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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운유(運維)이고, 자는 지국(持國)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해주(海州) 사람이다. 고려조에 전법 정랑(典法正郞)을 지낸 분의 휘는 숙(肅)인데, 실로 공의 시조가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11대조로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분의 휘는 역(易)이다. 2대를 전하여 휘 종(悰)은 문종의 따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졌으나 광묘(光廟 세조) 5년(1459)에 후명(後命)을 받았으며, 영양위의 아들 휘 미수(眉壽)는 중종조에서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책훈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들은 공의 9대조, 8대조이다.
고조 휘 효준(孝俊)은 지돈녕부사이고, 증조 사헌부 장령 휘 적(樍)은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황경(皇京)에 갔는데 도중에 작고하여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중귀(重龜)는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필녕(必寧)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작고할 때의 관직은 호조 참판이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는 본적이 파평(坡平)이고 부친은 윤천휴(尹天休)이다.
숙종 갑신년(1704, 숙종30)에 공이 태어났다.
영조 을묘년(1735, 영조11)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계해년(1743)에 능 침랑(陵寢郞)에 제수되었다.
무진년(1748)에 의금부 도사를 거쳐 회덕 현감(懷德縣監)에 제수되었다. 정사를 행할 때는 횡포한 사람들을 매우 준엄하게 단속하니, 읍민이 비로소 공법(公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경오년(1750)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과 부친상을 거듭 당하였다. 상제를 마친 다음 해인 병자년(175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정무를 처리했는데, 공이 글을 올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진휼하고 세자의 학문을 닦는 방도를 아뢰자, 대조(大朝)께서 공이 올린 글을 들여보낼 것을 명하더니, 전교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다. 홍문관과 세자시강원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이다.”
하고, 말을 하사하여 가상히 여겼다.
공은 이조 좌랑으로서 서천 군수(舒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서천군은 물길이 짧아 전야(田野)가 쉬이 마르는 것을 근심했는데, 공이 도랑을 내어 물 대는 것을 가르치니, 서천 사람들이 지금까지 덕을 보고 있다. 3년 동안 근무하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다.
임오년(1762) 윤5월에 공이 장령으로서 13일을 만나 급박한 소식을 듣고 창황히 대궐에 달려갔는데, 호위 병사들이 이미 똘똘 뭉쳐서 막았으므로 궁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공이 삼사(三司)의 여러 사람과 함께 대궐 문을 밀친 것이 세 번이었으나 세 번 다 저지당하였다. 공이 드디어 의론을 맨 먼저 내어 말하기를,
“오늘 은혜를 온전히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하의 직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소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미처 완성하기 전에 상이 내린 전교를 보고 울면서 중지하였다.
공은 갑자기 상국(相國) 조재호(趙載浩)를 탄핵하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 나중에 통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홀로 있을 때마다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기를,
“이미 안금장(安金藏)이 심장을 가른 것처럼 하지 못했고, 또한 전천추(田千秋)가 군주를 깨우친 것처럼 하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신하는 없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이어서 겨울에 천둥 때문에 장령으로서 소를 올려, 덕을 닦을 것과 인재를 등용할 것과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자신을 닦아 바르게 하고 허물을 살펴서 고치며 백성을 가르쳐 타이르는 방도를 언급하였다. 상이 칭찬하고 가상히 여겼는데, 이에 말하기를,
“가르쳐 타이른다는 두 마디 말은 내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하였다.
계미년(1763) 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총이 매우 두터워 공의 관직이 은대(銀臺 승정원)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홍술해(洪述海)가 홍문관의 관원으로서 어떤 사람을 탄핵하자, 상이 그를 죄주었다. 승정원의 동료들이 그를 신구(伸救)하려 할 때 공이 이견을 가지고 참여하지 않자, 김치양(金致讓)이 홍술해를 위하여 도리어 공에게 독을 쏘았다. 상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매로 다스릴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은 김치양이 당시 정승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해 윤달 이후 패초(牌招)를 어긴 삼사의 관원들이 삭직되었다.
갑신년(1764)에 공이 서용되어 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때 상이 동가(動駕)할 무렵, 어가의 앞과 뒤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사기를 진작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세손(世孫)에게 공경하여 맞이할 것을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
“세손은 지금 심제(心制) 중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이르기를,
“그렇다. 그렇다.”
