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흔히들 '그것 예술적이야'라고 말한다. 뭐가 예술적인가? '예술'이라는 단어에는 삶의 힘이 너무 많이 담겨있다. 이용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루어 그야말로 上位에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천사(祈禱)도 못말리는 이별이 있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는 우리의 가난은 하늘(神)을 우러러 원망할 권리를 열어 놓는다. 몇 번을 고쳐죽어도 건강한 神, 그에게 現代라는 무기를 바꿔 쥐어주고 과학으로 포장해도, 우리의 공통된 슬픔의 제사상에 올라오는 그의 모습은 자못 반갑다. '욕덩어리 神'은 우리의 건강이다. 슬픔은 스스로의 것이지만, 기쁨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하늘을 원망할 권리에서 '너'가 그립다는 것은 낮은 자도 양보하는 정형적인 웃음의 '十字(예술)'을 보여준다. 가시관을 온몸으로 쓰고 있어도 편안하다고 발음되어야 하는 서글프고 힘찬 운동(삶)에 있어서, 인간은 '미소(十字)'로서 완성된 존재이다. (이는 4차원을 넘나드는 宇宙人이라도 절대에서 떨어진 객체로서 마찬가지 운명이다) '예술(十字)'은 절대(죽음)와 우상(삶) 사이에서 우리의 가난을 나누는 일이다.
예술은 '너'에게 열려진 모든 행위이다. 창조하려는 새로움에 대한 고통은 '나'의 문제(解脫)인 직업의 일이고, '말씀'의 실천(나눔)이 예술이다. 누구나가 '너'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예술은 누구나에게 편안한 가능성의 여백으로, '나'가 '너'를 만나는 방법이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자리 잡으면, 하늘도 운다는 우리의 가난도 따듯하고 당당하게 소비하게 된다.
(2) 예술행위...
'나'의 재주와 능력이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것은 예술이기보다는 직업에 가깝다. 직업이 대가 없이 '너'를 찾을 때 예술이 된다. 예술은 '너'와 '나'의 적극적인 만남 속에 언제나 열려있다. 예술은 '너'로 가는 명랑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나'(자아)를 인식하는 여정(求道, 직업)은 고통이고, '너'를 만나는 내재율로는 즐거움과 명랑뿐이다. 슬픔은 '나'만의 것이기에, 웃음은 '너'를 만나는 道理이다. '나'를 지나 '너'에게 던져진 선물인 '十字(예술)'는 웃고 있다. 십자가 고통의 표상이라는 것은 求道者(작가, 직업)의 욕구이지, 사랑의 실천양식이 아니다.
解脫(초월)이라는 거짓 단어의 통용성은 無를 話頭로 하는 직업의 일이고, '나'의 일이고, 無를 지나 '말씀'을 갖는 우리의 운동 중에서 실천적 최고의 거짓(한계)은 '愛(예술)'이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그 가난함을 서로 애달아하는 마음이 우주통치의 정신이겠다.
平常의 和(순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예술'은 사회 구석구석 단순하고 다양한 현란함으로 소비되고 있다. '나'가 벌어 '나'를 위해 쓰면 직업이고, '너'를 위해 쓰면 예술이다. 救難布施, 行人布施, 越川布施, 活人布施, 衆生布施, 地水布施 모두 예술이다. 태어나고 저축해가려는 힘겨운 사냥(직업)에서 소비가 숭배되는 유일하게 열린 길, '너'에 대한 나눔이 예술이다. 생존 욕망(迷惑)에 불타서 몸이 뒤틀릴 때 새로움만을 찾는 감각은 다시 '나'로 가는 마취이고, 굳게 닫쳐진 비밀의 門을 세워가는 생활의 허상이고, 예술, 그 간단함은 '너'에게 의지하는 모든 순간들이다.
