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을 돌아보며....
1972년 1월 31일 육사에 첫발을 디딘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정말 빨리 지나갔다.
스무살의 앳띤 얼굴로 입학하여 어리둥절하면서 시작한 군 생활을 36년에 걸쳐서 군복을 입고 지내다가 전역을 하였다.
그리고 민간인으로 바뀌어 이런 일 저런 일 하다가 또다시 14년이 지났다.
그래서 20살의 생도, 임관 후 소위로 시작하여 육군 준장까지 다양한 직책과 일을 하다가 지금은 70나이에 들어서 노인회에 가입하면서 노인대열에 합류하였다.
스물여덞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하여 신혼생활을 즐기기도 전에 어느새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40을 넘고 손자 손녀들 넷을 두었고,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다보니 벌써 외손녀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할아버지와 마냥 놀아주지도 않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누나 두 분과 큰 매형도 돌아가시니 이제는 사람이 살다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군 생활도 열심히 하였고, 전역 후에 일반회사 직장에 들어가서 일도 하고 용돈을 버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이제는 남에게 직장을 구걸할 일도 없고 알아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군에 들어가서 젊은 병사들에게 설교를 하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조그만 교회를 짓고 제주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며 전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목회자가 되었으니 누가 우리 인생을 예측하며 살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세월이 그렇게도 빨리 지나갔듯이 앞으로 남은 세월도 또 그렇게 빨리 지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제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계획을 세워서 이 세상을 떠날 때 미련 없이 떠나도록 준비하고자 한다. 계획을 세웠다고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래도 계획을 세우며 살았던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70, 80, 90대를 준비하여 살고자 한다. 그러다가 복이 많으면 100세도 넘겨서 살 수도 있고.....
그동안 50년 일기를 쓰다 보니 그래도 지나간 날들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우리 새얼 동기생들께 지난 50년을 조금이나마 돌이켜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50년 동안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몇 날을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지난 14년 전에 냈던 <나는 행복한 군인이었다>의 일기문에 이어서 지난 14년의 일기를 모아서 제 2편을 내고자 한다.
50년을 같이 지낸 새얼 동기생들께 뭔가 좋은 선물을 남기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모두 생각하는 길이 달라서 조금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난 50년을 돌이켜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크 의미를 두고자 한다. 나와 가까운 동기생들도 있고, 그동안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소원한 동기생들도 있지만 그래도 군 생활이라는 한배를 탄 전우들로서 누구나 차 한 잔 마시며 지난 날들을 얘기하고 싶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듣고도 싶다.
지나간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돌이키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성이 있다. 군 생활하면서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조금 멀어지기도 했지만 지금 와보니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동기생들은 멀게도 느껴지다가 만나서 어울리다 보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제 70에 들어서면서 지난 날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벗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다. 모두 더 가까워지도록 힘써야 한다. 옛날 같이 흘렸던 땀이 이제는 끈끈한 정으로 변하여 하나로 똘똘 뭉치는 우리 동기생들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나의 살아왔던 모습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지면이 제한되어 50년 일기중 10년에 하나씩만 골라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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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1일(화). 가입교 식에서 선배들의 환영
정각 6시가 되자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강당에서 가입교식을 하였다. 늠름하고 멋진 생도 대장님의 훈시는 내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오후에는 3시간 동안 육사를 견학하였는데 이렇게 여러 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규모가 큰지는 미처 몰랐다. 특히 군사박물관 견학은 새삼 나를 놀라게 하였다. 다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관계로 발걸음을 돌려야 해서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정식으로 입교한 후에는 얼마든지 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열장에 가서 다시 가입교식을 했다. 상급생도들이 환호를 울리며 환영해 주었다. 얼떨떨하였지만 들뜬 기분과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도 쓸 것이 많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펜을 놓는다. 취침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1976년 3월 26일(금). 육사 졸업
비가 올 것 같더니만 기어이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모두들 실망했다. 다행히 많이 내리지는 않아서 예정대로 오전 10시부터 행사가 시작되었다. 1부 행사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만 참석하고, 다른 식구들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2부행사에 참석하였다. 난생 처음 대통령을 비롯한 귀빈들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을 맛보았으나 대통령의 맏딸인 근혜양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섭섭하였다.
