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 하동정씨 묘지명(恭人河東鄭氏墓誌銘) 병서. 병오년
내가 소싯적에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오 상국(吳相國) 손자의 집이 과천에 있는데 형제 네 사람이 모부인을 받들고 산다고 한다. 부인은 가정을 이끄는 것이 엄정하여 법도가 있는데, 매일 이른 아침에 여러 아들이 나아가 안부를 살피고 물러나면 여러 며느리가 뒤를 따라 하루에 세 번씩 안부를 살펴서 규문의 법도가 정연하여 시종 게으름이 없다고 하니, 과연 현숙한 부인이었다. 내가 공경하여 마음에 둔 지가 오래였는데, 지금 오우(吳友) 심운(心運) 씨가 공인(恭人)의 행록(行錄)을 적어 보이며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이미 그 선친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또 어찌 감히 사양할 것인가.
행록을 살펴보건대, 공인은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진사 오공 상보(吳公尙溥)의 계실(繼室)이다. 증조의 휘는 홍량(弘量)이고 관직은 군자감 봉사이다. 조부의 휘는 용(墉)으로 무공랑이다. 부친의 휘는 원건(元鍵)인데 호는 각헌(覺軒)이고 세상에서 처사(處士)라고 일컫는다. 모친은 성주이씨(星洲李氏)로 통덕랑 휘 익하(翊夏)의 따님이고 지평 휘 유석(惟碩)의 손녀이다.
공인은 용모와 의표가 아름답고 맑았으며 식견과 도량이 순수하고 밝았다. 15세 이전부터 현숙한 덕과 효우의 행실이 있어 부모 형제의 사랑을 받았다. 계미년(1703)에 오공에게 출가하여 남편을 섬기기에 어긋난 덕이 없었으니, 항상 말하기를, “부부가 비록 체모를 가지런히 한다고 하나 어찌 감히 태만히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공의 전배(前配) 이씨(李氏)가 아들 성운(星運)을 하나 낳고 겨우 네 살 때 죽었는데, 공인이 마치 자기 소생처럼 보살피고 길렀다. 공인이 연이어 세 아들을 낳아 가르치고 기름에 어미 비둘기가 새끼 비둘기를 기르듯이 은혜와 사랑을 똑같이 쏟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의로운 방도로써 가르치고 화려한 의복과 기름진 음식에 대해서는 가까이하지도 못하게 하니, 여러 아들이 순순히 가르침을 받들어 따라서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하지 않았다.
공인은 가정 살림에 더욱 능숙하여 집안이 정돈되고 화평하였다. 날마다 베짜는 일을 하여 일찍이 스스로 안일하게 하지 않고 여종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 주어 일없이 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겉만 꾸미는 수식을 제거하였으며, 또 물자를 여유있게 남겨 두어 뜻하지 않은 상황에 대비하여 재정이 넉넉하고 갖추어지게 함으로써 남편에게 안 살림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도록 하였다. 마음씀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비록 천한 하인들에게라도 은혜와 신의가 넉넉히 미쳤다. 친속과 친목을 돈독히 하여 종족들이 마음으로 의지하였고, 이웃을 보살피고 도와서 있는 대로 베풀어 주어 인색하게 아끼는 뜻이 전혀 없었던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고 사모하였다.
정유년(1717)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한 웅큼의 쌀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고, 상복을 벗지 않고서 곡읍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듯했던 것이 3년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남편의 상을 당하여 험한 팔자에 이 한 목숨 여전히 남아 죽지 못하는 것은 어린 자식들을 맡길 곳이 없고 제전(祭奠)을 주관할 이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죽기 전에 힘을 다할 바는 오직 제사에 있다.”
하고, 매양 제삿날을 맞으면 반드시 친히 제수를 갖추기를 5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친정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예제에 지나칠 정도로 몸을 훼상했고, 대소렴과 장례에 필요한 기물을 마련하여 금천(衿川)에 안장하였다. 춘추의 절사(節祀)에는 몸소 제수를 마련하여 바치기를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고, 또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제사를 받들 바탕을 삼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공인은 숙종 갑자년(1684)에 태어나고 영조 경인년(1770) 7월 6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87세였다. 9월 모일에 공주의 치소(治所) 동쪽 10리의 대오동(大梧洞) 경좌(庚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세 아들은 익운(翼運), 심운(心運), 기운(箕運)이고 한 딸은 시집가기 전에 요절하였다. 익운의 양자는 석일(錫一)이고 두 딸은 남리백(南履百)과 최정(崔炡)에게 출가했다. 심운의 두 아들은 진사 석리(錫履)와 석경(錫庚)이고 네 딸은 진사 권규(權揆), 홍진(洪璡), 최해문(崔海聞), 윤행복(尹行復)에게 출가했다. 기운의 두 아들은 중부의 양자로 나간 석일(錫一)과 석충(錫忠)이고 한 딸은 김득인(金得仁)에게 출가했다. 내외 증손ㆍ현손이 약간 명이다.
아아, 공인은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남편을 섬김에 순종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의롭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가도가 덕분에 실추되지 않았으니, 부인의 행실이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항상 시어른의 원통함이 씻어지지 않는 것을 종신토록 애통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주상 갑진년(1784, 정조 8)에 손자 석충이 원통함을 호소하여 씻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탄식하기를, “오씨의 집에 자손이 있다.”고 하였다.
공인의 떳떳한 법도와 아름다운 기림을 익히 들어왔는데, 지금 현윤(賢胤)이 지은 행록을 얻어보고 더욱 그 상세함을 얻어, 그 대략을 이상과 같이 엮고 다음에 명을 붙인다.
군자의 배필이고 / 君子之配
여사의 행실이었네 / 女士之行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순한 덕은 / 仁孝婉娩
천성에 근본하였네 / 本乎天性
공경으로 남편에게 순종하여 / 敬順夫子
예를 따라 어긋남이 없었네 / 率禮無違
자녀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침에 / 撫敎膝下
교화시켜 인도함이 법도에 맞았네 / 化導中規
근검으로 집안을 이루고 / 勤以家成
수를 누려 덕이 융성함을 보였네 / 壽以德隆
친척이 모두 은혜에 감격하고 / 宗戚感恩
이웃이 공덕을 칭송하였네 / 鄕隣頌功
동관이 붓을 잡으면 / 彤管秉筆
마땅히 숙원편(淑媛篇)에 들리라 / 宜編淑媛
나의 명이 아첨이 아니니 / 我銘不諛
경건히 후손에게 고하노라 / 敬告後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