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명찰 진주 성전암 전경. 왼쪽은 무량수전. 오른쪽은 요사채이다. |
진주 여항산(艅航山) 중턱에 자리한 성전암이 화마로 소실된 법당을 4년 만에 ‘문화재급’으로 복원하고 회향법회를 봉행한다. 성전암(주지 성공스님)은 11월16일 오전11시 ‘법당 낙성및 경로대잔치’를 갖고 천년명찰(千年名刹)의 명성을 계승하는 대장정에 박차를 가한다.
산세가 험한 여항산은 예로부터 으뜸가는 수행처이자 기도처로 유명하다. 신라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전국 각지에 사찰을 창건할 당시 ‘성인이 살고 있는 암자’라는 의미에서 성전암(聖殿庵)이란 사명(寺名)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가 신라 헌강왕 5년(879년)이니, 성전암은 개산(開山) 1135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량이다. 성전암이 자리한 곳은 명당으로 손꼽힌다. 옥룡사에 머물 당시 수백여 명의 제자를 두었던 도선국사가 명산명지(名山名地)에 도량을 창건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전암이다.
후대에 길이 남을 전각 조성
인조대왕 100일 기도 올린 도량
11월16일 법당낙성 및 경로잔치
백두대간을 끼고 내려온 백두산의 정기가 하나는 서울 삼각산에 머물고, 또 하나의 지맥이 내려와 맺힌 여항산에 성전암을 창건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천하 명당임을 증명한다.
성전암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仁祖)와 인연이 깊은 도량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외갓집 인근의 여항산 성전암에 머물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야인(野人)으로 전국을 떠돌던 능양군이 석 달 열흘간 국난 타개를 위해 정성을 다한 것이다.
성전암에는 인조대왕지위(仁祖大王之位)라는 위패가 봉안됐고, 인조대왕각(仁祖大王閣)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비록 숭유억불 시대였지만, 임금이 기도를 올리고, 위패까지 봉안한 성전암은 유생과 백성들에게 신성한 공간이었다.
두 번의 화마에도 손상되지 않은 아미타부처님. 조선 인조 22년 조성되어 350년이 된 부처님이다. |
군신(君臣)의 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 매년 정초 하루 전이면 관원들과 주민들이 찾아와 밤을 새웠다. 새해 첫날 인조대왕각에서 먼저 예를 올린 후 마을로 돌아가 차례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도 전통이 이어져 매년 연말이면 성전암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성전암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인조 22년(1664년)에 조성했다”는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정확한 조성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목조여래좌상(아미타불)은 두 번의 큰 마장(魔障)에도,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010년 5월 방화로 법당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총무 도안스님이 불 속에 뛰어들어 부처님을 모시고 나왔다. 도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을 불 속에서 꺼내야 겠다는 일념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에 앞서 한국전쟁 때도 큰일을 겪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투기가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발사해 전각 대부분이 불타거나 무너졌다”면서 “폭격이 끝난 뒤에 사찰에 올라가니, 다른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부처님 한분만 온전하게 남아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인조대왕 위패를 모신 인조대왕각. |
신이(神異)한 일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도량을 청소하고, 조그만 집을 집어 부처님을 모셨다. 2010년 화마를 피한 목조여래좌상이 바로 그 부처님이다.
두 차례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목조여래좌상은 올해로 조성 350년을 맞이한다. 높이 60cm, 폭 43cm의 작은 규모이지만 인자한 상호(相好)가 인상적인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의 아홉 가지 수인(手印) 가운데 하품하생(下品下生)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돼 있는데, 조선 중기 불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어, 국보 또는 보물로 승격이 필요하다.
2010년 화마를 겪은 후 주지 성공스님을 비롯한 성전암 대중이 낙담하지 않고 새로 지은 법당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기 때문이다. 화재 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었지만, 목조여래좌상이 아미타불이기에 전각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성공스님은 무량수전을 지으면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불자들에게는 수행과 신행의 공간이면서 국가적으로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 법당으로 조성하겠다는 원력에 따라 심혈을 기울였다. 성공스님은 “내 생전에 법당을 두 번 지을 수 있겠느냐”면서 “부처님 모신 전각을 여법하게 제대로 조성하겠다는 원력 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목을 껍질만 대략 벗겨 다듬은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는 ‘도랑주’ 방식으로 무량수전 기둥을 세웠다. 12그루의 국내산 느티나무를 다듬어 기둥으로 만들었다. 여느 기둥과 달리 예산도 10배 이상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기둥에 맞는 자연석을 구해 초석(礎石)을 만들고,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 크레인을 동원해 기둥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사진 왼쪽부터 2010년 불길 속에서 아미타불을 모셔 내온 도안스님, 4년간 법당 등 건축불사에 혼신을 다한 김희산 목수, 대중과 근로자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한 공양주 보살. |
무량수전 건축은 문화재보수기능자 고(故) 김창희 대목수의 제자인 김희산 목수가 맡아 혼신을 다하고 있다. 스승과 함께 불국사, 직지사, 월정사, 낙산사 불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김희산 목수는 지난 4년간 성전암에 머물며 불사에 전념하고 있다. 성공스님은 “험준한 산세로 목재 운반을 비롯해 난관이 많았지만 김희산 목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신심(信心)과 열정으로 정성스럽게 일을 해 주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성전암은 법당 낙성식을 계기로 기도도량의 위상을 강화할 방침이다. 본래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유명하기에, 기도 환경 조성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법당 뒤 절벽 아래에는 나한상을 봉안해 놓았다. 전각이 있던 공간에 앉아 “내가 바로 나한이다”라는 원력으로 기도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성공스님 뜻이다. 스님은 “물론 절을 하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부처님도 3000년 전에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을 전했다”고 강조했다.
