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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늦게 깨달은 어머니의 사랑
오월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젖어드는 이름,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몰랐습니다.
밥은 먹었느냐는 말이
그저 흔한 안부인 줄 알았고,
늦지 말라는 말이
그저 잔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문밖을 바라보며 기다리시던 마음도,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시던 눈빛도,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시던 밤들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부르면 대답해 주시고,
찾아가면 반겨주시고,
돌아서면 또 걱정해 주시는 분으로
영원히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손 한번 꼭 잡아드리지 못했고,
고생 많으셨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너무 아껴버렸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뒤에야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밥 한 그릇이 사랑이었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기도였고,
어머니의 기다림이 평생의 희생이었다는 것을.
어머니의 굽은 허리는
자식들을 업고 살아오신 세월이었고,
어머니의 거친 손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닳아버린 사랑이었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왜 조금 더 다정하지 못했을까요.
왜 바쁘다는 말로 미루고,
다음에 하겠다는 말로 지나쳤을까요.
이제 와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원하신 것은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싼 선물도 아니고,
대단한 효도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더 찾아오는 발걸음,
한 번 더 걸어드리는 전화,
따뜻하게 잡아드리는 손,
진심 어린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 쉬운 말을
왜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못했는지
가슴 깊이 후회가 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지만
어머니의 사랑만큼 말없이 깊은 사랑은 없습니다.
받을 때는 당연한 줄 알고,
떠나신 뒤에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계시던 집은
그저 집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품이었고,
세상에 지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이제 그 문을 열어도
버선발로 반겨주시던 어머니는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리 불러도
“왔니?” 하고 대답해 주실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더 아픕니다.
어버이날의 꽃 한 송이가
가슴에 사무칩니다.
살아계실 때 달아드리지 못한 카네이션,
살아계실 때 드리지 못한 감사의 말,
살아계실 때 다하지 못한 효도가
이제는 후회가 되어 마음에 남습니다.
어머니,
그때는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어머니의 희생이 얼마나 고요하고 거룩했는지
너무 늦게야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못다 한 효도는
이제 눈물로밖에 드릴 수 없지만,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은
제 삶 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마음으로
더 따뜻하게 살겠습니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사랑으로
내 가족과 이웃을 더 아끼며 살겠습니다.
어머니,
하늘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이 못난 자식이
이제야 깨닫고
이제야 고백합니다.
어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합니다.
오월이 오면
저는 다시 어머니를 부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 속에서,
갚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늦게 깨달은 후회를 안고
오늘도 조용히 불러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전기를 생각하면,
세월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어릴 적에는 전기가 지금처럼 귀하고 정교한 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불을 켜고, 기계를 돌리고, 더우면 선풍기를 틀고, 추우면 난방을 하는 데 쓰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된다. 세상을 바꾸어온 힘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위대한 것이 전기였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같은 양의 전기를 써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백 와트를 써도 불빛은 어딘가 침침했고, 밝음보다 열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적은 전기로도 훨씬 밝고, 훨씬 오래가고, 훨씬 정교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빛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옛날에는 많은 전기를 들여 겨우 환하게 만들던 것을, 이제는 적은 전기로도 훨씬 맑고 환한 빛을 얻는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류가 자연의 힘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일처럼 느껴진다.
전화기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들고 다니기조차 버거울 만큼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다. 전기도 많이 필요했고, 기능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기계 하나가 손안에 들어온다. 그 안에서 전화도 하고, 글도 읽고, 세상 소식도 듣고, 길도 찾고, 빛도 비추고, 필요한 정보도 얻는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면서도 전기를 적게 쓴다는 것이 놀랍다. 작아졌는데도 더 강해졌고, 가벼워졌는데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과학이라는 것이 결국은 적은 힘으로 더 큰 가치를 이루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IT도, 반도체도, 데이터도 모두 전기 위에 서 있다. 전기가 없으면 컴퓨터도 멈추고, 통신도 멈추고, 데이터도 흐르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정보와 기술과 산업들이 사실은 모두 전기의 길 위를 지나가고 있는 셈이다. 만약 전기를 다루는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편리함도, 연결됨도, 빠름도 모두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변화를 길게 설명할 때보다, 전기 하나를 생각할 때 더 분명하게 미래가 보인다. 전기를 더 적게 쓰면서도 더 큰 효용을 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본질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만드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더 지혜롭게 쓰는 일이다. 같은 힘으로 더 큰 가치를 만들고, 같은 자원으로 더 많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발전일 것이다.
앞으로 직업은 더 다양해지고, 세상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길 가운데서도 결국 중심에는 전기를 다루는 일이 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 전기를 만드는 사람도 중요하고, 전기를 저장하는 사람도 중요하며, 전기를 통해 반도체를 만들고 데이터를 움직이고 기계를 작동시키는 사람도 중요하다. 겉으로는 분야가 달라도 결국은 모두 하나의 뿌리로 이어진다. 전기는 이제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문명을 지탱하는 바탕이 되었다.
