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봄맞이
-영운리 남산을 오르며
송언수
남산. 통영에 오기 전까지 남산은 서울에만 있는 줄 알았다. 통영 영운리에도 남산이 있다. 이웃한 고성에도 남산이 있고,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 한양의 남쪽에 있어서 남산, 신라시대 수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있어서 경주도 남산, 세병관 남쪽이라서 통영의 남망산, 그리고 영운리 남산은 삼천진의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랄 수 있다고 누가 얘기했다. 그 외의 지역에도 남산은 있다. 물론 동서남북 다 갖다 붙이면 북산도 되고, 서산도 된다. 고유명사와 일반명사의 차이로, 그래도 역시 남산하면 서울의 남산이 제일 유명하긴 하다.
통영의 남산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그래도 봄이면 한 번씩 올라가고 싶은 산이다. 진달래가 지천이기 때문이다. 남산 가까운 종현산에도 진달래는 지천으로 핀다. 접근성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종현산에는 진달래가 피기 무섭게 사람 손을 탄다. 통영 사람들은 봄이면 시절 음식으로 진달래 화전을 부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배운 화전은 찹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지져 꽃을 한 송이 올리는 거였다. 통영의 화전은 다르다. 아예 쌀가루에 꽃을 넣어 같이 반죽한다. 잘 만든 통영의 화전은 진달래꽃을 많이 넣어서 색깔도 맛도 화려하다.
우선 꽃을 따서 깨끗이 씻어 수술을 일일이 다 떼어내야 한다. 꽃잎만 넣고 쌀가루와 반죽해서 동글납작하게 빚는다. 기름 두른 팬에 약한 불로 오래 익혀야 한다. 불이 세면 붉은 꽃잎의 색이 변하기 때문이다. 인내와 끈기가 요구되는 시절 음식이다. 하긴, 우리 전통음식이 어디 간단하고 빠른 게 있던가. 화전이 다 익으면 뜨거울 때 설탕을 듬뿍 뿌려 녹여준다. 설탕이 녹아 시럽이 되어 흐를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한입 베어 물면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봄을 만끽할 수 있다.
통영시장엔 진달래꽃과 어린 쑥을 넣은 쌀가루를 봉지에 담아 판다.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진달래 화전은 봄이면 꼭 먹어야 하는 의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종현산 진달래가 남아나질 않는다. 흐드러진 진달래를 보려면 남산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영운리 남산은 미래사 쉼터 옆길이 들머리다.
초입부터 진달래가 반긴다. 봄기운이 만연하여 날씨도 좋은 산길을 줄지어 오른다. 초입에서 조금 들어가면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바로 치고 올라가는 길과 빙 둘러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 이번엔 완만한 둘레길을 택한다. 남산에 몇 번 왔었으나 둘레길은 처음이다. 매번 그대로 치고 올라가 동굴을 만나고 암벽타기 수준의 등반을 했었다. 대부분 치고 올라가는 길을 택한다. 조금 힘들긴 해도 오르는 재미가 있다. 둘레길에도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다. 한산도와 새바지를 보면서 걸을 수 있다. 빙 둘러 이제는 올라가야 하는 그곳에 바위가 있다. 건너편 논아래개 부엉이 바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다.
그 바다 건너편에 한산도 문어개가 있다. 한산대첩 승전기념비가 있고,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쓰신 신선암이 있는 마을이다. 한산대첩의 현장이 이곳일 것이라 배웠다. 배가 숨어 있다가 나오기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고 무엇보다 바다가 둥글게 넓다. 견내량이 해전을 하기에 좁고 물살이 빨라 좀 더 넓은 곳으로 적을 유인하였다면, 이 정도 공간은 되어야 한 판 붙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의 판옥선은 바닥이 뾰족한 일본 배와 달리 바닥이 넓적하고 평평했다. 배를 좌우 회전하기에는 더없이 좋았지만, 속도 면에서는 저항을 받는다. 소나무로 만든 조선의 배는 무게도 일본의 배보다 더 무겁다. 그런 배로 가볍고 속도도 빠른 적을 유인하여 이 먼 곳까지 따라잡히지 않고 내달렸다. 8월 한여름 격군들의 수고가 얼마나 심했을까 짐작해본다. 피비린내 나는 그날의 승첩을 겪은 바다는 오늘 한없이 고요하다.
남산 정상의 바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전에 왔을 때는 바위에 올랐었다. 시야가 트여 사방 가리는 것 없이 다 보였던 곳인데, 주변 나무들이 너무 자라서 바위가 나무 사이에 갇힌 꼴이 되어 있었다. 조금 내려가 신선바위에 자리를 잡기로 하였다. 신선바위는 종현산 쪽으로 앉은 바위다. 전에는 꽤 넓었는데, 이번에 가니 풀과 이끼들이 자라 바위가 좁아 보였다.
자연이 원래 주인이었던 곳이다. 사람들의 흔적으로 풀이 눌리고 나무가 꺾여 길이 만들어지고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던 자연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 어김없이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자유를 얻는다.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가 손님인 것을. 그들이 주인인 것을. 우리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하자.
사람들이 자기 자리만 지키고 살아도 공존이 가능하지 않을까. 너무 많은 자리를 욕심내다 지구를 망치고 사람을 죽인다.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만 잘하고 살면 더불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자의 몫에 만족하자. 욕심 내지 말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가졌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오늘 우리 곁에 온 봄에 반갑다 인사한 것으로 충분하다. 늘 와주니 고마운 봄이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