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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파슨스 「열린 비밀」 Tony Parsons 「the open secret」
토니 파슨스 및 책 소개
토니 파슨스는 한 마디로, 영국이 낳은, 명쾌하게 깨달은 벽안의 선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 선불교 조계종의 종조인 육조 혜능선사와 비견할 수 있는, 서양에서 현재 살아 있는 조사선의 체득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미스터 토니의 가르침은 바로, “언어도단,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조사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대중(개인성)에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본성만을 가리켜 보이는 토니씨의 말들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정의와 진리탐구의 문제, 공동체의식 붕괴의 문제, 자유의지와 운명론의 문제, 개인적 고통의 해결이라는 문제 등과 마주하여 진지하게 길을 찾아 나아가는 수많은 구도자들은 물론이고, 이 땅 위에서 우연히 주어진 삶을 가지고 너무도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하는 번역입니다.
Tony Parsons, 「the open secret」, 1995, 1998, 1999, 2000, 2005, 2011.
서론
우리가 서로 협상하고 교섭해야만 하는 따로 분리된 개인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 안에 갇혀 있는 동안은, 우리는 꿈꾸는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꿈의 상태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대칭성의 법칙-소위 모든 긍정적 행위도 그 반대의 것에 의하여 정확하게 똑같이 상쇄되어 균형이 잡혀지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삶이 잘 영위되게 하고, 완전함에 도달하고, 개인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모든 개인적 노력과 시도는, 상쇄되고 중화되어 무효로 돌아가고 맙니다.
깊은 숙고와 이해를 통하여, 우리가 이런 꿈 안에 있기를 계속하는 동안,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동그라미 순환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일체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끝없이 그 자체를 되풀이 하는 그런 바퀴 위에 우리는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과 자유를 동시에 포괄하는 창조 안에서의 일체성의 환희입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건 지워진 신념체계에 따라 반응하고 응답하는 꿈속의 등장인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앞을 향해 진보해 간다고 아는, 이 세계의 대표적이며 최고 수준의 모든 종교, 예술, 과학은, 오로지 또 다른 측면의 가능성을 반영함으로써 완벽하게 상쇄되고, 정확하게 중화된 상태를 가져오는 법칙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해탈, 자유의 측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외형적으로 부서져 소멸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또한 외형적으로 부서져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외형적으로 다시 생겨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꿈은 전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우리의 본유적이며 무시간적 본성으로부터 떠나, 한정되어진 일체성 안으로 매몰됨으로써 이러한 상황과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깨어남은 꿈과 시간의 밖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고 알려지며, 개인적 노력이나 방향, 과정 혹은 신념을 통한 성취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그 너머에 지금 있습니다.
맥락(전후 상황)
아주 어릴 때, 나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마법의 세계 안에 있다는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경이로움이 나를 감싸버리는 알 수 없는 단일함 말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같다고 나는 느낍니다.
겉보기에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하였고 나는 분리와 필요성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내가 나와 분리된 어머니와 아버지, 하나의 이름을 가졌고, 이것 혹은 저것을 행하는 선택을 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시간과 공간, 경계와 탐험, 애씀과 조작 그리고 즐거움을 추구하고 괴로움을 회피하는 세계로 옮아갔습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고, 이들이 나의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인 것으로 믿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예절바르게 행동하며, 나의 선택 및 부과된 일에 성공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며, 내 건강을 잘 돌본다면 행복을 거머쥘 좋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꽤나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때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나는 빠진 무엇인가를 종교를 통하여 찾아 나서야겠다고 결심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나는 다시 여러 종류의 수련법과 의식儀式, 그리고 정화淨化에 전념하고 몰두한다면 마침내 영적인 완성이라는 성취를 거머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적절해 보인다 싶은 것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완전히 빠져들었지만, 여전히 무엇인가 허전하고 빠진 듯한 느낌의 원인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 거의 우연처럼, 나는 이 비밀을 재발견하였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이것이 나를 재발견한 것이겠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는 몹시 불가능합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가까운 묘사는, 사랑의 감정으로 휩싸여 압도됨과 동시에 생각과 상상, 마음속의 그림을 완전히 넘어선 전체적인 이해입니다.
이 재발견은 너무나 단순하지만 또한 너무나 혁명적이라는 계시와 같이 동반하여 왔으며, 이것은 내가 여태껏 배워왔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을 단 일격에 완전히 쓸어내 버렸습니다.
이 자각 중 일부는, 깨달음은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 혹은 심지어 삶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과도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생동하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자각으로의 전면적인 이동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찾거나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구함의 쇼핑 목록이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픈 목마름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집은 완전한 일체一體이고, 본유적本有的이며 당연한 현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금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른 어디로 갈 곳도 없으며, 다른 무엇이 될 것도 없습니다.
물론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을 통하여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선언적 진술은 비밀의 드러남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나는 깨달음, 시간, 목표, 영적 완성을 성취하기 위한 나의 노력에 대한 믿음이, 언제든 직접 누릴 수 있는 일체성을 곧바로 가로막는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애쓸 것입니다. 어떻게 분리,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추상적 관념이라는 환영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영향력들을 포용함과 동시에 이들을 변용시키는 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여 혼미하게 만드는지를 말입니다.
나는 또한 환영에서 놓여나고 풀려지는 이 자유에로의 열려짐이, 얼마나 애씀 없이 쉽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명상적 삶으로 인도한다거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를 권고하는 것으로 본다면 핵심을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적 진술은 우리의 진정한 됨됨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단일하고도 혁명적인 도약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꾸밈이나 장황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한 번 자각하여 깨어나면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서의 깨달음, 완성, 자유, 일체성 등의 말은 내가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성취는 없다
나에게 처음의 깨달음 혹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으로의 깨어남은 뭔가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일어난 일은 심지어 어떤 하나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드러나려면 분리된 경험자의 부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깨어남은, 이것이 나를 경이로움과 전적으로 홀로임의 상태에 있게 한 것이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중요하고도 혁명적인 내용의 깨달음과 같이 왔습니다.