하고, 공경하여 맞이하라는 명을 속히 중지시켰다. 그 뒤에 황단(皇壇)에서 의식을 미리 익히기 위해서 음악 연주를 시작할 무렵에 상이 공을 보고서 세손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명한 것은 대개 공이 전날에 아뢴 말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은 잇따라 예조 참의,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공의 상소와 계사(啓辭)는 임금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것이 많았다.
을유년(1765)에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 여주는 귀족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기로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곳이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법에 따라 처단하니, 관찰사가 강포한 자들을 제거했다고 칭찬하였다. 다음 해에 어떤 일 때문에 체직되었다.
정해년(1767)에 상이 옛 경복궁에 행차하여 중시(重試)를 시행하였다. 공이 이때 승지로 재직하며 예방(禮房)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드디어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누차 한성부 좌윤, 부총관, 호조 참판으로 이배되었다.
공이 여주를 다스릴 적에 고을에는 전지(田地)의 총수를 숨기거나 누락한 자들이 있고 관원과 아전이 그 이익을 나눠 가진 지 오래되었는데, 공이 그것을 찾아내어 백성에게 주어서 흉년의 조세 징수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상신(相臣)이 공을 법률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며 매우 힘써 주장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어질구나, 정운유(鄭運維)여. 자기를 위하지 않고 백성을 위하였도다. 그 죄를 묻지 말라.”
하였다.
기축년(1769) 11월에 대사간으로서 빈대(賓對)에 참석하여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모레는 16일입니다. 왕세손이 효장묘(孝章廟)에 가서 배알하고, 이어서 수은묘(垂恩廟)에 가서 전배(展拜)하는 것은 예로 볼 때 그만둘 수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대개 16일은 진종(眞宗 효장세자)의 기일(忌日)이고 왕세손은 아직 한 번도 수은묘에 참배하지 못하였다. 공은 늘 정리와 예의에 흠결이 된다고 여겼으므로 먼저 16일을 말하고서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이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이겠는가.”
하고, 상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수은묘에 관한 요청은 또한 제 분수에 넘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이 이에 인피(引避)하여 체차되었다. 수십 일 뒤에 상신이 정운유가 품은 생각은 엄히 처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세손을 데리고 수은묘에 한번 가고 싶었으나 차마 창덕궁(昌德宮)을 지나가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후에 누차 대사헌, 대사간, 예조 참판, 부총관,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최익남(崔益男)의 옥사가 일어나자,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최익남의 공초에서, 작년 정운유가 품은 생각이 그의 생각과 대략 서로 비슷하므로 이 소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으니, 정운유는 사실 최익남의 효시이고, 죄는 유배에 해당합니다.”
하였는데, 비지(批旨)에서 이르기를,
“‘효시’라는 두 글자는 지나치다. 그러나 법을 집행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의당 특별히 윤허해야 한다.”
하고, 이에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귀양을 보냈다. 다음 해 봄에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그의 마음에 다른 것이 없음을 알았으니, 그를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라.”
하니, 공이 울면서 아뢰기를,
“벗은 마음을 알기만 하는 사람인데도 죽음을 허락합니다. 하물며 임금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가을에 상이 정업원(淨業院)의 옛터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했는데, 정업원은 바로 단종의 비(妃)가 머물던 곳이다. 상이 가서 보고 공에게 들어올 것을 명하고 고사(故事)를 물어보았다. 대개 단종의 비가 늘 공의 8대조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을 믿고 의지한 것은 그가 단종의 누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옛일을 생각하고 특명으로 공을 가의대부의 품계에 승진시키고, 이어서 도승지에 제수하였다.
공은 병조 참판에 두 번 제수되었다. 그리고 대사헌에 옮겨 제수되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일찍이 최익남을 배척하는 소에서 아뢰기를,
“난여(鸞輿)가 출발하지 않았는데, 학가(鶴駕)가 홀로 간 전례가 없습니다.”
하여,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경종께서 춘궁(春宮)에 있을 때와 당저(當宁 영조)께서 세제(世弟)가 되었을 때에 난여를 모시지 않고도 가서 배알하셨다.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보았는데, 그는 누구를 속이는 것인가. 하늘을 속이는 것인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상이 공을 병조 참판에 옮겨 제수하고, 다음 날 지의금부사에 제수하고 자헌대부의 품계로 승진시키면서 전교하기를,
“정운유가 비록 늙고 쇠약하나 성품이 강렬하고 목소리가 쇳소리와 같다.”
하였다.
