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전에 이지숙(李知叔), 이화중(李和仲) 형제와 교분을 맺었는데, 지숙은 나와 동갑으로 신유년(1681, 숙종7)에 태어났다. 화중은 세 살이 적다.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려 시장(試場)의 방방(放榜) 때마다 두 공이 번번이 합격하니, 어린아이까지도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지숙은 37세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16년이 지나 화중이 또 병으로 임종하니, 역시 중년을 못 넘긴 것이다. 친구들이 슬퍼하기를 골육처럼 하였다.
아, 인재는 태어나기가 매우 어렵지 태어나면 지우(知遇)를 만나기 마련이다. 두 분은 재주와 기량을 다 갖춘 분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을 두고 고금의 지사(志士), 인인(仁人)이 울먹이며 탄식해 마지않았는데, 두 분에게도 해당된다 하겠다.
화중의 휘는 양우(陽遇)이고, 자호는 연주(蓮洲)이다. 시조는 휘 순유(純由)로서 신라에 벼슬하여 경상(卿相)에 이르렀다. 신라가 망하자 폐출되어 장리(長吏)가 되었고 경산부(京山府)에 이주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성주(星州)이다. 이로 인해 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20대를 내려와 휘 조년(兆年)이 있었으니, 이름이 국사에 실려 있다. 지금 영봉서원(迎鳳書院)에서 향사되고 있는 분이 이분이다. 대대로 혁혁한 벼슬을 이어 와서 휘 발(潑)에 이르렀으니, 우리 태종을 섬기고 지위가 병조 판서에 올랐다. 그 증손인 휘 자견(自堅)은 지위가 호조 판서에 올랐으니, 가장 드러난 인물이다. 몇 대는 떨치지 못하다가 휘 곡(轂)이 공조 좌랑을 지냈다. 양자인 휘 보윤(保胤)은 요절하였다. 아들 휘 징(徵)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으니, 바로 선고(先考)이다. 비(妣)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참판을 지낸 휘 위(瑋)의 따님이자 영의정 휘 대운(大運)의 손녀이다.
화중은 숙종 10년 갑자년(1684) 모월 4일에 태어났다. 성동(成童)의 나이도 되기 전에 이미 학업이 고루 겸비되어 빠르게 성취되었다. 글을 짓고 글자를 익힘에 있어서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날로 진보되었는데, 사학(史學)을 더욱 잘했다. 치란과 득실에 대해 깊이 궁구하여 사리를 꿰뚫었다. 신묘년(1711, 숙종37)에 형제가 모두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끝내 현달하지 못하고 임자년(1732, 영조8) 윤5월 8일에 임종하였으니, 운명인가 보다. 9월에 광주(廣州) 돌마리(突馬里)의 해향(亥向)을 등진 언덕에 안장되었다.
화중은 성품이 호방하고 매우 강개하여 언론이 과격하였으며, 남의 좋지 않은 언행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더럽혀질 듯이 하였다. 그리고 충신, 열사의 훌륭한 행실과 뛰어난 이름에 이르면 번번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여 노래하고 읊조렸다. 산업에는 관여하지 않아서 쌀독이 자주 비어도 개의하지 않고 오직 책을 읽고 사리를 담론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일찍이 과장(科場)에 나아갔는데, 은밀히 사적인 경로로 시관(試官)에게 소개해 주려는 자가 있었다. 이에 바로 정색하며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아들 건(揵)이 향적(鄕籍)에 이름을 올려 과거 급제에 이롭게 하려 하자, 임금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는 것이라며 책망하였다. 일에 대처함이 모두 이러하였다.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통덕랑 익상(翼祥)의 따님이자 이조 판서 세규(世規)의 손녀이며, 감사 오공 시대(吳公始大)의 외손녀이다. 아들 둘이 있으니, 장남 건과 차남 관(摜)이다. 관은 양자로 나갔다. 건은 박섬동(朴暹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재주는 본디 지니고 있었고 / 才者自有也
절개도 본디 지키고 있었네 / 介者自守也
자신의 뜻대로 늘 살았으니 / 厥志常伸
버려진들 탓할 게 없네 / 舍藏而無咎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