예전에는 기계와 전기가 비슷한 무게로 느껴졌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기가 훨씬 더 많은 갈래로 뻗어나가고 있다. 전력, 배터리, 반도체, 통신,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전기차, 자동화, 로봇까지 모두 전기의 세계 안에 있다. 전기는 단지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더 편리하게 하고 더 밝게 하고 더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것도 전기이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깝게 이어주는 것도 전기이며, 무겁고 복잡한 일을 가볍고 빠르게 바꾸는 것도 전기다. 그러고 보면 전기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해 왔다. 드러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힘, 말없이 문명을 밀어 올리는 힘, 나는 전기에서 그런 품격을 느낀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대를 생각할 때면 이런 마음이 든다. 미래는 전기를 얼마나 많이 쓰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기를 얼마나 유용하고 지혜롭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같은 전기로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내고, 더 적은 소모로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과학이고, 산업이고, 인류가 나아갈 방향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길을 먼저 이해한 사람들이 세상의 앞자리에 서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이 귀해진 시대.
옛날에는 이런 풍경이 흔했다.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 길모퉁이에서 미끄러져 넘어진다.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쓰라려 울먹이며 집으로 돌아오면, 문 앞에서 맞는 아버지의 첫마디는 정해져 있었다.
"자전거는 어쨌냐. 부러진 거 아니냐."
아이의 상처보다 쇠붙이의 안위가 먼저였다. 그 말이 매정해서가 아니다. 그 시절 자전거 한 대는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매 장만한 귀한 물건이었고, 한 번 부러지면 쉽게 바꿀 수 없는 살림의 큰 축이었기 때문이다. 물건이 사람보다 귀하던 시대. 정확히 말하면, 물건을 지켜야 사람도 살 수 있던 시대였다.
지금은 어떤가. 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절뚝이며 들어오면,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딱 한 가지다.
"어디 다쳤어? 괜찮아?"
자전거가 휘어졌는지 바퀴가 빠졌는지는 그다음이다. 아니, 그다음도 아닐 때가 많다. 자전거는 언제든 다시 살 수 있지만, 아이의 무릎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안다. 묻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은 보는 것이 바뀌었다는 뜻이고, 보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은 마음의 저울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자전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밥그릇을 깨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 그릇이 얼마짜린지 아느냐." 지금은 유리 조각 앞에서 먼저 나오는 말이 "발 조심해라"다. 접시보다 발바닥이 먼저다. 옷에 김칫국물이 튀어도 "옷 버렸다"가 아니라 "뜨거운 데 데지 않았냐"고 묻는다. 차 문에 손가락이 끼었다는 소식에 "차 긁혔냐"고 묻는 사람은 이제 없다. 모두가 사람의 안부부터 묻는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물건의 값보다 사람의 값을 먼저 셈하는 쪽으로 옮겨왔다. 그 '어느 사이'가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던 어느 해였을 것이고, 둘러보니 물건은 흔해지고 사람은 줄어들던 어느 시기였을 것이다. 귀한 것이 옮겨갔다. 저울 한쪽에는 물건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 반대편 사람 쪽이 내려앉는다.
나는 이 변화가 조용하지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일이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역사의 대부분에서 당연하지 않았다. 아들보다 자전거가 먼저 눈에 들어오던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시대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었을 뿐이다. 먹고살기 벅찬 시절의 아버지는, 자전거가 부러지면 아들의 내일이 불편해진다는 것까지 헤아리느라 안부의 순서를 뒤로 미뤘던 것이다. 그러니 옛 아버지들을 탓할 일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괜찮아?"라는 말을 먼저 내뱉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려 도달한 자리인지는 기억해두고 싶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자전거부터 살피지 않아도 되는 사회, 유리가 깨졌을 때 조각값을 계산하지 않고 발부터 걱정하는 사회. 이 사소한 말의 순서 하나가, 우리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시대가 팍팍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관에서 흙 묻은 아이를 맞으며 "다치지 않았냐"고 먼저 묻는 오늘의 부모들을 보면, 나는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분명히 좋아졌다고. 사람이 귀해진 시대. 이만한 시대가 인류 역사에 그리 흔했을까 싶다.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누가 회의해서 정하는 것도 아니고, 법으로 못 박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면 다들 비슷하게 씁니다. 쓰던 말이 사라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까지 자연스럽던 말이 오늘은 입에 걸립니다. 말이 먼저 늙는 게 아니라,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달라진 겁니다.