임관장을 받고 마지막 퍼레이드를 마치고 재학생들의 멋있는 분열이 끝난 후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2부 행사에 들어갔다. 가족들이 들어오지 않은 관계로 얼마를 지체하다가 대통령이 떠나가시고 난 후에 가족이 입장하여 2부 행사를 시작하였다. 나의 계급장은 전진덕 교관님이 달아 주셨다. 20년 후에 장군이 되면 찿아오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2,3학년 생도들이 지환을 끼어주고 떠나갈 때는 무척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부터 화랑대의 별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차중령님의 독특한 목소리와 함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순식간에 별이 형성되면서 우리 졸업생들은 다이야몬드를 만들었다.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 교훈제창이 끝나고 재구상 앞에서 재구가를 부른 뒤 선배님들에게로 뛰어갔다. 29, 30, 31기 선배님들이 축하해주는 가운데 드디어 졸업식은 완전히 끝났다. 졸업 후에 느낀소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가족석으로 갔다.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 누나, 매형, 작은누나, 작은 매형, 철수형, 이모, 큰어머니, 중수 형, 남숙이 누나, 그리고 조카 네명이 나의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참석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헌희와 윤희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참석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 재교생들이 만들고 있는 도열코스로 부모님과 가족들을 모시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주먹세례가 들어오고 모자를 누르면서 잘 가라고 환송해 준다. 이제 정말 졸업을 하나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흐뭇해 하셨으며, 큰 누나는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계속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마지막 나의 관물인 휴가백을 들고 나오니 생도대 광창에서 광춘이와 선기가 멋있게 담배를 피우며 잘가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한바퀴 돌고 드디어 학교 문을 나왔다. 4년 동안 정들었던 육사를 이제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멋있는 육군소위로 새 출발을 한다. 진짜 군인이 될 것이다. 이제 멋있는 야전 군인이 될 것이다. 저녁에 명동성당 입구에서 헌희와 맥주를 몇 잔 마시고 “나 때문에 절대 울지 말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부디 멋있는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
1987년 7월 16일(목, 비 온 뒤 맑음). 대대장 취임
오늘은 아마 나의 군 생활에 있어 무척 중요한 하루가 될 것 같다. 대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예상보다 빨리 대대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오전에 사단장님께 보직 신고를 드리고, ‘포를 잘 쏘라’는 것과 ‘사고를 근절하라’는 두 가지의 강조 사항을 들었다. 역시 군대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대에 정성을 많이 쏟으시는 분들인 것 같다. 동기생과 가족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가능한 이런 자리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 현재까지 해 왔던 대로 계속하자. 둘째, 전임자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고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자.
이제는 500명을 지휘하는 대대장이다. 629포병대대의 모든 지휘권을 행사하여 부대의 성패에 대한 책임을 진다. 부하들은 나의 말 한마디에 복종하며 따를 것이다.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 629대대를 사단에서, 전군에서 가장 우수한 대대로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지식과 나의 정열을 합하여 반드시 싸워 이길 수 있는 부대를 만드는 것이다.
저녁때는 부대에서 자면서 업무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두손모아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1994년 2월 20일(일, 흐림). 아버님 운명
아버님께서 점점 숨이 가빠지신다. 몸에 힘이 빠지시고 손발이 점점 식어간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새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하신다. 아내가 간밤에 상복을 입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후 2시에 딸 지애를 데려다 주고 아버님의 증세를 봐서 이제 운명하실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부대에서 나의 일을 정리하여 인계하고 큰일을 치를 준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님께서 손목을 꼭 잡으신 후 빨리 가보라고 손을 저으신다. 가족이 보는 가운데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기도드렸다. “아버님, 하나님을 믿으시기 때문에 천국에 가실 거예요”라고 말씀드리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리고는 대전으로 향하였다. 이것이 살아생전에 본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전 복수동 아파트에 도착하여 집에 전화를 하니 2시 35분에 운명하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김영래 중령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송석호, 김창규 소령과 함께 장성으로 향하였다. 아버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살아계실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례준비를 하였다. 사람들은 아버님께서 우리 가족을 생각하셔서 시간을 맞춰 서 세상으로 가셨다고 한다.
2007년 11월 30일(금, 맑음). 전역신고
인도 파키스탄 군사옵저버 단장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 채 드리어 오늘 전역식을 하였다. 엄청나게 큰 변화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전역신고는 쉽게 이루어졌다. 12명의 장군들이 11시 30분에 장관님께 신고를 하고 국방회관에서 오찬을 하였다. 신고할 때 나에게 “잘 안되더라”는 한마디가 인도 파키스탄 옵저버 단장에 대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점심식사 후에 장관님께 잠깐 뵙고 말씀을 드릴려고 하였으나 결국 장관 보좌관의 만류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한번만 더 고려해 줄 수 없느냐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상관의 심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고 언로를 차단하는 것은 부하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 같다.
오후 4시에 육군참모총장님께 신고를 드렸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신고를 한 것이다. 평정제도를 바꿀 것과 ‘강한 군인,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나의 소신을 말씀드렸다. 합참 차장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뒤에서 많이 힘써 주셨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은 마지막 군복을 입은 매우 뜻깊은 날이다. 너무나 갑자기 다가온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어차피 이제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고 앞길을 계획해야 한다. 군과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
시드니 대령과 헬렌집사를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하였다. 항상 나를 위하여 뒤에서 기도를 많이 해주시는 분들이다.
