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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룡산외 2편
김정찬
하늘 내린 인제의
진산(鎭山)아!
긴 잠에서 깨어나
군민의 의기(義氣)로운
힘찬 날갯짓 인양
날아오르라
미래를 향하여
영원한 몸짓으로…
인제가 낳은 시인, 최병헌 선생님의 시이다. 기룡산은 금강산 비로봉, 장군봉, 일출봉, 차일봉, 백마봉, 호롱봉, 국사봉, 매자봉을 거침없이 내려오다 회전령에 이르러 갈라져 뻗어와 서화 대암산에 이르러 솟아서 중조봉(中祖峯)이 되고 구불구불 뻗어와서 복룡산(伏龍山)을 만들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인제읍 터를 이루고 또 방향을 바꾸어 양구 사명산과 춘천 청평산을 이룬다.
기룡산은 해발 1,015m의 인제의 진산으로 그 모습이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으므로 복룡산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엎드려 있는 용보다는 일어나는 용이 낫다 하여 기룡산(起龍山)이라 고쳤다고 내용을 옛 문헌 「한국지명유래집」, 「해동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룡산은 민족 상쟁인 625동란을 온몸으로 겪고 아픔을 견뎌내고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진격과 후퇴의 격전지가 되고 휴전 후에는 간첩이 북한에서 내려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기룡산 자락에는 625동란으로 순직한 104분의 영령을 모셔진 충혼비가 세워져 있어 매년 현충일에 제례를 지낸다.
기룡산 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여러 갈래로 내를 이루어 소양강으로 흘러간다. 광치령에서 가아리를 거쳐 원통 서저울에 이르는 가아천, 기룡산 서쪽 골짜기를 타고 시작된 여러 갈래 샘물이 갯골천이 되어 인제읍 남북리를 거쳐 소양강으로 향하고, 기룡산 동쪽 가파른 너덜 바위비탈 골짜기에 샘을 만들더니 얼마 동안 땅속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커다란 바위 밑에 물웅덩이로 변해 물안골을 따라 인북천과 합류해 소양강으로 흐른다. 물안골은 물을 안은 골짜기란 뜻이다.
기룡산 중턱 해발 480m 지점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설치되어 있고 인제읍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인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소양강 물줄기가 기다랗게 뱀 꼬리 모양으로 살구미 모래톱을 지나 조림리 마을 앞에 모래사장을 만들고 팔봉산 산허리를 돌아 용소에 머물다 가로리 평원으로 내달린다.
새해 첫날에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손전등을 켜고 산에 올라 동쪽 하늘이 잘 보이는 언덕배기에 서서 연실 뿜어 나오는 입김을 불어 대면서 먼 동쪽 산에서 떠오를 새해의 첫 태양을 기다리다 조금씩 얼굴을 내미는 붉은 광채를 바라보면서 새해를 맞이한다.
건너편 산은 동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 비봉산이라 하고 산허리 부분에 박달고치가 있어 원대리 남전리의 경계를 이룬다. 눈을 서쪽으로 돌리면 눈썹처럼 아름답다는 아미산(峨眉山, 725m)이 지그시 실눈을 뜨고 인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미산은 인제군립공원으로 1992년도에 지정되어 군민들의 휴식 공간과 관광마케팅을 접목하기 위하여 개발계획을 세워 추진 중이다.
나는 10년 전에 공직에서 퇴직하면서 오전 한나절을 기룡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지만 그동안 건강을 챙기지 않아 생긴 고혈압, 고지혈증 등 노년 질환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시간도 유동적이지만 해가 길어지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어김없이 공무원 출근 시간에 맞춰 9시 전에는 산으로 간다.
지난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려 겨울 풍경을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 멀리 떨어져 지내는 친구들에게 밴드를 통해 고향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올봄에도 양지쪽에 제일 먼저 피어나는 노랑제비꽃 소식부터 전할 생각에 설렌다.