내가 알게 된 것 중 한 가지는, 깨달음은 오직 그것이 성취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졌을 때야 비로소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의들, 목표 달성 과정들, 점진적인 진보의 길들은, 자아가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함으로써, 그 상태에 머무는 문제 상황을 단지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하나임oneness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환영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들이고, 바로 자아 정체성 탐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진실을 가리는 장막입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성·개체성·개성이라는 꿈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땅 속 깊은 구멍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어떤 사람이 그 구멍을 탈출하기 위하여 더욱 더 깊이 땅을 파면서, 파낸 흙을 자신의 뒤로 던져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빛을 덮어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노력도 하나임을 나타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나 자신이 그것인,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기 위한 극단적인 애씀의 유일한 있음직한 효과는, 결국 완전히 지쳐 밑바닥에 쓰러져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놓아버림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군분투하여 신성화 되려 함으로써 자유를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시간 안에서의 노력과 분투는 해탈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삶은 수행하는 힘든 과제가 아닙니다. 삶에는, 노력하여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어남 이외에는,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새로) 깨닫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예전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깨닫게 될 수 있으며, 그 사건은 누군가가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단 한 번, 이 상을 타는데 성공하면, 그 이후 당첨자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무오류성 그리고 다시는 썩지 않는 선량함이 보장된다고 말입니다.
무지 속에서, 나는 이러한 깨닫게 된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노력한 끝에 얻어 소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망상은, 깨달음은 비범하며 선택된 소수의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거의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습니다. 이런 오해와 착각은, 완벽한 상태는 어떻게 보여야만 한다는, 내가 붙잡고 있던 어떤 이미지로부터 나왔습니다. 깨달음은 완전성이라는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신념들은, 내가 그렇다고 상상하는 나의 부족함을, 그때 당시에 우연히 끌린 “영적 영웅”들과 비교할 때 더욱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이런 방식으로 본다고 느낍니다. 확실히 이런 신념들에 용기를 북돋워 주고 또한 실제로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나는 이제는 이것이,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나는 숨을 쉴 줄 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고 허망한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자각은,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깨달을 무엇도 없다는 갑작스러운 이해를 동반합니다. 깨달음은 단순하게 늘 있습니다. 이것은 우승 트로피처럼 얻거나 성취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 일체는 지금 하나임이며, 깨달음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행하는 모든 노력은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깨달았다는 주장 혹은 특정한 입장의 견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 자체가 가지는 모순된 성질 및 그들이 성취했다고 상상하는 그 상태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단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심오한 개인적 경험을 했을 수는 있지만, 이런 것은 해탈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특정한 신념체계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적인 관념들 안에 스스로 묶인 채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영적 교사’ 혹은 ‘깨달은 스승’의 역할을 떠맡을 필요를 느끼는 듯하며, 필연적으로 학생이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이원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지도자”와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로의 분리를 촉진합니다. 추종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스승의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역할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게 됩니다.
이런 역할이 채택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들 중 하나는, “인간적 약점”의 표출 및 시인에 대한 (자기)단속입니다. 이런 것과 함께, “스승”과 추종자들 간의 거리가 통상적으로 만들어 집니다.
“스승”의 특별함이 더욱 효과를 발휘할수록 추종자들의 요구도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 가르침도 더욱 모호하고 뒤얽히게 됩니다. 가르침의 불명확성이 증가하는 것과 같이하여 분리가 더욱 확대되고, 종종 추종자들 중 많은 사람은 더욱 혼란스럽게 되고 복종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통상적 효과는 무조건적 추종, 환멸, 혹은 알아채고는 다른 데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향력들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곧바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대해 의심과 무능력한 느낌을 만들어 내고 유지시킵니다. 이 의심과 부족감은 집단 무의식에 내재하는데, 환상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껴안은 사람들은 팔아야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이 소식을 서로 나눌 때는 그들 자신이나, 나누는 것에 대하여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 혹은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하여 그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독점권은 배타성을 키우지만, 자유는 벗으로 사귐을 통하여 같이 나누어집니다.
시간
외관상의 분리 안에서,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간의 존재와 영향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나는 불가피하게 시작, 중간 그리고 끝...깨달음이라는 목표와 결말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는 관념과 경험에 묶여버렸습니다.
이 여정이라는 관념은, 학교에서 성적이 좋다거나, 사업에 성공한다거나 혹은 깨달음을 이루는 등 어떤 수준에서든 적용됩니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어떤 결과를 얻거나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로입니다.
이 메시지는 외관상으로 보이는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과정에 의하여 내 정신에 가장 강하게 아로새겨졌습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는 반박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의 존재, 흐름 그리고 영향을 반영하고 강화하였습니다. 시간의 영향력으로 생겨나 보이는 것을 내가 경험하는 만큼, 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간의 존재를 믿는 만큼, 또한 나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만큼 역시 주어진 기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아있다고 상상하고 믿는 기간 동안,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고, 무엇인가를 성취하여야 했으며,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적이라는 관념이 태어났고, 이와 더불어 내 기대와 목적 달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동반되었습니다.
기대와 목표
나는 목표에 대한 기대를 통하여 시간과 분리의 한계 속에 갇혀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적인 것을 포함하는 다양한 인생의 목적과 목표들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전통적 종교윤리 안에서, 나는 그때 당시에 풍부한 전통을 가진 권위 있는 지혜를 대표한다고 믿기는 동·서양의 다양한 교리들 및 관념들을 만나고 경험하였습니다.
