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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위세(緯世)이고, 자는 숙장(叔章)이며, 성은 문씨(文氏)이다. 선조 다성(多省)은 신라 시대에 현달하여 남평 현주(南平縣主)가 되어 자손들이 마침내 남평(南平) 사람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 공유(公裕)는 태학사(太學士)이고 시호는 경정(敬靖)이며, 극겸(克謙)은 평장사(平章事)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인데, 조선조에 이르러서 두 공(公)의 공업(功業)이 빛난다는 이유로 고려왕을 모시는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익점(益漸)은 끊어진 학문을 창도하여 학자들의 스승이 되고 부모에게 효도하여 살던 마을에 정려문이 세워졌는데, 이분이 삼우(三憂) 선생이다. 익점은 고려 말에 벼슬하여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 목화씨를 얻어서 돌아오니, 동국(東國)의 백성들이 만세토록 영원히 힘입었으며, 우리 열성조께서 그 공덕을 추념(追念)하여 강성군(江城君)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하며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공에게 9대조가 된다. 공의 7대조 화(和)는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5대조 상행(尙行)은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증조 창(昌)은 현령을 지냈다. 현령공은 봉사(奉事)를 지낸 현(賢)을 낳았는데, 봉사공은 중종(中宗) 기묘년(1519, 중종14)에 사화(士禍)에 걸려 금고(禁錮)를 당했으며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봉사공은 공의 아버지 량(亮)을 낳았는데, 량이 국자 생원(國子生員)으로 있을 때 변방에 사변이 일어나자 조정은 억지로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았다. 량은 얼마 안 되어 적신(賊臣)인 이기(李芑)에게 미움을 받아 집에 거처하며 나가지 않았다. 량은 어초은(漁樵隱) 윤공 효정(尹公孝貞)의 딸에게 장가들고, 부인은 장흥(長興)의 풍산(楓山) 저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에 외삼촌인 귤정(橘亭) 윤구(尹衢)에게 배웠다. 외삼촌은 공이 남달리 똑똑하고 단정한 것을 사랑하여 《소학(小學)》을 권하며 늘 말하기를,
“아이는 끝내 반드시 큰 학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은 차차 성장하자 통렬히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서책들을 널리 보아 통달하고 그것을 성현의 경전으로 요약하였으며,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일찍이 미암(眉菴) 유공 희춘(柳公希春)에게 나아가 경의(經義)의 차이를 질문했는데, 유공이 칭찬하였다.
공은 31세 때 도산(陶山)에 계시던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뵈었다. 비록 어머니가 연로하기 때문에 이 선생을 오래 모시지는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을 오고 가며 직접 배우기를 매우 지극하게 하였다. 이 선생이 일찍이 무후(武侯)의 〈팔진도(八陣圖)〉를 공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 역시 격치(格致)의 한 단서이다. 독서하는 여가에 잠심(潛心)하여 익히고 연구하라.”
하였다.
공은 34세 때 어머니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은거하며 다시는 나가지 않고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법도에 맞게 집안을 다스리니, 마을 사람들이 본받아 법칙으로 삼았다.
부모가 다 별세한 다음에는 백씨(伯氏), 중씨(仲氏)와 강 언덕을 나누어 오두막을 짓고 화목을 다할 따름이었다. 또한 가지산(迦智山) 속에 들어가 수석(水石)과 기이한 경치를 사랑하여 작은 집 둘레에 매화와 대를 심고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날마다 성인의 글을 읽고 퇴도(退陶 이황)의 글들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찾아와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권면하고 타이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지 않고 사라진 듯이 목소리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력 임진년(1592)에 섬 오랑캐가 뱀처럼 침범하여 우리의 어가(御駕)가 파천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7개 도(道)는 무너지고 호남(湖南)만이 한 모퉁이를 보존했는데, 두 절도사가 관할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다가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 등 여러 의사가 전투에서 패하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아침저녁으로 죽을 때를 기다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은 박공 광전(朴公光前)을 찾아가 뵙고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병졸에게 군량미를 먹이는 것을 오직 호남에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호남이 비어 사람이 없습니다. 호남을 보존하지 못하면 나라도 따라서 망합니다. 참으로 두세 명의 현명한 선비를 얻어 흩어지고 도망간 병졸을 불러 모아 험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다가 적을 맞이하여 친다면 훗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어찌 이에 힘입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또한 군자도 죽는데 죽을 때 제 자리를 찾아야지, 새나 쥐가 엎드려 있다가 구차하게 살기를 꾀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박공이 의연히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하고, 즉시 편지를 써서 임공 계영(任公啓英)에게 알렸다. 임공은 일찍이 박공과 함께 이 일을 의논하면서 함께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했는데, 즉시 달려와서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앉아 과연 세상을 잊은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오늘 우뚝 의사(義士)의 주창자가 되었구려.”