내가 사는 지역은 봄이 서울보다는 일주일 정도 늦었고 경상도나 전라도 남쪽보다는 보름 정도 늦게 온다. 우리나라에서 봄이 가장 빨리 찾아온다는 제주도와는 한 달도 넘게 오는 거 같다. 그러나 오고야 마는 계절을 탓할 수는 없다.
오늘도 기룡산 중턱에 올라서니 딱따구리가 나무 등가죽을 쪼아대면서 딱딱딱 소리를 낸다. ‘고놈 참’하며 머리를 들어 어딘가 높은 나뭇가지에 있을 딱따구리를 찾아본다.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연실 머리로 방아를 찧듯이 나무와 박치기를 해대더니 소리와 모양으로 들켜 버린 줄은 알았는지 나무 뒤로 몸을 얼른 숨긴다. 서산 스님의 「청허집」에 나오는 오도송 중엔 조명산갱유(鳥鳴山更幽)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새는 울어도 산은 더욱 그윽하기만 하구나”
봄에는 날씨가 변덕스러워 아지랑이 언덕에 나풀나풀 나비가 보여 이젠 완전 봄이구나 했는데 태도를 싹 바꾸어 칼바람 부는 날이 허다하고 일찍 핀 진달래 꽃봉오리에 봄눈이 쌓여 세수를 시킨다. 도토리가 열리는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에 도토리꽃이 포도송이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피는 사월에도 갑자기 날씨가 심술을 부리듯 추워지면 꽃이 수정이 안 되어 그해에는 도토리 흉년을 피할 수 없다.
산은 사람처럼 시절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는다. 삼사월엔 연녹색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오월에는 초록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칠팔월에는 온통 짙은 초록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구시월엔 붉은 계통 정렬의 색으로 온통 물감칠로 옷을 적셔 놓더니 동지섣달인 십이월엔 하얗게 솜싸개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서 겨울을 보낸다. 가끔 나뭇가지에 은빛이나 백옥색의 상고대를 만들어 보너스를 받는 눈 호강을 받을 수 있다.
사계절의 인연 따라 노랑․보라색 제비꽃, 산유화, 진달래, 철쭉이 차례대로 피어나면 짙은 녹음과 함께 기생 속치마를 헤집고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나리꽃이 햇살의 간지러움을 못 이겨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본다. 어느덧 풀매미 소리가 간지럽게 연주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참매미가 본격적으로 매앰~ 매앰~ 매~앰하면서 이른 가을까지 산속은 음악회로 변할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과 모진 태풍을 견뎌내고 부지런히 약삭빠른 청설모가 잣송이를 여기저기 떨굴 때가 되면 능이, 송이꾼들의 일상도 바빠진다. 재주가 없는 나는 하루 종일 산을 쏘다녀도 한 꼬투리 송이를 볼 수가 없다. 그냥 혹시나 하면서 노송 근처를 맴돌 뿐이다.
햇볕도 많이 식어 산 중턱에 올라서면 금세 땀구멍으로 서늘함이 스며들고 여기저기 메뚜기가 폭삭~ 폭삭~ 바쁜 시절을 보낸다. 안 보이던 용담꽃이 파란색을 내밀면서 조심스럽게 투구꽃과 함께 쌓아 올린 돌담을 의지하여 한자리 잡고 피어있다. 지난봄부터 여름 내내 숲 가꾸기 낫질에도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자손을 번식하는 놀라움이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지나면 온통 구절초와 국화류의 야생초가 하얗게, 노랗게, 붉게 우산을 펼쳐 나비나 꿀벌들의 마지막 겨울 양식을 채워준다.
