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안동 항일투쟁 답사기
작성자: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이승희 회원님
내가 안동을 방문한 것은 1995년 학교선배가 안동출신 신랑과 결혼하게 되어 참석한 것과 1999년 12월말일 밀레니엄 해돋이를 보고자 청주에서 포항까지 가는 길에 하회마을에 잠시 들렸던 것. 그리고 2022년 여름휴가를 하회마을 락고재에서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도산서원 한번 다녀온 것이 고작이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역사인식에 안동은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
선조 때 왜의 침략 가능성을 잘못 판단하고 대비하지 못한 것과 정치적 안배가 있었겠지만 별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원칙적인 예를 주장했던 예송논쟁의 꼬장꼬장한 동인 계열의 중심이었고 또 1800년 정조대왕이 죽고 김조순과 그의 딸 순원왕후 김씨로 시작된 60여년간 강력한 세도정치로 당시 사회를 병들게 했던 이들이 바로 안동의 권문세가들 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답사를 통해 안동이 임란과 일제시기 항일투쟁의 선봉지 였음을 알게 되었다.
학봉 김성일의 15대 종손인 김종길 선생님의 안내로 학봉 역사문화공원(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74)과 학봉 종택을 두루두루 볼 수 있었고, 더욱이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종택 소유의 진품 보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를 열어 보여주시기도 하였다. 또 안동식혜와 과일, 한과를 내어 개인적으로 처음 먹어보는 안동식혜는 생강향의 시큼한 맛으로 꽤 괜찮았고, 저녁에 식당에서 나온 안동식혜는 또 다른 맛이었다.
학봉은 조선통신사로 왜를 다녀와 침략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임란이 터지자 초유사로 부임하여 주변에 산재한 많은 의병들과의 훌륭한 코디네이션와 메니지먼트로 당시 의병투쟁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진주성에서 병사하기 전까지 통신사로서의 잘못된 보고를 엄청 후회하였다고 한다. (역사문화공원에서 통신사의 이야기는 없었다.)
안동찜닭 점심을 먹고 잠시 들른 법흥사지 7층 전탑과 너무나도 운치있고 예뻤던 한옥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한잔했다. 이런곳에 한달 만 살고 싶다…..^^
안동대학교 사학과 강윤정 교수님의 안내로 그 유명한 임청각( http://www.imcheonggak.com/)을 둘러보고, 안동문화지킴이 사무실로 옮겨 안동지역의 항일투쟁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안동에서 전국 최초로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초기 선비중심에서 나중에는 신분에 구분없이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에 항거했다.
꼿꼿하기 그지없는 안동의 유학자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 자정 순국하신 분이 많으셨는데, 부부가 순국하신 분도 계셨다. 본인의 유학자적 & 민족적 양심에 망국의 한이 얼마나 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우리가 잘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혁신적인 유림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910년 한일합방 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하였는데, 이 당시 백하 김대락 선생을 비롯하여 안동에서 이주한 독립투사들이 1911년도에 2,500명, 1920년대말까지는 25,000명이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고 한다.
석주선생은 신흥강습소등을 세웠고 이는 훗날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이후에 서로군정서 최고 수장인 독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셨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안동의 임청각을 아들을 보내 팔아서 독립자금으로 충당하였는데, 문중에서 이를 여러 문중 사람들의 기부로 다시 매수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을 갈망하며 추운 만주땅에서 싸웠을 분들앞에 너무나 부끄럽고 숙연해진다.
임청각은 바로앞에 일제때 만들어진 철길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지금은 철거하였다. 나는 예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나, 참석하신 많은 회원들께선 철길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셨다.
저녁을 먹고 안동포전시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길 341-12)에서 김여랑님의 해금연주와 마을회관에서 김수호님의 대금 연주는 이번 답사의 또 다른 힐링이었다. 특히 김수호님의 마지막 곡 대금산조는 최근에 즐긴 그 어떤 문화공연을 뛰어넘는 훌륭한 명품 연주였다.