내가 본 것의 결과로 나는 부족하고 결핍되었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되고, 어떤 곳에 속하기 위하여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목표점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다고 느낄 필요성을 만족시켜줄 실재 모델을 나는 찾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외관상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정보를 고려할 때 그러한 접근이 가장 적절하게 보였습니다. 나에게 주어져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서구적 배경, 성경적 역사와 전통에 대한 지식, 외관상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 과정, 의례들...원죄, 기도, 고백, 용서, 성찬의식, 정화 그리고 기록되고 말해진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이해하고 신성시하던 것과 나의 영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바라던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며, 여기보다 더 나은 다른 곳에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를 통하여 신의 은총에 다다르며, 이것을 통하여 나는 마침내 존재의 낮은 수준에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동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메시지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믿기는 돈과 수단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천상의 네모난 광장에 앉아 셈하고 기록하는 동안, 나는 기도로서 간청하고 공적을 연기演技하여 협상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보다 낫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많은 기회, 지식, 시간이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나의 목표는 희망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옳게 잘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노력하고, 저항하고 이를 고집스럽게 계속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는 것은 더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도록 도울 수도 있었습니다.
목표, 희망, 믿음은 나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를 주었습니다. 목표, 희망, 믿음...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숭배되고 또한 외견상 강한 힘을 가진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들 역시 혼란, 절망, 의심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당시에 나는 사물의 그런 측면에 대하여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필연적으로, 양극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던 시계추는 기대와 실망, 노력과 무능함, 외견상 강점과 약점들과 부닥쳤고 그들 모두는 내가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교감과 참회, 그리고 모든 영적인 과제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탐욕적이고 밑 빠진 영적 쇼핑 카트를 나는 기도, 금욕, 겸허, 숭배, 그리고 선행으로 채워야 했지만, 비록 내가 그 중 하나의 바닥에 도달한다고 쳐도, 아마도 나는 또 다른 것을 복종과 순결로써 채워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어떤 면에서 그 모든 것들은 너무 구태의연하고 기쁨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무기력한 추종자가, 부정과 숭배라는 수련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기대는, 고작 두려워하고 무기력한 추종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종교적 독신생활을 고수하는 길을 가면서 하나가 되는 결혼 축하연회에 이르고자 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아무런 액체도 넣지 않고 밀가루만 가지고 빵과 과자를 구우려 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교의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허위의 진술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창작자의 미묘하고 아름다운 자유의 노래를 영원한 종교적 교리라는 한계 속으로 완벽하게 번역해 넣으려는 모순된 생각 말입니다. 새가 날아가고 나면, 종종 새의 노래의 정수는 잃어버리고 빈 새장만 남아 있게 됩니다.
나는, 사막에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막 발견한 어떤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신과 악마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신이 악마에게 말하죠, “아하, 이제 저 사람이 진리를 발견했으니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악마가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난 그가 진리를 조직화 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걸”
언제나 혹은 어디서나 조직화된 종교는 있습니다. 조직화된 종교는 우리들의 최악의 두려움과 가장 어두운 죄책감, 그리고 사람들과 민족들과 신념들 간의 가장 추한 투쟁을 가장 쉽게 낳고 키우는 풍요로운 토양입니다. 우리가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지와 무관하게, 이런 상처들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할 수 있고 우리 경험의 모든 부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내가 직관적으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속죄하는 부정과 신중하게 고려된 긍정에 기반 한 윤리체계는 부자연스럽고 부자유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런 상황들에서 옮겨가, 우리 시대의 치유와 영성의 세계를 탐구하였습니다.
완성을 향한 이러한 접근들이, 내가 그 이전에 부닥쳤던 어떤 것들보다도, 그리고 매우 열리고 자유로운 생각보다도, 더욱 지혜로우며 받아들일 만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창조력, 건강, 부유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내 스스로 느끼는 자긍심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의 부분들을 발견하고 치유하고 통합하는 것을 배울 수단이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흥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지게 될 것인지요.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삶의 방식의 개념적 모델이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은 특히 호소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엄청나게 많은 과정들과 20세기의 영적인 모험 같이 느껴지는 것을 공유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충격적이고 찬란한 돌파구들, 감정의 격동, 가장 내밀한 것의 드러남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 스승에 대한 진정한 순종, 왜 내가 여성들에 대하여 그토록 매혹됨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는지 등등에 관여한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뇌와 계시들, 과거 삶의 기억들, 현재의 도전 그리고 미래의 희망과 두려움들을 공유하는 것, 이 모두는 하늘의 계시였고 확증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부 매우 흥분되는 것이며, 전부가 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장 깊고 가장 계시적인 명상에 몰입하였고, 가장 최신의 가장 중요한 서적들을 탐독했으며, 그리고 당연히 가장 최신의 치유법에 열성적으로 매진하였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땅에서 새로 솟아난 처음 보는 과일처럼, 즙을 빨아먹고 소화시키고 혹은 맛보고 그리고는 던져졌습니다...이런 호흡법, 저런 확언, 이런 통합법, 저런 특별하고 의미심장한 에너지...이 모두는 초기 시절에 나에게는 매혹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활동들이 자기성찰 아니면 자기방종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더라면, 나는,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외견상의 선택은 개인적 동기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용서하고, 내면의 어린아이를 치유하고, 과거에 파고들기 등등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치명적으로 중요하게 지키고 따라야만 할 것들이 되었습니다...차라리 현대판 십계명과 같은 것이었지요.