기룡산은 금강산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농작물이 뿌리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감자나 땅콩 같은 섭리라 할까? 산자락 끝 서리골에 전통사찰인 백련정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다. 절 위쪽 2km 지점의 용천(龍泉)에서 발원한 물이 계곡을 이루며 절 앞을 지나가서 천곡사(泉谷寺)라고 불렀다. 창건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사찰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에 용천 곁으로 옮겨 지으며 절 이름을 신수리사(新水理寺)로 바꿨다고 한다. 1950년 육이오전쟁으로 불에 타 폐사된 채 남아 있다가 1966년에 중건하였다. 1968년 강효진(姜曉進) 석천(昔泉) 스님이 천일관음기도를 시작한 뒤부터 절 이름을 백련정사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백련정사의 포교당은 서리골에 있는 전통사찰과 떨어진 인제읍 시내 기룡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현대식 건물로 조성되어 많은 불자의 도량으로 사랑받고 있다. 나는 일 년에 몇 번은 백련정사 포교당에 간다. 사월초파일 봉축법회, 다른 기도법회와 도량을 가꾸는 자원봉사를 위해서다. 절에 가면 성소 주지 스님께서 반겨주시고 한 끼 공양도 맛있고 마음이 편해지는 거 같다.
수백 생에 쌓였던 업장을 녹여 내고자 삼보三寶(佛.法.僧)에 귀의하여 번뇌를 끊어내어 불도를 닦아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 하리라. 나무아미타불.
터미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60년대 남쪽에 고향을 둔 군(軍)입대자들이 전방부대로 배치되면서 푸념으로 하던 말이다. 인제는 일제강점기에는 황국신민으로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는 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육이오전쟁 휴전 후에는 미군정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살아야 했다.
육이오전쟁 때에는 살던 터전이 전쟁의 한가운데 놓이면서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온전한 것이 없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서 숨어 지내며 가족을 돌봐야 했고 장티푸스나 학질에 시달려 어린 생명이나 노약자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고 어르신들은 회고하신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전쟁에서 수복된 지역에 민간인 입주가 시작되자 너도나도 새 삶을 찾아 인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토지는 농지개혁법에 따라 분배 농지로 재배당되고, 그 과정에서 약삭빠른 사람들은 무연고자가 예상되는 땅을 차지하려고 땅 경계를 표시 한 줄을 넓게 띄어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다가 관철이 되면 자기 땅이 되고 안 되면 내어놓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생존하는 어른분들께서 들려주신다.
인제에서 동해안지역을 제외한 서울이나 타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축령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고개가 좁고 굽이가 험하여 내려오는 차와 올라가는 차량이 소통하는 차원에서 경고음 소리를 내야 하므로 조용한 새벽 아침에는 첫 버스가 군축령을 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서울서 집으로 오기 위해서는 오후 2시 전에는 볼일을 마치고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방면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한다. 서울 망우리고개를 넘어 경기도 국수, 양수리를 거쳐 먼지를 뽀얗게 날리면서 양평을 지나 강원도 홍천터미널에 한참을 정차한 뒤 네다섯 시간 만에 마지막 엔진음을 거칠게 토해내며 가넷고개를 오르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가넷고개를 내려가게 되면 집에 다 왔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한다. 군축령 고개는 원래 가넷고개였는데 고개가 높아 차량이 통행할 수 없어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육군 1102야공단, 즉 야전공병부대에서 도로공사를 마치고 군축령(軍築嶺)이라고 명명하고 자연석 돌기둥에 음각으로 새겨서 도로 한복판에 세워 좌우 오가는 경계로 삼았다.
인제는 1954년 수복지구 내 민간 유입이 시작되면서 시내가 형성되었는데 주요 관공서 자리를 기룡산 자락 언덕 부분에 우선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관공서를 중심으로 도로와 개인 건물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버스정류장이 시내 중심에 자리하게 되어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어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인제와 원통 지역에는 휴전선과 대치하는 군부대가 많이 집중되어 버스회사에서는 서울~속초 간 주요 승객이 군인들과 군인 애인이나 가족 면회객이 많아 운행 횟수를 늘려 호황기를 누렸다. 따라서 버스정류장 주변에는 늘 사람으로 붐볐다. 더욱이 군인용품을 취급하는 군장(軍裝) 가게는 휴가 가는 군인들이 꼭 들려가는 코스다. 고향집에 멋있는 모습으로 가기 위해 평소에 하지 않던 군복에 각가지 휘장을 다는 것이다. 유격마크나 태권도마크, 휴전선경계부대의 민정경찰표식 등등. 나도 군복무 중에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군장 가게에서 해본 경험이 있어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온다. 버스정류장 주변에는 시골에서 생산한 잡곡이나 약초 등을 팔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나오는 손님을 선점하기 위해 잡곡 상점과 약초 상회가 많았다.