예전 거리를 떠올려 보세요. 길모퉁이 가게에서 "아가씨, 이리 와 봐" 하던 소리가 있고, 시골 장터에서는 "총각!" 하고 사람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처녀"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오갔습니다. 무례하려고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 시절엔 나이가 어떻고,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어느 집 자식인지, 그게 사람을 설명하는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말은 늘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부터 붙잡거든요.
그러다 도시가 커지고 회사가 생기고 사무실 책상이 놓입니다. 그 무렵엔 "미스 김", "미스 리"가 꽤 그럴듯했을 겁니다. 지금 들으면 어딘가 우스운데, 그때는 근대적이고 세련된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한복 자락의 세상에서 블라우스와 구두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새 시대의 말투를 흉내 내고 싶었습니다. "미스 김"에는 영어 냄새만 든 게 아니라, 도시 사무직 여성, 근대적 교양, 서양식 예절에 대한 동경이 함께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전엔 사람을 분류해 주는 말이 편리했습니다. "처녀"면 미혼 여성, "아주머니"면 기혼 여성.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분류되는 것을 불편해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나인데, 왜 결혼 여부부터 부르나. 그냥 손님인데, 왜 젊어 보인다고 아가씨가 되고 나이 들어 보인다고 아주머니가 되나. 호칭이 편리한 분류표에서 불편한 딱지로 바뀐 겁니다.
요즘 카페에서 한번 들어보세요. 스무 살 청년이 카운터를 향해 "저기요—" 하고 부릅니다. "언니"도 아니고 "이모"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닙니다. 그냥 저기요. 호칭을 통째로 건너뛰는 거죠. 이게 지금 한국어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학생", "손님", "고객님", "선생님"입니다. 학생이 아닌데 "학생"이라 부르고, 가르치는 직업이 아닌데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틀린 말인데 안전한 말입니다. 상대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으니까요. "아가씨"는 나이를 짐작한 게 되고, "아주머니"는 결혼을 넘겨짚은 게 됩니다. "선생님"은 좀 과해도 실례는 덜합니다. 한국 사회가 정확한 호칭보다 무사한 호칭을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말이 순해졌다고만 보면 반쪽입니다. 사람 사이가 복잡해진 겁니다. 옛날엔 관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집안 어른, 동네 아저씨, 사돈, 서방님, 새댁, 총각. 부를 자리가 선명했죠. 지금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훨씬 많고, 상대의 나이도 결혼 여부도 직업도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호칭은 친밀함의 언어라기보다 조심성의 언어가 됩니다.
그러니 호칭의 변화는 말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 보는 눈의 변화입니다. "아가씨는 어디 갔나" 하고 물으면, 아가씨가 멀리 간 게 아닙니다. 그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시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선생님"이 늘어난 것도 다들 선생이 돼서가 아니라, 서로를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세상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먼저 부르는 말부터 바꿉니다. 역사는 책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골목에서 누군가를 어떻게 불렀는가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아침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남들은 안 된다고 했고, 어렵다고 했고, 무리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버티고, 밀고, 쌓아왔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결국 길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큰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견디고 건너온 사람에게 조용히 와 앉는다.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사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데 있다는 것을. 아침에 눈을 뜨는 일, 따뜻한 밥을 먹는 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일. 예전에는 당연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감사하게 다가온다. 조금 편안한 것, 조금 건강한 것, 조금 밝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
사람은 큰 성공 하나로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평안이 쌓일 때, 하루가 가볍고 마음이 환해질 때, 그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이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인생은 행복하게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쁘다는 것은 욕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놓치지 않고 힘 있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움직이고, 배우고, 견디고, 웃고, 다시 앞으로 가는 것. 그것이 삶을 살아 있게 만든다.
오늘 아침도 그렇다. 운동하러 가는 이 순간, 공기의 느낌, 몸의 리듬, 하루가 열리는 기분이 참 좋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늘도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있다. 또 하나의 기적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행복은 거창한 완성이 아니라, 그런 예감을 품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아침,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이미 충분한 기적이다.