하고, 드디어 계책을 정하였다. 마침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이 본현으로부터 왔고, 이에 격문을 지어 여러 군현을 효유하였다. 공이 이에 말하기를,
“이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한갓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각자 병졸을 불러 모아 한 도의 선두가 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가 답하기를,
“예!”
하였다.
공은 충의(忠義)로 친지와 족당(族黨)을 격려하고 자제들을 주변 고을에 나누어 보내 장사(壯士) 200여 명을 얻어 7월 모일(某日)에 보성(寶城)의 관아 문 밖에 이르니, 임공과 박공도 기약한 대로 이르렀는데 그들이 모집한 사람 역시 수백 명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장수가 없으면 군대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에 임공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공과 박공은 전략을 주관하였다. 드디어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동쪽으로 가면서 병사를 모은 것이 또한 1000여 명이 되어 군대의 성세가 점점 떨쳐졌다. 지나가는 여러 성에서 혹은 유병(儒兵)이라고 얕보며 군량미를 주어 도와주지 않자, 임공이 근심하며 공에게 말하기를,
“양식을 풍족하게 준비하는 것은 군대를 운용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이렇게 군량미가 떨어졌으니, 여러 군사가 중도에 흩어질까 염려됩니다.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공이 만약 대책을 세워 군대의 일이 이루어지게 한다면 전공이 장수를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은 자와 같을 것입니다.”
하자, 공이 드디어 급히 원근 지역으로 달려가서 읍재(邑宰)와 부유한 백성을 만나 지성으로 깨우쳤는데, 말을 한마디 할 적마다 눈물을 몇 줄기씩 흘리니, 감격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이 길에 서로 이어졌다. 이에 말은 기운이 오르고 군사들은 배불리 먹었으며, 마침내 여러 도의 의병장과 합세하여 금산(錦山)과 무주(茂朱)의 적들을 베고 개령(開寧)의 적을 격파하고 성주(星州)의 적을 몰아낼 수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공이, 군량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노력한 덕분이었다.
10월 임공이 종사관 정사제(鄭思悌)로 하여금 휘하 장병의 전공을 상소로 진달하게 했는데 공이 으뜸이었다.
계사년(1593)에 순찰사 권공 율(權公慄)이 행재소에 급히 장계하여 전공을 논의했는데 역시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갑오년(1594) 여름에 적이 물러나 남해에서 버티자 대가(大駕)가 비로소 서울로 돌아와 여러 의병을 해산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은 다시 가지산 속으로 돌아갔다.
을미년(1595)에 조정의 진신들이 번갈아 가며 공의 재능과 학식을 천거하자, 상이 특별히 6품에 승진시킬 것을 명하고,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하였다. 벼슬살이하는 것은 공의 뜻이 아니었으나 국가의 우환이 한창 큰 것을 생각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용담현은 적이 지나가는 요충지로서 공사(公私)가 땅을 쓸어 낸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나 공이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돌보고 폐단을 고쳐 신용을 보이자 백성들이 부모를 대하듯 소중히 떠받들었다.
정유년(1597)에 적이 다시 방자하게 마구 쳐들어와 남쪽 지방이 소란스러워지자 수령과 읍재가 모두 짐승처럼 달아나 제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으로 삼았는데, 공은 홀로 읍민(邑民)을 묶어 1군을 만들어 적의 길목을 끊고 자제 4, 5명으로 하여금 죽음을 각오한 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사라지며 기습 작전을 벌이게 하여 적을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온 경내가 그 덕분에 온전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그 경내에 들어와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호남과 영남이 전란의 피해를 입어 백성의 재물이 모두 무너졌는데, 유독 이 고을은 평소처럼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태수의 현명함을 알 만하다.”
하였다.
다음 해에 적이 평정되어 공이 인끈을 풀고 돌아가려 하자, 백성들이 울면서 머물 것을 청하였고,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자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공은 산으로 돌아온 뒤에는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책 보는 것을 즐겨서 질병이 아니면 책을 손에서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경자년(1600) 봄 선조(宣祖)께서 공의 업적을 생각하고, 등급을 뛰어넘어 파주 목사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이미 병든 상태였고, 끝내 3월 14일 침소에서 별세하니, 향년 67세이다. 장흥(長興) 늑룡동(勒龍洞) 건향(乾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사림(士林)이 공의 의(義)를 사모하여 관산(冠山)의 월천(月川)에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에 제향을 올렸다.
