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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1장 1-2절
아모스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호세아 선지자의 활동 시기와 비슷합니다. 또한 호세아 선지자가 북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것처럼, 아모스 선지자 역시 북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핵심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호세아서의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면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랑과 공의를 정 반대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공의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 없는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 역시 사랑 없는 공의가 아닙니다. 특히 죄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으로 결과 될 수밖에 없는데, 모든 사람이 이런 심판을 받는가? 일시적인 심판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심판과 관련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만큼은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한편으로는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진노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리는 자기 백성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대속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랑의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거기에 공의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고 해서 거기에 사랑이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심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씀이라고 할 때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이요, 단지 죄에서 돌이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모스서를 살필 때 하나님의 공의, 공의에 따른 심판의 내용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인 1절 말씀을 보면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활동시기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입니다. 단지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라고만 말하지 않고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라고 적고 있는데, 두 사람이 남과 북의 왕으로 있을 때 아모스는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활동 지역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라졌다고 할 때 북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워진 자가 아모스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단지 북이스라엘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처럼 아모스 당시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유다도 북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일차 대상은 북이스라엘이 맞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통치가 끝나고 난 뒤 대략 30년 후에 멸망하게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을 기록의 형태로 남겨놓았다는 것은 멸망한 북이스라엘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남아 있는 남유다를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게 될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성도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단지 북이스라엘만을 위한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서신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 쓴 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만을 위한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딤후3:16),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할 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딤후3:17) 로마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보존된 이상,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날 교회에게 전해진 이상 그 말씀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말씀으로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지역에 편지를 써 보낼 때 단지 그 지역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도 회람되도록 할 것을 권하는 말씀도 있는데, 골로새서 4장 16절입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분명 골로새서를 시작하면서 수신자에 대하여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골1:1)에게 편지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편지가 라오디게아에게까지 회람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어느 시기에 활동했다,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은 단지 그 시기와 그 지역에 제한되어서 주어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할 때 선지자 아모스가 전하는 말씀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받아 그대로 전한 말씀임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말씀의 권위가 있는데, 이러한 권위는 사람의 외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혹은 교회당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재정이 넉넉하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전하는 데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강요 1541년 프랑스 초판에서 제15장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살피고 있지만, 교회의 권세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전하는 것을 어떻게 권위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기독교강요에서도 언급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7:1-7) 특히 4절에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로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들려지지 않는 곳이 성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들려지고, 들려지는 말씀에 따라 열매를 맺지 않는 곳이 성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들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오늘날 교회는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보거나 듣는 일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종결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계시가 없기 때문에 비상직분으로서의 선지자, 사도와 같은 직분도 오늘날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계시된 말씀이 교회에게 주어졌다고 할 때, 그래서 성경 66권만을 교회에게 주신 정경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교회는 계시된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고, 또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가 그 말씀에 합당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성을 생각하자면 열매를 맺는 일에는 부족할 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답게 전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답게 전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성도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요18:37).
