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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BASS 서문
말수가 적은 아이
저는 일곱살때까지 이웃이 그런대로 괜찮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자랐습니다. 아빠는 화장품 회사 마케팅 부서의 임원이셨고, 엄마는 피아노 강사셨습니다. 우리 식구는 고만고만한 방 세개짜리 집에 살았고, 저의 자매 두 명이랑 집 근처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릴 적의 소리는 피아노 교습생들이 치는 거친 피아노 소리와 엄마가 시간날 때 연습하시던 바삭거리는 듯한 하이든의 소나타 연주였습니다. 제 언니 ‘명’은 아이큐가 높아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는 명이에게는 자신의 아이큐 점수를 알려주지 말라고 엄마에게 당부할 정도로 영특했지만 저는 그렇게 영특하지는 못했습니다. 제 여동생 ‘상’은 사랑스럽고 친절한 아이였습니다.
저는 너무 조용해서 아예 말이 없었고 새털같은 머리에 근시인 소녀였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대화를 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바쁜 월급쟁이였던 아빠는 집에 잘 계시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이웃집 학생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했고 끝나면 다른 일을 했고 이어서 집안일, 요리, 그리고 손길이 가야하는 늘어난 가족들을 보살폈습니다. 한국에서는 돈을 벌어오는 아내와 엄마는 끝임없이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제가 4살이 되기 전에 제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고, 미국에 와서도 어쨌던 혼자서 영어를 깨우쳤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제가 어떻게 글자를 깨우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제가 글자, 단어, 문장과 문장부호에 센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제 삶에서 구어로 된 말들은 적어서, 책을 읽는 것이 그 공백을 메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한 것과 같이 저는 책읽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고 사랑받게 느끼게 끔 하기 위해서 말을 걸어주고, 아이들 말을 들어주어야 된다는 걸 다 아시지만 말입니다. 제 부모님들이 무관심하셔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아이들 먹이고 키우는데 메달려서, 아이들의 내면의 삶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말로 소통하는 것이 부족했던 게 그리 문제가 된 것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책속이 이야기들은 제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필요했던 따뜻한 감정, 성장의 가능성, 그리고 의미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살면서 찍은 제 어릴 적 몇 안되는 소중한 사진들은 흑백사진인데, 얇은 흰색 프레임에 넣어진 것들입니다. 아빠가 어디서 상품으로 타셨던 캐논 카메라로 찍으신 게 틀림 없습니다. 이처럼 저의 서울에 살았던 기억은 회색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생생한 컬러와 풍부한 빛으로 기억되는 것들은 대부분이 이야기책에서 왔습니다.
엠허스트에서의 독서
박정희 대통령 정부 시절, 원산의 북쪽 지역에서 피난하신 우리 아버지는 영원히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셨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정든 땅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지만, 퀸즈에 살고 있으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존 삼촌에게 이민을 후원해 달라고 했고 삼촌은 그렇게 했습니다. 1976년에 우리 다섯 식구는 뉴욕으로 이사했습니다. 부모님은 1년 동안 신문 가판대를 운영하셨고, 나중에는 맨해튼의 코리아타운에서 노점상 상점을 운영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일년 내내 일주일에 6일 동안 길거리 행상인과 소규모 상점 주인에게 의상 보석 도매를 하셨습니다.
수년 동안 우리는 퀸즈 엠허스트에 여러 임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웅장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뉴욕 주변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임대 아파트의 먼지를 털어냈지만 낡은 리놀륨은 결코 밝아지지 않았고, 벽에는 얇고 더러운 페인트가 말려 있었습니다. PS 102의 형광등 불빛은 새로 이사온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벌레잡는 등 같은 초록 불빛을 비추었습니다.