다음 해에 기사(耆社)에 들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를 하기 위해 대궐에 나아갔다가 병이 나서 들것에 실려 돌아왔는데 마침내 침소에서 작고하니, 곧 임진년(1772) 5월 10일이고, 향년은 69세다.
부음이 들려오자 상이 매우 슬퍼하며 친히 글을 지어 제사 지내고 그 아들이 상제를 마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며, 추도하는 하교를 조정에 누차 발하였다. 여주의 추읍산(趨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절도사(節度使) 원휘(元徽)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동준(李東俊)의 따님이다. 원 부인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철조(喆祚)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고, 차남 후조(厚祚)는 현감이고 백부(伯父)의 후사가 되었으며, 장녀는 박호원(朴祜源)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문과에 급제한 전 판서 이가환(李家煥)에게 시집갔다. 이 부인은 아들 순조(順祚)를 낳았다.
철조는 아들이 없어 순조의 아들 시행(時行)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고, 딸 한 명은 노광진(盧光晉)에게 시집갔다. 후조는 세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보지 못하였다. 순조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시행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딸은 임백풍(任百豐)에게 시집갔다. 박호원의 양아들은 박종륜(朴宗倫)이고, 이가환의 양아들은 이재적(李載績)이다.
공은 부모를 섬기는 효성을 확장하여 임금을 섬기며 오직 의리(義理)만을 잡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며, 남쪽 변방의 장기(瘴氣)와 흙비를 낙토(樂土)처럼 보았다. 영조 임금께서 신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공이 어떻게 많은 사람이 노여워하는 가운데서 몸을 보전했겠는가. 공은 독서를 좋아했는데 《사전(思傳)》 공부를 더욱 독실히 하였으며, 세상에 나가 명군(明君)을 만나서 끝내 시종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의리뿐이었다. 이것이 독서의 효과이니, 참으로 사람은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의 아들 현감군이 공의 사적을 편집하여 일찍이 나에게 명문을 부탁했는데, 나는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했으나 양해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뜻을 품고 잊지 않고 있었는데 현감군이 뜻밖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에 노쇠함을 헤아리지 않고 공의 가장(家狀)을 살펴 글을 쓰며 유명(幽明)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영조 임금은 성인으로서 / 英廟乃聖
인륜을 극진히 하였네 / 人倫之至
예와 의를 / 曰禮曰義
어찌 창졸간이나마 소홀히 하랴 / 豈忽造次
공은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 公有獨見
충언을 간절하게 하였네 / 忠言懇款
새 사당이 저기에 있는데 / 新廟在彼
어찌 뵙고 돌보기를 윤허하지 않으랴 / 盍許省覲
사람들 입 다물어도 나는 외쳤으니 / 人噤我叫
바다 장기는 두려울 것이 아니네 / 海瘴非畏
영조께서 가상히 여기고 / 英廟嘉乃
강철 심장에 강렬한 기개라 하였네 / 鐵腸剛氣
천 세대가 뒤에 있고 / 千世在後
백 세대가 앞에 있네 / 百世在前
영조 임금의 조정에 / 英廟之廷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 莫曰無人
경월은 높은 반열이나 / 卿月崇班
공에게는 전혀 아니었네 / 在公全未
내가 공의 묘에 명을 새기니 / 我銘公墓
후인들이 한숨을 쉬리라 / 後人之喟
[주-D001] 후명(後命)을 받았으며 : 정종(鄭悰)은 문종의 부마(駙馬)이며 경혜공주의 남편인데, 1455년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거사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광주(光州)로 귀양 갔고, 1457년에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일이 발각되어 귀양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후명은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는 명령을 이른다.[주-D002] 대조(大朝) : 왕세자가 섭정하고 있을 때의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 영조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헌세자가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영조를 대조, 장헌세자를 소조(小朝)로 구분하였다.[주-D003] 임오년 …… 달려갔는데 : 1762년 윤5월 13일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폐세자(廢世子)가 되어 뒤주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로 달려간 것을 말한다. 사도세자는 그달 21일에 세상을 떠났다.[주-D004] 조재호(趙載浩) : 1702~1762.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이다. 1762년 장헌세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되고 사사되었다.[주-D005] 안금장(安金藏)이 …… 것 : 안금장은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충신으로, 황사(皇嗣)로 있던 예종(睿宗)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가 일어나 황사의 측근들이 국문을 받던 중 다들 견디다 못해 시인하려 하였다. 이에 안금장이 칼로 자신의 심장을 갈라 황사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측천무후가 그 소문을 듣고 국문을 중지시켜 황사가 화를 면하였다. 