풍경 회장님이 일일이 껍질과 뼈를 발라서 내놓은 과메기와 총무님이 공수한 신선한 미역은 이미 저녁을 배불리 먹었음에도 너무 맛있어서 엄청나게 먹은 것 같다. 또 오뎅탕과 가리비찜도 일품이었다. 회원들과의 정다운 술자리는 문화답사가 아니라 먹방투어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행복한 만찬이었다.
다음날 박홍철님의 안내로 안동포에 대한 역사와 제조과정에 대한 것과 기능보유 할머니들의 시연을 볼 수 있었다. 어느 회원님의 의견처럼 명품브랜드 마케팅으로 경제적 뒷받침속에 천년을 지속해온 안동포 제조 기술과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장경재님의 해설로 진행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http://www.815gb.or.kr/)
200여개가 넘는 국가중에 19세기 제국주의의 속국으로 경제적 문화적 침탈을 당하지 않은 국가가 고작 10개국가 밖에 되지 않는다니 새삼스럽다. 그 10개국은 이 당시 침탈한 자원과 부를 바탕으로 지금도 최고의 선진국 반열에 올라 호의호식하고 있다.
당시에 안동이 조선의 모스크바라로 명명될 정도로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지금은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지금은 흔히들 보수에서도 조금 더 우클릭의 이미지이지 않은가?
강교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예기에 나오는 공자의 이상사회인 대동사회의 “능력과 신분을 넘어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사회”가 사회주의의 이상사회와 같아서 많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라는 면이 있었고, 일반적인 신지식인 사이에서도 당시에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이론이어서 식민국가를 포함하여 심지어 제국주의에서도 지식인들의 트랜드는 분명히 사회주의였다. 또 우리는 식민지여서 반제국주의 공동목표도 일치하여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로 사회주의를 선택한 독립투사가 많았으리라.
안동출신의 조선공산당 최초 책임비서 김재봉 선생과 610만세운동의 주역 권오설 선생의 투쟁기와 78년만에 철관에서 나와 비로소 온전히 흙으로 돌아간 이야기와 부친 권술조 선생의 구구절절한 제문. 아나키스트 박열 선생과 부인 가네코 여사,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했던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의 스토리에 숙연해졌다.
나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접할 때마다 먹먹하고 우울해진다.
해방이 되어 독립된 국가를 다시 세우고 지금은 일본과 맞짱 뜰만큼의 국격이 되었으면 독립투사 선조들이 지하에서라도 껄껄껄 웃을만한데, 현실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일제에 부역하며 독립투사를 가두던 친일 인사들이 그대로 고위직에 머물며 잘 살고 있고, 독립투사들과 그 후손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배려를 못 받고 있다. 잘사는 친일 후손들은 높은 사회적 위치를 이용하여 친일 선조들을 독립투사로 둔갑시킨 사례도 많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 활동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무력화시킨 어처구니 없는 우리의 역사는 첫 단추가 잘못 꿰진 듯, 지금 현재도 이를 바로 잡으려해도 캐캐묵은 이념논란이라며 길길이 날뛰는 분(놈?)들이 많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공공의 해악에 대한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지켜낼 수 있다.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패악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사회적 고통과 갈등의 주 원인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에 난데없는 계엄령으로 사회를 총칼로 통치하려했던 행위는 반드시 후대가 아닌 바로 지금 철저히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처벌하여 우리 사회가 단 한걸음이라도 뒷걸음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안동 답사의 프로그램와 강사섭외까지 모든 것을 준비하신 다함 선생님과 행사를 진행하고 준비하신 풍경 회장님, 총무님. 그리고 잔심부름 등의 많은 일거리를 묵묵히 해주신 회원님들과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좋은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역시 예상대로 높은 식견과 지식을 갖춘 회원님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영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