Van Kleeck Street에 있는 우리 아파트 건물에서는 물벌레와 바퀴벌레가 로비와 소각장 벽을 가로질러 날아다녔고, 맨해턴에 있는 부모님의 임대 상점에서는 숯색 쥐들이 모든 임대인들이 공유하는 지하 화장실을 배회했는데, 이 쥐들은 축축한 지하에 사는 줄무늬 얼룩무늬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블루칼라 동네에서는 누가 덜 가지고 있고 누가 조금 더 가지고 있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부모님과 친절한 형제자매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쉴 수 있는 집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예측 가능한 일정이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집에 있을 때는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들로부터 소외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이민자인 저의 부모님은 정착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일에 매달려 다른데 정신을 둘 여력이 없었습니다. 잘 어울릴 줄 아는 저의 두 자매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애들은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지만, 저는 외부 세계와 저 사이의 어두운 틈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계속 읽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고전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을 숙제로 내 주었습니다. 저는 Langston Hughes의 "Thank You, Ma'am", O. Henry의 "Gift of the Magi", Shirley Jackson의 "The Lottery"와 같은 작품의 줄거리와 교훈을 배웠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특별하게 기억하는데, 그 이유는 작품의 메시지가 아이들에게도 유익하고 이해하기 쉬웠고, 마치 비타민 캡슐처럼 제 자신에게 공감과 아이러니를 풍부하게 해 주었고, 조직 사회의 야만적인 본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권을 끝내면 다른 책을 찾았습니다. 저는 흙 속에 묻힌 씨앗이 햇빛을 찾는 것과 같이 이야기속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우울한 어린 시절-별 볼일 없는 소녀의 우울한 삶으로 보였습니다-을 벗어난 어느 곳, 어딘가 다른 곳을 필요로 했습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추천 고전을 읽으며 러시아 귀족의 사회 규범, 무기력한 프랑스 지방 주부들의 백일몽, 런던 도시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낮과 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0년대에 십대 이민자였고, 천재적인 이미 고인이 된 미국과 유럽의 작가들을 통해서, 수 십년 전에 멀리 떨어져 사는 흑인과 백인 어른들의 풍부한 내면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다운타운 맨해튼 제 부모님이 살던 미드타운 맨해튼과는 거의 닮지 않았는데, 그 곳에서 사람들은 가끔 폭행을 당하고, 총을 든 강도를 만나고,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임스의 잘 구성된, 갈등이 충실하게 해결되는 이야기속에서 그 곳의 소리, 질감, 향기를 흡수했습니다. 저는 제가 읽은 내용을 잊을 수 없었고, 그의 뉴욕도 저의 뉴욕이 되었습니다.
워싱턴 광장을 따라 늘어선 웅장한 붉은 벽돌 저택을 지나갈 때, 저는 상속녀가 자기 앞 응접실의 페르시아 카펫 위를 걷는 모습과 그녀의 실크 드레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여자는 돈, 지위, 재산을 가질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제임스의 빛나는 장면을 통해 저는 부유한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에게 자신을 축소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는 저를 사랑스럽고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민 온 가족이 더 부유한 가족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소설은 제가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세계로 저를 풍성하게 해 주었고, 지어낸 이야기는 저에게 인간의 동기에 대해 대단한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견습 및 공예
고등학교 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Sinclair Lewis였는데, 그 사람은 예일대에 나왔는데, 그래서 저도 거기를 지원했는데 어쩌다보니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영어나 문학을 전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는데요. 그러한 전공을 하는 사람들은 캠퍼스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둔하고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던 저는 역사를 공부하기로 선택했고, 가능할 때마다 전공 외에 문학과 사회학 수업도 들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저는 창의적인 글쓰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사설을 쓰고 출판했고, 대학에서는 개인 에세이를 썼지만 소설은 뭔가 달랐습니다. 소설에는 사람, 장소, 시간, 소망, 사건, 갈등, 결말 등을 구성하는 총체적인 창작이 필요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소설은 또 다른 수준의 대담함이 필요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저는 초급 소설 수업에 등록했습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훌륭한 단편 소설을 읽어보라고 주셨고, 별다른 지도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편 소설을 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많은 단편 소설과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편과 장편의 차이점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미니어처, 초상화, 두루마리, 신성한 삼부작, 천장 프레스코, 건물 크기의 벽화 등 다양한 형태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단편소설은 장편 소설이 아닙니다. 물론, 이야기는 (장편)소설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러나 어떤 장편 소설가라도 단편 소설이 장편보다 글자수가 적다는 이유로 대체적으로 더 낮은 예술 형식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오히려 두 가지 형식을 모두 썼기 때문에 단편 소설을 잘 쓰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편소설에는 실수를 숨길 곳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정의는 단어 수를 장편과 단편의 최대의 차이로 얘기합니다. 단편 소설의 범위는 1,000단어에서 1만 단어이고, 소설은 5만 단어가 넘습니다. 이 정의가 제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긴 형식에서 허용되는 점진적인 위기와 결말을 차근차근 구축해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토리(단편소설)에는 강렬한 감정이나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부적절한 정의에 대해 너무 많이 논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는 것으로 하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저는 단편 소설과 소설이 서사적 소설의 작품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각각에는 시작, 중간, 끝이 필요합니다. 각 소설에는 주제, 등장인물, 설정, 관점, 줄거리, 스타일, 목소리, 갈등, 해결, 어조, 서술 시간 등 소설의 많은 요소와 하위 요소가 필요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인공의 좌절된 소망, 자신의 인정, 관점의 전환, 관객에게 만족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요구했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첫 번째 소설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에 등록했습니다. 저는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독서는 더 이상 퇴각이나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찾은 불씨를 가지고 놀고 작은 불을 피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저는 저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우리 집에는 책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퀸즈에서는 길 아래에 있는 도서관과 학교에서 빌린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서점에서 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럴 돈도 없었고 부모님에게 그런 사치품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저는 저만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래서 책 여백에 노트를 할 수 있었고, 그 때 발견해서 적어둔 것이 그리울 때 다시 펼쳐 볼 수 있었습니다.