260418
경북의 도시 이름에는 성격이 숨어 있다( 경주사람 입장에서)
— 경주는 왜 점잖고, 상주는 왜 크고, 영천은 왜 거칠게 느껴질까
사람도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지만, 도시도 그런 면이 있다. 오래된 도시는 이름이 그냥 붙지 않는다. 그 이름 안에는 역사와 지형이 들어가고, 그 지형 위에 사람의 기질이 쌓인다. 경상북도의 몇몇 도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경주, 상주, 영주 같은 ‘주(州)’ 도시가 있는가 하면, 김천, 영천, 예천 같은 ‘천(川·泉)’ 도시도 있다.- 삼주 삼천-
이 가운데 ‘주’는 우연히 붙은 글자가 아니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오래된 행정 중심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사벌주가 상주의 뿌리이고, 경주는 천년 수도 신라의 서라벌의 후신이며, 영주 역시 북부 내륙의 중심 고을로 자리 잡았다. ‘주’가 붙은 도시에는 대체로 “큰 고을”, “중심지”, “격이 있는 행정도시”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이름부터가 작은 동네보다는 큰 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경주는 예의 바른 도시처럼 느껴진다. 물론 경주 사람이라고 다 점잖고, 다른 도시는 다 거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경주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공기는 분명 다르다. 신라 수도였던 도시답게 말씨도, 태도도, 도시 전체의 인상도 어디엔가 한 번 걸러진 느낌이 있다. 길가의 돌 하나도 “나는 그냥 돌이 아니오” 하고 앉아 있는 곳이 경주다. 첨성대가 있고, 대릉원이 있고, 불국사가 있는 도시에서 사람도 모르게 몸가짐이 점잖아지는 것인지 모른다. 수도였던 도시는 대개 그렇다. 오래 권력을 가졌던 도시는 함부로 흥분하지 않는다. 경주가 예의 바르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 탓만이 아니라, 천 년 동안 수도였던 도시의 기억이 아직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주는 또 다르다. 상주는 경북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큰 느낌을 준다. 이름부터 상주다. 사벌주에서 이어져 온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영남 내륙의 큰 고을이었다. 길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고, 곡식이 모이던 자리다. 그러니 상주 사람에게는 어딘지 “우리가 원래 큰 동네였다”는 자의식이 남기 쉽다. 실제 상주는 예부터 교통과 물류, 농업의 중심지였고, 그래서 도시의 감각도 자잘하기보다 넓게 펼쳐진다. 상주에 가면 골목의 재치보다는 들판의 호흡이 먼저 느껴진다. 작고 촘촘한 도시가 아니라, 크게 한 번 벌리고 보는 도시다. 그런 곳 사람들은 말도 조금 크게 하고, 세상도 넓게 보는 법이다.
영천은 이름부터 결이 다르다. 김천과 예천의 ‘천’은 샘 천(泉)인데, 영천의 ‘천’은 내 천(川)이다. 김천과 예천이 “좋은 샘이 나는 고을” 쪽이라면, 영천은 물길이 흐르는 도시 쪽에 가깝다. 샘은 고여 있고, 강은 흐른다. 샘은 맑고, 강은 부딪힌다. 이 차이가 은근히 크다. 영천이 다른 ‘천’ 도시보다 조금 더 거칠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영천은 대구와 맞붙은 교통의 길목이고, 예부터 말과 군사, 이동과 연결의 감각이 강한 곳으로 여겨졌다. 길목 도시는 대체로 사람도 빠르고, 말도 직선적이고, 성격도 부딪힘이 있다. 수도의 예법보다 현장의 기세가 먼저 서는 곳, 그것이 영천의 맛일 수 있다. 영천이 다소 거칠다고들 하는 것도 꼭 흠이라기보다, 유순함보다 추진력과 현장성이 앞서는 도시의 체질 때문일 것이다.
김천은 또 다르다. 이름의 한자부터 금천, 곧 금 같은 샘이다. 어디선가 “김천 사람은 물맛을 안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예천 역시 단술 예(醴), 샘 천(泉) 자를 쓴다. 이름부터 물과 맛과 풍요가 겹친다. 예천군 공식 설명도 예천 지명의 유래를 “물맛이 좋고 단술과 같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니 김천과 예천의 ‘천’은 영천의 ‘천’과 같아 보여도 속뜻은 다르다. 겉보기엔 모두 ‘천’이지만, 어떤 도시는 샘의 도시이고 어떤 도시는 물길의 도시다. 이름의 끝글자가 같다고 기질까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너무 과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도시의 기질이라는 것은 절반은 역사이고 절반은 사람들의 인상이다. 그러나 인상도 괜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경주가 왜 유독 점잖게 보이고, 상주가 왜 크게 보이며, 영천이 왜 조금은 거칠게 느껴지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결국 이름 속 역사에서 시작된다. 수도였던 도시는 예법을 남기고, 큰 고을은 규모의 감각을 남기고, 길목 도시는 속도와 기세를 남긴다.
그래서 경북 지명을 보면 재미있다. 단지 행정구역 이름이 아니라, 오래된 성격유형이 붙어 있는 것 같다. 경주는 “몸을 바로 하라”고 말하는 도시이고, 상주는 “판을 크게 보라”고 말하는 도시이며, 영천은 “주저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고 말하는 도시처럼 느껴진다. 이름은 짧지만, 그 뒤에 붙은 세월은 길다. 사람 이름도 한자를 뜯어보면 재미가 있듯, 도시 이름도 들여다보면 성격이 보인다. 경북의 삼주삼천이 재미있는 까닭은, 그 이름들이 아직도 자기 도시의 표정을 조금씩 닮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다.