나는 동양적 명상과 혼합된, 핵심적인 현대적 의미의 치유를 많이 경험하는 심도 있는 코스를 주거를 하면서 수행하는데 일 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나는 이런 치유와 방법이 나에게 적합하며 많은 이익이 있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이전에 고수해오던 금지와 억제로부터 엄청난 변동을 경험하였고, 내 이전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신념체계와 패턴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일들이 행해지면서, 자아 정체성과 자긍심에 힘을 주고 이를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목표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이론은 만약 내가 이러한 과정들을 받아들이고 동질화 한다면 마침내 나는 더욱 생동감 있고, 균형 잡히고 효율적인 개인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전체 안에서의 관계맺음과 내 역할에 대한 보다 명백한 견해를 가진 개인으로서 말이지요. 이 모든 구조는 상당한 수련과 노력으로부터 개발되는 강력한 신념체계 위에 건립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의심의 그림자 안에 거주합니다. 신념 그것은, 언제나 우위를 점하려는 의심을 억압하는 바로 그 정도로만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내가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고치고 한데 모으면 마침내 이들로 하여금 함께 더불어 단일한 하나의 전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안에서 노력하고 있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깨달음은 자아 정체성과 자긍심에 관련된 나의 노력과 기대를 넘어선 곳에 있다는 이전의 나의 이해와는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현대적 치유의 세상은 이전에 지나가 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더 받아들일 만한 수많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내 경우에 공원에서의 깨달음의 일별은 내 21세 때의 종교적 길에서 벗어남을 가져왔습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현대적 치유법에 관여했는데, 이들이 더 깊은 가능성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나는 시간으로 둘러쳐진 기대와 목표와 결실들에 매혹되고 매몰된 나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시간의 세계에서는, 목표와 결실이 완벽하게 적절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를 둘러싼 집착과 기대 위에 너무나 많은 투자가 필요합니다...이것이 되고, 저것에 속하며, 변화의 과정들, 혹은 더 나아지고, 정화의 방법들 등등. 중요한 새로운 사람과 장소, 의식의 마스터들과 진리의 스승들이 모든 곳에서 샘솟듯이 출현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공식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공식에서 저 공식으로 옮겨 다님으로서, 자유가 어느 한 장소 혹은 다른 한 장소에 거주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바로 그 본성에 의하여, 배제되거나 배타적일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다음의 “영적인” 향상을 기대하며 행진해 갈 때,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그 보물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바로 그 발걸음의 단순한 본성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 안에서 보다 나은 상황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돌진은, 매 순간 그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존재의 꽃을 밟아 뭉개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한 우리의 집착은 우리 스스로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고자 하는 필요성으로부터 태어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삶은 그저 단순히 삶입니다. 삶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번의 봄은 지나간 봄보다 더 나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물푸레 나무는 참나무가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범상치 않고 극적인 것에 대한 이끌림에서 저절로 놓여나면, 평상적 삶에 놓인 단순한 경이로움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다른 존재 이유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공원에서
어느 날 나는 런던 교외의 한 공원을 걸아가고 있었습니다. 걷는 도중에, 나는 내 마음이 앞으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나는 이런 마음의 투사들을 지나가게 하고 단순하게 나의 걸음과 같이 있으려는 선택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나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느낌과 촉각에서, 각자 완전히 독특하다는 것과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 한 순간이 있다가 다음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내걸음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단순한 걸음의 현존으로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부적절하지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고요함이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하였고, 일체 모든 것이 시간 없음으로 되었으며,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라졌고 더 이상 경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일체 모든 것과 동시에 하나임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지 모든 것 일체와 하나임이 일어난 일이며, 압도적인 사랑이 모든 부분을 가득 채웠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전체성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처럼 보이는 무시간적인 순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일과 곧 이어 발생한 일이 내포한 계시가 그 본성상 너무 엄청나고 혁명적이어서 나는 이 결과를 납득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잔디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내가 본 것은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전달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질문에 대하여 답이 주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이미 공개된 비밀이 나에게 보여 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 일체는 이 공개된 비밀을 포함하고 이를 반영합니다. 천지자연, 사람들, 태어남과 죽음, 분투하고 노력함, 두려움, 욕망 모두가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있고, 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갑자기 어떤 것이 엄습해 와서 모든 것이 새로운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잔디, 나무, 개,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본질 뿐 만 아니라 그들의 본질이 나의 본질인 것처럼 내가 그들의 본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마치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깊고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으로 뒤덮여지는 것 같았고,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은 왠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평상시에는 감지되지 않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왜 나이고 왜 지금일까요? 어떻게 나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요? 나는 성서적 감각 혹은 다른 감각지각 또한 심적으로도 순수하지 않았음은 확실했습니다. 나는 규칙적인 명상적 삶 혹은 영적으로 헌신적인 어떤 종류의 삶도 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밝게 비추는 계시는, 내 쪽에서는 아무런 노력함 없이 일어났습니다. 매우 쉽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내발걸음을 관찰하도록 내가 선택되어진 것처럼 외관상 보였고, 곧이어 이 보물이 드러났습니다.
나는 또한 이 선물이 이전에도 언제나 주어져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내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본유적 존재는 나타나 나를 껴안을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물은 고되고 외견상 의미심장한 영적 수행과 의식들을 통하여 재발견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멋지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물은 발걸음의 본질에서, 트랙터 소리에서, 고양이가 앉는 것에서, 고통과 거부의 느낌에서, 산꼭대기 위에서, 혹은 시내 중심가 한가운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모든 곳에서 나는 고요함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하나임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채 껴안아져 있습니다.
나중에 나는 어떻게 이 보물을 간직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번 거듭하여, 내가 재발견해야한다고 생각한 이것은 결코 성취되거나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으며, 이 보물을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바로 그 믿음이 본래 타고난 이것의 성품을 방해합니다.
또 다시 역설이지만, 이 신성한 본성은 언제든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손안에 있으며 영원히 준비된 상태로 있지요...지속적이고 믿음직한 연인이 우리의 모든 부름에 언제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내가 이것을 허용할 때 이것은 있고, 내가 이것을 회피할 때도 이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노력이나 기준 혹은 규범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편애도 없습니다.
무시간의 존재는 밟아갈 길도, 갚을 빚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옳고 그름을 모르며, 심판과 죄책감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입니다. 내가 귀환을 위하여 빠져나올 때 이것은 단지 분명함과 연민과 기쁨으로써 봅니다.