고아원에 한 달에 한번 70여명의 자장면을 해주는 아저씨, 이익과 상관없이 유기농법으로 밭을 가는 할아버지, 자리 양보하기,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밥해주는 법당, 카피 레프트, 유산 기부하기, 갈 곳 없는 환자 집에서 돌보아드리기, 이익을 분배하기, 고민하는 사람 위로하기,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기......, 이 모두가 美(문화구조)의 권력이 몰래 지불받던 실제 '예술'이다.
(3) 예술과 그림
직업은 탄생으로 시작되는 고통의 약속이고, 예술은 죽음(없음)에서 소비가 시작되는 기쁨의 약속이다. 직업은 어디론가 가야하는 발전내재성을 가지고 있고, 예술은 돌아가거나 머무르려는 '놀이'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작가고착화는 놀이가 직업(상품)이 되는 상실이고, 삶(놀이)을 기술과 신비와 가치로 뭉쳐놓고 대가를 요구하는 고통이다.
'나'의 감성을 향한, 작가(화가)의 생성만을 위한 예술관은 우리에게 폭력이었다. 작품(전시언어)은 직업적인 보고서일 뿐이다. 작금의 문화공간이 갖는 경건성과 내밀성은 작가의 求道에 대한 충실에만 시력(보는 그림)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成佛의지(작업)만이 있을 때, 그는 무감각하고 도덕도 저급이며 物質的이다. 成佛(독창성,原罪)은 '나'의 거울의 때를 제거하는 일이고, 佛供 즉, 예술(十字)는 그 거울로 '너'를 보는 일이다.
직업(사냥)이 '너'를 찾아 예술(나눔)으로 갈 때, 놀이를 직업으로 둔 작가의 나눔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의사(직업)가 예술을 하는 순간이면, 놀이가 갖는 문화보다 절실한 생존의 샘터가 된다. 그림은 그렇게 예술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너' 앞에서 '나'를 주장하는 문화구조는,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웃지 못 할 촌극이다.
老僧(이루어진 방법)은 있으나 求道僧은 본래 문화(놀이)속에서는 없음이다. 求道는 日記帳이고, 일기장의 문화는 去來의 저급이다. '나'를 위한 出家는 직업이고, '너'를 위한 出家가 예술이다. 老僧은 작품(정법안장)으로서 그렇게 노래될 수 있다는 방법(詩)의 제시인데, 그 감상(작품)이 우상화된다는 것은 老僧의 뜻도 아닌, 그저 무책임한 거짓이다. 전시장은 그림이 되는 방법과 재료를 소개하는 場이지 結晶體의 쌓임은 아니다.
그림은 우리 모두의 놀이로서 멈추어서기를 향해 역사와 변화를 가져왔다. 壁을 장식하는 평면놀이가 놀이답게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그림의 역사는 記意를 상실한 거짓이었거나 고급장난 혹은, 문화권력의 이용물이었거나 시작도 없었던 상실이다. 그냥 '그림이야기'이었을 뿐이다. 욕망(놀이)의 활동에 있어서 사랑 혹은, 미소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무엇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역사는 '너'와 융합하는 놀이로 가는 형태가 아니라면 진보되지 않음이다. 예술(기술)을 위한 예술(직업)은 건강한 '너'와 '나'가 만나는 놀이를 향해 끝없이 수정될 것이다.
(4) 그림이 가질 수 있는 '예술'
사냥(직업)을 떠난, 놀이의 권력은 자비의 단어이며, 나눔(十字)의 단위이어야 한다. '너' 없는 構圖 즉, 작품(사물)이 스스로 독립한다는 것은 문화권력 뒤에 작가가 숨어서, 피비린내나는 사냥(직업) 후에 중얼거리는 황당한 거짓이다. '나'가 '우리'가 된다는 욕망과 질투는 '너'를 절하시키고, 권력구조에 충성하여 事物로 달려갈 뿐이다. 욕망은 강하다. '너'의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나'의 욕망에서, '너'의 욕망을 편하게 하려는 욕망이 藝術이다.
