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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1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서론]
오늘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을 살피겠는데, 이 고백서는 1643년 잉글랜드 의회의 요청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로 모인 사람들이 내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총회가 열리게 되었는가? 총회가 열리게 된 배경과 관련해서는 저희 교단(합신) 김병훈 교수가 연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첫 번째 내용으로 대신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http://repress.kr/19655/).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찰스 1세가 통치하던 기간(1626-1649년)에 열렸습니다. 찰스 1세는 영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에 친화적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주장을 펴며 주교제도를 통해 교회에 대한 왕권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찰스 1세의 정책은 잉글랜드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찰스 1세는 장로교회였던 스코틀랜드 교회로 하여금 잉글랜드 교회와 같은 예배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판 ‘공동기도서’를 만들어 그것을 시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1637년 7월 에딘버러에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638년 12월에 글래스고우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공동기도서’의 도입을 거부하며 주교제도를 폐지하고 장로교회에 어긋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준비의 부족과 잉글랜드 의회의 비협조로 말미암아 오히려 스코틀랜드 군대에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군대를 가리켜 언약파 군대라고 합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전비 마련을 위해 징세를 하려고 하였지만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탓에 의회를 해산하고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와 다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이제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에로 진격해 왔으며, 이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요구를 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스코들랜드 군대의 요구는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의회는 앞서 해산된 단기의회와 구별하여 장기의회라고 일컬어집니다.
장기의회는 왕과 대립을 한 끝에 1642년에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약 7년간에 걸친 내전을 치룹니다. 전세가 불리하였던 의회파는 전쟁 초기에 스코틀랜드 언약파와 동맹을 맺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1643년 9월에 맺은 이 동맹을 가리켜 ‘엄숙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라고 일컫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이 동맹을 통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은 장로교회로 개혁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의회파는 후에 회중주의자 크롬웰의 지휘 아래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시민 전쟁의 와중에 잉글랜드 의회는 의회에 대한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위한 교직자들의 총회를 소집할 것을 찰스 1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왕이 이를 다섯 번에 이르기까지 거부를 하자 왕의 재가를 받지 않은 채 상원의 동의를 얻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채플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총대의 수는 모두 151명으로 이중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121명의 주교가 아닌 성직자들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5명의 목사들과 3명의 장로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의회에 의하여 과제를 부여받은 총회는 첫 회의가 열렸던 1643년 7월 1일부터 마지막 회의가 있었던 1649년 2월 22일까지 무려 5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1,163번에 이르는 회의들을 가졌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 시간에도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신조 혹은 교의, 교리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신앙의 조목, 어떤 종교의 신앙 내용이 진리로서 공인된 종교상의 가르침, 각 종교의 종파가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이르는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를 뜻합니다. 이것이 그 형태나 용도에 따라 신경(creed), 요리문답(catechism), 신앙고백(confession)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데(박일민, 개혁교회의 신조, p.18), 이러한 신조, 혹은 교리는 성경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가르치는바 신앙의 조목이 신조,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정확무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 교리는 정확무오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고백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또 신앙고백의 내용이 성경의 모든 것을 다 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개혁교회의 신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도르트 신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등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고백을 다 받느냐? 한 예로 도르트 신조가 나온 배경에는 항론파가 선언한 내용이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의 내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우리가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들도 성경을 따라 그렇게 주장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올바른 해석으로 있지 못하다고 하여 도르트 총회가 열린 것이고, 그 결과 도르트 신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모든 신조를, 모든 신앙고백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151명이라는 사람이 모여 회의한 결과로 내놓은 내용입니다. 모든 주제에 있어 동일한 성경 해석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좋은 해석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더 좋은 해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더 좋은 해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늘 더 좋은 해석을 가진 사람을 따르느냐? 