선택 없는 선택
있음 안에서 나는 내가 결코 그 무엇도 선택하거나 행한 적이 없고, 오히려 삶은 살아져 왔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바다를 멈춘다거나 태양을 움직인다거나 한 적이 없고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인 그것으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진 적이 없습니다.
신성한 무력함을 수용하는 가운데 나는 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과거나 미래를 전혀 소유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누가 선택하고, 누가 이 경이로운 혼돈을 감독합니까?” 그러나 한 번 아무 문제 꺼리도 없는 사랑의 품 안에 놓이면, 나는 마치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살 수 있으며 흘려보냄을 기뻐합니다.
나의 세계
나의 세계로서 내가 경험하는 것들 안에서, 일체의 것은 완전히 나에게만 유일무이하게 독특합니다. 다른 그 누구도 내가 경험하는 빨간색, 마시는 차의 맛, 두려움과 행복, 발걸음, 꿈을 꿈 혹은 깨어남의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내 경험들은 크게 나의 신념들을 형성하고, 그리고 나는 외견상 내가 믿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과 신념이라는) 두 동포의 상호 작용이, 순간순간, 매일매일, 등에서 내 삶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재의 이 수준에서는, 나는 “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화필름에서, 제작자 겸 시나리오 작가로, 그리고 배역 선정, 대본, 배경 음악의 감독으로 나타납니다.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하게 내 삶을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나의 특정한 신념체계가 광고하는 그런 종류의 영향력과 이미지에 완벽하게 걸맞은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패턴을 나에게로 끌고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매우 흥분하게 되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각 패턴과 신념체계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삶의 경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권유하고 또한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됨됨이는 경험과 신념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본래면목을 재발견하기까지, 나는 어떤 종류의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애써왔을까요?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가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나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분명히 알 수 있는가요? 내가 만들어야만 할 것에 대한 생각이 당신의 생각보다 더 좋거나, 혹은 우리들 각자가 개인적 미래상을 가지고 서로 충돌할 것입니까? 이것은 반복하여 발생하고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이런 관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은,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 내려는 바람과 욕망 너머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이와는 다른 훨씬 더 강력한 원칙은, 완전하게 본래 타고난 것이지만, 평소에는 인식되지 않는, 계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삶의 역설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그것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본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우리를 쉼 없이 초대하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원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와 협상하여야만 하는 분리된 개인으로 있다는 경험 안에 갇혀 있는 동안은, 우리는 꿈을 꾸는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꿈의 상태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긍정이 그 정반대의 것에 의하여 정확하게 상쇄되어 평형으로 돌아가는 대극對極의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깊은 숙고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이 모습만을 바꾸며 그 자체 저절로 계속 반복하는 수레바퀴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외견상 창조한 것을 파괴하고, 우리가 외견상 파괴한 것을 다시 재창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하여 무엇을 믿는지에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조건적 반사작용 및 신념체계에 따라 반응하고 응답하는 신성한 연극 안에서 꿈꾸어지는 캐릭터들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앞을 향해 진보해 간다고 알고 있는 이 꿈의 세계의 모든 것은, 오로지 또 다른 (반대) 측면의 가능성을 반영함으로써 완벽하게 상쇄되고, 정확하게 중화된 상태를 가져오는 법칙 때문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목적 이외에는 전혀 다른 목적이 없는 꿈을 꾸고 있는 꿈꾸는 이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응답을 하건 안하건 무조건적 사랑에 둘러싸이고 껴안아져 있습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의 경험은, 각자가 다시 깨어나는데 필요한 특별하고 고유한 필요성에 맞추어, 큰 규모의 사건들과 작은 차이점들까지 미세 조정된 완벽하게 맞추어진 적절한 나타남을 알뜰하게 준비해 놓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활동이 중요하건 아니면 중요하지 않건, 혹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우리의 표현됨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재능 있는데, 예술적인데, 유용하군, 평범하네, 혹은 결실이 없구나든 뭐든 간에, 이 모든 것 일체는 단지 그리고 오로지 그 숨겨진 원리의 작용일 뿐입니다.
온전히 적절하게 반영되는 거울상은, 모든 현상 속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가는, 그래서 그것의 방사물의 근원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영원히 끊이지 않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마음/몸의 죽음
마음/몸의 죽음은 단지 분리라는 환상의 끝남일 뿐입니다.
무조건의 사랑으로 깨어남은 즉각적입니다. 외견상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본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몸/마음이 막을 내릴 때, 그곳에는 준비라거나 정화라는 중간과정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가 있었나? 개인적인 “사후”에 대한 모든 생각들 혹은 윤회전생은 단지 마음이 그 자신의 지속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는 바람일 뿐입니다.
우화는 끝났습니다. 신성한 소설은 쓰여 졌고, 마음이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장면은 증발하여 사라지고 연기자들은 무대를 떠났습니다...그들의 외견상 존재는 꿈과 같은 연극의 공연, 그 끝마침과 더불어 시작되고 끝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대양大洋이자 파도고, 어둠이자 빛이며,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상관념(추상작용)
나는 추상개념에 사로잡히고 매혹되어져, 가지지 못한 살아있는 경험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림을 그려서 가지는 쪽을 더 좋아했습니다.
내가 추상화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살면서 간혹 물에 희석된 것처럼 흐릿하게 순간적으로 스칠 뿐입니다.
내 관념은 갈망 혹은 좌절에서 생겨난 희뿌연 영상이고, 그것은 나에게 휴일이라는 꿈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아는 것 안에서 언제나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입니다.