1950년,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와 누나, 집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어찌됐든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돈 없는 학생으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1986년에 내가 예일대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주셨습니다. 저는 매 학기마다 저의 모든 책과 독서 패킷을 구입하여 보관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만큼 책을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상만해도 근사한 일이었지만, 저는 항상 제가 가진 것에 한계가 있는 아이처럼 냉정하게 행동했습니다.
저는 는 입이 넓은 항아리에 1센트, 5센트, 10센트, 25센트를 저축했고, 항아리가 가득 차면 보물을 종이 동전 슬리브에 말아 넣어 케미칼 은행의 저축 계좌에 입금했습니다. 저는 일주일치 용돈을 조금씩 모아 둔 게 있었고, 부모님이 힘들게 벌어온 돈을 함부로 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일대에서는 예약 없이 책을 샀다. 제 생각에 저는, 연극이란 연극은 다 보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알고, 프라도와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저보다 휠씬 더 나은 급우들을 따라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미국에 있는 동안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저와 저의 자매들이 수학여행 외에는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 생애 처음으로 저는 부모님들이 저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던 모든 것을 제가 배우기를 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제가 원하는 모든 종류의 책을 샀습니다.
4학년 초에 저는 Margaret Atwood가 편집한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 1989의 문고판을 구입했는데, 이 책은 어떤 수업에도 필수 교과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든 소설을 읽고 Michael Cunningham의 "White Angel"을 여러 번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에게,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두 형제와 그들의 학교 교사인 부모가 주최한 비극적인 뒷마당 파티에 대한 커닝햄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에는 작가에 대해 뒷 페이지에 나열된 것 이상으로 아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의 이력은 그가 살아있는 작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많은 죽은 작가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모두 훌륭하고 중요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작품이 돌처럼 느껴졌는데, 마치 대리석 판에 새겨진 특별한 고전 이야기, 금박으로 문지른 각 글자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 그리고 여느 특별한 예술 작품처럼, 비난할 여지 없는, 신성한 돌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죽은 작가들의 고전과는 달리, 이 선집에 담긴 이야기는 이 작가들이 글 쓰는 시점에 활동하고 있었고 모든 이야기가 불과 1년 전에 출판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르고 활력이 넘쳤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실제 작가를 만난 적도, 독서 모임에 참석한 적도 없었습니다. 저자들은 브롱크스 매스페스 엠허스트에 있는 공립학교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를 통해 소설가들은 살아있고 현대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현대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했습니다. 2년 동안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1995년 중순에, 한 달에 300시간을 청구한 후 나는 변호사 생활을 영원히 그만뒀습니다. 저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고, 자연스럽게 다른 차원의 진지함으로 다시 읽기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형편없는 소설을 썼는데 모든 곳에서 거절당했습니다.저는 다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작품을 계간 문예지와 잡지에 보냈으나 거의 항상 편집자들이 제 작품은 퇴짜를 맞았습니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 퇴짜 맞은 작품만 두꺼운 묶음이 되었습니다. 그 10년 동안은 여전히 종종 저의 황무지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미적 백열등의 어렴풋한 불빛 - 감동적인 구절, 실존하는 것 같이 느낀 인물, 자연스럽게 풀리는 이야기의 실마리 - 이 발산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평가 및 가로등 기둥(lampposts)
제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처음 10~15 페이지 동안, 세상의 모든 삶이 멈추고 오직 중요한 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 같은 몰입적인 소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습니다.
