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금년에도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생명의바다교회는 올해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협력하며 동참할 것입니다.
금년을 시작하면서 저는 읽어야 할 네 권의 책을 정했습니다. 그 첫번째는 존 월튼의 책,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이며, 아브라함 헤셸의 책, ‘예언자들’이 두번째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세번째는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 ‘땅 위의 거룩한 습관’, 그리고 네번째 책은 유진 피터슨의 책, ‘현실,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아브라함 헤셸의 책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로 읽을 계획입니다.
제가 이 네 권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인공지능 비서 제미나이의 추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미나이와 대화를 통하여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특히 지난 해 열심히 읽었던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의 책들에서 얻은 영감을 삶 속에 실천하는데 중점을 두어야겠다고 하자 위의 네 책을 추천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표어를 정할 때 실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세상과 함께 진리를 찾고 복음으로 진리의 증언을 완성하는 구도자들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의 표어는 결국 우리의 신앙을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고 구체화할 것인가를 지향합니다. 앞으로 이 점을 기억하면서 독서도 하고 설교도 할 계획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배운 신앙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것이 올해 우리의 기도제목이고 목표가 되겠습니다.
2. 존 월튼의 제안, 창세기를 다시 읽어 보자
제가 가장 먼저 읽고 있는 책의 저자가 존 월튼입니다. 월튼의 이 책은 창세기 1장을 새롭게 읽자는 제안입니다. 월튼이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이 책의 원 저자가 고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임을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도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이 성경이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며 온 세상 만민을 위한 것이지만, 성경이 씌어진 첫번째 대상은 바로 고대의 히브리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와 세계관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을 받아 볼 1차 독자들이 그들이며 그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창세기 한 부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자기 아들 야곱에게 신부감을 구하라고 조언을 주는 대목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창세기 28:1~5
이삭은 야곱에게 신부감을 구할 때 야곱의 외삼촌 댁으로 가서 그 딸들 가운데서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야곱의 외삼촌은 라반입니다. 라반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어머니의 오빠의 딸이면 사촌지간입니다. 외사촌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결혼의 대상을 찾을 때 외사촌 중에서 찾으라는 권면을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가서 자기 외사촌과 결혼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할 수 없다고 민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가나 외가의 구분이 없이 모두 적용됩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예로부터 동성동본의 결혼금지 문화가 있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결혼 풍습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은 오늘의 우리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현대인의 관점으로 읽지 말고 고대인의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은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 아브라함의 가문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존 월튼은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어보자는 것일까요? 저는 새해 들어 월튼의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 약 30%를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 오늘은 창세기 1장에서 처음 삼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월튼의 글을 요약하고 그 소감을 정리한 것입니다.
3. 태초는 창조의 7일간을 가리킨다
창세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여기서 태초에라는 말은 모든 만물이 시작되는 그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현대과학의 지식을 통해서 우주가 빅뱅이라는 처음 순간에 일어난 대폭발로부터 생겨났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의 안경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 구절 태초에라는 말은 빅뱅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빛이 있으라는 선언은 빅뱅의 대폭발 때 발생하는 강렬한 빛과 유사할 것이라는 상상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방식입니다.
존 월튼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 고대인의 문화와 상식으로 성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이 책,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초에라는 구절은 무슨 의미일까요? 월튼은 그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빅뱅과 같은 어떤 한 순간을 의미한다기보다 천지 창조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태초에’라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베레시트라고 부르는데, 이와 유사한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이 그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에서 네 시작은 ‘레시트’로서 창세기 1장 1절과 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28:1에서도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에서 ‘시작’이라는 말이 ‘레시트’입니다. 욥기 8:7에서 욥의 인생 전반기를 ‘시작(레시트)’이라 부르고, 예레미야 28:1에서 시드기야 왕의 통치 초기 기간을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창세기의 ‘태초’는 7일간의 창조 사역이 진행된 ‘초기 운영 기간’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건을 소개하는 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 1장에서 처음의 창조가 있었고 그 후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2절의 창조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월튼의 주장처럼 태초를 창조의 7일간으로 이해한다면, 창세기 1장 1절은 1장 전체를 요약하는 ‘표제어’입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님이 우주 성전의 기능을 어떻게 세팅하셨는지, 그 초기 경영(태초)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라는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4. 공허와 혼돈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땅이 나옵니다. 아직 빛을 창조하지도 않으시고 땅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땅이 나오고 수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오늘 현대인의 안경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창조를 생각할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는 행위로만 생각합니다. 그것을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은 물질을 만드신 분이시지만, 창세기가 강조하는 것은 더 나아가 그것들에 목적과 기능을 부여하신 운영자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월튼은 창세기 1장 2절의 ‘토후(Tohu)’와 ‘보후(Bohu)’를 분석하며, 창조 이전의 상태가 ‘물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능적 무(Non-functional)’ 상태였음을 증명합니다.
