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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충만을 꿈꾸며 간구하는 법>의 줄거리:
성령 충만을 바르게 간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형 목회를 위해 필요한 능력으로 그리고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은 성령을 망령되게 대하는 것입니다. 충만해야 하는 성령은 내가 이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장착해야 할 무슨 무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특권과 의무인 성령 충만을 꿈꾸며 간구하는 법을 알아봅니다.
성령 충만을 꿈꾸며 간구하는 법
(사도행전 1장 1절~5절)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 충만을 꿈꾸며 간구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 충만을 꿈꾸며 간구하는 법’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상하권 한 권으로 묶여있던 책입니다. 2세기 초에 들어서 누가복음 자체만으로도 다른 복음서에 견줄만한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여겨지게 되어 분리되었습니다. 한 권으로 묶여있던 책이었던 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누가복음에 이어서 하권에 해당하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방법이 올바르면 약속된 성령 충만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간구하는 방법이 틀렸다면 약속되었어도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약속하셨기에 간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시면서 간격을 두십니다. 이러한 간격을 두신 이유는 우리가 약속을 향하여 꿈꾸고 기대하며 간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꿈꾼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꿈꾼다는 표현이 많은 어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꿔도 되는 단 하나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거저 받는 것이기에 선물의 내용을 미리 간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를 바라시며 선물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것이란 가질 때 마음의 채움이 일어나고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좋은 것을 뚜렷하게 성령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을 보면 앞서 보았던 마태복음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되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성령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구해야만 하고 구하면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고로 좋은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은 선민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로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지독하게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최고로 좋은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도 구할 것을 의무처럼 강조하십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구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단들 중에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 목회를 위한 능력을 얻고자 성령 충만을 구합니다. 혹은 이 세상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간구합니다. 성령 충만이 얼마나 간절한지 기도원에 가면 소나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올바른 구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주춤합니다만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원 집회가 얼마나 많았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특정 교단의 지침이 아닌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음을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은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당연한 일을 하면서도 노아 홍수 때나 소돔의 멸망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큰 부담과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부활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일을 성령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결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 충만, 성령세례는 부활의 자리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된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시며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며 간구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움을 위하여 간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구하는 일이 필연적이라면 반드시 성령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열한 사도나 당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이들에게만 허락된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38~39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볼 때 먼 데 사람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도 약속된 선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성령 충만을 기대하며 바라고 꿈꿀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자 의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세례는 물에 잠겨서 내가 죽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무엇인가의 있음의 느낌을 갖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존재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있는 대상들을 향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우선적으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존재감을 느끼기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좋음의 확신 또한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세상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격의 상태로 살 수 없다고 여겨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물세례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성령세례 또한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세례가 육체의 전신을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죽었음을 상징하듯이 성령세례는 인격이 성령님께 완전히 잠기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의식과 몸을 통제하는 인격의 주체성이 성령이라는 물에 잠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사람의 인격에서 나타나는 아홉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성령 받은 사람의 인격이 변하여 맺어지는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인격이 완전히 성령에 잠긴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세례가 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세례는 인격이 성령에 잠기게 하는 것이라고 보신다면 구분이 명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며 꿈꾸고 좋아해야 할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대형 목회를 위한 능력을 얻고자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경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삶의 문제를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역할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동일시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고 믿어진다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동일시와 연합은 이론과 교리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이 믿어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연합이 실제로 나의 부활로 믿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제자들의 상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사십일 동안 열 번이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자기 사건으로 여길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마음에서 이 세상에 대한 죽음과 탈출이 일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동일시가 일어나게 되었고 제자들의 마음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게 되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시고 세상 바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갔기에 더는 세상에서 두려워할 일도 없고 추구할 일도 없습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이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었기에 몸이 죽는 것조차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몸이 살아있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셔서 세상을 빠져나가심과 부활이 내 사건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에 의해서 이러한 동일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아침마다 말씀에서 동일시를 하라고 외치니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보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며 동일시하는 것은 성령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같이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성령으로 충만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첫 번째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세상을 빠져나가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과정에 나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무엇보다 크게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존에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크게 느끼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좋음보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좋음을 먼저 확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소원하기보다 이 세상 것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과정을 내가 겪은 것처럼 느끼게 해주십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장님께 꾸지람을 듣게 된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꾸지람하는 사장님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귀로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있어도 마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바를 따르게 되고 그 지시에 따라 사장님께도 대응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이 충만하면 세상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가정을 예로 들자면 이전에는 배우자의 존재감이 최우선이었고 자녀의 존재감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세상 있음의 느낌을 갖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의 존재감에 따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며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면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것처럼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먼저 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렇기에 성령 충만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무엇보다 크게 느끼게 하시는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동안 육체를 통해서 만나는 것들에 대해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했습니다. 