“정주영 회장은 옥스퍼드 출신이고, 나도 옥스퍼드 출신이다. 다만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두 시간 만에 정문으로 나왔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고 싶은 뜻은 하나다.
사람은 간판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정주영 회장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도전정신이다.
많은 사람이 정주영 하면 성실, 근면, 추진력, 배짱을 말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결국 “한번 해보자”는 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도전정신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어린 시절에 주목하게 된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 통천에서 아버지 밑에 살던 시절, 무려 세 번이나 가출을 했다. 때로는 집안 돈에 손을 대서라도 고향을 벗어나려 했다. 지금 기준으로만 보면 불량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단순히 삐뚤어진 행동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 시대의 가난한 농촌 청년에게 고향을 박차고 나간다는 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운명을 바꾸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본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서툴고 거칠더라도 자기 힘으로 다른 세상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그 무모함, 그 불안함, 그 배짱이 나중에 정주영이라는 사람의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주영 회장의 도전정신은 책상 위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가출의 경험, 다시 말해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려는 본능에서 나왔다고 본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실패하면서도 또 나갔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돌아오고, 혼나고, 실패해도 다시 나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큰일을 만든다.
후일 정주영 회장이 보여준 발상들도 다 그런 정신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할 때 “왜 안 되느냐”고 묻고, 엉뚱해 보이는 방식으로라도 길을 찾으려 했다. 유엔군 묘지 공사 때 잔디 대신 보리를 심었다는 일화도 그렇다. 겉으로 보면 황당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현실을 돌파하려는 생각의 전환이 있다. 남들이 정답이라고 믿는 방식만 따라가면 큰일을 못 한다. 때로는 엉뚱해 보여도, 살아 있는 생각이 죽은 관습을 이긴다.
내가 정주영 회장을 본받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완벽해서가 아니다. 점잖아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부족하고, 거칠고, 때로는 무모해 보여도 스스로 길을 만들려는 힘, 그것이 부럽고 닮고 싶다.
나는 사람이 크게 성공하려면 지식도 필요하고, 운도 필요하고, 시대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결국 도전할 배짱이다.
익숙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큰 생각도 나오지 않는다.
고향을 벗어나 보려 했던 청년 정주영의 마음속에는 이미 기업가의 씨앗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주영 회장을 떠올릴 때마다, 단순히 현대를 만든 경영자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안에서 세 번 실패해도 네 번째 다시 길을 나서는 사람을 본다.
바로 그 정신이 사람을 바꾸고, 회사를 바꾸고, 결국 시대까지 바꾼다.
그 점에서 나는 정주영 회장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 역시, 후문으로 들어가 두 시간 만에 정문으로 나왔을지언정, 적어도 그분에게서 도전정신 하나만큼은 배우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학벌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도전은 흉내만으로 안 된다.
그건 결국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 판을 흔들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지산 창업자. 한 주식.
원비D 한 차와
도시계획세
음료업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박카스와 원비D를 꼽는 사람이 많다.
나는 오늘 박카스 이야기가 아니라 원비D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하면 원비D 한 차를 통째로 끌고 온 정 사장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 나이 삼십대 중반쯤 되었을 때였다.
내 이름이 주식이고, 그분 이름은 형식이었다.
주식과 형식이 만났으니, 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형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나는 삼십대 중반이었고, 그분은 벌써 환갑쯤 되어 보였다.
나이로 보면 한참 웃어른인데, 어느 날 형님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재산세 고지서를 내보이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고지서를 받아 들고 찬찬히 봤다.
그런데 보니까 재산세 속에 도시계획세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도시계획세라는 것은 말 그대로 도시계획이 되어 있어야 매길 수 있는 목적세 아닌가. 도시계획도 안 된 시골 공장에 이걸 왜 붙여?”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전국적으로 그냥 관행처럼 다 붙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형님께 말했다.
“형님, 재산세는 내가 내드릴 테니, 그 대신 형님이 하시는 인삼 드링크 있지요. 그때는 원비F니 원비D니 이름이 좀 섞여 불렸는데, 그거 한 차 가져오십시오. 동네 사람들 실컷 나눠 먹게.”
형님이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내가 설명했다.
“재산세를 내가 대신 내겠다는 뜻이 아니고, 이 도시계획세가 잘못 붙은 것 같으니 그걸 바로잡아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게 되면 세금 문제는 풀릴 테니, 대신 음료 한 차 가져오셔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자는 얘기입니다.”
그랬더니 이 형님, 정말로 원비D 한 차를 끌고 왔다.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참 많이 웃었다.
말이 그렇지, 요즘처럼 회사 대표가 귀한 시절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길에서 “사장님!” 하고 부르면 반은 돌아볼 정도였다.