첫 소설을 세상에 내 놓기 전까지의 10여년 동안은 좋은 소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 멀리 낯선 길에서 타오르는 가로등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은 저에게 계속 나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문학 잡지인 바나나피시(Bananafish)로부터 열정적인 배우 지망생과 그녀의 우울한 친구에 대해 쓴 "빵과 버터(Bread and Butter)"라는 소설로 2등상을 받았습니다. 상금은 250달러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작업한 "Motherland"라는 이야기는 2002년 The Missouri Review에 게재되었고 나중에 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의 독립된 장이 되었습니다. 뉴스 기사를 기반으로 한 단편 소설 "The Best Girls"는 제가 대학에서 처음 썼고 나중에 개정했는데, 현재는 없어진, Asian American Writers' Workshop 산하의 또 다른 문학 잡지에 실렸고, 2004년 NPR "Selected Shorts"에 포함되어 심포니 스페이스에서 낭독되었습니다. 15년 후인 2019년에 저는 "The Best Girls"를 다시 써서 최신작을 디지털 선집으로 출간했습니다. “The Best Girls”만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1989년부터 2019년까지. 미쳤죠, 정말.
올해의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 발행을 위해 , 뛰어난 작가이며 이 시리즈의 편집자로 일해 온 우아한 문학인인 하이디 피틀러 - 그녀가 없었다면 이 시리즈는 존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 는 저 이전의 객원 편집자들에게 한 것처럼 2022년에 제게 120편의 단편소설을 보내왔습니다. 이 120편을 읽고 20편의 단편소설을 선택하는 것이 저의 임무였습니다. 이 책에 실리지는 못한 단편소설의 제목은 책 뒤쪽에 "2022년의 우수한 소설들”아래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연간 발행하는 책을 편집하는 것은 작가에게 영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 작가들을 평가하고 그 중 백명의 작가를 선정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서 저의 고뇌를 알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몇 장의 서문에서, 선정된 20명의 작가들의 단편소설 중 어느 하나를 골라 따로 소개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작품이 다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멋진 작품들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대신에, 잠시나마, 저는 선정되지 못한 100편의 작품에 대해 무게를 실어 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책 뒷면으로 돌아가서, 나열된 100편의 작품을 살펴보시고, 작가들의 작품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왜일까요?
아마, 그들은 저의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족이란 것 말고 다른 것이 없다면, 그건 제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Walter Mosley가 편집한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 2003년 책 343페이지를 보시면 Elmore Leonard의 소설 "How Carlos Webster Changed His Name to Carl and Became a Famous Oklahoma Lawman" (from McSweeney’s) 바로 위에 제 이름과 "Motherland"(The Missouri Review, vol. 25, no. 6)가 나와 있습니다.
같은 페이지에서 Maile Meloy, Arthur Miller, ZZ Packer, Grace Paley, Edith Pearlman, Annie Proulx, Emily Raboteau 및 Roxana Robinson 등의 이름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굉장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Curtis Sittenfeld가 편집한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 2020년 책의 366페이지에서 제가 공을 들인 이야기 "The Best Girls"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해 저는 Anthony Doerr, Louise Erdrich, Garth Greenwell, Yiyun Li, Carmen Maria Machado와 함께 주목할 만한 인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마디로 책 뒤쪽에 있는 “Other Distinguished Story” 리스트에 오르는 것도 영광일 수도 있겠네요.
작품이 선택된 20명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저는 그 해의 편집자에 의해 120편의 작품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전율을 느낍니다. 120편에 들지 못했던 해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원고료도 없이 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해는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어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쓸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힘빠지게 해 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가스라이팅
저는 거의 30년동안 작가 생활을 해 왔습니다. 요 근래 5년동안은 그럭저럭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심지어 이 조차도 누가 묻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작가로서 살아가는 건 어렵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출판인, 에이전트 그리고 선금액에 불만을 토로하는 세상물정 잘 모르는 작가 (cave painters)도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인터넷으로 출판물을 어느 때보다도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전업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힘듭니다.
