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족보에는 오정이 사위로 나오는데 비문에는 동생 오전이 사위로 나옴
공의 휘(諱)는 면(沔), 자는 지해(志海), 자호(自號)는 송암(松庵)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 왕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하자 자손들이 국내에 흩어져 살았는데 고령(高靈)에 거처를 잡은 자들이 고령을 관향으로 삼았다. 휘 남득(南得)이란 분이 있는데 고려 말에 현달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증조(曾祖)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증직된 휘 장생(莊生)이고, 조부(祖父)는 도승지 휘 탁(鐸)이고, 선고(先考)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휘 세문(世文)이다. 선비(先妣)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고, 판관(判官) 김중손(金仲孫)의 따님이다.
공은 기운과 풍모가 굳세고 강개하며 큰 지절(志節)이 있었다. 독서할 때 장구(章句)를 따지는 데 힘쓰지 않고 묵묵히 성현의 지결(旨訣)을 궁구하였는데, 특히 이정(二程)의 글을 읽기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몸가짐과 일 처리에 이 글에서 도움을 얻는다면 큰 잘못은 없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남명(南冥)을 스승으로 삼고 한강(寒岡)을 벗으로 삼아 지조와 행실이 날로 돈독해지자, 사방에서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고을 사람들은 훌륭한 덕에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너는 불선한 일을 하지 마라. 송암 선생이 알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즉위 초에 유현(儒賢)을 발탁하여 모두 6품직으로 올렸는데 조월천(趙月川), 성우계(成牛溪), 정한강(鄭寒岡) 그리고 공이었다. 처음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처음과 같이 제수되어 간곡한 부름이 갈수록 잦아지니 마지못해 한 번 사은(謝恩)하고 돌아와서는 마치 그대로 일생을 마치려는 것처럼 세월을 보냈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25) 4월에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입하자 열진(列鎭)이 족족 무너져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존망(存亡)이 경각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임금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는데 신하가 죽지 않는다면 성인(聖人)의 글을 읽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조공 종도(趙公宗道), 곽공 준(郭公䞭), 문공 위(文公緯)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니, 한 달도 채 안 되어 수천 명의 무리가 모였다. 당시 왜적은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의 경계에 주둔하면서 10만 군사라 일컫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군사들을 데리고 우지(牛旨)에 진을 쳤는데 호령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한 덕분으로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군사들의 모든 훈련 동작이 엄숙하여 소란스럽지 않았다. 적장이 군사를 크게 모아 아군을 습격하려 하자 공이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쳐들어오는 적들을 맞아 싸워 무찌르니, 군사들의 위세가 이에 비로소 진작되었다.
당시에 곽공 재우(郭公再祐)도 의병을 일으켜 서로 호응하였는데 도백(道伯) 김수(金睟)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격문(檄文)을 보내 김수의 죄상을 나열하고, 김수 또한 곽공(郭公)의 잘못을 열거하여 행재소(行在所)에 급히 장계하였다. 이에 공이 외부의 적이 섬멸되기도 전에 내부의 다툼이 먼저 일어날까 염려하여 곽공에게 서신을 보내 그만두도록 타이르자, 곽공이 깨닫고는 즉시 자기의 탓으로 돌리고 혐의를 풀어 일이 중지될 수 있었다. 공이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정진(鼎津)을 끼고 적진과 대치하니, 백성들이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아 마치 시장에 몰려들듯 몰려들었다. 곽공이 장좌(將佐)에게 말하기를 “김 의장(金義將)이 적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있는데, 그 계책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10여 기병(騎兵)을 따르게 하여 공의 군문(軍門)을 두드리니, 공이 장내(帳內)로 맞아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한껏 보내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곽공이 물러나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엄숙하고 굳세구나, 그 모습이여. 편안하고 느긋하구나, 그 기운이여. 이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조종도에게 말하기를 “적군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으니, 계책을 쓰지 않으면 격파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사방을 둘러싸 북과 나팔을 울리고 함성을 질러 마치 원군(援軍)이 사방(四方)에 집결한 것처럼 꾸미는 한편, 바람을 따라 빈 배 10여 척을 띄워 적진 가까이로 떠내려가게 하였다. 적이 고각(鼓角)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먼저 의아해하다가 빈 배가 저절로 뭍에 와 닿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이는 우리를 유인하여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사를 돌려 퇴각하려 하자, 공이 서둘러 병사를 도강(渡江)시키고는 온 힘을 다해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허겁지겁 밟아 죽이기도 하여 그 시체가 30리까지 가득 이어졌다. 공이 마침내 승세를 타고 무계(茂溪)에 주둔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함선이 강을 뒤덮을 정도로 와서 정진에서의 한을 풀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장좌에게 “바라건대 제군(諸君)을 위하여 한번 죽기를 결단하겠노라.”라고 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결사 항전하니, 강에 빠져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싸움에서 적에게 노획한 재물이 아주 많았는데 그 모두를 방백(方伯)에게 보내 행재소에 바치게 하였다.
