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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드디어 로마서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기쁘고 가슴 벅차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수십 년 신앙생활 했어도 로마서를 몰랐거든요. 심지어는 신학을 나오고 목회를 하면서도 로마서를 몰랐어요. 그럼 어때서? 성경을 구석구석 다 알아야 신앙생활 수 있나? 또한 목회자라고 성경을 모두 다 알 수 있으라는 법이 있나?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로마서만큼은 결단코 아닙니다.
한마디로 로마서를 모르면 진짜 신자도 아니고요, 더군다나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단언컨대 로마서를 모르면 설교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모르면 종교인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모르면 필경 구원관이 어긋났다는 것이니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한 꼴이 됩니다. 저도 불과 6년 전까지는 로마서를 몰랐었는데, 어느 날 주님이 찾아오셔서 눈의 비늘이 벗겨지자 처음 로마서가 열려졌습니다.
그때 기절초풍했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펑펑 울었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서 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만감이 교차되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잘못 가르쳐서 신자들로 하여금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살게 했으니까 나 혼자 어둠에 갇혀 산 게 아니라 모두를 그릇된 길로 안내를 했다는 생각에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스럽더라고요.
동시에 비로소 눈뜨고 기독교를 다시 보니 예전의 내 모습처럼 종교에 갇힌 그들의 처지가 보여져서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팠지요. 우선 가까운 분들에게 로마서의 복음을 전하지만 선입관에 잡혀있기에 쉽사리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과거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기다릴 뿐, 사람의 힘으로 설득되지 않는 게 믿음의 세계이니까요.
자, 그렇다면 과연 로마서가 그리도 중요합니까? 모든 성경66권이 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66권은 다 소중하고 다 구원에 대해 말씀하는 책이 맞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교리)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들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우회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면 로마서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은혜라는 말입니다. 즉 구원은 사람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으로 쟁취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줄여서 ‘이신 칭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IX)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을 줄여서 ‘이신 칭의’라고 합니다. '以信稱義'는 한자어지요(써 이, 믿을 신, 칭할 칭, 의로울 의)..말 그대로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본래는 의인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에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존재는 여전히 죄인인데 그냥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속은 죄로 득실거리는데 겉은 예수님의 피로 덮어 주셔서 그 피를 보시고 속은 더 이상 안 보신다는 뜻이니 이게 은혜 아닙니까? 진짜 은혜란 받은 자격이 없는 자가 영생을 선물로 받은 이 대속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롬6:11절에서 이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이 앞의 내용을 보면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때 우리도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아났다는 말씀을 한 후에 11절이 나옵니다. 그 말을 줄여서 ‘이와 같이~’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다 탕감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함 받아서 죄가 더 이상 우리와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죄가 다시는 가타부타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이니까 한마디로 죄와 상관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리 되었지요? ‘죄의 삯은 사망’, 이것이 율법의 요구인데, 이 율법의 요구를 우리 대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 내셨기에 우리는 무죄한 자, 즉 죄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고 이렇게 의롭게 되었으니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행함으로 죄를 안 짓거나 반듯하게 살아서 의인되는 게 아니라 이같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율법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 오직 IX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에 복음이지요.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잖아요? 왜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까? 인간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고 그저 주님의 행하심만 믿으니 기쁘고 좋은 소식이지요. 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자는 아직 복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입니다.
뭔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항상 숙제로 남아 있다면 은연중에 부담이 되어 짓누르고 있으니 어찌 웃겠습니까? 잠시 웃음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기쁨은 없지요. 늘 어떤 종교적 행함이나 윤리 도덕적 실천이 자신을 옥죄니까 진정한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말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자기 행함을 돌아보는 자는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니라 종교인입니다. 시쳇말로 아직 복음의 깊은 맛을 모르는 자라는 말이지요.
