이 원고는 2017년 12월 12일 팟빵 방송용 원고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책이란 것을 읽고 그 책에 대한 결론을 내릴 때, 한결같은 결론은 그 책에서 누구누구를 본받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본받기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거의 동일한 결론을 맺었습니다. 동화책을 읽어도, 소설책을 읽어도, 역사책을 읽어도, 위인전을 읽어도, 심지어 만화책을 읽어도, 결론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즉 누구누구를 본받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때때로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흥부전을 읽고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제비를 고쳐주고 복을 받은 흥부를 본받아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밥을 빌어먹어야 하는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바로 흥부 자신인데, 어떻게 흥부를 본받아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만 합니다. 만약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주지 않아서 흥부가 계속 거지꼴로 살아가는 것으로 흥부와 놀부전이 끝을 맺었다면 그때도 과연 흥부를 본받아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을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홍길동전을 읽고 내리는 가장 일반적인 결론이, 의적 홍길동을 본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의적이라고는 하지만 홍길동이 도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홍길동을 본받아 도적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웃기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흥부와 놀부전을 쓴 작가의 의도가 과연 흥부를 본받으라는 것이고, 홍길동전을 쓴 작가의 의도가 과연 홍길동을 본받으라는 것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왜 형제지간인 흥부와 놀부가 서로 등을 지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왜 홍길동이 자기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자기의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 사람의 본질,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누구누구를 본받자고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이게 훨씬 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육십육 권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름만 한 번 나오고 마는 사람들도 있고, 몇 절 소개에만 그치는 사람들도 있고,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삼손처럼 몇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호수아나 에스라나 느헤미야나 에스더처럼 아예 책 한 권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은 한 권이 아니라 몇 권에 걸쳐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성경을 마치 위인전처럼 읽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한다고, 모세를 본받아야 한다고, 다윗을 본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성경 속 인물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기도 하고 또는 자녀의 이름으로 삼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 인물들이 과연 위인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그 안에 나오는 사람들이 위인이니 그들을 본받는 삶을 살라고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을 본받기만 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공연히 죽으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성경 속 인물들은 결코 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궁금했다 코너를 통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 사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인으로 제시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다룰 사람은 흔히 ‘믿음의 조상’, ‘순종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그가 그런 칭송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 분별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우리는 아브라함을 ‘순종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12:1]에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묵묵히 순종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부터가 아주 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원래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1:31-32]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아브라함 일가 모두는 원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아마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너무 늙어서 도저히 갈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가 죽자 이제 하란을 떠나 원래 가기로 했던 가나안 땅으로 다시 가려던 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원래 가던 목적지로 들어간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너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면 순종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원래 가기로 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이 가나안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후였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2:6-7],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라는 내용입니다. 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이 가나안 땅인지도 모른 채 가나안에 들어왔고, 가나안에 들어오자 하나님께서 이 땅이 너에게 주려던 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맨 처음 말씀하실 때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되려면 당연히 고향도 떠나야 하고, 당연히 친척도 떠나야 하고, 당연히 아버지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친척이 있었고, 종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친척인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게 순종인가요, 불순종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불순종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제 눈에는 불순종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람이 크게 보아야지. 그렇게 자잘한 것까지 보면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신은 그렇게 완벽해?’ 이렇게 따지실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예.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저도 흠투성이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에게 순종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라고 칭송받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맺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나안 땅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이 내가 너에게 준 땅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으니,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순종의 사람이었다면 그 땅에서 정착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 땅을 지키고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라고 하셨으니 책임도 하나님께서 감당해 주실 거야.’ 이런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떠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라는 기록입니다.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바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왜 책임져 주시지 않느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대로 애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래도 아브라함이 순종의 사람인가요? 이런 아브라함을 과연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아브라함을 신앙의 위인으로 받드는 가운데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자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