제가 가진 테이터를 보여드릴게요.
작가조합에서 “21세기 집업으로서의 작가"라는 제하의 2020년 리포트를 보면, 작가의 절반이 연방 최저 빈곤 수입액 $12,488보다 더 작게 벌었습니다. 2015년부터 2020년 사이에는, 출간을 통한 수입을 얻는 작가는 그 반으로 떨어집니다. 유색인종 작가의 수입은 백인 작가들 수입 중간액수의 반 정도입니다. 비록 자비 출간을 하는 작가들의 중간 수입이 상기 리포트가 발표된 이후 4년간 85% 정도 증가했습니다만, 자비 출간 작가들은 전통적인 출판을 통해 버는 전업작가들 수입의 80%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작금의 작가들은 글을 쓰고 그 작품을 홍보할 필요할 필요가 있는데, 계속 글을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입을 유지해야 합니다. 고작 20% 정도의 전업작가들만이 책을 팔아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80%의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뭘 할까요?
작가들은 가르치고, 직업적으로 편집일을 하고, 대필 작업을 하고, 회사의 연설문을 쓰 주고, 교정을 봐주고, 정보를 확인하고, 강의하고, 영화와 TV 대본을 쓰고, 출판업, 광고업, 홍보업체, 문학관련 단체에서 풀타임 혹은 파트타임을 하고, 많기도 하군요, 그 외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어떤 경우는 경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지원해 줄 사람이 있겠지요. 어떤 이는 친구 집이나 함께 사는 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거나 혹은 친구집 소파를 빌려 살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선생님, 회계사, 의사들도 본업을 가지고 사이드로 글을 씁니다. 작가들도 또한 응급환자처치사로, 시큐리티 가드로, 혹은 앱을 기반으로 한 운전기사를 하기도 합니다.
저도 최소 다섯가지 쟙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간을 위한 작가, 프리랜서 작가, 강사, 창작 교사, 그리고 영화대본가입니다. 또한 두 가지 큰 단체에서 활동하는데, 하나는 PEN 아메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조합입니다. 저는 언제든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다른 작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건 책을 통해, 작가는 독자와 다른 작가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까요.
제가 아는 모든 작가들은 도서관, 지역 책방, 문학단체, 공공학교, 교도소, 병원, 공공센터, 그리고 비영리단체들에서 봉사를 합니다. 요청을 받게 될 때, 여건이 허락하면, 우리는 동료 작가와 문학상을 위해 동료로서의 평가를 기꺼이 합니다. 저도 퓰리쳐상, 커크스상, 그리고 전국책 우수상을 위한 심사위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봉사하는 것은 언제나 영광입니다. 반면 그에 대한 어떤 금전적 감사의 표시는 그 영광과는 결코 금전적으로 등가이지 않습니다. 영광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어떻게 금전적인 보상없이 말도 안되는 돈에 그런 일을 할 여건이 되는지 궁금해집니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이 우리 문학 관련된 일에 참여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껴안을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 문학의 문화가 진짜의 세상을 반영할 수 있을까요?
거의 모든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의 책의 추천사를 써 달라거나 책 홍보 여행에 함께 하자고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작가들은 출판사, 블로그, 팟캐스트, 주류 미디어에 권장 독서 리스트를 제공하는데, 괜찮은 책들은 친구들이나 소셜미디어, 학교나 책방에 따로 알려주는데, 그건 이런 책들이 읽히고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가가 모든 걸 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뭔가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일들은 무보수입니다.
책이나 예술의 세계에서 돈과 시간을 논하는 것은 무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임금과 시간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하는데요, 그건 소설이 모든이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 맨 뒷장을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이 “미국과 캐나다 잡지들의 단편소설"이란 제하에, 처음으로 실린 잡지들의 리스트입니다. 상주 편집자 하이디와 제가 선택한 단편소설들은 ‘뉴욕커' 잡지에 실린 것들부터 유명한 계간 잡지 ‘시와니 리뷰'와 ‘지지바'를 비롯해서 대중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전설적인 온라인 잡지 ‘일렉트릭 리터러쳐'에서 고른 것들입니다.