복음은 여기심의 은혜입니다. 여전히 죄를 풍풍 쏟아내는 죄인들인데 그저 예수님의 피로 덮어서 ‘너 죄 없다’ 선언해 주시는 망극하신 은혜지요. 그래서 IX의 십자가 은혜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표현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속은 죄인인데 예수님 피 공로 때문에 대박 맞은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지요. 마치 한겨울 밤새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온 세상에 하얗게 덮이면 더럽고 추한 쓰레기나 오물까지 다 하얗게 보이잖아요. 눈 밑에는 여전히 더러운 오물들이 그냥 있지만 온통 세상이 하얗게 보이듯이 하나님은 예수 피로 덮힌 자들을 다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죄인들에게 대박이지요. 성도는 예수 피로 덮힘 받은 죄짓는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사건이 바로 야곱이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따내는 장면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27장을 보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기를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면 네게 축복을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엿들은 어미 리브가가 야곱에게 이르기를 네가 그 축복을 받아야하니까 이차저차 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대로 야곱이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자 이를 리브가가 별미로 만들고 에서의 옷으로 변장시켜서 이삭 앞으로 가져갑니다. 그때 이삭이 묻기를 네가 누구냐 하자, 야곱이 담대히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대답하자 이삭이 만지면서 말하기를 ‘음성은 야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말하면서 장자의 축복을 해줍니다(이삭이 알면서 속아준 것)
이 한 컷의 장면이 바로 여겨주심의 은혜를 미리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인데도 장자이신 IX의 십자가 피를 보시고 ‘너 예수 맞네’라고 여겨주시는 게 바로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장자이신 예수님의 피 공로로 우리가 장자로 인정을 받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이 기상천외한 구원 방식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베푸시는 사랑일 뿐이지요.
만일 사람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 구원을 직설적으로 말씀하는 로마서를 모르면, 창27장의 이런 내용도 전혀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이 많아 늙은 이삭의 어리석은 해프닝 사건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니, 이게 얼마나 큰 손실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구원의 내막을 깨닫고 생명으로 삼으라는 것을 발로 차버리는 격이 되니 여전히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따내려고 동분서부하게 될 테지요.
야곱이 준비한 염소 새끼 두 마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레16장에서도 대속죄일 날 두 마리 염소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염소는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죽는 염소이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가 광야에 버려져 찢겨죽는 비참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병이어(칠병이어)에서는 두 마리 물고기로 비유된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로마서가 모든 성경을 해석해 주는 잣대(캐논 CANON)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로마서는 66권 성경의 해석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몰론 로마서가 없어도 모든 성경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려내고 있는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 은유적으로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없으면 오리무중으로 헤매기가 쉬운데 로마서가 복음의 기준과 표준이 되면 나머지 성경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서의 중요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모르면 목사든지 신자든지 십중팔구는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로마서를 모르고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진리를 모르니 당연히 자유함이 있을 수도 없고, 신앙 세계에서 자유가 없으니 구원도 아직 오리무중상태일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은 전혀 눈에 안 들어오니 자연히 사람의 행함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로마서는 보석 중의 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로마서의 주제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구원은 ‘율법 행함의 의’가 아니라 IX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믿음의 의’입니다. 롬3:21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준 것이고, 그 ‘율법의 의’ 말고 우리에게 다른 의를 주셨는데 그게 바로 ‘믿음의 의’라고 말합니다.
<롬3:19~28> (중략..)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중략..)
이 믿음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강조 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의라는 뜻이지요. 그게 바로 IX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믿음의 의’입니다. 이것을 27절에서는 믿음의 법이라고도 하네요. 그리고 쐐기를 박는 말씀을 28절에서 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어디에 있다? 율법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여기서 율법 행함이란 유대인들이 지키던 십계명이나 다른 모든 규례 율례 절기 등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둔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 율법 행함입니다. 이것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일침입니다.
