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의 휘(諱)는 익필(益馝), 자는 문원(聞遠)이다.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본래 고려(高麗)의 개국 공신인 태사(太師) 도(棹)와 국조(國朝)의 호조 전서(戶曹典書) 구직(丘直)의 후예이다. 고조(高祖)는 종문(宗文)으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현감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증조(曾祖)는 지영(之英)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함길도 병마평사(咸吉道兵馬評事)를 지내다가 광해(光海)의 난정(亂政)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으며 사간(司諫)에 증직되었다. 조부(祖父)는 구(球)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지내고 대사간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는 진주(震柱)이니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으며,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 호조 판서 전흥군(全興君)에 증직되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貞夫人) 옥산 장씨(玉山張氏)로, 여헌(旅軒) 선생의 손녀이자 정랑(正郞) 장영(張𨥭)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시격(時格)으로 군수를 지냈고, 생모(生母)는 숙부인(淑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통덕랑(通德郞) 이엄(李䄋)의 따님이다.
공은 골격이 수려하고 남달랐으며 영민하고 호방한 성격을 지녀 어디에도 구속되는 법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는 집안사람이 밤중에 공이 있는 곳을 놓쳐 샅샅이 찾았더니, 바로 암흑 속의 오래된 사당에 앉아있었다. 이에 집안사람이 놀라며 거기에 있는 이유를 묻자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도깨비의 허실(虛實)과 유무를 알아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공은 일찍이 밤중에 다산포(茶山浦)로부터 도깨비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그곳으로 가 살펴보고는, 돌아와 말하기를 “사람들이 도깨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라고 하였다. 15, 6세에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하고 과거 공부를 하였다.
숙종 계미년(1703, 숙종29)에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무과(武科)로 진출하였는데, 급제한 뒤로는 청탁으로 벼슬자리 구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여러 무경(武經)을 읽었다. 그로부터 8년 뒤 비로소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비국랑(備局郞)을 겸관하였다. 주부(主簿), 도사(都事), 첨정(僉正)으로 누차 천직(遷職)하다가 외직으로 나가 평해 군수(平海郡守), 죽산 부사(竹山府使), 전주 영장(全州營將), 선천 부사(宣川府使)가 되었는데, 사안을 판결함에 막힘이 없었고 의취(意趣)가 호방하고 시원스러웠다. 〈의검정(倚劒亭)〉이란 시를 지어 “어느 때나 대막(大漠)에서 격전을 벌여, 노래하고 춤추며 장안으로 들어갈거나.”라고 하였는데, 오공 명항(吳公命恒)이 접반사(接伴使)로서 부(府)에 들렀다가 이 시를 보고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기상이 웅혼(雄渾)하니, 욀 만하다.”라고 하였다.
영조 을사년(1725, 영조1)에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거쳐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대흥 중군(大興中軍)에 제수되었다.
정미년(1727)에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
무신년(1728) 봄에 승진하여 호남좌도 수군절도사(湖南左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니, 이는 당시 남방(南方)에 벽서(壁書)가 내걸리는 변고가 생겨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을 선발하여 벼슬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미처 그곳에 부임하기 전 적신(賊臣) 이인좌(李麟佐) 등이 거병(擧兵)하여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淸州城)을 함락하고 절도사(節度使)와 영장(營將)을 죽이니, 이때는 3월 15일이었다. 상이 격노하여 대사마(大司馬) 오명항(吳命恒)을 불러 이르기를 “경을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제수하니, 경은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가서 흉역(凶逆)을 정벌하되 오직 마군(馬軍)을 이끌 장수는 스스로 선택하라.”라고 하니, 이에 오명항이 공과 이수량(李遂良)이라고 대답하자 상이 이를 허락하고는 특별히 공을 금위영 우별장(禁衛營右別將)에 제수하여 도순무사의 지휘를 따르도록 하였다.