최 사장, 박 사장, 김 사장, 사장님 천지였다.
그런데 그중에도 진짜 사장이 있었다.
누가 “정 사장!” 하고 부르면, 다른 사장들은 다 부사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정 사장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정사장 이라 부르기도 하고, 회장님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내게는 그저 형님 같은 정 사장이었다.
그 정 사장이 인삼 드링크 한 차를 보내왔으니, 동네가 한바탕 즐거워졌다.
그 뒤 내가 문제 삼았던 도시계획세는 결국 바로잡히게 됐다.
총무처에서 관할하던 일이었는데, 이게 한번 문제로 인정되면 전국적으로도 파장이 있으니 처음에는 조심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잘못을 인정하면 전국의 비슷한 사례에 대해 세금을 다시 돌려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은 결국 바로잡아야 하는 법이다.
결국 정 사장은 5년분 재산세를 돌려받게 됐다.
그러자 정 사장이 아주 호탕하게 말했다.
“한 사장, 죽을 때까지 내 원비D는 실컷 먹도록 해주겠소.”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원비D는 평생 공짜구나.”
그런데 사람 일이란 참 그렇다.
그날 한 차 얻어먹고는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그 약속도 잊고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러다가 훗날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문득 그 약속이 생각났다.
“아, 나는 죽을 때까지 원비D를 실컷 먹기로 했는데, 그 사람 것을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하고, 내가 먼저 챙기지도 못한 채 그 사람을 먼저 보내버렸구나.”
그 생각을 하니 웃음도 나고,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했다.
약속대로라면 나는 원비D를 상속재산처럼 중세로도 받아먹었어야 맞는 일인데, 세상은 꼭 그렇게 계산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남은 것은 원비D 몇 병이 아니라, 그 시절 사람들의 정이었다.
세금 문제 하나를 놓고도, 누군가는 원칙을 따졌고, 누군가는 호탕하게 음료 한 차로 답했다.
그런 시대였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원비D를 생각하면 단순히 인삼 드링크가 먼저 떠오르지 않는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 사장의 한마디다.
“죽을 때까지 실컷 먹게 해주겠소.”
그 약속은 다 이행되지 못했지만,
그 말속에 들어 있던 인정과 호방함만은 지금도 진하게 남아 있다.
지산 창업자. 한주식
까치가 몇 마리냐
( 노년의 경제 자립관념)
(이른 아침에)
내 친구인 신바람 , 황수관 박사가 자주 하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양지바른 마루에 앉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
아들이 대답했다.
“까치예요.”
잠시 뒤 아버지가 또 물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
“까치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저 새가 무슨 새냐?”
처음엔 대답하던 아들도 차츰 짜증이 났다.
“까치라 했잖아요.”
나중에는 성을 냈다.
“왜 자꾸 같은 걸 물으세요. 몰라요, 몰라요.”
그때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된 공책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 아들이 어릴 적, 마루에 앉아 저 까치를 보며 ‘아빠, 저 새가 무슨 새야?’ 하고 스물세 번을 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까치란다’ 하고 스물세 번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 너는 어렸고, 나는 젊었다. 지금은 나는 늙고 너는 컸다. 내가 몇 번 묻는 것이 그리도 귀찮으냐.”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움직인다. 예전에는 늙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고, 아들은 그 곁에서 대답해 주는 풍경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효도의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늙어 자식에게 기대는 것만 자연스러운 일로 볼 것이 아니라, 부모 역시 마지막 날까지 자식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고 뒷바라지하는 일은 부모의 큰 기쁨이다. 나라의 부모들은 평생 아들딸을 가르치고, 살림을 꾸리고, 어려운 세월을 버티며 가족을 지켜 왔다. 그 과정 자체가 존엄한 삶이었다. 그런데 더 큰 행복은 늙어서도 주저앉지 않고, 여전히 자식들에게 의지가 아니라 버팀목이 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몸이 허락하는 한 자기 삶을 단정히 지키고, 죽는 날까지 배우고 일하고, 가능하면 자식과 후손을 보살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복인가.
그래서 나는 늙었다는 이유로 자식에게만 기댈 생각부터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자기 건강을 지키고,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서도 후세를 위해서도 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더 너그러워져야 하고,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야 자식도 부모를 더욱 존중하게 된다.
오늘 아침 문득 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참 환해진다. 늙는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 아니라, 잘만 살면 끝까지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살았듯, 늙어서는 후세를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사람의 품격이라고 믿는다.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가야겠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오늘도 나라와 가정을 위해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참 행복한 일이다.