그러면 좋겠지만 자신의 해석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의 주장 속에서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 사이 혹은 덜 좋은 해석이나 더 좋은 해석으로 결과되는 것이 신조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하지만 그 말씀의 해석의 산물로 나온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은 미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 교리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과 같은 교리 없이 성경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것은 이미 역사 안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이단에게 빠질 위험은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 가운데 있었던 수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참된 뜻으로의 성경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이 여기에 대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우선 10절을 보시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경의 기록을 위하여 비상직분을 두셨는데, 구약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면 신약은 주로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선지자들, 사도들은 점과 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점과 흠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점과 흠이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특별한 은혜로 저들을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혜는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이때 모든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구약 성경을 의미하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까지 확장됩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 성경까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상 거기에는 인간의 것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모든 오류도 성경 기록에서만큼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점과 흠이 있고, 오류가 있는 사람이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한 거기에는 점과 흠이 있고,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정확무오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비록 점과 흠이 있고 오류가 있는 사람이 기록했지만 성경을 기록할 때만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점과 흠으로부터, 그리고 오류로부터 보호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만을 기록하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점과 흠도 없고, 오류도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도 점과 흠,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알리셔서 기록하게 하실 때 성령으로 저들을 모든 점과 흠으로부터, 오류로부터 보호하셨던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직분은 비상직입니다. 신약의 사도도 비상직분입니다. 사도만이 아니라 신약에도 선지자로 불리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비상직분입니다. 비상직분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기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직분으로 저희 교단 헌법에서는 교회의 기초직원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총회 헌법, 제3부 교회정치, 제4장 교회의 직원에서 제1조 교회의 기초 직원에 대한 소개를 이렇게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최초에 기적을 행할 은사를 사도들에게 주셨고(마10:8), 그들의 선교에 의하여 각국에서 택한 백성을 모아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다.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그대로 계승되지 않았고, 그 직의 표가 되는 사도적 기적(고후12:12)도 멎어졌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회의 기초가 성립될 때에만 이런 기초 직원이 있었다(엡2:20, 계21:14).”
그럼 비상직분, 혹은 교회의 기초 직원으로서 사도라는 직분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항존직분으로 목사를 세우셨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지금 사도 바울은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다른 이’라고 말하는 대상은 말씀 사역자로 제한이 됩니다. 그러나 비상직분으로 있던 자들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새로운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닦아 둔 터 위에 세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사도들처럼 점과 흠과 오류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에서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할 때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그 말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록하여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내 뒤에 오는 자들, 사도가 아닌 자들, 항존직분으로서 목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세울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명하는 것이 12절 이하 15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터는 그리스도로 변함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할 때 그들을 터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어떤 재료를 가지고 건물을 세우느냐? 금, 은, 보석으로 세울 수 있고, 나무, 풀, 짚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재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불에 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에 타는 것입니다. 즉 말씀 사역자가 말씀을 가르침에 있어서 불에 타지 않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불에 타서 없어질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막13:31, 눅21:33)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 이런 점에서 불에 타지 않는 가르침은 터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지만 결국 불에 타서 없어질 가르침,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터로 삼는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는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을 가르친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구원을 말할 수 없겠지만 그리스도를 터로 두고 있는 이상 구원 받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고대 교부들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과거의 많은 성도들, 곧 시프리언(Cyprian),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오늘날 우리와 아주 가까운 시대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곧 그레고리(Gregory)와 버나드(Bernard),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이 그런데, 그들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서 건축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서 건축하는 올바른 건축 방법에서 빗나갔다.”
