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애(姜淳愛) - 뜻길에 서서
1. 어려움 가운데도 하나님의 손길이
1 인생문제에 고민을 느끼고 장래 문제를 염려하기 시작한 때가 여학교 졸업기였다. 당시 나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이중생활의 그늘에서 시부모님과 형제들을 모시는 데만 자기의 사랑과 시간과 전체를 바치시고도 말 한마디 않고 인내하시는 어머님에 대해 뼈저리게 가엾은 생각을 하면서 같은 여자로서 인생문제에 고민을 쏟은 시대이다.
2 나는 같은 환경에서 지내는 친우 3명과 같은 방향으로 집에 갈 적 마다 “우리 금강산에 가서 여승(女僧)이 되자. 이 세상에서 남편한테 사랑을 못 받을 바에야 결혼은 무엇하러 하니” 하고는 한숨지으며 안타까워 했다.
3 그리하여 졸업이 임박하여서는 공부라도 많이 해서 교육사업에 헌신하여 독신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희망했으나 마침 부친의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전(染專)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영문과를 지망했으나 은사님들이 “여자는 교육과가 좋고 앞으로는 일미전쟁(日美戰爭)이 일어날 것이니 영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라고 권유하여 이틀 전에 과(科)을 변경하여 유치사범과(幼推師範科)를 택했다.
4 매일 아침 채플시간에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도 잔디 위에 앉아서 한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날이 갈수록 신비감에 젖으며 선교사들과 가까워졌다.
5 국경을 초월하여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봉사하는 그들의 모습이 고상해 보이며 자신도 모르게 끌리어 가는 것을 느꼈다. 성경은 한 구절도 몰랐지만 박마리아 선생[이기붕(李起鵬) 씨 부인]한테 3학생만 따로 배워 그중에서 나는 마태 복음 5장 산상 수훈을 기억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기원했다.
6 졸업기를 맞이하여 취직 문제를 염려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캄캄한 하늘에 북극성만이 빛나며 거기서 참으로 어여쁜 선녀가 흰 관(冠)을 쓰고 흰 옷을 휘날리며 날라 오더니 내 귀에다 “염려말라”라는 음성을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때는 유치원의 수가 많지 않아서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으므로 내가 염려할 것을 이미 하나님은 아시고 선녀를 시켜서 알려주신 것이다.
7 이때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무소부재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과 또 선녀가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신생활과 자선사업만을 ‘모토’로 하고 함경남도 유치원 선생으로 임명을 받고 서호(麻湖)로 갔다.
8 이제부터가 나의 산 생활이요, 나의 배움을 발휘할 때이며 하늘이 원하시는 교육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하고 처음 가서부터 아이들 세수시켜 주기와 손톱깎아 주기, 머리깎아 주기를 하면서 노래와 춤과 동화를 가르치고 색종이 접기도 하였다.
9 나도 어린이와 같이 놀고 춤추니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 간다”라는 말씀이 실감나서 더욱 기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이화유치원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이화동산에 오니 친어머님 품에 안긴 듯 하여 더욱 흐뭇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가장 좋은 가정의 아이들이므로 다루기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이 기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10 묘령의 22세가 된 내 몸은 살이 너무 쪄서 유치원 자모들로부터 ‘함박꽃이 핀 듯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늘이 시련을 주셨는지 23세 때 피부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주사 맞은 것이 농화(渡化)되어 두 번의 수술을 받게 되어 무려 6개월을 병석에서 신음하였다.
11 이때 나의 마음은 결혼해야겠다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퇴원 후 친구 부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생활은 나의 이상과는 달리 평탄하지 못하였다. 일류 사업가의 가정으로 시집을 가고 보니 돈이 원수였다. 형제들 사이의 알력과 남편의 방탕 생활 등등이 나를 괴롭혔다.
12 그러나 첫 아들을 낳고는 모든 것을 참고 화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마음은 정착되지 않아서 더욱 신앙생활에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아들이 한 돌이 되자 우리는 분가하여 가정을 꾸미고 이상적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13 그러는 동안에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겪게 되었는데 물질이 있어서 먹고 입는 것에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온갖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나이 43세에 중병을 앓아 자리에 눕게되니 비감과 아픔이 더하였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