다시 아모스의 말씀으로 오면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인데, 이 아모스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드고아 목자’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는 드고아 출신으로 목자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드고아 지역은 베들레헴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라고 합니다. 칼빈에 따르자면 암벽으로 둘러싸인 가난한 촌락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끄러울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가? 칼빈은 자신에게는 어떤 권위나 명성을 과시할 만큼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벽촌에서 그를 불러내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예언하도록 세워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의 출생지를 밝히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하나님께서 드고아 출신의 아모스를 부르신 것은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를 택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늘 드고아 출신의 사람만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를 받는 자만 부르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없는 자를 부르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지만, 때로는 지혜 있는 자를 부르셔서 지혜 없는 자들만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들까지 가르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으로 통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29절의 말씀처럼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자들만이 아니라 지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은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뭔가 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로 여겼다고까지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4-8) 이런 점에서 다시 고린도전서 1장의 이어지는 내용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0-31)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이요, 그리스도 없이는 육체를 따라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사용하시지만, 사도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 같은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탁월함을 드러내십니다. 즉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탁월함이지, 아모스가 어느 지역 사람인지, 얼마나 학문에 있어 뛰어난 사람인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목사를 세우고자 할 때 최소한의 기준은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런 기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준도 없이 아무나 목사로 세우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질서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준에 따라 목사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출신, 그 사람의 학벌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세웠는가,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전하는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가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드고아 목자’와 관련해 어떤 사람들은 아모스가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우리말 ‘목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목자(רֹעִי[로에])가 아닌, 양떼들을 대량으로 목축하는 목장과 뽕나무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농원을 함께 경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암7:14-15 참고). 특히 우리말 ‘목자’로 번역한 히브리어가 본문 외에 열왕기하 3장 4절에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왕기하 3장의 목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이때 ‘양을 치는 자’(נֹקֵד[노케드])가 본문에 나오는 목자와 동일한 단어인데, 왕이 거느릴 만큼의 양을 치는 자가 아모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양을 치는 자’라는 단어가 직접 양을 치는 목자일 뿐만 아니라, 크게 목축을 하여 수많은 양 떼를 소유한 사람을 지칭하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목자들을 고용하여 기른 것이고 이것을 아모스에 대하여 적용할 수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것처럼 드고아는 부유하기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 가난한 작은 마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단지 단어적으로 어떤 사실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성경에서 ‘אלהים’[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지만 모든 경우가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재판관에게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에게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모스가 가난한 자가 아니라 약간의 부를 가지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러 선지자로 세우시든, 아니면 부한 자를 불러 선지자로 세우시든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어떤 것도 자랑꺼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의 말씀으로 하자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측면에서도 자랑할 수 없지만, 선지자로 세워졌다고 할 때 선지자는 그런 외적인 것을 가지고 사역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모스가 선지자로 세워졌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입이 하나님의 입으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이 하나님의 입으로 있지 않는 선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이 있지 않는 선지자,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지 않는 선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할 때 작은 동네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가난한 자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모스에게 주셨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의 권위는 그의 외적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에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의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권위가 있는 것이지, 그의 외적 모습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아모스가 드고아 출신이라고 할 때, 그리고 드고아 지역이 베들레헴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라고 할 때, 드고아 지역은 남유다 지역에 속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북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아모스 7장에 보면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암7:12-13) 그러나 아모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7:14-15) 그러니까 지금 아모스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 출신이기 때문에 남유다 지역에서 선지자 활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뜻이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거기에 순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을 보이시면서 말씀을 주셨는데,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라고 말한 뒤 ‘지진 전 이년에’라고 말하는 이 부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 2년 후에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을 이미 정하시고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가랴 14장 5절에 보면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2년 후 지진이 있을 것인데, 지진에 앞서 지금 하나님은 남유다 출신인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워 북이스라엘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지금도 종종 지진이 일어나지만 적어도 여기서 기록된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심판은 왜 일어나는가? 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3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죄를 말하고 그 죄로 인하여 벌을 내릴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이러한 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모스 2장 4절과 5절에서는 남유다의 죄를, 아모스 2장 6절에서 8절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북이스라엘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그들의 죄악을 들춰내시는데, 바로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되 지진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것은 비록 벌할 것을 정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돌아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지만, 그리고 그러한 진노는 저들의 죄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고자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죄를 짓고 지어도,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주일을 귀히 여기셔야 합니다. 주일 공예배로 모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공예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시간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목소리가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공의로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용납하시는 은혜와 긍휼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하지만, 회개 때문에 우리를 용납하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기로 하시고 그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면, 북이스라엘 왕으로는 여로보암이 남유다의 왕으로는 웃시야가 다스릴 때입니다.