平常에서 귀신(天才)은 그 단독성으로 외롭게 되어있다. 욕망(직업)이 최고로 고급화 되면 '놀이화'(예술)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꽃(十字)'이 되지못한 설익은 욕망은 '너'를 더욱 제외시키고 진짜 鬼神이 되어 천당과 지옥을 만들고, 우리에게 구원을 강요한다.
'나'만의 것은 언어가 아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예술이 아니다. '너'의 언어권리에 들어가서 '나'를 주장함은 창조이기보다 폭력이기 쉽다. '너'와 '나'의 자유언어가 서로 막힘이 없는 곳에 그림이 있다. 누구나가 반복할 수 있는 가치, 그 터를 넓혀가는 것이 예술이다.
畵家(작가)의 가치란 작품을 제작함에 있다하기 보다는, 그 직업적 수많은 재료실험의 효과(역사)로 주위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자유스럽게 붓을 들게 만드는 가로 결정될 것이다. 허무와 부조리와 불합리로부터 기쁨을 주는데 우리의 자유언어(놀이)가 갖는 활동이 있다. '말씀'은 이미 전달되어 피어있고, 이 향기 속에서 놀이의 권리는 누구나가 갖는 공짜의 터전이다. 이 명랑성이 그림이 예술이 되는 길(道德)이다.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사명을 다한다고 생각지 말자. 그림, 그 자체를 '너'에게 돌려주는 것(화실개방)이 그림이 갖을 수 있는 '예술'이 될 것이다. 이제 그림은 작품(보는 그림)으로서는 단편적인 조각(상품, 이야기)이 되었다. 그림의 본분인 '직접 그리기'의 소비로서 '너'를 부르는 문화구조를 갖출 때, 그림의 歷史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그림形式이 되고 다른 직업(조직)에게 보다 자유롭게 휴식을 주는 터로서의 藝術로 가는 길일 것이다.
(5) 예술은 놀이의 균형를 主導 한다
예술은 끈적끈적한 사람관계이다. '나'가 더 이상 깨칠 것이 없다고 '너'의 살을 씹는다면 짐승이요, '나'에 대한 동질감 없이 누가 '나'의 살을 씹는다면 아프지도 못할 돌덩어리이기에, 아무리 둘러봐도 솔직인 '너'앞에 충실함은 못나도 좋은 우리의 흔적들이다. 작가(화가)의 일도 '너'에게 의지하는 일이지, '너'의 못남을 향하여 밥을 먹는 일이 아님은 확실하다.
정제된 뉴스(작품)로서의 소통은 고급의 '나'의 문제일 뿐인데, '우리'의 것인양 권력(보는 그림)을 조직화 했다. '나'는 너무 강하다. 이 생존의 조건에서, 예술은 직업(작가)을 떠나 삶의 균형을 위해 놀이를 주도하는 이름이다.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떠나 '너'와 함께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에 예술은 어떤 결정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순간에 '너'와 함께 소비되는 구조로서 휴지통과 닮아있다. 작품(상품)은 상품답게 있어야 한다.
'너'에게 의지되는 건조하고 심심한 상황(한계)은 발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 그렇게 中心이 되어 무조건 있는 조건이다. 수많은 去來와 막힌 틀 속에서 아이(愛)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이 가꿔지는 일이며, 수많은 맛과 멋의 허탈 속에서 누구를 돕는다는 것은 자신을 돕는다는 일임을 왜 자꾸 잊혀지는 것일까? 가꿔주고 도와주려는 놀이들이 왜 거리에서 상품으로만 돌아다니려 하는 것인가? 상품(직업)은 승리하는 자의 기쁨과 포로가 되는 자의 슬픔을 구분한다. 이 距離를 좁혀놓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문명이 인간의 소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함에 존재한다. 예술은 어디론가 가야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소비시켜야 할 어둠이 있다. 휴일(놀이)은 罪사함의 기다림이 아니라, '너'와 '나'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藝를 소비하는 권리(術)이다. 그림은 그 휴일이 갖는 잼버리 중에 단지 하나일 뿐이므로, 그 자체에는 무게가 없다. 각각의 공간에서 그림은 '놀이'로서 시작되고 소비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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