당시는 태평한 나날이 오래도록 이어진 탓에 군사들이 전쟁에서 쓰는 북과 징 소리조차 듣지 못하여 모두가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서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마군을 이끌고 선봉장이 되었고, 출정(出征)을 앞두고서는 몸에 차고 있던 것을 떼어 모친에 돌려주고 말하기를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모자(母子)의 은혜는 가벼우니,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것으로 저의 얼굴을 대신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길을 떠난 지 여러 날 만에 좌별장(左別將) 이수량을 돌려보내라는 상지(上旨)가 전해지자, 공이 도순무사에게 말하기를 “이수량은 충의(忠義)를 갖춘 용감한 선비이니, 싸움터에 임하여 장수를 교체한다면 병가(兵家)에서 기피하는 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도순무사가 또한 깨닫고는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밤중에 진위현(振威縣)에서 진을 칠 적에 홀연 함성 소리가 나며 검객(劍客)들이 진영으로 돌진해 왔는데, 이때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 누가 적인지 판별할 수가 없자 공이 서둘러 일어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기를 “군졸에게 원앙대(鴛鴦隊)로 배열을 지어 규정된 위치에 가지런히 서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 나머지가 적입니다.”라고 하였다. 도순무사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10여 명을 붙잡아 죽이니, 종사관(從事官) 조현명(趙顯命)ㆍ박문수(朴文秀)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러한 장수가 있으니, 군문(軍門)에 걱정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안성(安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마침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비까지 내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다음 날 아침 적이 보낸 간첩을 붙잡아 비로소 적이 청룡곡(靑龍谷)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도순무사가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 전투를 벌였는데, 그때 공이 앞장서서 용기를 북돋아 날랜 기병이 비바람이 몰아치듯 내달리니 적이 그 위세를 보고는 기가 꺾여 아무도 그 예봉(銳鋒)에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이튿날 승세를 타고 죽산(竹山)에 있던 적을 추격하였는데, 깊은 산과 골짜기에 매복이 있을까 의심되어 경포(警砲)를 한 차례 울렸다. 그 앞에 고개 하나가 있어 이름을 장항령(獐項嶺)이라 하였는데, 그곳을 적이 먼저 차지할까 염려하여 공이 말을 달려 나는 듯이 그 위에 오르니, 바람이 불어와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깃발이 나부꼈다. 그 고개 아래의 수십 보 되는 거리에 적의 주둔지가 있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듯 세찬 기세로 내려오는 관군(官軍)을 별안간 발견한 적이 퇴각하려는 태세를 취하자, 공은 좌별장과 함께 매우 신속히 좌우로 둘러싸며 공격하여 적신 이인좌를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이로써 안성과 죽산에 있던 적들이 다 평정되니, 도순무사가 말하기를 “내가 원래부터 장군이 승리할 줄을 알았다.”라고 하고 이어 〈의검정〉 시를 외고는 말하기를 “오늘의 일이 그 징험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날로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영남에서 적이 출현하였다는 급보(急報)가 전해지자 박 종사가 직접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도순무사의 군문 안에서 군사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만든 이는 오직 박 종사뿐이니, 이 군문에서 하루도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도순무사가 그 말을 따르고는 영남의 적을 평정하는 일이 쉬울지 어려울지에 대해 조용히 묻자 공이 말하기를,
“적들은 비록 형성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지려(知慮)는 너무도 없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을 술과 음식으로 꾀어 억지로 활과 칼을 잡고 여기저기에 머물도록 하고 있으니, 무릇 오합지졸이란 상대의 수가 많으면 쉽게 놀라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쉽게 흩어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남방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창의(倡義)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 관군과 서로 호응하고 있으니, 이에 놀라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후 공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4월에 도순무사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난을 겪은 읍들을 진무(鎭撫)하고 19일에 군대를 정돈하여 서울로 돌아오니, 상이 숭례문(崇禮門)에 거둥하여 승지를 보내 맞이하여 위로하도록 하였다. 예법대로 이인좌의 수괵(首馘)을 받고 나서 출정한 장군들을 선정전(宣政殿)으로 불러 접견하였는데, 상이 “도순무사는 앞으로 나오라.”라고 하여 직접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주고는 이르기를 “경은 이익필, 이수량과 함께 나누어 마시라.”라고 하였다. 또 공을 수충갈성양무 공신(輸忠竭誠揚武功臣)에 책훈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켜 전라 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제수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였다. 