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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엘 1장 1-7절
이런 일이 있었느냐
요엘서 앞에 있는 호세아서의 경우 그가 어느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요엘서의 경우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의 활동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어느 시대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간혹 선지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지만, 요엘서는 굳이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어느 때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시대적 배경이 흐리고 불확실하다 할지라도 그 가르침의 요지에 있어서는 분명히 나타나는 선지서입니다(칼빈). 그러므로 그가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방해 받지는 않습니다.
다만 요엘 선지자가 남유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요엘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욜3:1) 즉 그는 북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 남유다를 위한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여느 선지서들처럼 심판과 구원이라는 내용이 핵심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시되 심판의 원인은 너희 죄라는 것이고, 심판의 목적은 결국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요엘의 아버지가 브두엘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에 대하여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그가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 자신이 브두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만큼 아마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가능합니다(칼빈).
‘요엘’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의미인데, 브두엘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당시 남유다의 상황 가운데 하나가 온갖 종류의 이방신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됩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아들 이름을 요엘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즉 아들의 이름 안에는 어떤 면에서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브두엘, 그리고 그의 아들 요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엘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요엘이라고 한 브두엘도 중요하지 않고, 선지자 요엘 자신도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1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요엘에게 두셨다는 것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요엘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요엘 자신은 자신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이 요엘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는 요엘 자신이지만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배워야 할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인간적인 가르침 아래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교회 안에 전해졌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인간적인 가르침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셨을 때 마태복음 7장 마지막 절에 보면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즉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가르침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면서 인간의 가르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으로 가면 좀 더 구체적인 예가 나오는데, 3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3-6)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가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익에 따라 폐하기까지 하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만 그렇습니까? 교회사에서 중세 시대로 분류하고 있는 때는 어떠했습니까? 온갖 미신이 교회 안에 넘쳐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교리들이 넘쳐 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서 교리를 배우지만 교리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그 틀을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역사는 알미니안주의, 반펠리기안주의, 펠라기안주의 등을 거절해 왔고 지금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이 알미니안주의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이 반펠라기안주의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전한 신학교를 나와서 하는 말은 성경 중심이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를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하나님 말씀 외에 인간의 교훈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른 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모든 것은 뽑힐 것입니다(마15:13).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폐하게 될 것입니다(겔6:6). 무엇만이 남느냐?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처럼(마25:35) 하나님의 말씀만 남을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마르고 떨어지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벧전1:24-25). 이런 말씀만이 교회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교회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자기 듣기에 좋은 말씀만 양식으로 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책망일지라도 내 양식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2절 이하 2장 11절까지 내용은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실제로 심판 자체를 위함이기보다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심판을 통하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엘 2장 12절로 가면 심판에 이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즉 심판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엘서를 시작하면서 한동안 심판에 대한 부분을 우리가 대할 것인데, 이때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또한 왜 심판을 하시는지 그 이유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심판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그런 죄에서 돌이키도록 할 목적으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제 2절로 오시면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늙은 자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모든 주민들을 부르시면서 너희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한 면이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에 그들의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요엘 선지자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쩌면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이 남유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종교혼합주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들려지는 말씀 또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혼합된 말씀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그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모든 주민 안에 늙은 자들이 있지만 ‘늙은 자들아’라고 먼저 부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너희가 살면서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본 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연수가 길다는 것이고, 그들의 연수가 길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너희가 볼 때 지금 너희가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너희의 날만 말씀하지 않고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도 물으십니다. 즉 지금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전무후무한 그런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3절에서는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으며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데, 경험한 너희만 알고 있지 말고 그것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또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또 그 자녀는 계속해서 후세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대한 내용,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후세에게 계속해서 말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이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답변은 과거의 사실을 거울로 삼아 현재 혹은 미래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실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실을 통해 좀 더 나은 현재나 미래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배우면서 “아! 이런 역사가 있었지”, “이런 사실이 있었지”라는 것으로 만족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의 좋은 면을 통해서도 그리고 역사의 나쁜 면을 통해서도 배워서 좀 더 나은 현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왜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런 심판에 대하여 너희 자녀에게, 그리고 그 다음 자녀에게, 계속해서 너희 후손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가?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만 끝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실제로 구약 역사를 통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1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2) 구약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을 말씀하는 것은 본보기가 되고 깨우쳐 그들과 같이 넘어지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 역사를 통해,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경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출애굽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구나!”, “개혁신학에 따라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구나.”란 지식으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면 심판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심판을 통해 무엇을 목적하시는지를 알고 혹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자 하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요구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거룩을 요구하시지만 거룩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 주변에 있는 이방국가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교훈하십니다. 즉 이방나라들이 하나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왜 앗수르가 사용됩니까? 왜 바벨론이 사용됩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혹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마치 심판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주신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되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심판의 내용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4절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팥중이와 메뚜기, 느치, 그리고 황충이는 다 메뚜기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먹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입니다. 