세월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듯 인제버스터미널에도 노선버스 운행회사에서 외곽으로 이전할 뜻을 행정관청에 요구함으로 검토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복잡하고 좁은 정류장에 대형 버스가 앞으로 뒤로 숨바꼭질하듯이 주차에 애를 먹고 늘어나는 교통혼잡은 주변에 생활하는 모든 시민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버스정류장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적용하는데 공용터미널과 공영터미널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공용터미널은 터미널사업자가 민간 시설을 임대하여 터미널사업을 영위하는 것이고 공영터미널은 해당 관청인 지자체에서 터미널시설을 직접 건립하여 터미널사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터미널사업자는 공용터미널 사업을 선호하지만, 본 회사가 직접 건립하여 운영하는 사례는 없다. 인제는 소양강다목적댐 상류에 위치하여 저지대는 홍수기에는 역류로 인한 침수 사례가 있어 건설교통부로부터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국유지를 무상으로 양여 받아 택지개발사업을 하여 시내 외곽 쪽으로 우회도로를 개설하고 여객자동차정류장시설 용지를 도시계획구역으로 확정 고시하여 터미널 이전은 확정될 때 나는 인제군청에서 터미널 이전 업무를 맡고 있었다.
민선 시대를 맞아 선거로 당선되는 지자체장이나 군의회의원은 민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예상했던 데로 터미널 주변에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유지하며 경제활동을 하던 상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반대 서명을 받아서 군수실로 찾아오고 각종 협박과 위해를 행사하면서 시끄러워졌다.
외부적으로는 인제버스터미널 반대 민원에 시달리고 내부적으로는 공용터미널 시설 건축인허가 문제가 생겼다. 터미널사업자가 사용하고자 하는 건축물을 건물주가 건축허가서에 호텔, 목욕장, 예식장, 게임업소를 함께 건축하고자 하는데, 법령에 안 된다고 주장하는 허가부서의 해석이다. 도시계획시설기준에관한규칙에서 여객자동차정류장에 포함될 시설을 약국, 음식점, 다방, 편의점 등으로 한정하여 규정되어 있으므로 인허가 조건에 안 맞는다는 법 해석 논리다. 나는 상급부서인 건설교통부에 질의공문을 보내어 자문을 받아보았으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적의 판단하여 결정하라는 모호한 답변밖에 받을 수 없었다. 전국의 유사한 사례를 살펴보기 위하여 경남 남해군과 울산광역시 사례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두 곳 모두 공용터미널을 운용하면서 각종 편의시설을 자유롭게 설치하여 이용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법을 적용하여 인허가를 하였는지 궁금하여 살펴보았다. 남해군의 경우 부군수를 TF 단장으로 해당 부서의 직원들로 하여금 원팀을 구성하여 개별법을 풀어서 인허가 제한사항을 해소하여 해결하였고, 울산광역시의 경우 민간자본유치촉진법을 적용하여 해결하는 사례를 볼 수 있었으나 우리 군의 실정은 두 가지 어느 사례도 적용하지 못하고 답보상태로 내부적 갈등만 키우는 답답한 상황만 이어졌다.