회맹을 마치고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리고 또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하는 내용의 글을 내렸으며, 얼마 뒤에 또 화상(畫像)과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었으며 생각이 깊고 원대하였다. 처음 벼슬하여 비국랑이 되었을 적에 수상(首相) 서공 종태(徐公宗泰)가 묘당(廟堂)에서 의논할 12조목을 입으로 불러 주고는 공으로 하여금 묘당의 여러 재신(宰臣)에게 아뢰어 그것의 이해(利害)와 가부(可否)에 대한 의견을 받아 오도록 하였는데, 내용이 복잡하여 한 번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공은 그 내용을 듣자마자 물러 나와 묘당의 재신들에게 돌아가며 아뢰기를 마치고는 돌아와 수상에게 아뢰었는데 하나도 순서가 틀린 것이 없었다. 이에 서공이 재차 칭찬하기를 “비국랑이 인물을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이 어떤 일로 만부(灣府 의주(義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침 호서(胡書) 한 통이 관서(關西)의 감영에 전해졌다. 접반사(接伴使)가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이를 조정에 급히 올렸는데, 상이 명하여 뜯어보게 하니 목호(穆胡 목극등)의 집안 편지였다. 이에 여러 재신이 일이 생길까 걱정하였는데, 공이 이를 해결할 계책을 묘당에 고한 덕분에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공적이 더욱 현저하였다. 평해(平海)에 있을 때에는 안찰사와 암행 어사가 백성을 잘 구휼하였다고 잇달아 표창하니 상이 명하여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통정대부로 승진시켰다. 죽산(竹山)에서 돌아올 적에는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공이 떠난 뒤의 그리운 심정을 담았다. 절도사로 있을 당시에는 큰 난리를 막 겪은 탓에 적폐(積弊)가 가득하였는데, 공은 성심을 다하여 그 폐단을 일소하는 한편 군적(軍籍)의 손질과 모마(募馬)의 창설을 행하고 수천 수백에 이르는 활과 화살, 총과 총알을 갖추었으며 2000섬의 곡식을 별도로 비축하고 1000필의 베를 별도로 비축하였다. 또 성을 개축함으로써 위세를 굳건하게 하고 적상루(赤裳樓)를 지음으로써 국경의 방어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서는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관서 병마절도사(關西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간의 탄핵이 일어났는데, 상이 비록 언관(言官)에게 죄를 주었으나 공은 극력 사직해 체차되어 마침내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전라도 암행 어사가 병영(兵營)의 시사(時事)를 논한 일로 인하여 고령(高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이는 공의 죄가 아니었다. 이에 안찰사가 상소하여 공의 억울한 정상을 밝히자 상이 즉시 사면하였다. 이로부터 부총관, 회령 부사(會寧府使),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누차 제수되었다.
당초 공은 아들이 없어 족자(族子) 관후(觀厚)를 후사로 삼았다. 그런데 공이 춘천(春川)에 부임해 있을 때 관후가 대각(臺閣)에 들어가 소장(疏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조리가 없어 장배형(杖配刑)에 처해지자 공 역시 파직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려져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영남의 하목정(霞鶩亭)으로 돌아가 거문고와 서책을 일삼고 꽃과 대나무를 벗 삼으면서 술 마시고 시 지으며 살아가니, 사람들은 공이 옛날에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계해년(1743)에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의 상을 당하였다. 공은 소싯적에 생부의 병을 시중들면서 손가락에 피를 내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성심을 다하여 애훼하였는데, 이해에 이르러서는 이미 70세였는데도 한결같이 예법에 맞게 상례를 치렀다. 상기(喪期)를 마친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신미년(1751) 8월 17일 침소에서 졸하니 향년 78세였다. 그 전날 저녁 공의 집에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땅이 진동하여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는데 의원이 곁에 있다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의 기가 흩어졌으니, 약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 지의금부훈련원사(兵曹判書知義禁府訓鍊院事)로 관작을 추증하고 예법대로 부의를 하였다.
임신년(1752) 3월 개령현(開寧縣) 금오산(金烏山) 신좌(辛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갑술년(1754) 가을 상이, 훈신(勳臣)이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여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배위(配位)는 증(贈) 정부인 해남 정씨(海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억(鄭檍)의 따님이다. 남편을 모심에 덕을 어기지 않았고 병오년(1726)에 졸하니 향년 53세였다. 3녀를 낳으니, 첫째는 정낙신(丁樂愼)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생원(生員) 이헌복(李憲復)에게 출가하고 셋째는 김제행(金霽行)에게 출가하였다. 관후가 조정으로부터 죄를 얻은 후 공이 상소하여 파양(罷養)을 청하였는데, 상국(相國) 조현명(趙顯命)이 상에게 아뢰기를 “훈신(勳臣)의 후사(後嗣)에 대해서 국가가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상이 관후에게 명하여 본종(本宗)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당제(堂弟) 익집(益
)의 아들인 배후(配厚)를 후사로 삼았는데, 유언을 남겨 배후의 이름을 직양(直養)으로 고치게 하였다.
