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시대, 제가 사는 도고 근처에서 활동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대한 장편 소설입니다. 제가 5년간 작업한 것입니다.
첫번째 제목과 목차, 소설의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인간의 길
- 소설 이존창 -
정대영
■ 목차
(소설의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
제 1장 여사울을 떠나 녹암정사로
제 2장 주어사 강학회와 동지회의 결성
제 3장 이벽의 죽음과 천주교의 확산
제 4장 진산사건과 교우촌의 건립
제 5장 천안 연금과 마지막 기도 |
소설의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
이 소설은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조선의 천주교 전래과정을 풀어본 것이다. 조선은 선교사 파송 없이 스스로의 노력과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정조 승하 다음해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관련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어 수십 년 간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 천주교는 살아남아, 뒤에 꽃을 피우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여기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이존창이 확실함에도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알려진 것도 부족하다. 몇 번의 배교 논란과 신분의 한계 때문일 듯하다.
소설에는 주인공 이존창, 이벽과 정약용, 정조 등 그 시대의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드러난 사료와 논리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엮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특히 사학의 괴수로 지목되고 집안이 한미하여 보호막이 없었던 이존창을 승하 전까지 지켜 주었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벽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개혁적 지식인으로 조선 천주교의 비조이다. 아쉽게도 1785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이존창 등과 이루려던 꿈이 무산되었다. 정약용은 잘 알려진 실학자로서 조선 천주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1795년 중국인신부 주문모의 도피를 주도했고, 이 일 등으로 충청도 금정역의 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근처에서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고 한양으로 곧 복귀할 수 있었다.
모두 알다시피 조선은 정조 사후, 100년에 걸쳐 망국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실학자라 불리는 사람, 깨어있는 지식인, 정조 등의 노력으로 잠깐 희망도 있었다. 이들은 꿈을 이루지 못했고 방책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지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그 시대를 동행해 보고 싶었다. 이들의 고민과 희망을 천주교의 전래과정과 함께 소설에 녹여 본 것이다. 이 소설은 배경과 상황에 대한 묘사보다는 등장인물의 대화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 지루하더라도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보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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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1759?-1801)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포의 사도, 호서사학의 괴수 등으로 불리고 조선 천주교의 밀알이 되었다. 출생과 가족관계, 신분과 행적 등이 불분명하다. 집안은 부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대학자인 홍유한 이병휴 이기양 권철신 권일신 등을 사사했다. 이벽 정약용 유항검 이총억 최창현 등 개혁적 지식인들과 깊이 교유했으며, 양반 평민 천민의 신분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천주교를 전파했다. 조선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할머니,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이존창 집안사람이다. 2009년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정조의 어찰에 대한 충청감사 박종악의 답신 사본인 수기(隨記)에는 이존창 집안이 천민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총억(1762?-1822?) 이존창의 스승이었던 이기양의 장남으로 선조 때 명재상이던 이덕형의 후손이다. 권철신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존창과는 친형제처럼 서로 도와주며 살았다.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조선의 개혁과 천주교의 전파에 매진하였다. 생몰연대와 장소 등이 정확하지 않다.
이법희(? - ?) 이존창의 친형으로 부모가 물려준 재산과 집안을 잘 관리하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사려 깊고 존창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이름을 스님처럼 지었다.
권철신(1836-1801)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당대의 대학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동생 권일신과 같이 양근(현 경기도 양평)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학문이 일가를 이루어 그의 호를 따 녹암학파가 생겨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고문과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순교했다. 동생 권일신은 먼저 1791년 진산사건 때 체포되어 그에 집중된 거친 추국의 후유증으로 유배지 예산으로 가다 죽었다.
이벽(1754-1785) 깊은 학문적 소양을 가진 개혁적 지식인으로 조선 천주교의 비조로 불린다. 조선은 영 정조 시대 일시 부흥기를 맞지만 속으로 곪고 있어 큰 개혁이 필요하였다. 이벽은 사람을 모아 개혁에 나섰고, 천주교를 공부하고 믿었다. 1783년 겨울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사신단에 참여한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하였고, 자신은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 등으로 가족 내의 불화가 심했으며, 32살의 젊은 나이에 돌림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1979년 4월 경기도 포천에 있는 그의 묘지 이장 시에 독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약용(1762-1836)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자로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초기 조선 천주교의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정약전 정약종은 친형제이고, 조선 최초 세례자인 이승훈은 자형이다. 이벽의 누나는 큰 형수이고, 진산사건의 순교자 윤지충은 외사촌이고, 백서사건의 주모자 황사영은 조카사위다. 양박청래를 주장했던 황사영을 강하게 비난한 것이 신유박해 때 약용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유항검(1756-1801) 전주 지방의 대지주이며 양반가문 출신이다. 학문에 관심이 깊었던 개혁적 지식인으로 권철신 권일신으로부터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호남 천주교 공동체의 창시자이다. 부자이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1801년 9월 능지처참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최창현(1759-1801) 역관 집안의 중인 출신으로 한양에서 약국을 운영하였다. 학문에 관심이 많아 권철신 권일신의 제자가 되고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성격이 원만하고 설득력이 좋아 천주교 총신도회 회장을 지냈다. 1801년 2월에 이존창 정약종 홍낙민 등과 같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