나는 최후의 마지막 수단을 고민한 끝에 입법과정에서 법을 검토하는 중앙부처인 법제처의 자문을 받아보기로 하였다. 대면 자문을 위해 법제처를 방문하여 J 법제관을 조우하는 행운으로 해결하게 되었는데, 나는 공손하게 법제관님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 군의 실정을 말씀드렸더니 법제관님은 인제 어느 군부대에서 법무 장교로 군 생활을 하셨다면서 인제의 시내를 잘 알고 계셔서 참으로 놀랐다. 법제관님은 그 내용이라면 당연히 호텔이나 다른 편의시설들도 권장하여 이용객의 편의를 주는 것이 법의 취지라고 하시면서 매월 발간하는 월간「법제지」에 상담사례로 실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해서 참 인연도 이런 인연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법제처에서 발간된 「법제지」 상담사례를 군수님께 보고드리고 관련 인허가 부서의 협조를 받아 인제읍버스정류장 시설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공직을 떠난 지 강산이 변한다는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버스정류장에 담긴 추억은 더욱 또렷이 머리에 남아 떠날 줄 모르니… 그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는 어디로 갔을까? 시방삼세(十方三世)가 일각소현(一覺所現)이라 했던가?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과거나 현재, 미래를 깨닫고 보면 모두가 마음의 그림자였을 뿐이라고 생각해 본다.
도리안(桃里岸)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고려말에 나옹스님인 대도인이 계셨다. 스님은 어렸을 때 마을의 친한 친구가 죽어 의문이 생겨 동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물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누구에게도 답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스무 살 때에 출가하셨다고 한다. 출가 동기가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세간에서는 죽음에 대한 장례 방법이 종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불교의 다비식을 제외하고는 매장 문화가 오래도록 관습 되어 왔다.
어렸을 때 상여를 메고 맨 앞에서 종을 떨렁~ 떨렁~ 흔들면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삶은 팥이 싹이 나면 오려나? 어람차~ 어혀.” 선소리꾼의 뒤를 따라 상여와 만장을 높이든 행렬 속에 삼베옷 입은 상주들은 더욱 슬피 울면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따라가는 장사행렬을 보면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사 문화는 21세기를 접하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3년도 화장률이 30%를 넘지 않아 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민간기구로 장묘문화범국민협의회 가칭 장개협을 설치하고 장묘문화 개선에 힘을 쏟았으나 실적이 미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도시엔 매장지가 없으니 화장하여 납골이나 수목장, 산골 등으로 장례를 치르지만, 시골에는 여전히 매장이 중심이 되어 불법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매장을 선호하는 데는 뿌리 깊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후손 보존에 대한 욕망이 심했으며 화장을 하면 두 번 죽는다는 선입관도 있고, 죽어서 부활한다는 종교적 신념이 강해서 매장을 고집하는 경향도 있다.
장사등에관한법률이 오래전 제정되어 시행하고 있지만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적용하지 않으니 죽은 법이다. 더욱이 단체장들은 선거에 예민한 애경사에 대하여 관여하기를 꺼린다. 2002년 민선 3기 지방선거에서 바뀐 군수님은 장사 문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나는 2003년 3월 사회복지과 장묘시설팀장으로 보직을 받아 처음으로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서울 광화문 앞 종로에 위치한 장묘문화범국민협의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사무총장이셨던 박복순 총장님을 처음 알았고, 총장님도 지방에서 찾아온 나를 보고 많이 놀랐다고 후일에 회고하셨다. 나는 총장님께 우리 군에 오셔서 군청 전 직원 특강을 해 줄 수 있는지 요청드렸더니 군수님이 초청하면 오시겠다고 하셨다. 군수님이 쾌히 허락하셔서 월례 조회를 통하여 특강을 하시게 되었고 우리 군과 깊은 인연을 맺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는 먼저 의회의 협조를 받기 위해 장례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의원님과 개발행위허가를 위해 협조가 필요한 부서 직원을 포함해 벤치마킹을 하기로 하고 국내 수원 연화장, 고양시 벽제추모공원, 부산 영락공원 등을 다니며 장례식장, 화장장, 납골당으로 이어지는 원스톱 방식의 선진 장례문화를 알게 되어 사업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적지 않은 예산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보건복지부에 사업 규모, 시설 내용이 담긴 사업계획서를 포함한 신청서를 제출하여 국가보조금 30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였다. 다음은 후보지를 선정하는 과정이다. 후보지는 제일 우선이 자발적인 유치신청이다. 당연히 인센티브가 뒤따른다. 군청에서 매월 발간하는 소식지에 장묘시설 유치신청 공고를 냈다. 예상했던 데로 자체 유치신청 하는 곳은 없다. 몇 번의 공고와 읍면별 순회 홍보설명회를 통하여 다섯 곳의 유치신청을 받아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게 된다. 대학교수(장례지도과), 전문가, 군의회의원, 공무원 등으로 7명의 위원으로 구성하고 부군수님을 심의위원장 모시고 현장답사, 주민의 유치 열기, 지리적 조건 등 평가 항목에 점수를 부여하여 최고 점수 후보지를 최종 후보지로 정하도록 하였다.