성공스님은 “한국전쟁과 방화라는 커다란 아픔을 두 번이나 겪었지만, 온전하게 법체를 나투신 부처님의 신이함을 보여준 도량이 성전암”이라면서 “법당 낙성식을 계기로 불법을 전하고, 중생들의 안심도량(安心道場)이며 귀의처가 되도록 하겠다”고 발원했다. 화마를 딛고 여법한 도량의 사격(寺格)을 다시 갖춘 성전암이 서부 경남의 대표사찰을 넘어 전국 제일의 기도도량으로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 성전암 주지 성공스님
“복원불사는 당연한 일…동참한 모든 분들에 감사”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소실된 법당을 새로 짓고, 도량을 정비하기 위해 지난 4년간 혼신의 노력을 다한 성전암 주지 성공스님이 회향을 앞두고 소회를 담담하게 밝혔다. 성공스님<사진>은 “4년이 짧다고 하면 짧을 수 있지만, 저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면서 “사실 속이 많이 탔다”고 말했다.
성전스님은 법당과 요사채를 새로 짓고, 종각을 옮기는 등 도량을 일신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 다녔다. 어려움도 많았다. 진주시가 사찰 소유 임야의 종교용지 변경을 불허해 해인사 스님, 신도들과 함께 항의법회를 하기도 했다. 매일 시청 앞에서 예불을 올리고 복원불사의 원만성취를 기원했다. 스님의 정당한 주장에 결국 시청도 입장을 바꾸었다.
복원불사의 또 다른 난관은 예산이었다. 시골 절이다 보니 화주(化主)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스님은 총 20억 원 가량의 예산을 투입해 차질 없이 불사를 추진했다. 경상남도와 진주시의 도움이 컸다. 성공스님은 “법당을 복원하고, 도량을 정비하는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면서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다해 동참한 시주(施主)들과 총무 도안스님, 목수, 공양주 등 대중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성전암 복원 불사에는 불자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전각이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우리 절을 복원해야 한다”면서 사발통문을 돌리고, 스스로 성금을 모았다.
이반성면에 거주하는 면민 230가구가 조금씩 정성을 모아 주지 성공스님에게 복원 성금을 기탁했다. 주지 성공스님은 “그분들이 250여만 원을 모아 절로 갖고 오셨다”면서 “불자들은 물론 주민들의 정성에 힘을 얻어 복원불사를 더욱 힘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공스님은 혜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출가 전에는 대불련과 청년회 활동을 했다. 제주 약천사 주지와 남원 운지사 주지, 해인사 학예실장 소임을 보면서 탐라대 사회복지학과와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약천사와 성전암 주지 부임 후 지역 스님들과 서귀포불교대학과 진주불교대학을 설립하는 등 재가불자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진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장으로 취임해 전국 최초로 ‘찾아가는 장애인 보장구 수리센터’와 ‘장애인 가전제품 수리센터’를 만들고,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참조은도서관’을 개관하는 등 사회복지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경남불교사회복지협의회장, 진주시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진주경찰서 경승실장, 창원법원 보호관찰위원, 총무원 호법부 상임감찰을 역임했다. 2010년 사단법인 마하어린이재단을 설립, 대표이사를 맡아 마하어린이도서관과 마하다문화교육센터를 개원하는 등 어린이와 다문화가정에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두 번의 화마에도 손상되지 않은 아미타부처님. 조선 인조 22년 조성되어 350년이 된 부처님이다.
첫댓글 천년고찰 성전암 법당 낙성식에 우리모두 동참합시다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시길 발원합니다
경로잔치를 같이 하신다 하니 일손도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우리진주불교대학포교사회가 가서 거들어야 하는건 아닌지요.....?
좋은 의견입니다.ㅉ ㅉ
ㅈㅈ
ㅈ
역시나 정진행 보살 이십니다
그날 진주불교대학 포교사회가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도록 함 해봅시다
계획 세워봅시다
꼭 동참하여 주세요.
위대한 우리에 유산을 잘 보존하게 해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