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르네상스기의 서화수집및 감식안의 대가 김광수의 행적이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심사정과 조영석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臥龍菴小集圖(종이에 수묵담채. 28.7*42.0 cm. 간송미술관소장)
인물 등장부분을 확대한 그림: 탕건을 쓴 이가 김광수 이며 둥근 모자를 쓰고
등을 보이며 앉은 이가 심사정과 김광국이다. 곁에는두 소년이 시중을 들고 있다.
위 그림은 김광수의 집을 영조대의 대표적 문인화가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작품입니다. 김광수가 48세 되던 1744년 여름 그림 감식안을 한 수 배우려고 18세의 김광국(1727-1797)이 김광수의 집 와룡암을 찾았다. 김광수가 두건을 젖혀 쓰고 팔뚝을 드러낸 채 앉아서 손수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나눠마시며 김광국과 서화에 대해 논하던 중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부어댔다. 그 순간 예정에 없이 심사정이 비에 흠뻑젖어 낭창거리며 찾아들었다.
비가 그치자 순간 정원가득 피어오르는 경관이 미불(1051-1107.북송의 화가)의 수묵화 한폭 그림 같았다. 심사정은 그자리에서 그 모습을 한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니 김광수와 김광국이 돌려보며 감탄을 하였다.
김광국이 와룡암소집도에 대해 글을 짓고 김종건이 쓴 그림 발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갑자년(1744)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상고자 김광수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이윽고 하늘이 바둑돌처럼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현재 심사정이 밖에서 허둥지동 뛰어와서 옷이 다 젖었으므로 서로 바라보면서 아연실색하였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자 온 뜨락의 풍경이 마치 미가米家(미불 집안)의 수묵도와 흡사하였다. 현재가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멋지다고 소리치며 급히 종이를 찾더니, 심주 심계남의 필법으로 <臥龍菴小集圖>를 그렸다. 필법이 촉촉하고도 윤택하여 나와 상고자가 함께 감상하고서 이어 간소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움을 만끽한 뒤에 헤어졌다. 내가 그 그림을 가지고 돌아와 늘 집에서 완상하며 애지중지 하였는데, 나중에 어떤 아이가 훔쳐가버려 늘 가슴 속에 그림이 오락가락하였다. 신해년(1791) 가을 우연히 용눌 이민식을 만나 그의 집에 소장된 화권들을 열람하였는데, 이른바 <와룡암소집도>도 그 속에 있었다. 어루만지며 추억하니 황홀하기가 옛날과 같았는데, 두 사람의 무덤에 나무가 이미 굵어졌고 나도 늙어 흰머리가 되었다. 지금과 옛날을 생각해보니 감회가 자못 깊어 이에 용눌에게 애걸하여 그림을 가져다 다시 나의 <석농화원> 속에 넣었다. 매양 펼쳐 완상하노라면 한참 동안 서글픈 마음에 잠기곤 한다.
심사정(1707-1769): 심사정은 그는 본래 사대부가에서 태어난 어엿한 양반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집안이 몰락한 후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숙종, 영조조에 걸쳐 권문세가에서 역적으로 몰러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라 일지감치 벼슬을 접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정선(鄭敾, 1676~1759)에게서 그림을 배워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김광수, 김광국, 이병연, 강세황 등 당대의 뛰어난 감식안을 갖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생전에 그를 만났던 문사들은 그가 세상살이에 당최 흥미가 없고, 그림에만 몰두하는 외골수에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그의 그림 와룡암소집도에 김광수와 김광국과의 그림일화가 담겨 있다.
김광국:〈와룡암소집도〉가 그려진 이날의 조촐한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참석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18세의 김광국이다. 김광수를 찾아온 소년은 훗날 조선 제일의 서화 수장가가 되었다. 그는 대대로 내의를 지낸 중인집안 출신 의관(醫官)으로, 1747년 의과(醫科)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우두머리인 수의(首醫)를 지낸 김광국은 중국을 드나들며 우황 무역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이런 재화를 기반으로 동서고금의 명화를 모았으며, 나라 안팎에서 수집한 방대한 작품을 엮어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화첩으로 만들었다. 와룡암 소집 당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한 세대 앞서 서화 감상과 수장으로 이름 높았던 김광수와 감상우(鑑賞友)로서 교제하였던 것이다.
심사정이 〈와룡암소집도〉를 그린 해가 1744년이니 상고자는 56세, 현재 심사정은 38세, 석농 김광국은 불과 18살이었다. 김광국은 이처럼 10대부터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하였다. 당시 와룡암소집도를 얻은 김광국은 세월이 흘러 그림을 분실하고 다시 우연히 이 그림을 수중에 간직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그의 나이 65세가 되던 때였다.
김광국은 우연히 들른 역관 이민식의 집에서 뜻하지 않게 〈와룡암소집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때는 1791년이다. 18세 홍안의 소년은 어느덧 65세의 백발노인이 되었다. 김광수도, 심사정도 고인이 된 지 오래다. 추억 어린 그림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김광수와 심사정을 떠올리며 진한 회한에 잠긴 김광국은 이민식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석농화원’이라고 이름 붙인 그의 애장품첩에 수록하고 매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기곤 하였던 것이다.
김광국은 자신의 수중으로 돌아온 그림에 그간의 사정을 적은 글을 첨부하였다. 이 그림은 다시는 분실되지 않고 그의 자손들을 통해 근대까지 전해졌다. 심사정의 화흥(畵興), 김광수의 서화 취미, 김광국의 감회 등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와 수장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와룡암소집도〉는 그들의 사연과 함께 근대의 대표적인 수장가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소장품이 되었다.
김광수가 당대의 화가 조영석趙榮䄷에 부탁해 그린 장기 두는 선비도. 간송미술관 소장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조영석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내력을 밝힌 화기畵記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중(成仲⸳김광수)이 유령(兪㱓)의 팔준도八駿圖 2축을 가지고 나의 《賢已圖》를 구하므로, 왕희지王羲之가 황정경黃庭經을 거위와 바꾸었던 고사를 빌어 마침내 즐겁게 그린다./成仲以岭八駿二軸, 求余賢已圖,用換鵝故事,遂樂而作.”로 되어있다. 당대 최고의 수장가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가 자신이 소장했던 중국 그림 2점을 주고 대신 《현이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찻상을 옆에 앉아 망건을 쓰고 장기 두는 모습을 돌아다보는 사람이 성중 김광수 자신이다.
김광수의 간찰
첫댓글 유익한 자료를 발구하신 클마님 넙쭉 엎드려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