추상관념이 무너질 때, 있는 것은 오로지 실제로 있는 것만 있습니다...내 몸의 감각들, 교향악은 계속 연주됩니다. 음을 조율할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뀌고 움직이며, 오고 갑니다. 여기 혹은 저기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납니다...그것은 증발하여 사라지고 다른 뭔가가 발생합니다. 내가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계측할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존재하다가 그 다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약 모든 것을 다 잊고 듣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거나, 혹은 보려고 하면, 사전에 미리 이런 감각들의 정확한 질감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예측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일 뿐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지 않고, 생명력이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듣는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는, 내가 소리에 대하여 관념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을 통제하기 위하여 이름붙이고 파악하려고 애씁니다. 외견상 이런 통제를 잊을 때 그곳에는 단지 듣는 사람과 소리만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떨어져 나가면 오직 소리만 있습니다. 그기에 나는 더 이상 없으며-다만 벌거벗고 활기차게 떨고 진동하는 존재 자체의 에너지가 있을 뿐입니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일체가 충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가 거주하는 이 존재의 연금술입니다.
생명이 나를 손짓하여 부릅니다. 그것은 속삭이고, 큰 소리로 외치다가, 그리고는 나에게 비명을 지릅니다. 종종 위기 혹은 질병이라는 비명은 나의 진정한 면목의 재발견을 가져오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관념으로만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진정한 나를 알기까지, 나의 삶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의하여 크게 조종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의 시작과 끝을 낳는 것은 나의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 계속되려는 본능적 동기를 유지하고 영속화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갈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두려워하면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친밀함을 두려워하면 냉담하려고 애쓰며, 종속·아첨을 두려워하면 지배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만약 내가 평범해짐을 두려워하면 나는 특별하게 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의 두려움이 극복되면 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의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만약 존재하기만 하면, 공포는 하나의 추상적 관념이라는 것이 뚜렷이 보여 집니다...앞날에 대한 근심은 기억의 청사진에서 생겨납니다. 만약 두려움을 낳는 스토리가 탈락되면, 나에게 남겨진 것은 가공되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는 육체적 감각뿐임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것은 나의 질주를 멈추게 하고, 조용히 존재의 자리를 대체합니다. 육체적 혹은 감정적 고통은 똑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하기를 그칠 때, 나는 나 자신을 그것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며 그것을 단지 있는 그대로 봅니다.
고통은 내 것인데, 그것은 나쁜 것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기를 그치면, 그것은 단지 어떤 하나의 형태를 가진 에너지임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은 그 특유한 풍미와 맛을 지니기 시작합니다.
고통이라고 이름 하는 것의 본질은 나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심오하게 들려줍니다. 즐거움을 갈망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바로 그것에 의하여 나는 그 가능성을 뿌리로부터 둘로 쪼개버리고 맙니다.
죄책감
오직 내가 배웠거나 나 자신을 위해서 구축한 신념체계에 기초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할 때만, 나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형성되는 신념들은 다시 시간 속에서 단지 과거 경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런 개념들은 목표를 향해가는 여정, 정화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존재에는, 무엇이 된다거나 목표를 향한 애착이 없습니다. 나는 가치 있게 되기 위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어떤 모범을 성취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음을 압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그 환영의 감각을 달래려고 시도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은, 나는 지속적으로 해방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무엇인지를 재발견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가로막는 강력한 연막인, 죄의 드라마 혹은 업장業障이라는 것을 만들고 싶은 매혹과 탐닉이 존재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옳음과 그름이라는 환영의 개념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착각된 상대 개념들은 절대적으로 이 둘 너머에 있는 그것을 회피하는데 쓰입니다.
존재에는 아무런 역사歷史가 없기 때문에 어떤 빚도 없습니다. 내가 분리되었다고 느끼든, 아니면 존재하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분리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불구하고, 나는 분리되었다고 느낍니다. 존재에서는 자신은 더 이상 없고 단지 실제로 있는 것만이 있습니다. 양쪽 상황 모두 완전합니다. 각 사건에는 그 자체의 응분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가 다음에는 사라집니다. 거기에는 앞으로 갚아야할 발생중인 빚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측정하는 무자비한 재판관을 지속적으로 고용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우리자신을, 투쟁하고, 죄악을 행하고 고통을 당하는 존재로 규정하여 감금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자신을 투영한 하느님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지요.
오직 알든지 그렇지 않다면 모를 뿐입니다. 만약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나는 볼 수 없으며, 어둠은 단지 어둠입니다.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닙니다.
악 또는 선, 원죄, 카르마 혹은 부채 등 어떤 종류든 간에 모든 개념은 깨어나지 못한 마음의 산물입니다. 부모와 내 자신이라는 감각의 유지, 보강 및 시간 속에 속박된 마음 말입니다.
생각하기
나의 생각하기는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은 나의 생각하기를 창조합니다. 시간 안에서 생각함으로써 나는 자아 정체성과 분리라는 환영의 감각을 유지합니다...나는 생각합니다, 고로 나는 계속됩니다.
시간 안에서 사고思考하기는, 대부분, 파악하고 둘로 나누며, 만족과 고난을 향해가는 전진이라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산출합니다. 그것은 혼란케 하고 또 질서 잡으며, 약속을 만들고 파기합니다.
시간·생각하기는 자아라고 부르는 곳으로부터 나온 기억과 투사投射의 바다 위를 앞뒤로 움직입니다.
나의 마음은 일생 동안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제한과 자유를 동시에 보며 그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보이고 보이지 않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속에서, 오직 보는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아무리 많은 생각일지라도 내가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나를 강어귀까지는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은 생각의 존재나 부재의 완전한 너머에 있습니다. 나는 자아를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보여 질 때, 그러한 봄은 고요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창조적 생각은 그 무엇도 아닌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생각 너머로 간다면,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누구입니까?