금전적인 문제는 문학잡지사에게는 언제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다 팬데믹으로 인해 거의 잡지사는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 되었습니다. 2022년 문예긴급지원금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글을 쓰고 출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문예긴급지원금을 요청한 비영리문학단체, 잡지사, 언론사의 40%가 월급을 받는 풀타임 직원이 없었습니다. 지원금 $100,000이하를 신청한 단체 중 대부분이 풀타임 직원이 없었습니다. 파트타임 직원이 있거나, 혹은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문학잡지의 경우, 구독부수를 유지해 주는 무상의 구독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편집자가 작가와 일을 하는 경우, 편집자는 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 급여를 받는데, 그것도 급여가 책정되어 있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2019년에서 2021년 사이에 계간지나 출판물이 거의 50% 이하고 줄었는데, 21,867개의 출판물이 11,591개로 줄었습니다.
문학잡지의 시인과 작가 데이타베이스에 의하면, 773개의 잡지가 소설을 실었는데, 235개의 작품에 대해서만 현금으로 작품고료를 지급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작가의 고료에 대해서 보자면, ‘뉴욕커' 나 ‘콩드 나스트 출판사'를 제외하고, 미국에서 출판된 단편소설에 대한 고료는 $10에서 $300 사이였습니다. 많은 잡지사가 작가에게 무료로 한 부를 주거나 출판물 중 두 개 혹은 일년 구독을 무료로 해주는 것으로 원고료를 대신했습니다.
문학잡지와 언론 공동체의 매리 개논 디렉터의 말에 의하면, 거의 800명 가까운 전체 회원 중 700개의 회원사의 잡지에 대한 예산이 $50,000이하이며, 반이 넘는 회원사는 $15,000 이나 그 이하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잡지사들은 급여를 지불하는 풀타임 직원은 없을거고, 작가에게 고료로 지급할 돈도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책을 내지 않았다면 저는 훌륭하게 매년 발행되는 이 책의 객원편집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문학잡지에 제 작품을 싣지 못했다면 책을 내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세세한 단계를 다 열거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작가에게 이런 식으로 일이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단순합니다. 문학잡지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실을 수 있는 첫번째 지면이고, 자신의 작품이 편집되는 첫번째 장이며, 이력서나 커버 레터에 적을 수 있는 첫 줄이 될 것인데, 이것은 창작지원금, 문학계 대표, 문학 강사, 혹은 출판을 할 때 딜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문학잡지가 없이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이력과 더불어, 셀 수 없이 많은, 유능하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스테프들이 적정한 보수없이, 그리고 남들이 알아 주지도 않는 속에서 일을 해 준 보물같은 일들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현대 문학작품을 계속 읽어나갈 수 있는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던 초창기에는 저는 뉴욕에서 가끔 저녁 식사나 칵테일 파티에 가곤 했습니다. 어떤 이가 제게 뭘 하세요라고 물으면 저는 작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저의 불찰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포장했지요.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책을 내지 않았지만 작가라고 말할 필요를 느꼈고, 그건 제가 실제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이 단지 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제 자신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일기를 쓰고 있었던게 아니었고,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 예술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작품이 읽혀지기를 원했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었던게 있었고, 그걸 저의 글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자주, 아주 자주 파티에서 사람들은 대답하곤 했습니다.
“아,그거 아주 흥미로운데요. 뭘 쓰시죠?”
“소설이요.”
“책방에서 사 볼 수 있나요?”
“음, 아니요.”