인격의 구조가 “마음+육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면 인격의 구조는 “마음+성령”의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이전에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이 육체를 통해 접하는 대상에게 향해있었다면, 성령 충만이 이루어진 후에는 성령이 육체의 자리를 대신하시기에 성령님만이 느낄 수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이 발생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마음에 하나님을 있음의 대상으로, 좋음의 대상으로, 소원할 대상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과 연결될 자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자리에 성령이 들어오시느냐 육체로 접하는 세상이 들어오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육체와 성령이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는 바로 마음에서 육체를 물리치고 성령이 들어선 형태입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의 발생은 성령이 포착하는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두 번째 일의 구체적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이 마음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며 성령 충만이나 성령세례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마음이 육체와 연결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면 육체가 포착하는 일들에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의 발생은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육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성령께서 대체하심으로써만 성령이 포착하시는 대상이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소원을 향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님은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체가 되어 주십니다. 앞서 성령께서 하시는 첫 번째 일과 두 번째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께서는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게끔 해주십니다. 두 번째로 부활의 자리에서 성령님께서만 포착하실 수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의 대상으로 제공해주십니다. 이제 이러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난 상태의 사람은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갔으니 더는 세상에서 살 이유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있음의 느낌도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고, 좋음의 확신 또한 세상 밖에서 가지고, 소원 또한 세상 밖에서 발생하고 있으니 세상에서 삶을 살아야 될 이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태에서 성령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주체가 되십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성령님께서 장악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성령님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기를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 더는 세상을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상태가 될 때 성령께서는 삶의 주체가 돼주십니다. 나를 대신하여 성령님이 삶을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 바깥에서 가장 좋은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리고 내 의식과 몸은 성령님이 주체가 되셔서 살아가십니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계획하시는 일들을 의식과 몸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나가시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이 하시는 세 가지 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중요한 일들을 하시기에 선민 혹은 교인이라면 성령 충만 없이는 존재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성령 충만의 욕심을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주제에 하나님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시기를 막무가내로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령을 약속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 은혜를 의지하여 성령 충만의 욕심을 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 충만의 가장 모범적 사건입니다. 성령의 전공과목인 세 가지 일을 간단히 말하자면 동일시와 하나님의 존재감을 우선적으로 느끼게 하고 이 세상 삶의 주체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서 실제로 일어나기 위해서 오순절에 제자들의 모습을 관찰해봅니다. 제자들과 우리의 차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어느 정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제자들이 받았던 충격의 백분의 일도 전달되고 있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이 제자들과 다르기에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말과 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접합니다. 그렇기에 삶이 처해있는 상황과 그에 대한 관심을 모두 물리칠 정도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과정을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일상의 관심거리들이 마음을 차지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자들의 상황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제자들에게는 일상의 어떤 사건이나 만남도 예수님을 결코 잊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이 죽으시는 모습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고, 누구와 만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보다 우선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이었다면 사장님께 꾸지람을 듣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잊을 수 있을까요?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기억에서 사라질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어느 정도의 강도로 기억할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제자들에게는 없었던 분명한 이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사건의 의미를 알고 접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인간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민생시찰을 나왔다가 간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일반인 한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대통령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된 이 사람은 평생 이 사건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대로 회자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을 말하고 듣고 먹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대통령에 의해 살아난 사람이 돈 문제가 생겼다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을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삶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잊어버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번제의 말씀을 나누고 십자가온라인교회에서 말씀을 나누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십자가 사건의 본래 의미를 넓혀가고 무겁게 느낄 수 있기 위해서 날마다 말하고 듣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는 분들은 마음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엄청나게 커져가는 것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인생을 설계하고 꿈꾸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인생의 미래 전체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의미는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나머지 인생에 대한 관심과 십자가를 맞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든 살든 잘 되든 못 되든 굶든 배부르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모든 관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자들과 같은 정도의 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미래와 맞바꿔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미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욱 확실하고 탄탄한 인생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계획되고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인생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십자가로 맞바꾸어질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당장 회사에서 잘리고, 당장 굶어 죽는 상황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십자가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과 맞바꾸어야만 하는 관심의 집중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성령 충만이 주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어때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보며 나머지 인생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음의 관심으로부터 내 인생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오직 십자가를 기억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성령 충만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에서는 돈 문제를 붙잡고 있다면 성령 충만의 이유를 돈 문제의 해결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성령 충만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제자들처럼 “인생 전체의 관심을 십자가에 쏟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올바른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세상을 빠져나가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있는 한,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 사건들이 전부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을 지워버리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이 지워지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인생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위에 세웠던 세상에 대한 꿈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나머지 시간을 십자가와 맞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마음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중에 십자가를 생활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기도뿐입니다. 제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잊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시에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몰랐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리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의미를 모른 채 사건을 접했지만, 우리는 이 의미를 알기에 십자가 사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 사건이 나의 인생에서 잊혀질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십자가 사건을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 충만은 약속된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세 가지 측면에서 기적 같은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꿈꾸며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바르게 기도하여 약속된 선물인 성령 충만을 날마다 경험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