직양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정오(鼎五)는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차남은 경오(敬吾)이다. 정낙신은 양자(養子)로 정지현(鄭志賢)을 두었다. 이헌복은 6남을 낳았는데 이홍명(李弘明), 이홍저(李弘著), 이홍백(李弘白), 이홍진(李弘晉), 이홍득(李弘得), 이홍욱(李弘昱)이고 두 딸은 모두 출가하였다. 김제행은 3남을 낳았는데 김시흡(金始翕), 김시전(金始全), 김시여(金始畬)이고 세 딸은 모두 출가하였다.
공은 집에 있을 적에 종족(宗族)과 향리(鄕里)에 인애(仁愛)를 베풀어 공을 의지해 끼니를 잇는 자가 늘 대여섯 집은 되었고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재물을 대 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해 주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소략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를 모실 때는 삼가고 공손하여 뜻을 받들고 음식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다. 장 부인(張夫人)은 법도가 엄격하여 공이 이미 존귀하고 현달한 신분과 늙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수시로 꾸짖기를 아이 때와 다름없이 하였는데, 그럴 때면 공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그 가르침을 받드는 한편 때로 즐겁게 웃으며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애썼다. 그러다 고로(孤露)의 몸이 되어서는 사람들이 부모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오열하였으니, 고인(古人)의 이른바 “충신(忠臣)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 참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 匪成功難
공에 머무는 게 어려운 것이니 / 難哉處功
공신록을 차례로 헤아려 보매 / 歷選盟券
끝맺음을 잘한 이 드물었네 / 鮮克始終
용맹한 이공은 / 矯矯李公
나라의 호신이라 / 國之虎臣
신하로서 절하고 왕에게 바친 것은 / 臣拜獻王
그릇에 가득 담긴 적의 귀였네 / 賊馘盛盤
능연각에 머리털이 또렷하고 / 煙閣毛髮
웅곤에 창과 깃발을 세웠네 / 雄閫戟纛
조정이 융단의 지위에 올릴 것을 의논하여 / 議築戎壇
곧 양국으로 자리할 것 같았는데 / 朝莫兩局
공은 유유히 소매를 떨치고 / 拂袖逌然
대령의 남쪽으로 내려가니 / 大嶺之南
낚시하고 소요하며 / 漁釣徜徉
하얗게 센 머리로 단심을 품었네 / 皓髮丹心
밝은 영조께서는 / 惟明英考
태조를 닮으시어 / 藝祖是似
덕에 힘쓴 이를 온전히 보전하여 / 德懋全保
은혜를 크게 베풀고 증직을 거듭해 주셨네 / 恩大贈貤
공명을 이룰 때에 / 功名之際
훌륭하게 주선하였으니 / 善乎周旋
정기는 북락성으로 돌아가고 / 精歸北落
무덤은 기련산을 본떴네 / 冢象祁連
태산과 황하 / 岱岳黃河
나의 명과 함께 전해지리라 / 我銘同傳
[주-D001] 여헌(旅軒) 선생 : 장현광(張顯光, 1554~1637)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주-D002] 대막(大漠) : 몽고고원(蒙古高原)의 큰 사막으로, 북쪽 변경의 오랑캐 지역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03] 오공 명항(吳公命恒) : 오명항(1673~1728)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으로 1705년(숙종3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를 겸관하였는데, 이때 이익필을 자신의 수하로 추천하여 그와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분무 공신(奮武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04] 남방(南方)에 …… 흉흉해지자 : 1727년 12월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의 저잣거리에 연달아 흉서(凶書)가 내걸린 일을 말한다. 이 흉서는 이듬해 1월 서울의 서소문(西小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모두 이인좌 난의 주모자였던 민관효(閔觀孝)가 이유익(李有翼), 이순관(李順觀)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일로 밝혀졌다. 《英祖實錄 3年 12月 16日ㆍ21日, 4年 1月 17日ㆍ3月 27日ㆍ4月 22日》[주-D005] 이인좌(李麟佐) : 1695~1728. 본관은 광주(廣州), 본명은 현좌(玄佐)로 청주(淸州) 송면 출신이며 남인의 명문가 출신이다.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정치일선에서 소외되자 1728년 정희량(鄭希亮), 이유익 등 소론 과격파들과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축출당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난을 일으켰다. 청주성을 함락한 후 서울로 북상하다가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영조의 친국을 받고 능지처참되었다.[주-D006] 마군(馬軍) : 조선 시대 훈련도감, 금위영, 총융청 등에 속하던 기병이다. 이때 이익필은 금위영 우별장(禁衛營右別將)이 되어 300여 기에 이르는 기병을 이끌었다. 《全城李氏世稿 卷9 家狀》[주-D007] 몸에 …… 것 : 《전성이씨세고(全城李氏世稿)》 권9에 실려 있는 〈가장(家狀)〉에 따르면 이때 몸에 차고 있던 것은 칼이다.[주-D008] 원앙대(鴛鴦隊) : 원앙이 한 짝을 이루듯 2열 종대로 편성된 군대의 항오(行伍)를 말한다. 《兵學指南 卷2》[주-D009] 임금과 …… 글 : 1728년 7월 19일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여러 공신에게 내린 어제수서(御製手書)를 말한다. 