배위(配位)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참봉 이경춘(李景春)의 딸이고, 5남 1녀를 낳았는데, 원개(元凱)는 주부(主簿)이고, 영개(英凱)는 선전관(宣傳官)이고 중부(仲父)의 후사를 이었으며, 형개(亨凱)는 직장(直長)이고, 홍개(弘凱)도 직장이고, 막내는 여개(汝凱)이며, 사위는 사인(士人) 백민수(白民秀)이다. 손자는 9명이니, 주욱(周郁), 재욱(再郁), 현욱(顯郁), 취욱(就郁), 사욱(斯郁), 현감 익준(益晙), 치욱(致郁), 치괴(致晆), 만욱(晩郁)이고, 6녀는 모두 사인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는 39인이고, 현손자와 현손녀는 60인이고, 내손자와 내손녀는 100여 인이다.
공의 자호(自號)는 풍암(楓菴)이고, 저술한 것은 모두 불에 타 버려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일찍이 달빛 타고 앞 시내 바위의 대(臺)에 걸어 올라가 쓸쓸히 북쪽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북쪽 대궐은 아득히 소식 끊기니 종남산과 위수가 꿈속에도 그립네.[北闕迢迢消息斷 終南渭水夢依依]”라고 하였다. 남쪽의 선비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외우며, 그 대를 ‘사군대(思君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 우리의 도는 체용(體用)일 뿐이다. 천하의 일은 그 체는 있으나 그 용이 없는 것은 없었고, 또한 그 용은 있으나 체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은 없었다. 무릇 공이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주고받은 것은 요컨대 부모에 대한 효도, 임금에 대한 충성, 백성의 떳떳한 본성, 사물의 법칙 같은 이치를 넘지 않았다. 또한 더구나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요결대해 기필코 매우 주밀하게 터득하기를 기다렸고 보면, 공이 은거할 때 접어서 가슴에 간직한 것은 말라죽은 나무나 불 꺼진 재가 아니었고, 공이 세상에 나갔을 때 의(義)에 의지하고 지혜로 도모하자 벌과 전갈이 그 독침을 꺾고 사직이 그 힘에 의지했으니, 성대하게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대개 평소 마음에서 강구하고 밝힌 것이 그것의 근본이 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고 그 누가 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 지금 공의 7세손 사한(史漢)이 천 리 길을 찾아와서, 내가 외람되이 부탁을 받았다. 이것은 효성스러운 후손의 정성이니, 감히 문장력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우선 문사를 엮어서 사적을 열거하여 붓을 잡는 자의 채택에 대비한다.
[주-D001] 풍암(楓菴) 문공(文公) : 문위세(文緯世, 1534~1600)로, 본관은 남평, 자는 숙장, 호는 풍암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진사를 한 뒤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전공이 있어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어 고을을 잘 지켰으며, 노년에 파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주-D002] 이기(李芑) : 1476~1552. 명종 즉위 후 우의정으로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와 함께 대윤(大尹) 윤임(尹任)을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주-D003] 윤구(尹衢) : 1495~?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이다.[주-D004] 유공 희춘(柳公希春) : 유희춘(1513~1577)으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 시호는 문절(文節)이다.[주-D005] 이 선생(李先生) : 이황(李滉)을 가리킨다.[주-D006] 무후(武侯)의 팔진도(八陣圖) : 무후는 중국 촉(蜀)의 전략가인 제갈량(諸葛亮)이고, 〈팔진도〉는 군진(軍陣)을 형성하는 작전도이다.[주-D007] 격치(格致) :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한다.[주-D008] 뱀처럼 침범하여 : 성질이 포악하고 잔혹한 자들이 침략한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에 “오나라는 큰 돼지와 기다란 뱀이어서 끊임없이 상국을 침범하고 있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는 말이 나온다.[주-D009] 조헌(趙憲) : 1544~1592.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ㆍ도원(陶原)ㆍ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분전(奮戰)하다 전사하였다.[주-D010] 고경명(高敬命) :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ㆍ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싸우다 전사하였다.[주-D011] 박공 광전(朴公光前) : 박광전(1526~1597)으로,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동복(同福)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주-D012] 임공 계영(任公啓英) : 임계영(1528~1597)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이다. 임진왜란 때 박광전, 문위세 등과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당시 와병 중이던 박광전 대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주-D013] 김익복(金益福) : 1551~?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膺),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임진왜란 때 영광 군수로서 현감 임계영과 함께 인근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결국 군중에서 전사하였다.[주-D014] 유병(儒兵) : 선비들이 주축이 된 의병을 말한다.[주-D015] 개령(開寧) :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이다.[주-D016] 용담(龍潭) : 전라북도 진안(鎭安)의 옛 지명이다.[주-D017]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요결 :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도(八陣圖)〉를 가리킨다. 퇴계 이황이 문위세에게 주며 익히고 연구할 것을 명한 내용이 앞에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