팥중이가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을 먹는데, 다 먹지 못하고 남깁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먹느냐? 메뚜기가 이어 먹습니다. 메뚜기가 먹다 남긴 것을 누가 먹는가? 느치가 먹습니다. 느치가 먹다 남긴 것을 누가 먹는가? 황충이가 먹습니다. 먹고 또 먹어서 어떻게 되느냐? 사람이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다음 주에 보게 될 9절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사람이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유다 땅을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드릴 수 없을 정도로, 또한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4절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실제 메뚜기 재앙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메뚜기 재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요 비유의 실제 사건은 6절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실제 메뚜기 떼를 통해서든 아니면 이방 나라를 사용해서든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치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렇게 치실 때 사람이 먹을 양식이 전혀 없을 만큼,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소제와 전제도 드리지 못할 만큼 철저히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할 때 이런 전무후무한 재앙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물어서 혹 자신에게 죄가 발견된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절은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지만 재앙이 시작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은 그나마 점진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재앙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요엘 2장 13절 중간에 보면 요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그러니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참고 또 참으시면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끝끝내 돌이키지 않으시면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때도 한꺼번에 내리시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의 상태는 취하여 있는 자들입니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닙니다. 재앙이 시작되고 그런 재앙이 계속되면 깨어 울어야 하는데, 깨어 울지 않습니다. 여전히 술에 취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왜 울라고 말씀하시는가?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포도주를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울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너희가 맛보고 있기 때문에 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고 계신지, 왜 하나님께서 재앙을 저들에게 내리고 계신지 한 가지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쾌락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술을 먹어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만큼 쾌락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 빠져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37-42) 문자 그대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 양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모든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것을 아는 자들로서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깨어 있지 못하고 세상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세상 일에만 몰두하면서 세상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엘 선지자 시대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쾌락을 쫓으면서 세상에 몰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4절 말씀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팥중이가 먹다 남긴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팥중이가 먹다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으면 그래도 남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일한 생각, 그러면서 남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세상 쾌락을 쫓아간다고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술에 취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의해야 할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경고하시는 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빠져, 쾌락에 빠져, 술에 취해 경고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경고로만 끝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재앙을,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을 행하고 계신데도 세상에 빠져, 쾌락에 빠져, 술에 취해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큰 재앙, 더 큰 심판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빠져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 사람의 관점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어 멀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좀 덜 성공하더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임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이 복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복은 세상의 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고 우리가 누려야 할 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왜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4절을 비유로 본다면 그 의미가 6절로 나타난다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4절의 재앙 외에 또 다른 재앙의 내용을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계를 행하실 때 4절처럼 어떤 재앙과도 같은 일이 있게도 하실 수 있지만, 많은 부분 이방 나라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적어도 세상 사람보다 잘 되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기도할 때 신명기 말씀을 붙들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신28:13). 그러나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6:31,33).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기도할 때 세상보다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기도합니까?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에 합당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 있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깨어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보다 이방인을, 이방 나라를 더 강하게 하시고 수가 많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치게 만드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신 차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방 나라가 강하게 되고 수가 많아지는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저들의 외적인 강대함, 그들의 외적인 많음을 보면서 부러워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너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저들처럼 외적인 강함, 외적인 많음에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엘리야로 하여금 850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자와 싸우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한 명인데도 850명과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만 그렇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강자들과 싸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기게 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습니까?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수가 아니라, 사람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강함, 많은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유다는 하나님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깨어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쾌락을 쫓고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를 세우시되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많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인 남유다를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십니까?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의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쾌락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고 말씀하시는데, 내 포도나무 그리고 내 무화과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유다를 내 포도나무로, 내 무화과나무로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실제 포도나무, 실제 무화과나무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측면에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지만 그것을 내 백성인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너희가 취하는 데 사용하고, 그것으로 너희가 너희 쾌락을 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나라를 통해 내 것이라 할지라도 멸하고 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면 결단코 완전히 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베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멸하고 버리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들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맨 처음부터 말씀하셨는데, 창세기 15장 1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방패로만 삼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패로만 말씀하시지 않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큰 상급,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인 이상 그와 견줄 수 있는 상급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최고 상급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마치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더 큰 상급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주시면 감사하면서도 거두어 가시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욥과 같은 고백을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에 그에게만 감사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가장 큰 상급이십니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상급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그래서 천국에 가는 것, 천국에서 여러 상급들을 받을 것인데, 그 모든 것과 비교한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되지 못합니다. 때문에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말은 이미 우리는 가장 큰 복을 받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유다는 어디에 한 눈을 팔고 있습니까?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에 한 눈을 팔고 있습니다. 혹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혹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 주소가 아닌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그 앞에 두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우상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야 할 마음이 다른 것에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시면서 혹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