후보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정해져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2003년 11월 군정 소식지에 장묘시설 후보지로 남면 남전1리 석둔골지역이 선정되었다는 제목과 가장 민주적인 주민 자진 유치로 윈윈 사례로 소개되는 내용이었고, 지방 일간지에도 대서특필 게재되었다.
그러나, 2004년 2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고 급기야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인제읍 원대리 마을 입구에 “남전리 화장장 결사반대”를 시작으로 정작 자진 유치하겠다던 남전1리 주민까지 합세해서 규모가 커졌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인제읍 원대리 마을은 시설 후보지와 4km 이상, 먼 곳은 8km까지 떨어진 곳이다. 반대 이유는 화장장에서 나오는 분진이 동남풍을 타고 자기네 동네로 날아오고 마을 입구에 흐르는 내린천 원대교량에서 강물로 유골을 뿌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군청에서는 대응반을 편성하기 위해 담당 주무과장을 교체하고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장묘시설 견학을 시행하기로 하고 반대 주민과 리장협의회, 노인회협의회, 지역인사를 포함해 수원 연화장, 부산 영락공원, 익산 추모공원을 찾아다니며 혐오 시설이 아님을 홍보하였다. 다녀온 며칠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3월이 되면서 날씨도 많이 풀리고 따뜻해지면서 대대적인 반대 집회가 시작되는데 이젠 동네 트랙터, 경운기에 상여까지 등장하면서 상복을 입고 시위하는 주민까지 생겨났다. 군수실을 점거하고 농약병을 먹는 시늉까지 하는 등 가관이다. 119구급차가 출동하고, 온종일 군청 청사가 시끄럽다. 경찰서 정보과와 경찰관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초비상 상황이 벌어졌다. 주무과장인 사회복지과장님은 정년을 1년 남으셨는데 모든 책임을 지고 명예 퇴임을 하신다고 울고 계신다. 다시 새로운 주무과장이 발령받았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군청 현관 앞에서 주야 노숙 집회가 여름 내내 이어진다. 더욱이 이슈로 번지면서 언론사와 방송사에서는 특종감으로 심층 취재하여 보도하는 데 반대하는 집회자 쪽에 집중한다.
동네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싸우는 사태에 대비하여, 매일 상황 파악을 하여 대응 전략을 수립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찬성하는 주민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해결하여 신뢰와 믿음을 심어주고, 사업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로드맵을 만들어 행정절차는 계속 진행해 나간다.
대략 반대하는 편에서는 무조건 싫다. 터무니없는 조건 요구, 찬성하는 사람이 싫어서 등 수시로 바뀐다. 찬성하는 주민들은 시설로 인하여 얻어지는 미래의 일자리, 마을의 인센티브 등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 최종 협상 과정에서 험로를 예상되었고 실제 그랬다.
강원도 도시결정심의위원회에서 장묘시설승인결정, 지적도면고시 절차, 국유지 도로개설허가, 사업결정고시 절차가 모두 끝났다. 이제 기공식과 사업만 추진하면 된다. 막바지 반대 집회는 사업장 입구에 천막을 설치하고 철야 농성을 한다. 맨 앞줄에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고 젊은 사람들은 둘러서서 자리 이탈자가 생기지 않도록 그물을 치는 거 같은 대형이다.