질문 하나 할까요? 로마서와 아주 흡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신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소위 ‘작은 로마서’라고 불리우는 성경이 있는데 다들 아시지요?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역시 로마서처럼 사람의 구원은 율법 행함에 있지 않고 오직 IX를 믿음으로 된다고 역설을 합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왜 육체로는 의롭게 되지를 못해요? 행위로서 의롭게 되는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탐심을 가진 육체는 자신만 위하고 사랑하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까? 그런데도 율법의 두 강령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겠다고 덤비는 그 자체가 탐심이요 우상 숭배인 줄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이 두 강령을 누가 이루셨습니까? IX께서 십자가로 다 성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주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겠네요. 바로 이 원리를 ‘믿음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어요. 주님 안에만 사랑이 있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IX안으로 들어가는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이기신 승리를 우리 것으로 여겨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갈2:21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행함)으로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요. 풀어서 말하자면 육신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자들은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이라는 고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구원을 받고서는 행함으로 구원을 지켜내야 한다는 자들도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성화주의 자들이지요. 교묘한 말로 미혹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성을 훼손시키고 사람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악한 자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바로 갈5장에서 지적하는 육신의 소욕입니다.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받으려는 모든 정신사고에서 출발한 것이 육신에서 나온 소욕(탐욕)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더 노골적으로 육신의 행함에 대해 질타를 합니다. 1장부터 언급하기를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일갈을 합니다. 그만큼 다른복음이 미치는 악영향이 성도들을 멸망으로 잘못 안내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훼손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복음이 뭡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오히려 좋아 보이고 대견해 보이는 것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십자가로 죄사함 받은 거 다 인정해, 그래도 조상 대대로 전통으로 전해오던 할례를 하면 더 확실한 신앙이 안 되겠나?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필요하고 안식일도 철저히 지켜가면서 예수를 믿으면 금상첨화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얼핏 들으면 오히려 힘이 나고 기특하다는 생각들이 풍겨납니다.
새로운 것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늘 해오던 것들인데 계속 좀 하면 더 좋은 신앙이 아니냐는 반문이 들기도 하지요? 특히 할례는 창17:14절을 보면, ‘할례를 행치 아니하면 내 백성 중에서 끊어진 자요 하나님 언약을 배반한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할례의 엄중한 말씀에 마음이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다고 해서 손해 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다른 지역으로 선교 차 떠나가면 어느 새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로 개종한 복음 전도자들이 와서 할례도 필요하다고 전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복음 전도자이지만 바울이 볼 때는 뭐죠?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이 와서 누룩을 뿌려서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게 훼방을 놓습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사람의 행함이 일절 없기 때문에 복음인데 행함을 첨가하면 이미 기쁜 소식이 아니지요.
그래서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분노한 것이지요. 저주 받으라는 말은 지옥에나 갈 놈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런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도 선언하게 되지요.
<갈5:3~4>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할례는 행함을 가치로 삼는 하나의 사례)
야고보서 2:10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하나에 걸리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일침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율법관과 하나님의 율법관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상대적 평가를 기대하고 율법을 대합니다. 즉 사람이 다 지키지는 못해도 애써서 지키는 모습을 보시고 어느 정도 점수를 주시겠지 하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좀 더 하자는 식으로 율법 행함을 실천하고자 덤벼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호합니다. 율법지킴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면 100% 다 지켜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100개중 99개를 지키고 하나를 어기면 다 어김이 되는 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다 지켜요. 613가지 말고도 십계명 자체도 1계명부터 못 지킵니다.
가령 제1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아니, 인간 내가 신이고 내가 왕이고 내가 하나님이고 내가 최고인데 무슨 수로 지킵니까? 인간은 자기사랑이라는 탐심의 굴레를 벗질 못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일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안되면 안하는 게 인간들이지요. 반드시 반대급부가 있기에 행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십계명을 절대로 못 지킨다는 것을 알라고 10번째 계명에 탐심을 일부러 딱하니 붙여 놓았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매일 탐내며 사는 존재들에게 탐내지 말라는 것은 빨리 손들고 항복하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마음은 탐심으로 가득해도 겉의 행위로 저지르지만 안하면 되는 줄 안다니까요.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속이는 짓이지요.