오늘 딸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전역하는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인 것 같다.
윤영수 장군님께
아빠! 오늘이 아빠 36년 군 새활의 마지막 날이네요. 기분이 무척 허전하고 서운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아빠 그동안 너무나 수고 하셨어요! 군인이란 직업이 매우 아빠에겐 잘 어울리고 무척 일을 사랑하셨던 아빠지만 그동안 힘든 일도 많으셨을 거예요. 그동안 아빠 품에서 우리 가족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전역하시고 조금은 여유롭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해요.
아빠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많이 존경하는 윤장군님! 하나님께서 아빠한테 더 좋은 길을 준비하시리라 믿습니다. 똑똑한 재원이 내년에 고시 합격하고, 돈 잘버는 딸도 엄마 아빠한테 잘 할 수 있는 사람만나서 결혼할 거고 앞으로 좋은 일들도 많이 있잖아요.
전역식도 못하고 군복을 벗어야 하는 아빠 심정이 정말 섭섭할거라 생각되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성실한 아빠시니까 잘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빠가 군인이란 이유로 많은 혜택을 누렸고 든든한 버팀목이엇다고 생각되요. 이제 재원이랑 제가 엄마, 아빠의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드릴 테니 마음 편히 군 생활 마감하시고 앞으로 우리 가족 더욱 똘똘 뭉쳐 행복하게 지내요. 아빠 사랑해요.
딸 지애드림
2011년 5월 11일(화, 맑음). 2지역대 방문
*조은 시스템 주한미군 사업본부장으로 근무했던 시절 이야기
오랫동안 계획하였던 4지역대(대구지역)를 방문하였다. 3개월 만에 방문을 하는 것이다. 1달에 한번 씩 방문하던 일정이 그동안 제안서 작성과 신학대학원 학기말 시험 준비로 미루어 진 것이다. 비록 내가 가지 않아도 아무 일 없이 각 지역대가 잘 운영된다 하여도 한달에 한번은 본부장이 모든 현장을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벽예배를 마친 후에 광명역으로 향했다. 아포역에서 내려서 김인규 지역대장을 만났다. 반갑게 맞아준다. 나와는 둘도 없이 귀한 인연을 맺게된 육사 동기생이다. APO DRMO에 가니 김대영 지대장과 4명의 대원들이 또한 반갑게 맞아준다. 작년 말에 open하여 지난 6개월 동안 근무체제를 정착하고 어려움 없이 잘하고 있다. 김 지대장의 역할이 크고, 지역대장, 지대장이 많이 지원을 하였으며, 본사에서 필요한 지원을 다한 결과라고 본다.
왜관 Camp Caroll도 전보다 많이 변하였다. 김인술 지대장이 지금까지 어느 지대장보다도 가장 관리를 잘 하고 있다. 전 직원들의 두발 손질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비록 본부장이 방문하기 때문에 이발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한 일인 것이다. 직원들이 잘 따르도록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포항지역이 가장 모범적이었다. 김인규 지역대장이 이렇게 변화를 시킨 것이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개인 사정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대단한 능력이었다.
저녁에는 포항 이광하 부장이 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하였다. 거절하였지만 완강하게 고집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포항 청룡회관에 짐을 풀고 바닷가를 거닐며 한 시간 동안 김인규 지대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 때문에 많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기도로 많이 도와주고 한번쯤은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2022년 2월 3일(목, 맑음). 동기회 계획 수립
오늘 새롭게 주간 계획을 수립하였다.
비록 계획대로 다 보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가 있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동기회 사업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로 하였다. 동기회장으로 선발 되었으니 그래도 1년 동안 동기회를 위하여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 5~6가지 사업을 매월 한번씩 zoom회의를 통하여 분석하며 동기들이 서로 관심을 갖고 지내도록 하자. 그냥 잠자는 동기회가 아니라 뭔가 움직이는 동기회를 만들자. 그리고 우리 동기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또 우리 동기들의 안전을 위하여 모든 동기생들이 기도에 동참하도록 요구하도록 하자. 동기생 중 어려움에 처해있는 동기들을 찾아서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관심이 바로 사랑이다.
오후에 아내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술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사실 술을 끊은 지가 오래되어서 별 관심이 없었지만 집 근처에 있는 것이라 한번 가보았다.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술을 비치하고 술 만드는 절차를 보여주기도 한다. 누군가 이렇게 술을 주제로 이 많은 술을 수집하여 전시관을 만드는데 대단한 정열을 기울였다.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술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술은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이어서 오후에 정승윤 동창(광주고)을 만나 차를 마셨다. 부인이 딸을 찾아서 육지에 가있고 혼자서 가게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가까이에 친구가 있어서 언제나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첫댓글 어제 이동오 중대회장의 권유로 동기회 홈피를 보게 되었음. 사실 일기를 그토록 오래 기록하는 것은 실로 꾸준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윤회장의 노력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오호근 동기님 첫 댓글 감사합니다. 행여 나를 자랑하는 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 동기님도 글을 하나 올리세요.