토후(Tohu)의 진정한 의미: “목적 없음”
우리는 ‘혼돈’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흔히 무질서한 물질의 덩어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월튼은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광야와 사막: 신명기 32:10 등에서 ‘토후’는 광야를 뜻합니다. 광야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이 거주하거나 문명을 이룰 수 있는 ‘질서와 목적’이 없는 땅입니다.
우상: 사무엘상 12:21에서 우상은 ‘토후’라고 불립니다. 우상은 나무나 돌로 된 물질적 실체는 있지만, 신으로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토후’입니다.
결론: ‘토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Unproductive) 상태를 뜻합니다.
보후(Bohu)의 의미: “비어 있음”
‘공허’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항상 ‘토후’와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월튼은 이를 기능이 수행될 수 있도록 채워진 구성 요소(Inhabitants)가 없는 상태로 정의합니다.
“좋지 못하다(Lo-Tob)”의 기능적 해석
월튼은 이 관점을 창세기 2장 18절,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선언에 결정적으로 적용합니다.
Tob(좋다)의 의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은 도덕적 완벽함이나 미적 아름다움보다는, 설계된 기능이 제대로 작동(Functioning well)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Lo-Tob(좋지 않다)의 의미: 아담이 혼자 있는 상태를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그의 성격이나 도덕적 결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 즉 ‘인류로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는 기능’이 남자 혼자서는 결코 작동할 수 없는 시스템(Non-functional system)이기 때문입니다.
해결책: 따라서 하와가 ‘돕는 배필’로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시스템을 완성(Functional completion)하는 사건입니다.
5. 창조의 첫 사흘, 기능적 질서
우리는 흔히 창조를 ‘물질의 제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존 월튼은 고대 근동의 문화를 근거로, 창조란 무질서한 상태에 ‘기능’과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과연 첫 사흘 동안 어떤 기능이 세워졌을까요?
첫째 날: ‘시간’이라는 리듬의 시작
첫째 날,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광학적인 ‘빛’의 입자를 찾으려 애쓰지만, 월튼은 본문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낮과 밤이 교차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첫날의 창조는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농경의 주기를 결정하는 ‘시간의 기능’을 우리 우주에 설치하신 사건입니다.
둘째 날: ‘날씨’라는 생존 시스템
둘째 날, 궁창이 만들어져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눕니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당황스럽지만, 고대인들에게 궁창은 비를 조절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존 월튼은 이 대목을 ‘날씨’의 기능이 확립된 것으로 해석합니다. 너무 많은 비는 홍수를, 너무 적은 비는 가뭄을 가져오죠. 하나님은 물의 질서를 잡으심으로써, 인간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기상 시스템’이라는 기능을 작동시키신 겁니다.
셋째 날: ‘양식’이라는 생명의 에너지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라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구의 지각 변동이나 생물학적 탄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땅이 씨를 맺고 열매를 내어 인간과 동물을 먹여 살리는 ‘양식 공급’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첫 사흘은 시간, 날씨, 식량이라는,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3대 핵심 기능’을 셋업(Setup)한 기간인 것입니다.
마무리: 진실은 ‘기능’에 있습니다
존 월튼이 이 책의 5장에서 강조하듯, 창세기는 과학적 발생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 운영 매뉴얼’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8장 22절이 약속하는 낮과 밤, 추위와 더위의 질서가 바로 이 기능들의 영속성을 증명합니다.
성경의 언급이 현대 과학과 다르다고 해서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어떻게(How)’보다 훨씬 중요한 ‘왜(Why)’, 즉 창조의 목적과 기능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창조의 사흘째 되는 날 식물이 창조되었음을 읽으면서 태양이 없으면 광합성을 할 수 없는데 태양이 먼저 만들어진 후에 식물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월튼의 해설을 참고하면 성경이 물질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준비하셨는가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사흘 동안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시간이며, 적정한 날씨, 그리고 양식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인간에게 주시려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만드시고 궁창을 만드시고, 바다에서 육지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편 104:24
6. 다스림은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작업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인간을 지으실 때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아담은 짐승들에게 이름을 불러줍니다. 마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던 것과 같고,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고 땅 아래에 한 곳에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고, 드러난 뭍을 육지라 부르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각 피조물을 부르심으로 그 피조물들이 기능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요, 다스림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이름을 부른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인간도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아담처럼 이름을 부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기능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각 피조물이 자신의 기능을 잘 해내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일을 하라고 지으심을 받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그 일, 피조물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래서 그 피조물이 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낙심한 이웃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 무너진 정의 앞에 ‘공의’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것, 기능을 상실한 물건이나 자연을 아끼며 ‘공존’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선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동역자가 아니라 기능을 잃은 공허와 혼돈 같은 존재가 다시 기능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보기에 좋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과 자녀로 사는 동안에 해야 할 일입니다. 기능을 회복하게 하고 도와주는 것, 그것이 사역이고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