팔순에 현역인 사연-
젊을 때는 산을 보는 눈보다 당장 집을 지을 형편이 먼저였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하니 산비탈을 필요한 만큼만 깎아 억지로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앞은 평지처럼 보여도 뒤에는 높은 옹벽이 생긴다. 면적을 조금만 더 넓히려 해도 옹벽은 더 높아지고,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 산사태 같은 불안도 생기고, 땅의 쓰임도 제한된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방법밖에 몰랐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산은 부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은 한쪽에서 보면 올라가는 경사면이지만, 꼭대기를 넘으면 다시 내려가는 경사면이 이어진다. 그래서 큰 그림으로 보면 산은 단순한 비탈이 아니라 하나의 둥근 덩어리이고, 마치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상처럼 보인다. 이 전체 형상을 읽을 수 있게 되면 개발의 방식도 달라진다. 일부만 깎아 억지 평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 전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흙의 흐름과 지형의 구조를 제대로 계산해 넓고 안정된 부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부분적으로 손본 땅은 뒤에 경사면을 지고 가야 하지만, 전체를 보고 조성한 땅은 평탄하고 안정적이어서 활용성이 높다. 집을 짓기도 좋고, 여러 용도로 쓰기에도 좋다. 처음 보기에는 산 전체를 손보는 일이 더 큰돈이 드는 것처럼 보여도, 제대로 계산하면 오히려 단위당 효율이 나을 수 있다. 좁고 불안한 평지를 힘겹게 확보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큰 그림으로 접근해 넓고 반듯한 땅을 만드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경제적이고 더 안전한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부분을 택했지만, 이제는 경험과 자본이 생겨 전체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일을 쉽게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는 몸이 앞서도 판단이 부족했다. 지금은 몸으로 뛰는 힘은 예전 같지 않을지 몰라도, 대신 어디를 깎아야 하고 어디를 남겨야 하는지,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이 효율적인지, 땅의 모양과 사업의 흐름을 함께 읽는 눈이 생겼다. 다시 말해,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장 제대로 할 수 있는 때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일을 그만둔다면, 평생 현장에서 겪고 쌓아온 경험을 가장 잘 쓸 수 있을 때 그것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된다.
그래서 내가 계속 개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단순한 미련이 아니다. 과거에는 살기 위해 일했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버텨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땅을 보는 눈이 생겼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같은 산을 보아도 예전에는 비탈만 보였는데, 이제는 그 안에 숨어 있는 평지의 가능성과 구조가 보인다. 이런 경험과 안목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손해도 보고 실패도 하고, 직접 부딪쳐 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잘할 수 있다. 특히 산과 땅을 다루는 일은 그렇다.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많이 해봤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결국 전체를 보는 눈, 위험을 읽는 감각, 효율을 판단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제야 그런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일을 그만두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정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 쌓아온 판단력과 노하우를 가장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시기를 놓치는 일이다.
예전의 일은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면, 지금의 일은 경험을 살리는 일이다. 젊을 때는 방법이 없어서 경사면을 등에 지고 집을 지었지만, 이제는 산 전체를 읽고 더 넓고 더 안전한 땅을 만들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일을 계속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욕심 때문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경험을 버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경험을 끝까지 살려, 더 나은 땅을 만들고 더 나은 일을 해보고 싶다.
내가 만난 진짜 VIP
얼마 전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을 만난 일이 있다.
나는 서울에서 출발했다.
그는 나를 다카로 초대했다.
직접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
나를 모셔 갔다.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다카는 그에게 중요한 곳이다.
수많은 공장과 사람들,
그리고 글로벌 시장과 연결된 현장이다.
비행기로 이동하고,
정성스러운 식사를 함께하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뒤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여기까지입니다.
중요한 VIP와 약속이 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현지 정부 관계자나
해외 투자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답했다.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입니다.”
순간 나는 말이 막혔다.
서울에서 다카까지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 모신 자리였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약속은
가족과의 저녁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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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다른 기준
사업을 하다 보면
누구를 만나느냐,
얼마를 벌었느냐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그날 나는
다른 기준을 보았다.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아무리 중요한 사업 자리라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뒤로 미루지 않는 것.
그가 말한 VIP는
권력도, 자본도, 명성도 아니었다.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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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목록 1번
나는 가끔 내 재산을 정리해 본다.
토지, 사업, 지분, 현금.
그러나 그날 이후
재산 목록의 1번은 분명해졌다.
가족이다.
사업은 다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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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전화를 걸 사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나 먼저 간다”라고
전화를 걸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 바로
내 인생의 진짜 VIP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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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다카까지 날아간 그날, 나는 사업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는 기업인도 저녁에는 가족에게 돌아간다.
진짜 성공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곁의 VIP를 떠올린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당신은 나의 VVIP입니다.”
사람이 살기 좋은 위도- 한국-
— 바람과 해류가 만든 기후, 그리고 한국의 조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흔히 따뜻한 남쪽이나 적도를 떠올리지만, 실제 인류 문명과 경제 중심지는 북위 30도에서 45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이 위도대는 사계절이 분명하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봄과 가을은 짧지만 뚜렷하다.