그러나 모든 가르침이 그리스를 터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참된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가톨릭교회였는데, 그들의 교리는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터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가톨릭의 교리는 결코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했던 것이고, 종교개혁 당시만 하더라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신앙고백서들, 그리고 요리문답 등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 가운데 있었던 수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참된 뜻으로서의 성경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람의 진심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으로 가는 참된 지혜는 할 수만 있다면 참된 진리를 따라서만 가는 길이요, 그 길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심겨 놓으신 내용들을 정거장으로 삼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회하거나 돌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오류에 함께 빠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대하는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자는 것이요, 교회 역사의 실수와 실패를 피하고 진리로 남은 것을 한 교회의 한 믿음과 한 교리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으로 가되 어거스틴, 특별히 후기 어거스틴이 이해한 성경으로 가야 합니다. 또한 어거스틴으로 하되 가톨릭도 받고 있는 어거스틴이 아니라, 칼빈이 이해한 어거스틴으로 가야 합니다. 또한 칼빈으로 가되 앞서 언급한 개혁주의 신앙으로 고백한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와 같은 내용으로 가야 하고,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을 산출한 17세기 개혁신학을 통해 가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의 경우도 교의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할 때 세 가지로 말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론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요리문답 교육의 체계, 혹은 요리문답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의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단순하게 해명하는 방법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살폈는데, 요리문답의 1문은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2문은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되게 살고 죽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알아야 하는가인데,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답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 셋째,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 내용에서 우리가 어떻게 죄와 비참함에 빠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에서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주된 내용이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내용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인데, 주된 내용이 십계명 해설, 주기도 해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가? 이것을 위해 우리를 지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무슨 규범을 주셨는가? 유일한 규범은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3문은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두 가지로 말하는데,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로 설명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전체 세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전체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인가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다룹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다루는데,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섭리 안에서 인간의 타락,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 등을 설명합니다. 여기에 은혜언약이 있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적용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설명됩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감사 부분처럼 십계명 해설과 주기도 해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고, 그 의무를 온전히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요리문답의 내용이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의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단순하게 해명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성격을 띠는 주제들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인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어떤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경우 제1장이 성경에 대한 고백인데, 이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주제에 따라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총론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셋째가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부지런히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성경으로 곧바로 가는 것은 진심일 수는 있으나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오류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류를 모른 채, 성경의 바른 해석을 등진 채 곧바로 성경으로 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 수없이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경이 참되게 말하고 있는 바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결코 합당한 성경 해석의 산물인 신앙고백, 그리고 요리문답과 같은 내용을 등져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경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계1:3)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계22:18 참조). 혹은 내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빼서도 안 됩니다(계22:19 참조).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요리문답의 틀이나 신앙고백의 내용과 상관없이 내가 볼 때 이 말씀은 이런 뜻으로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처럼 전통이 또 다른 규범으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단들도 오직 성경을 외칩니다. 그래서 어떤 이단들은 유월절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라고 말씀하시는데(출12:11,14), 왜 기존 교회들은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지키지 않는 교회가 거짓된 교회요,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원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서 끝이 없는 영원, 혹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영원으로도 사용합니다.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한시적인 측면에서 영원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시적으로 끝 날 때가 있지만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지켜야 할 규례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저들이 말하는 오직 성경은 사실 오직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 말처럼 오직 성경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저들은 성경의 전체 내용으로 오직 성경을 말하기보다는 성경의 일부 내용으로 오직 성경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함께 전체 성경(Tota Scriptura)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일지라도 전체를 통해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폐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 3항이 이 부분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안에서 도덕법과 의식법, 재판법이 있는데, 3항은 의식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보통 도덕법이라 칭해진 이 법 외에 하나님은 미성숙한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모양의 규례들을 포함하는 의식법을 주기를 기뻐하셨다. [의식법의] 일부는 예배에 대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표하고(히9, 10:1, 갈4:1-3, 골2:17), 일부는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교훈들을 제시한다(고전5:7, 고후6:17, 유1:23). 모든 의식법은 신약 아래에서 지금 폐해졌다(골2:14,16,17, 단9:27, 엡2:15,16).”
그런데 전체 성경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우르시누스가 교의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으로 설명한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입니다. 요리문답을 통해, 그리고 주제별로 된 총론을 통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내용을 배워야 하는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정리하자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서론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장로교 목사라면, 그리고 장로교의 직분자라면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고서 직분자로 세워집니다. “1. 본인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습니다. 2. 본인은,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서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서약합니다. 3. 본인은,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서약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선서는 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들입니다. 왜 이것들을 받는다고 고백하는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참되게,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우리가 머물러야 할 최종적인 자리는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따라 더 좋은 해석이 총회의 결과물이 아니라 총회 안에 있는 어떤 한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