6월에 조정에서 공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았는데, 그 교서(敎書)에 “정진에서 용맹을 떨치매 도망하던 적들이 넋을 잃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르매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라고 하였다. 행조(行朝)는 비록 수천 리 밖에 있었지만 공의 공적(功籍)이 자자했던 까닭에 그 실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9월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고 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11월에 상이 공의 위망(威望)이 가장 현저하다고 하여 특별히 의병대장(義兵大將)의 호칭을 하사하고 수백 자에 이르는 교서를 내려 장려(獎勵)하기를 지극히 하였는데, 그 말미에 “깊은 원한을 씻어 내고 구업(舊業)을 회복한 이는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하니, 공이 읽기도 하고 울기도 하매 온 군사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초에 정인홍(鄭仁弘)은 공과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의 명성과 위엄이 자기를 뛰어넘은 것을 시기하여 한을 품게 되었다. 이에 그 휘하(麾下)가 모함하고 선동하여 비방을 가하였으나 공은 그에 대해 한결같이 시비를 따지지 않으니 정인홍도 끝내 감히 안색과 말로 어쩌지 못하였다.
이 당시 공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군량을 원조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내용이 강개하여 글자마다 눈물이 맺혀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가 들어주지 않자 공은 더욱 발분하여 무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격려하며 이끌어 적을 지례(知禮)에서 섬멸하고 개령(開寧)에서 무찌르는 한편, 호남과 영남의 여러 의병장과 네 도(道)로 함께 진격하자고 약속하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자고 맹서하였다. 그런데 여러 의병장이 기약한 날짜가 되어도 이르지 않자 공이 홀로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 육박해 들어가니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고령(高靈), 지례, 의령(宜寧), 김산(金山) 등의 읍을 수복하니, 상이 그 업적을 장하게 여겨 공이 거느리고 있던 부대를 이끌고서 근왕(勤王)케 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행장을 꾸려 하루를 넘기면 안 될 것처럼 서두르자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공이 여기 있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찰사 김공 성일(金公誠一)이 서둘러 행재소에 급히 장계하여 아뢰기를 “김면이 본도를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남방(南方)은 수습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공을 본부(本府)에 머물도록 명하여 이루어 놓은 공을 마저 끝내도록 하였다.
공은 여러 읍을 순행하여 흩어져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을 적에 눈비와 서리를 맞아 가며 제 몸을 돌보지 않으니, 공을 위하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영(先塋)을 지나갈 적에 고을 수령이 제수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은 이를 물리치며 “능침(陵寢)도 향사(享祀)를 못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나의 선조에게 제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단지 글만 지어 고하였고, 처자식들이 굶주리고 떠돌면서 10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나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계사년(1593) 1월 우도 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상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천조(天朝)의 군사가 크게 모여 이미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니 경성(京城)에 있는 적들은 끝내 반드시 도망쳐 돌아가게 될 것이다. 경은 정예병을 모조리 매복시켜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직임을 맡은 이후로 오직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성산(星山)에 있던 적을 쳐부술 때엔 수백 급(級)을 참수하고 선산(善山)으로 압박해 들어갈 때엔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면 멈추지 않았다. 이에 관찰사가 사람을 시켜 타이르기를 “적의 세력이 지금 왕성하니, 우선 늦추는 것이 어떤가?”라고 하자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고서 여러 의병장을 배치하고 편제하여 군령(軍令)이 이미 정해졌는데 공이 갑자기 병이 들어 끝내 3월 17일 군문(軍門)에서 졸하였다.