관계
어릴 때 부모 및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 경험들이 관계맺음과 관련한 나의 신념과 행동양식을 건립하고, 이런 행동패턴들은 내가 나의 진정한 면모를 재발견할 때까지 그 이후의 모든 관계들을 뒤따르며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게임 안에서, 내가 관계하는 모든 이들은 대부분 그 게임에 있어서의 동료들이 되고 그것을 보강해주고 떠받칩니다. 만약 내가 궁핍해질 필요성이 있으면, 나는 가난을 창조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내동댕이쳐질 필요성이 있으면, 나는 거부반응을 끌어당길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는 수만큼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패턴들은 오직 나의 특별한 필요성과 신념의 확인일 뿐이며, 그들은 내가 아직 재발견하지 못한 그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무조건적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른 가능성을 보도록 초대하는, 단지 그런 숨겨진 원리의 한 부분으로서-완벽하게 적절합니다.
시간과 분리라는 나의 세계 안에서 내가 관계로서 경험하는 것은, 마치 나와 다른 사람 간의 연결고리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감정과 관심, 열정, 웃음과 눈물, 생각과 투영의 상호 교환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소통합니다. 나는 나에게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내가 저 밖으로 투사한 것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완전히 충족된 합일의 느낌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투사, 두 개의 조건의 집합, 두 개의 행동양식 간의 교통 혹은 서로의 에고를 후려치기로 하는 상호 합의처럼 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내 컴퓨터는 상자 안에 가둬두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 어떤 다른 사람을 꺼내 놓습니다. 종종 나는 그 상자의 비트를 여기저기로 확장하거나, 더 크거나 작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안전하게 머물면서 그 사람에 관한 나의 관념과 관계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지요.
나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되기 위하여 분발할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그들을 나의 판단으로서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미묘한 경쟁입니다.
나는 또한 다른 사람을 내 결핍된 느낌을 충족시켜줄 누군가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투사하기를 바라는 이미지를 알아챌 수 있거나, 가치 있게 되고자 하는 내 느낌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로써 나를 흥분시키거나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필요를 충족시켜 줍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모든 것과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맺음에서 가장 강력한 투영이고, 그것은 나 자신과 관계함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지를 재발견하게 될 때 관계맺음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없습니다. 열려있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현존에는, 기억 혹은 경쟁, 비교 혹은 기대의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만나야 할 장소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둘 사이에 거리가 없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관계 맺을 필요성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지속되는 신선함과 축제 속으로 통합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로 다시 돌아갈 시절인연을 맞이할 때 우리를 일깨울 수 있는, 동시적으로 주고받는 영적인 교감입니다. 한 때 위협으로 보였던 공허감을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종종 고요한 침묵이 존재합니다. 이런 침묵은 지속적으로 춤추고 있는 존재의 단순한 함께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아니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마음, 육체, 느낌들, 즐겁거나 아픈 경험, 투쟁, 성공 혹은 실패가 아닙니다. 나는 외로움, 고요함, 좌절과 낙담, 자비와 연민이 아닙니다. 나는 심지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목표, 탐구, 발견, 혹은 소위 말하는 그 어떤 영적인 체험도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꿈 꿀 때, 나는 이런 경험들을 신성시 하게 되고, 이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며, 이것들에 심대한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이것이 한 번 이해되면, 그것들은 나에게 해답과 공식을 줄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경험들은 단지 무의미한 숨바꼭질 게임 안에서, 하나임 스스로의 감추어짐과 나타남일 뿐입니다.
나는...이다.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전체성의 완전한 나타남이 있습니다. 더하거나 제거해야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전혀 없지요. 어떤 것이 다른 것 보다 더 타당하거나 더 성스러운 그런 것은 없습니다. 충족될 필요가 있는 상태와 조건들은 없습니다. 무한성은 우리가 훌륭하게 되기 위하여 기다리는 그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거나, 혹은 순종하거나, 정화되거나, 어떤 종류의 변화나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분리된 개체라는 환영이 그 자신이 환영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무언가를 연습할 수 있겠습니까?
심각해지거나, 정직하거나, 부정직하거나, 도덕적이 되거나, 비도덕적이 되거나, 심미적審美的이 되거나 저속하게 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조할 중요점이 없습니다. 외견상 일어나는 삶의 스토리는 각자가 깨어나는데 가장 정확하게 유효적절하고 독특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정당하고 올바릅니다...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나은 무엇인가가 될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라는 초청은 언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변용變容의 순간을 기다린다거나, 혹은 행하지 않는 사람(무위를 행하는 사람), 영속적인 축복, 에고 없는 무아의 상태, 고요한 마음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신의 은총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색즉시공)
탐구자가 갈망하는 것은 하나의 물건으로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말로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객체화 되고, 그러면 추구하는 에너지는 불가피하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으로 믿고, 그것을 발견하여 파악하고 획득하거나 훌륭하게 혹은 굉장하게 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분리된 실체는 모든 것을 외견상 이원적으로 체험합니다...다른 어떤 것으로 알거나 인식하지요...한 그루 나무, 한 사람, 혹은 한 의자 위에 앉음. 거의 항상 그에게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한 사람이 존재합니다.(대체로 항상 어떤 한 사람이 존재하는데 모든 일은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는 스토리는 언제나 무엇이 될까에 대한 것이지, 절대로 지금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 속의 보물을 탐색하는 것이지, 삶이 보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있음 자체는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적당합니다. 전체성, 에너지, 존재, 공, 모든 것, 하나임, 무한함 등 모두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완전히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해지는 것은 요즘 인기 있는 생각인, “지금 여기 존재하라”, 혹은 “순간을 살라”, 혹은 “모든 것은 의식이다”, 혹은 “내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기” 등등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어쨋거나 존재의 성품을 표현할 방법이 있다면,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포괄하면서, 원인 없고, 무엇과도 연관이 없으며, 비개인적(비인격적)인 에너지...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며...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이것이라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로서 절대적으로 있고, 형상을 가지고서 무형상으로 있습니다. 이들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둘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모든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할 때, 공과 일체 사물의 절대적 단일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는 것임과 동시에 있지 않음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실체이면서 가상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외견상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어떤 것이든 모든 것 전부가 “이것”이며...그것은 지금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알 수 없는 그것을 말로 가장 가깝게 묘사할 수 있는 최대한 일 것입니다.