제게 질문한 분은 측은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거나 자리를 뜰 수 없을 때는, 잠깐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화장실에서 울곤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공부한 것이 결국 동정이나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니 말입니다.저는 가정주부 겸 엄마였고, 몇 년 동안 돈에 궁한 시절이었습니다. 건강보험을 갖기 위해 학교에 취직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을 위한 일을 하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제가 박사학위가 없고 교수직에 꼭 필요한 연구출판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딱 맞는 추천서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강사직은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양육할 충분한 경제력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뒤에 책을 출판하고 책이 조금 팔리고 강사직을 가졌음에도 저는 또 다른 종류의 동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텔레비젼에 대해 얘기하길 원합니다. 저도 티비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걸 말풍선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방송서비스가 있고 무한한 컨텐츠가 있는데 왜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제 자신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들이 책 읽는 대신에 드라마 에피소드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두뇌는 책을 읽을 때, 영상으로 된 스토리를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독서는 저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켰습니다라고 저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책을 일긴 하지만 소설은 읽지 않는다고 제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편이나 장편 소설은 허구잖아요라고 얘기합니다. 사실에만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시, 극본, 단편소설, 장편소설을 읽지 않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보입니다. 저도 픽션을 쓰는 대부분 작가보다 논픽션을 쓰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앞에 말씀드렸듯이 저도 역사와 법에 단련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말을 하신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제가 조리있게 제가 들려드리고 싶은 말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십년 전에라면, 픽션을 쓴다고 돈 잘버는 쟙을 그만둔데 대해서 제 자신을 탓했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렇게 잘 난 사람에게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진짜 하찮게 보이겠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겁니다. 만약 그 분들의 말이 옳고 내 인생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제 자신에게 묻고 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더 이상 다른 사람집 화장실에서 울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저는 고개를 끄득이고,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그들, 픽션은 읽지 않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리를 뜹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허망함은 인간성을 갉아먹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설가로서 저의 동정심이라는 감정의 기계가 잘 작동하도록 노력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상상하려고 합니다. 정말로요. 저는 제가 거기서 뭘 했는지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쬐끔 잘 난 채 한 걸 인정합니다. 잘못했다고 느낍니다.
메리엄 웹스터는 2022년의 대표 단어로 “가스라이팅"을 꼽았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가스라이팅은 어떤이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는가라고 의문을 갖게끔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1938년 영국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의 ‘가스라이트'에서 유래되었는데, 아내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고 가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여러분의 객관적인 상황을 부정한다면 그것이 가스라이팅입니다. 거의 80년 된 이 말이 우리의 문화속에서 계속 씌여져 왔고 지금도 많은 경우에 적절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간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 말을 생각해 낸 미스터 해밀턴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2022년에 선정되어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저는 2022년의 단어로 선정된 ‘가스라이팅'이 이 책의 단편소설 작가들과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를 줄곧 생각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여우사냥이나 유리뒤면에 그림을 그려 돌려보는 것 (reverse glass painting) 혹은 셈을 하는 주산 같은 것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문학잡지, 작가 그리고 독자들이 픽션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태로 가스라이팅 된 게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좋아해서 하는 것들에 대해서 경제적 관점에서 별로라면, 그것은 시장이 이미 이것을 구태의연한 것이나 혹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와 교육을 픽션이 받는 관심과 비교해보면 픽션은 시대에 덜 맞다는 얘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픽션이 덜 중요한 것일까요?
놀라운 사실이지만, 우리가 도서관이나 인터넷으로 공짜로 이야기(소설과 같은 픽션)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공으로 제작된 이미지와 덜 세련되지만 본래 이미지 사이에 적당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명확한 데이터가 있습니다. 사진이나 트윗은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습니다. 잘해야 시각적인 정보, 충분한 컨텍스트나 뉘앙스가 결여된 뉴스, 더 많은 경우, 집중을 방해하고, 교묘한 빈정거림 혹은 쉬 잊혀지는 즐거움을 줄 뿐입니다. 꾸며진 정교함과 필터링되고, 결코 가지 수 없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디지털 세상에서, 현대인은 불안정하고 갈팡질팡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자신에게 말하주기 위해 이야기를 빚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햇빛과 목적을 추구합니다.
픽션을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자면, 우리는 의미를 상실하고 궤도를 잃어버린 더 큰 세상에 의해 가스라이팅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독자와 작가는 이야기가 세상을 구하고, 밝게 하고, 계도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이는 우리는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가장 밝은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희미하게 세상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할 것인데, 결국 하나의 촛불과 거울이 불꺼진 방으로 옮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픽션은 더 이상 밝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 세상의 빛의 근원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형식과 이야기 둘 다를 갈고 닦아 둘 다에 능숙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들이 창조한 진짜의 세상에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쓴 작품들입니다. 자신의 느낀 감정과 인식을 기반에 두고 우리 독자들에게 감성적 진실을 제공하고, 우리의 정신을 복구시키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평온함을 선사합니다.
2022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120편의 작가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빛을 보기를 바라며 모든 곳에서 글쓰기에 매진하는 작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문학잡지 발행인, 편집자, 작품을 미리 읽어 편집자를 도와 주시는 독자들, 그리고 문학단체의 후원자 여러분들의 동료로서의 노고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 구도심 그리고 관대함에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끈끈한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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