《전성이씨세고》 권9에 〈사훈부유제훈신(賜勳府諭諸勳臣)〉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영조는 훈신들의 공을 치하하는 한편,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전일한 마음으로 화합함으로써 회맹에서 한 맹약을 언제나 잊지 말자는 당부를 하였다. 《英祖實錄 4年 7月 19日》[주-D010] 어떤 일 : 1710년(숙종36) 11월 이만건(李萬建) 등이 삼을 캐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갔다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가 국경을 분명히 정하기 위해 1712년 목극등을 파견하여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도록 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36年 11月 9日, 38年 2月 26日ㆍ12月 7日》[주-D011] 접반사(接伴使) : 박권(朴權, 1658~1715)을 말한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성(衡聖), 호는 귀암(歸庵)으로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파견되었을 때 조선 측 대표인 접반사에 임명되었다.[주-D012] 대간의 탄핵 : 1730년 10월 사헌부 장령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여 영남(嶺南) 출생으로 내력도 분명치 않은 이익필이 평안 병사 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뢴 일을 말한다. 《英祖實錄 6年 10月 8日》[주-D013] 고로(孤露) : 부모가 세상을 떠나 혼자 남겨진 고단한 신세를 말한다.[주-D014] 고인(古人)의 …… 것 : 《후한서(後漢書)》 〈위표열전(韋彪列傳)〉에서 “무릇 나라는 현자(賢者)의 등용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고, 현자 여부를 가릴 때에는 효행을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아야 한다. 공자께서도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기 때문에 임금에게 충성을 옮겨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夫國以簡賢爲務, 賢以孝行爲首. 孔子曰: “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 必於孝子之門.”]”라고 한 위표(韋彪)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주-D015] 끝맺음을 …… 드물었네 : 처음에 이룬 공을 끝까지 지켜 유종의 미를 거둔 자가 드물다는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탕(蕩)〉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을 믿을 수 없도다.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으나 끝맺음을 잘하는 이는 적도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16] 능연각(凌煙閣)에 머리털이 또렷하고 : 이익필의 초상화가 공신각(功臣閣)에 걸려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능연각은 당 태종(唐太宗)이 643년에 공신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지은 누각으로, 그곳에 장손무기(長孫無忌)를 비롯한 공신 24명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주-D017] 웅곤(雄閫)에 …… 세웠네 : 이익필이 큰 고을의 병마절도사가 된 것을 말한다. 웅곤은 큰 고을의 병영(兵營)으로, 이익필은 전라도와 평안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주-D018] 융단(戎壇) : 군문 대장의 자리를 말하며, 조선 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 총융청(摠戎廳) 등 오군영(五軍營)의 대장이 이에 해당한다.[주-D019] 양국(兩局) :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주-D020] 태조(太祖) : 이성계(李成桂)를 말한다.[주-D021] 정기(精氣)는 북락성(北落星)으로 돌아가고 : 이익필이 세상을 떠나 그 정기가 북방의 군문(軍門)을 상징하는 별인 북락사문성(北落師門星)으로 돌아갔다고 한 것이다. 북락성은 북락사문성의 준말로,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북락(北落)과 사문(師門)은 한 별로 우림(羽林)의 서남쪽에 있다. 북(北)이라 한 것은 이 별이 북방에 있기 때문이고 낙(落)이라 한 것은 하늘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사(師)라 한 것은 무리이니, 사문은 군문과 같다.”라고 하였다.[주-D022] 무덤은 기련산(祁連山)을 본떴네 : 이익필이 수립한 공이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 곽거병(霍去病)에 비견된다고 한 것이다. 곽거병은 기련산 일대에 있던 흉노를 정벌하여 수차례 큰 공을 세웠는데, 곽거병이 병으로 죽자 무제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무덤 모양을 그가 생전에 전공을 세웠던 기련산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 주었다. 《史記 驃騎將軍列傳》[주-D023] 태산(泰山)과 황하(黃河)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진다 하더라도 나라는 영원히 보전되어 후손에게까지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채택하였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 여기서는 이익필이 무궁한 공을 세웠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