실재는 판단, 분석, 결론에 도달하려는 바램, 혹은 무엇이 되고자 함이 전적으로 없습니다. 실재는 가고 옴과 기대가 없습니다. 단순히 있는 것이...있지 않는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존재는 이미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존재는 “행하여” 질 수 없습니다. 존재 안에서, 외견상 존재를 회피하는 일이 일어나지만...그러나 그것 역시 있는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존재거나 아니면 외견상의 분리가 있습니다...한계 없는 열림이거나 아니면 겉보기에 조작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존재의 경이로움과 단순성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예상함으로서 만드는 제한성이 외견상 있을 수 있습니다. 일체 모든 것은 겉보기로 나타나는 것이며, 모든 것은 이미 존재입니다.
존재는 존재가 아닌 환영으로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 환영이 외견상 증발하여 사라질 때, 그것과 동반하여, 분리라는 것과 자아정체성, 희망 그리고 전체와 분리된 한 부분을 알고자 하고, 부분이 되고자 하며, 이런 일을 계속하려는 노력이 같이 소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죽음입니다...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의 종말이지요.
존재는 완수할 과제도 아니고 이용되어질 수 있는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며 어딘가에 이르기 위한 영적 수행이나 연습 혹은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를 하나의 완수할 과업으로 연관시키는 생각은 마치 그물로 공기를 잡으려는 것만큼 무익합니다. 존재는 지금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므로 그 어디에도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면, “내”가, 이미 모든 것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탐색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이상 없을 때, 삶은 꾸미지 않고, 열정적이며, 지금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자유 낙하이고, 충만한 삶이며, 나의 삶이 아니고, 그 누구의 삶도 아니며, 그냥 단지 삶입니다.
존재는 천국을 이 땅에 가져오거나, 이 땅을 천국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존재 이것입니다.
보임과 보이지 않음
이 책은, 깨달음은 언제든지 접근 가능한, 갑작스럽고 직접적이며 활기찬 밝음이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노력, 정화의 길, 단계, 혹은 어떤 종류의 가르침도 우리를 거기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개된 비밀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 살아있는 실상實相의 재발견입니다.
어떤 하나의 개념, 혹은 개념의 집합도 깨달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을 통하여 이미 그러한 이것의 경이로움과 재발견을 공유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마치 건포도 푸딩의 조리법을 써놓고는 누군가가 이것을 읽고 그 맛을 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과 같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일입니다.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은 다만 어떤 이해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내가 느낀 것에 대한 나의 이해를 공유하는 것은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이해를 가능케 하는 통찰을 열어놓습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것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다른 영향권과 배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고 말해져 왔습니다.
나와 함께 이것을 나눈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박스 안에 넣고 이름표를 붙이고는 멀리 치워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득 이것과 우연히 마주치지만 재빨리 그들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되돌아 가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삶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곤 하지요. 단순성은 본성 자체가 내포하고 나타내는, 나를 놀라게 한 다른 성품들과 함께, 가장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성품입니다. “깨달음에는 시간이 걸려”, 혹은 “이런 식의 접근”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전에 어떤 믿음을 구체화 해야만 한다거나, 다양한 단계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고된 노력이나 희생과 수행을 통하지 않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말해지고 있는 것을 완전히 잘못된 식으로 번역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이 통찰은 소통되고, 그것은 목표달성, 신념, 방식 혹은 단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고 단지 지속적으로 공유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특정인만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모두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홀로 지금 바로 이대로 단순하게 있기 때문에, 논쟁할 필요가 없고 입증하거나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알아채지지 못하고 거부되거나, 혹은 깨닫고 살아질 뿐입니다.
토니 파슨스, 1995.
첫댓글 토니 파슨스 글을 뜨문뜨문 읽다가 이렇게 다 번역해주신 것을 읽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문으로도 보았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않고 몇번 읽다가 매번 뒤로 미루었거든요.
저도 토니 파슨스를 서양영성의 최고봉으로 여기고 있고 유튜브에 올라온 번역된 영상을 처음 보았을때의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않습니다.마치 모든 목마름이 일거에 해소됐다고나 할까요.
아울러 다른 곳에서 접하지 못했던 존 휠러의 글도 너무 좋습니다.네이선 질, 밥 아담슨도 물론이구요.
다른 글들도 같이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방문할것 같아요~
잘 읽으셨다니 오히려 매우 고맙습니다..주변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두루두루 나누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행운을 기원합니다~
관심있어하는 몇 지인들에게 소개했어요.
사실 교수님 카페를 예전에 가입했다가 잊어먹어서 몇번 검색해서 최근에 다시 들어왔거든요.
토니 파슨스를 육조혜능에 비유한 글이 계속 머리에 감돌았었어요. 정작 주소는 잃어버리고요.
어쨌든 좋은 자료들 다시 보게되서 다행이고요 많은 분들과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기뻐고 행복한 마음입니다..ㅎ 대단히 고맙습니다^^~
안드로메다님의 안내로 어제, 오늘 짬짬이 글을 읽으며 그동안 희미하던 그 무엇이 선명하게 알아지는 그것에 감사해요!!!
위에 토니씨 말대로 서로 서로 이렇게 공유하니 좋고도 좋고, 고맙고도 고맙습니다 ㅎㅎ ^^~~~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내로 토니 파슨스에 대해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책도 사 보았는데 전문을 전체 번역하신 거군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도움되셨다니 저가 오히려 대단히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원서 전자북을 모두 보내드리께요~~
lmoonho@knu.ac.kr(첫자는 영문 소문자 엘 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서 눈팅만 하고 가다가 열린 비밀 번역해 놓은 것을 보고 출력해서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한번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카페를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영어에 익숙한 세대이다 보니
훨씬 더 와닿습니다.
유투브도 잘 보고 있습니다.
속이 시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