이렇게 인간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진노의 자식이라서 결단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는 자가 마지막으로 십자가 밑으로 달려와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아무나 믿는 게 아니라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인생의 배가 바닥을 친 실패자들이나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 자기 가능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복음이 건성입니다. 여하히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까가 그들의 신앙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먼저 택함을 받은 자가 있고 그들 중에도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로 큰 실패를 맛보고서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아는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에게 십자가는 빛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다 인생의 실패를 겪은 자들 맞지요? 승승장구 일취월장 성공출세한 분은 여기에 계시면 안 됩니다. 계셔도 되지만 이해를 못해요. 와 닿지가 안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이냐 복음이냐? 행함이냐 은혜이냐? 옛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인간의 실천을 방점으로 삼는 신앙과, 인간은 일체 빠져라 오직 IX의 십자가 은혜를 방점으로 삼는 신앙이 복음이고 은혜이고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더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중 무엇을 먼저 기록했을까요? 갈라디아서는 총6장이고 로마서는 총16장입니다. 감이 잡히지요? 갈라디아서를 먼저 기록합니다.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에 없는 죄의 권세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왜 바울은 13개 서신서 중에서 가장 먼저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을까요? 자신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당당봉사였으니까요. 당시 눈을 떠보니 가장 시급할 일이 자신처럼 사람들의 구원관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율법 행함으로 구원이 되는 줄 착각했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자신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되자 십자가 복음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갈라디아서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위에서 잠깐 나눈 것처럼 율법 행위로 구원을 보탠다는 거짓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오직 십자가 복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역설을 합니다.
그 후에 다시 갈라디아서를 더 보완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구원의 전모를 다루는 로마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따라서 로마서가 더 깊고 방대합니다. 갈라디아서 기록 연대가 대략 48~50년경이라면, 로마서는 57년경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된다는 복음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으니 여타 다른 성경의 캐논(표준과 기준점/막대, 지팡이, 줄기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 같은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신약 성경의 편집 순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신약성경의 편집 순서를 보면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순서를 보면 4복음서(마, 막, 눅, 요)가 먼저이고 다음은 성령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사도행전입니다. 그 다음부터 사도들의 서신서가 등장하는데 무엇이 가장 먼저 나옵니까? 로마서입니다. 여기서 다시 로마서의 캐논(기준)적 위치를 보게 됩니다.
다른 성경을 보기 전에 무엇을 먼저 알아야 된다? 로마서를 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나머지 서신서들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전모를 모르면 사람은 저절로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은 필경 종교인을 양성할 뿐이지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가장 먼저 나오게 됩니다. 그 순서를 자세히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성경이 쓰여 졌듯이 이 성경들이 편집되는 것도 다 성령께서 간섭해서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일하심인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알고 시작하라는 의도가 편집 순서에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다음은 고린도서입니다. 이것도 기가 막힙니다. 만일 로마서를 모르고 고린도서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보고 너무도 큰 혼란에 직면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문제투성입니다. 누구의 은사가 더 좋은가로 다투고, 우상의 제물에 대한 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고, 누구의 제자인가로 파당을 짓는가하면 심지어는 근친상간에다가 음란에 토색과 술취함 등의 육신적인 모습으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책망하지 않고 1장 처음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면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IX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확증합니다(고전1:2/8~9/30). 그러면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IX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찬송을 하네요?
이것이 믿어지시나요? 아니, 이런 꼴통들이 모인 교회를 책망하는 게 아니라, 이들을 거룩한 자들이라고 하더니 한발 더 나아가서는 책망할 것도 없다고 하면서 이들과 IX 안에서 교제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네요.
사실 제가 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이런 너그러움? 관대한 시각? 등이 예전에는 이해가 잘 안되어서 아리송했었지요. 아니 이런 엉터리들을 보고 거룩한 성도라고? 바울이 제정신인가? 아니면 내가 틀렸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지요..어쩌면 제가 성경을 복음적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 배경이 고린도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의문들이 쌓였고 답을 찾지 못해서 몇 년간 방황하던 차에 주님이 찾아 오셨으니까요.
알고 보면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복음적 시각에서 팩트를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바울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식으로 고린도교회를 본다면 먼저 책망과 핀잔이 나갈 것입니다. ‘너희를 그렇게 해서 천국 가겠어? 이놈들아 똑바로 해!!’ 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서 천국 가겠어?’ 우리가 많이 듣고 또 많이 뱉어낸 말이잖아요? 너무도 익숙한 용어입니다. 사람의 반듯한 삶에 대한 요구와 열심 있는 신앙 활동에 대한 필요성을 얼마나 듣고 자랐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을 보고 ‘너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거룩한 성도들이야 마지막 주의 재림 때에 아무 책망할 게 없는 자 맞거든?’ 완전히 정 반대의 시각 차이가 납니다. 왜일까요?