이 계절의 변화는 단순한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농업을 준비하게 하고, 저장을 습관화하게 하며,
위기에 대비하는 긴장과 계획의 문화를 만든다.
역사적으로 산업과 경제가 발전한 지역이 이 위도대에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후
기후는 위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해류와 바람의 방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위도에서는 편서풍이 불어 해양의 영향을 동쪽으로 전달한다.
태평양의 물은 북상하면서 대륙 서해안을 따라 기온을 완화한다.
그래서 같은 위도라도 해양에 인접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온화하다.
캐나다의 밴쿠버는 북위 49도임에도 겨울이 비교적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반면 서울은 북위 37도이지만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이 더 춥고 여름이 더 덥다.
그러나 이는 단점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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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생각보다 기후 조건이 좋다
한국은 흔히 “덥고 춥다”고 불평을 듣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면 오히려 기후적으로 균형이 잡힌 지역이다.
극단적인 사막 기후가 아니고
열대성 질병대가 아니며
혹한의 툰드라도 아니다.
제주와 남해안은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하다.
동백꽃이 2월에 피고,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도 봄꽃이 일찍 핀다.
서산과 같은 서해안 지역은 해양의 영향으로 기온 변동이 완화된다.
한국은 대륙성과 해양성의 경계에 서 있다.
이 경계성은 때로는 기온 차를 만들지만, 동시에 다양한 생태와 농업을 가능하게 한다.
사계절은 약점이 아니라 경쟁력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은 생활 리듬이 분명하다.
준비와 수확, 저장과 계획이 문화 속에 녹아 있다.
열대 지역은 연중 생산이 가능하지만,
계절 변화에서 오는 긴장과 대비의 문화는 약하다.
혹한 지역은 생존 자체가 어렵다.
한국이 속한 위도대는
생존이 극단적으로 위협받지 않으면서도
항상 대비해야 하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이 근면과 계획성,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단순히 따뜻한 곳이 아니다.
위도, 해류, 바람, 계절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북위 30~45도 사이, 그리고 해양과 인접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문명과 산업이 발전해 온 공간이다.
한국은 그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종종 “춥다”, “덥다”고 말하지만,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기후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에 속한다.
사계절의 변화는 불편함이 아니라
균형과 긴장을 동시에 제공하는 자산일지도 모른다.
지산. 창업자. 한주식.
거친 바람이 나무를 곧게 세운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지만, 고난 속에서 깨어난다.
따뜻한 온실 속의 나무는 바람을 모르기에 뿌리가 얕고, 산비탈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은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린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실험에서 미끄러운 바닥 위에 먹이를 두었더니, 오리는 쉽게 먹지 못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오리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만약 평평한 땅에 먹이를 두었다면 그런 노력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불편함이 곧 훈련이 된 셈이다.
자연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황무지에 천적 없이 풀어 놓은 토끼는 처음에는 급격히 늘어난다. 먹이가 넘치니 번식은 가속된다. 그러나 개체 수가 폭발하면 병이 돌고, 약한 개체부터 쓰러진다. 그때 늑대가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토끼는 달리기 시작하고, 긴장하며, 병든 개체는 자연히 도태된다. 살아남은 토끼는 더 강해진다. 위협은 곧 건강을 만든다. 긴장이 생존을 낳는다.
인류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 곳곳을 떠돌며 차별과 박해를 겪었던 유대인 공동체는 정착의 불안정 속에서 지식과 교육을 생존 수단으로 삼았다. 토지와 권력을 쉽게 가질 수 없었기에, 이동 가능한 자산과 금융, 학문, 네트워크에 집중했다. 반복된 시련은 강한 결속과 교육열을 낳았다. 고난은 전략을 만들고, 전략은 경쟁력이 되었다.
동양 고사에도 비슷한 교훈이 있다. “생우우환 사우안락(生於憂患 死於安樂)”—근심 속에서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어려움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안락은 사람을 눕게 한다. 역사는 늘 긴장 속에서 전진해 왔다.
지리와 기후를 보아도 생각할 점이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농사가 쉽지 않은 지역은 저장과 계획, 기술 발전이 절실하다. 반면 사시사철 작물이 자라는 곳에서는 당장의 풍요가 계획을 늦출 수도 있다. 물론 번영은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절박함이 사고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부족함이 계산을 낳고, 계산이 과학을 낳는다.
인간은 환경이 좋아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거칠어도 포기하지 않고, 불리해도 멈추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한다.
이 글이 전하는 교훈은 “때문에”가 아니다.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가 아니라,
조건이 불리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 데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 삶의 자세이다.
지산 창업자
명예경영학 박사 한주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