병이 막 위독해졌을 때 조공(趙公)이 약그릇을 손으로 내밀며 말하기를 “공이 만일 불휘(不諱)한다면 국사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자, 공이 억지로 일어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적을 섬멸하여 주상께 보답하자고 맹서하였는데, 불행히도 목숨이 여기에서 끝나게 되었으니, 이는 천명(天命)이다.”라고 하고 이어 눈물을 줄줄 흘리니, 군교(軍校)들과 좌우에서 시봉하던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얼마 뒤 조공에게 부탁하기를 “적들이 나의 죽음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그 틈을 타고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이를 비밀로 하고서 신창(新倉)에 도착한 뒤에 발상(發喪)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장좌가 유명을 받들어 공을 신창으로 실어 오고서야 비로소 발상하니, 온 군사들이 통곡하고 백성들은 발을 구르며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찰사가 급히 장계하기를 “강우(江右) 일대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된 것은 모두 김면 덕분입니다. 장성(長城)이 한번 무너져 하늘이 순덕(順德)을 돕지 않으니 신이 외로이 홀로 있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애통해하며 특별히 병조 판서로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뒤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판서에 바꾸어 추증하였다. 광해(光海) 초년에 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공은 향년 53세로, 모 고을 모 언덕에 묻혔다. 이후 조공 종도와 곽공 준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면서 성이 함락되어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충신(忠信)으로 사귐을 맺어 삶과 죽음이 갈리는 와중에서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평소 부모를 모심에 효성을 다한다고 알려졌다. 황고(皇考) 찬성공(贊成公)이 북진(北鎭)에서 졸하였던 당시는 공이 영남에서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고 있었던 때라 거리가 수천여 리나 떨어져 있었고 날씨마저 찌는 듯 무더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가고 가슴 치고 울부짖으면서 나아가니 노중(路中)에 있던 사람들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였다. 훗날 모친의 상중(喪中)에서도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예(禮)를 다하기를 부친상과 똑같이 하였다. 일찍이 살던 집 뒤편에 있는 산자락에 누대를 쌓아 ‘회선(懷先)’이라 명명하고는 선영을 바라보며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는 오직 충(忠)과 효(孝)를 행할 뿐이다. 공이 부친상을 당해 수천 리 길을 걸어서 분상(奔喪)하였을 때에 이치상 필시 목숨이 끊어졌어야 했는데도 끝내 죽지 않은 것은 “공으로 하여금 효를 행하다 죽게 한다면 훗날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누가 있어 나라의 위기를 구할 임무를 내릴 수 있겠는가.”라는 하늘의 뜻 때문이 아니겠는가. 끝내 국사에 심신을 다 바쳐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공이 효를 행하다 죽지 않고 충을 행하다 죽은 것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이 졸하고 70여 년이 지난 뒤에 사림(士林)들이 고령(高靈)에 사당을 세우고 제향(祭享)하였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으니, 전배(前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황(李煌)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완산 이씨로 부림부수(缶林副守) 이건(李建)의 따님이다. 모두 자식을 기르지 못하여 아우인 현령(縣令) 자(滋)의 아들 의립(毅立)을 후사로 삼으니, 그의 벼슬은 현감이다.
의립은 1남을 두니, 정황(鼎黃)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사위는 참의(參議) 오전(吳竱)이다. 증손(曾孫)과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나에게 글을 청하여 신도(神道)를 빛내려는 자는 6대손인 절도사(節度使) 재(梓)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학문에는 체와 용이 있으니 / 學有體用
어찌 그것이 죽은 물건이겠는가 / 豈伊死物
상황에 따라 분수를 다함은 / 所遇盡分
그 근원이 한가지이네 / 其原也一
공은 지난날 고요히 앉아 / 公昔靜坐
정자와 주자를 논하였는데 / 曰程曰朱
몸을 일으켜 큰소리로 호령하자 / 起身大號
의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 義旅雲趍
정진에서 적을 죽일 때에는 / 殺賊鼎津
죽은 적의 배를 밟고 피바다를 건넜으며 / 履膓涉血
무계에서 예봉을 부러뜨릴 때에는 / 摧鋒茂溪
적을 물고기와 자라 밥으로 만들었네 / 賊飼魚鱉
왕이 용만에 있을 때 / 王在龍灣
커다란 치적이 알려지니 / 茂績升聞
대장의 호를 하사하고 / 錫號大將
왕을 호종하라는 명을 내렸네 / 誥綍從天
공은 절하고 눈물 흘리며 / 公拜以泣
신은 노둔하고 나약하옵니다 하니 / 臣駑且孱
왕은 말하길 사양치 말라 / 王曰無讓
너는 나의 장성이니 / 爾予長城
너를 총애함이 어떠해야 하겠느냐 / 寵爾維何
호절과 아정이니라 하였네 / 虎節牙旌
공은 큰 담력을 지녀 / 公有斗膽
적의 소굴을 하찮게 보고는 / 蟻視賊窟
우리 의로운 장수들과 함께 / 同我義將
하루도 안 되어 소탕하였는데 / 不日掃滅