바로 복음에 대한 지식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알았고 우리는 복음을 몰랐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은 하나뿐입니다. 모두가 죄의 저주로 심판의 대상이요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크고 작은 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빈부격차, 성품의 착하고 악함의 차이, 학문의 유무, 큰자 작은자 등의 차이는 없습니다. 모두 멸망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십자가 복음이 들려질 때 믿어지는 자는 주님의 피 공로가 입혀져서 모든 죄가 깨끗하게 씻겨지고 영원한 죄사함과 거룩함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사람의 어떠함은 전혀 감안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모지리들이 모여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거룩한 성도들이라고 바울이 부른 이유가 복음의 효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을 고린도 교회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혹시 그래도 고린도 신자들보다는 낫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모두 진노의 자식이고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우리가 한다는 짓은 다 방해꾼 노릇만 해 왔습니다. 그간 주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위해 고군분투 해온 것입니다. 그러고도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자부했지요? 사단에게 속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구원관을 바로잡으려고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고요, 이런 신앙의 기준점(캐논)이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기에 로마서를 먼저 읽으라는 취지로 가장 먼저 편집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서를 모르고 고린도서를 본다면 실족할 것입니다. 아니 이런 놈들을 거룩한 성도라고? 책망할 것이 없다고? 이처럼 복음을 모르고 고린도서를 읽으면 아마도 바울을 나무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통해 복음의 지식을 공부한 자라면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네’라고 이심전심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복음에 대한 지식이지요. 말로만 복음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 복음을 아는 여부가 생사를 가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율법적 신관으로 굳어진 우리들이 미덥지가 않아서 고린도서 다음에 다시 갈라디아서를 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차원에서 다시 갈라디아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서신서를 보기 전에 먼저 복음의 중요성을 알라는 차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편집의 의도가 우연이 아님이 명확합니다.
오늘 로마서 서론인데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기록 목적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로마서의 중요성과 필연성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직접 거론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1:10~11절입니다.
<롬1:10~11>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아마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복음을 모르고 무턱대고 예수를 믿는다는 수준에 머문 상태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를 가기로 벼르고 별렀습니다만 하나님이 아직 허락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언제가 가기 전에라도 이 로마서를 그들에게 전하여 오직 복음에 입각한 교회로 굳건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면 11절 말씀처럼 신령한 은사를 주어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란 복음을 말합니다. 편지로 복음을 쓰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요. 할 말은 많은데 글로 쓰자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속히 가고자함을 미리 알리려 한 것이 로마서를 기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는 15장에 나옵니다.
<롬15:22~29> 봉독..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중략..)
바울의 최종 선교의 목적지는 서바나입니다. 오늘날 스페인인데 당시 서바나가 세상 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끝이라는 곳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스페인에 가지 못하고 로마 감옥에서 순교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두 가지 목적을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로마교회는 자생한 교회인데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상태라면 그들의 신앙이 어떠하겠습니까? 한마디로 혼잡한 상태일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여져서 짬뽕이 된 어지러운 상태이지요. 그런 곳에 가장 시급한 게 십자가 복음을 담고 있는 로마서입니다.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다른 무슨 성경보다도 로마서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와 판박이입니다. 이곳저곳에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정작 복음을 아는 진리 지식이 없이 혼잡한 상태로 예수님도 믿고 율법(행함)도 중시하는 큰성 바벨론입니다. 여기에 로마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누룩이 일체 섞이지 않은 순순한 로마서만이 그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의 첫 번째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서바나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로 로마교회의 도움(연보)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교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듯이 복음은 더 넓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도움을 얻어 다른 지역의 교회로 복음이 확산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로마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직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리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보다 혼잡한 비진리로 변한 교회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처럼 고귀한 생명의 말씀인 이 십자가 복음을 힘을 합쳐 이웃 형제들에게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