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려질 때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여로보암인데,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이 아닌 열 세 번쩨 왕 여로보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여로보암에 대하여 여로보암 2세라고도 하는데,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3절과 24절입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여로보암 2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로보암 1세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로보암 1세의 죄는 무엇인가? 그의 대표적인 죄에 대해서는 열왕기상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왕상12:25-33 참고). 가장 먼저 남과 북이 갈라졌다고 할 때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는 일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하나는 단에 두고, 다른 하나는 벧엘에 둔 일입니다. 또한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삼은 일입니다. 앞에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그는 레위 자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다고 할 때 그곳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맡아 보았는데, 이미 이런 일은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 1세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유다의 절기와 비슷한 절기를 만들어 지키게 한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로보암 1세의 대표적인 죄라고 할 때 그러한 죄를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3절과 24절에서는 분명 여로보암 2세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진노와 징계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5절과 26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간단히 말하면 끊임없이 죄를 짓던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를 내리시던 것을 멈추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한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푸시는데,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해 하신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한 마디로 여로보암 2세 때는 부국강병한 나라를 이룬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부국강병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영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진노 받아 마땅한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쌍히 여기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겠지만, 이미 은혜임을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그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리는 형태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진노를 나타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해 진노를 말씀하신다고 할 때 비록 진노를 말씀하시지만, 그리고 2년 후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할지라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한 측면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지금 아모스는 선지자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지만, 남유다를 향한 말씀이라고 할 때 웃시야 왕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런 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웃시야 왕의 대한 평가는 열왕기하 15장에 의하면 그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왕하15:3).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함으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는 것이 점과 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왕하15:4).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역대하 26장에 있는데, 1절 이하 15절은 그의 형통을 16절 이하 21절은 그의 교만에 대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의 형통은 누구로 말미암았는가? 15절에서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기이한 도우심, 즉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강성해지고, 그로 인해 형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죄만을 짓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해서 그 은혜를 깨닫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때는 깨달을 수 있지만, 악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외적인 복을 받는다고 해서 그 복으로 인하여 돌이키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상황은 다릅니다. 그래서 웃시아에 대하여 그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남유다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강성하여졌을 때 교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라가 든든히 섰을 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그 강성함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교만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분명 외적으로는 부국강병한 시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국강병함이 주의 뜻을 따르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는가? 주의 뜻을 모르는 자들은 당연히 없지만, 주의 뜻을 아는 자라 할지라도 늘 주의 뜻을 따르는 자리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국강병함이 주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교만할 수 있다는 것을 웃시야 왕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인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완악하고 완고한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잘 하다가도 주의 은혜임을 잊고 교만하게 되는 자들, 그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공의만이 아니라 공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로 오시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는 아모스 선지자입니다. 자신이 기록하고 있지만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 말씀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시온이요,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여로보암 1세의 죄에 대해서도 살펴봤지만,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예배가 아니라 거짓 예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가 없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 이방신을 위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바로 앞 산에 산당을 지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습니다(왕상11:7-8). 성경은 그 산에 대하여 ‘멸망 산’이라고까지 칭하는데(왕하23:13), 성전 이후 산당은 폐해야 할 것이지 결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산당만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거짓 예배일뿐입니다. 심지어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때문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거짓 예배요, 거짓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다릅니다. 다른 선지서들을 보면 남유다 역시 여러 가지 죄악 된 모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배가 아닌 참된 예배가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 2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참된 예배가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거기에 참된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없을 뿐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참된 말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부르짖으신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높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의 포효와 같이 울부짖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천둥이 칠 때처럼 그렇게 나는 소리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무서운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심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자와 같이 포효하심으로, 천둥이 칠 때처럼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내심으로 미리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임박한 재난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라는 경고의 음성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고의 음성에도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립니다.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갈멜 산은 엘리야 선지자가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대결한 장소인데, 북이스라엘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이 마른다는 것은 시편 23편 2절의 말씀처럼 본래는 푸른 풀밭이요, 쉴 만한 물가가 있어 양들이 먹고 마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지만 그 모든 것이 말라 황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로보암 2세 때 놀라운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남부러울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베푸셨다고 해서 그들의 끊임없는 죄에 대하여 묵과하시는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을 멈추시고 부국강병한 나라를 이루게 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죄도 괜찮다고 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분명 회개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해서 죄조차 괜찮다고 여기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에 대해서도 괜찮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쌓고 또 쌓으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요, 특별히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공의 없이 나타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우리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북이스라엘과 같이 거짓된 예배로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단지 공적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로서 우리 자신을 드리고 있는가? 다시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