천운인가 시운인가 / 天耶時耶
공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 公不起疾
군민들은 소리 내어 곡을 하고 / 軍民號哭
소가 울부짖고 천둥이 울렸네 / 牛吼雷裂
이에 왕이 슬퍼하여 / 王庸悼惜
빛나게 관작을 추증하였네 / 有爛追爵
공은 옛날에 정을 주로 하여 / 公昔主靜
앉아 있을 때에는 진흙으로 빚은 인형 같았는데 / 坐泥塑若
신묘한 용을 조금 시험하여서는 / 略施妙用
우리의 사직을 부지하였네 / 扶我社稷
제기가 엄숙하니 / 俎豆有儼
또한 보덕이라 할 만하네 / 亦云報德
명을 지어 보이노니 / 銘以眎之
후학의 본보기로다 / 後學之則
[주-D001] 남명(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이다. 경상남도 산청(山淸)의 덕천서원(德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주-D002] 한강(寒岡) : 정구(鄭逑, 1543~1620)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경상북도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3] 조월천(趙月川) : 조목(趙穆, 1524~1606)으로,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이다. 퇴계 이황의 팔고제(八高弟) 중 한 사람이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사양하고 일생 동안 이황 옆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심학(心學)에 밝았다.[주-D004] 성우계(成牛溪) : 성혼(成渾, 1535~1598)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이다.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으며 20세에 한 살 아래의 율곡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1681년(숙종7) 문묘에 종향되었다.[주-D005] 조공 종도(趙公宗道) : 조종도(1537~1597)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군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하였다.[주-D006] 곽공 준(郭公䞭) : 곽준(1551~1597)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1594년 안음 현감이 되어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가족과 함께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주-D007] 문공 위(文公緯) : 문위(1554~1632)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순보(順甫), 호는 모계(茅谿)이다. 조식(曺植)ㆍ오건(吳健)ㆍ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의병들을 모집하고, 의병장 김면과 함께 고령(高靈)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 70세의 나이로 고령 현감에 부임하였으나, 수개월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8] 우지(牛旨) : 우두령(牛頭嶺)으로,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상북도 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주-D009] 나무를 …… 삼아 : 농민들이 무장을 하고 떨쳐 일어남을 말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과진론 상(過秦論上)〉에 “나무를 깎아 무기로 삼고, 대를 들어 깃발로 삼으니, 천하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응하면서, 양식을 싸 들고 그림자처럼 따랐다.[斬木爲兵, 揭竿爲旗, 天下雲會而響應, 贏糧而景從.]”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10] 정인홍(鄭仁弘) : 1536~162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황간 현감, 장령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 합천, 고령, 함안 등지를 방어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주-D011] 김공 성일(金公誠一) : 김성일(1538~1593)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정(敵情)을 잘못 알린 죄를 물어 파직되었다가 유성룡 등이 변호하여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 중 순직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峯集)》이 있다.[주-D012] 불휘(不諱) : 죽음을 완곡하게 부르는 말이다.[주-D013] 국사에 …… 그만두었으니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신은 심신을 다 바쳐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臣鞠躬盡力, 死而後已.]”라고 하였다.[주-D014] 호절(虎節)과 아정(牙㫌)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벼슬을 말한다. 호절은 절도사가 지니고 다니던 범 모양의 병부(兵符)이고 아정은 장군의 의장(儀仗)인 상아로 만든 큰 깃발인데, 김면은 1593년 1월 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주-D015] 앉아 …… 같았는데 : 북송(北宋)의 학자인 사양좌(謝良佐)가 정호(程顥)에 대해 평하기를 “명도 선생은 앉아 있을 때에는 흙으로 빚은 인형 같았는데 다른 사람을 접할 때에는 오롯이 한 덩어리의 온화한 기운이었다.[明道先生, 坐如泥塑, 接人則渾是一團和氣.]”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近思錄 卷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