50년 일기 쓰기를 통해 매일 자기 성찰을 하시면서 생각들을 잘 다듬으셔서 표현이 매끈하고 훌륭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낙흥이 고맙습니다. 내 일기에 낙흥이 이야기도 몇번이나 나오는데...
낙흥이도 글을 한번 써서 올려주기 바랍니다.
윤회장님의 성실과 끈기는 알아줘야합니다. 나도 졸업이후에도 일기를 계속 써오다가 전역하면서 뜸해졌지요. 힘들 때 일기를 쓰면 편안해지고 새로운 힘이 나지요. 참 좋은 습관이 일기쓰는 것이지요. 일기를 정리하여 책까지 내셨으니 대단합니다.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게해줘서 감사합니다.
영찬이 감사합니다.
저도 그래서 일기를 계속 씁니다. 일기는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새롭게 다짐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일기를 쓰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하루를 다 채우지 않은것 같아요.
영찬이도 글을 기고하기 바랍니다. 생각나는대로 한번 써 보세요. 멋있게 살아가는 영찬이에게 또 한수를 배우고 싶기도 하고.
벌써 70이구나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이를 잊고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70부터라고 하잖아요. 꼭 기고하기 바랍니다.
넵
윤영수 회장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오랫만에 카페에 들어 왔네요.
칠순 나이에 접어 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조직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최병은 회장님, 격려말씀에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부족하지만 그래도 맡겨주신 귀한 직책이니 최선을 다할까 합니다.
마음을 통하게 하는 글을 모으고자 합니다. 많이 호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회장님기고문 부탁합니다.
윤회장 일기쓰는 끈기하고 달리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ᆢ
집념의사나이라 할 수 있지요
본받을 만한 좋은 습관입니다
동기회장으로서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구요
기왕지사 노도에에서 맡았응께 여타동기분들께 누가 않되게 지혜를 모아 좋은 결실 맺어 봅시다 ^^
국종이 늦었지만 댓글 고맙습니다. 내일기가 국종이에게는 새삼스럽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많이 지냈지요.
생도때 국종이 집에 갔을 때 국종이 부모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그때 동네 운동회때 달리기 시합도 나가서 냄비도 선물로 받았지요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서 이제 70에 이르렀으니 가는 세월 어찌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살날이 많이 남아있으니 시간을 아껴서 더 멋있게 살아갑시다. 그러다가 하늘나라 가면 되지요. 2022년, 육사 입교 50주년, 뭔가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홈피에 들어와서 주옥같은 일기를 읽어보았네요.
참군인 장군 예편, 직장생활, 목회자로의 변신 등
드라마틱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윤목사님, 사랑합니다~
남당 조연호님 감사합니다.
우리 동기생들 모두다 저처럼 다양하게 열심히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인생 더 멋있게 살고 싶습니다만 꼭 그렇게 되는 것만도 아니겠지요. 최선을 다하여 살면 가치있는 인생이 되리라 믿습니다.
운회장님!
멋진삶과 진지한 인생관을 느끼며 높은산과 깊은물을 만난 느낌입니다. 더더욱 근자의 모습을 보고 들으며 참좋다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옵니다. 백곰으로 시작하여 생도연대본부까지 그리고 삼각지에서의 인생길에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길을 걷고 싶은 바램입니다.
샬롬
정기현 박사님, 과분한 칭찬에 감사합니다. 그사이에 육사 입교 50주년 행사가 지나가 버렸네요.
지난 세월 생각해보면 그냥 덧없이 지나가기만 한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 우리인생을 그리고 색칠을 하면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모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가하면 한시도 흐트러지게 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박사님은 정말 멋있게 살아온 것 같고요. 저도 남은 삶을 더 귀하게 살아갈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존경합니다.
김충일 목사님 감사합니다. 벌써 50년이 지났습니다. 나의 일기도 점점 고색 창연해 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가는 나의 일기를 모아서 제 2권을 발간할까 합니다. 그때는 김충일 목사님 이름도 넣겠습니다^^
오래전에 올리신 글인듯 한데, 놓치고 못 보다가, 오늘에서야 읽어 봤습니다.
담담히 아주 잘 쓰셨네요.훌륭하게 살으셨네요.
50년간 일기를 빼 먹지 않고 쓰다니. 대단하시고요.
지난 번에 사모님이 쓰신 글도 본 적 있는데...사모님도 글을 아조 잘 쓰셨드만요. 작가 지망생?
보고 많이 배우고 따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