행정대집행! 최후의 행정 수단이다. 강제로 불법집회를 해산시키는 수단이다. 계고장을 1차, 2차, 3차 시한을 충분히 준 후에 최종적으로 경찰관 입회하에 군청 내 건장한 공무원을 필두로 행동에 나섰다. 특히 조심할 건 여자 집회자다. 잘못 건드리면 성추행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자 공무원이 상대하여 대집행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사업장 통로는 확보되었으나, 간헐적으로 막아서는 반대 주민들 때문에 정상 소통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행정절차를 문제 삼으며 반대 주민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1심법원인 춘천지방법원에 이어 2심 서울 고등법원판결까지 원고 측이 항고한 위법한 행정절차 주장은 기각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소송에서 드러난 반대 주민들의 차가운 눈빛은 지금도 섬뜩함을 느낀다. 좁은 동네에서 형님 동생 아주머니 어르신 하면서 대하던 시절이 더 많았는데…
인제종합장묘센터! 2007년 11월 26일 드디어 완공되었다. 2003년 3월 장례문화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업을 구상하고 절차를 진행하면서, 2005년 8월 19일 기공식에 이어 4년여 만이다. 명칭 공모를 하였는데 지금의 도리안이 된 것이다. 도리안(桃里岸)은 복숭아 언덕 마을이다. 예전에 이곳엔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복숭아꽃이 지천이었다고 한다.
석둔골 도리안 지금도 도리안 장례센터 입구에 커다란 바위를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역사적 유물이나 유형문화유산은 없었으나 그 바위는 보존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는 일상사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면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내 어머니를 이곳에서 보내드렸고, 금년도 두어 달밖에 안 남았지만 왜 주변에서 부음이 유난히 많이 들려오는지, 외삼촌, 친구 어머니, 또래 친구…
처음 조성할 때 그 많던 납골당이 다 차서 다른 곳에 증설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금방 적응하는 거 같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군청 민원실에 상가 민원 전담반이 있어서 상갓집에 천막을 쳐주고 전깃불도 달아주는 직원이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이곳에서 원하는 장례를 원스톱으로 한다. 죽은 자의 공원이 새로 하나 생겨난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여행 때 어느 공원을 지나는데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누워서 일광욕하는 추모공원이라고 설명하는 가이드 말이 생각난다. 보건복지부에서 전국 시․군에 장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유럽의 장묘문화를 벤치마킹할 기회가 있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를 순회하면서 유럽의 장묘문화와 죽은 자에 대한 인식도를 살펴볼 수 있었다.
프랑스 어느 공원묘지는 도심 속에 있었는데 그곳엔 결혼식장과 장묘시설인 납골당과 묘지가 공존하고 벤치도 놓여있어 시민들의 휴게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만들 때 반대하는 시민은 없었느냐?”고 질문하니 답변이 “우리 사는 곳과 멀다.”고 항의하는 시민이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영국에서는 화장장에 예배당을 함께 사용함으로 장례식을 예배당에서 추모예배를 드린 다음 시신은 아래층 화장장으로 내려보내 순번에 의해 화장이 되면 정해진 날짜에 유골을 찾아서 평소에 살던 집 마당이나 가까운 추모공원에 망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꽃으로 유택동산을 만들어 가꾸고 추모하는 장묘문화를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카톨릭 교회가 대세인 유럽에서도 교황청의 승인으로 화장문화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전국의 화장률이 90%를 차지한다. 너무 빨리 화장률이 올라가니까 관련 종사자들이 놀랐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에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법문이 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인연에 의해 멸하기 때문이다.
인연법(因緣法)은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이 없어진다는 생하고 머물고 멸하는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일체법(一切法)은 자성이 없기에 영원한 것은 없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다
나옹스님이 출가 전에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의문을 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이 나옹스님께 물으셨다고 한다. “스님 죽으면 어디로 가십니까?” 스님은 두 주먹을 합쳐(交拳) 가슴에 대면서 “다만 여기에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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