《新唐書 安金藏列傳》[주-D006] 전천추(田千秋)가 …… 것 : 한 무제(漢武帝) 때 여태자(戾太子)가 강충(江充)의 모함으로 무고옥(巫蠱獄)에 연루되자 군사를 동원하여 강충을 잡아 치죄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태자가 반란한 것으로 알고 반란자를 잡아 죽이게 하였고, 여태자는 벗어날 길이 없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뒤에 고조의 능 참봉 전천추가 급변을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송변(訟辨)하니, 무제가 크게 깨닫고 전천추를 대홍려(大鴻臚)로 삼았다. 《漢書 田千秋傳》[주-D007] 자신을 …… 고치며 : 《주역》 〈진괘(震卦) 상(象)〉에 “천뢰(洊雷)가 진(震)이니 군자(君子)가 본받아서 공구수성(恐懼修省)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풀이하여 “천(洊)은 거듭함이다. 천둥이 거듭하여 이어지면 위엄이 더욱 성대하니 군자는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닦아 바르게 하고 허물을 살펴서 고치려고 생각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8] 홍술해(洪述海) : 1722~177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선(仲善)이다.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1777년(정조1)에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홍술해도 함께 주살당하였다. 《正祖實錄 行狀》[주-D009] 김치양(金致讓) : 1725~1793. 본관은 청풍, 자는 여득(汝得)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金尙魯)이다. 1776년 정조의 등극으로 인하여 17년간 제주 정의현(旌義縣)에 유배되었다.[주-D010] 지난해 …… 삭직되었다 : 지난해 윤달은 1762년 윤5월을 가리킨다. 사도세자가 윤5월 13일에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죽었는데, 이 사건 이후에 삼사의 관원들이 임금이 불러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영조가 그들을 파직한 것이다.[주-D011] 심제(心制) : 출계(出系)한 아들이 본생부모(本生父母)에 대해 대상(大祥) 때부터 담제(禫祭) 때까지 입는 복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영조의 세손(世孫)이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상에 심상(心喪)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주-D012] 황단(皇壇) : 대보단(大報壇)을 가리킨다.[주-D013] 효장묘(孝章廟) :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를 봉사(奉祀)하는 곳으로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에 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장남으로 사도세자의 형이다. 1724년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10세의 어린나이에 서거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후사로 입적되어 등극하였고,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孝章)은 시호이며, 능호는 영릉(永陵)으로 경기도 파주에 있다.[주-D014] 수은묘(垂恩廟) : 사도세자의 사당이다.[주-D015] 최익남(崔益男) : 1724~177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겸(士謙)이다. 1770년 이조 낭관으로서 당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죄가 크다고 논하고, 세손이던 정조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묘사(墓祠)에 참배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가 대신들의 맹렬한 탄핵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영조의 노여움까지 사서 영구히 서인(庶人)으로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고, 계속되는 고문으로 장하(杖下)에서 죽었다.[주-D016] 조영진(趙榮進) : 1703~1775. 1761년 도승지로서 사도세자의 처형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대사헌으로 기용되었다.[주-D017] 흥양현(興陽縣) : 전라남도 고흥(高興) 일원의 옛 이름이다.[주-D018] 정업원(淨業院) : 동대문 밖에 있던 절인데, 태조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이 절에서 중이 되었고, 단종의 비(妃) 송씨(宋氏)도 이 절에서 중이 되었다 한다.[주-D019]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 정미수(鄭眉壽, 1456~1512)로, 자는 기수(耆叟), 호는 우재(愚齋), 봉호는 해평부원군,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그의 어머니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이므로 그는 단종의 생질이자 문종의 외손이 된다.[주-D020] 김치인(金致仁) : 1716~179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당(古堂), 시호는 헌숙(憲肅)이다.[주-D021] 난여(鸞輿)가 …… 없습니다 : 임금이 사당에 가지 않는데 세자가 혼자 사당에 간 일은 없다는 뜻이다.[주-D022] 이가환(李家煥) : 대본에는 ‘□□□’로 되어 있다. 《만가보(萬家譜)》에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하의 ‘이가환’도 동일하다.[주-D023] 사전(思傳) :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이라는 뜻으로 《중용》을 말한다.[주-D024] 영조 …… 하였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규구는 방원의 지극함이요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規矩, 方員之至也; 聖人, 人倫之至也.]”라고 하였고, 《순자(荀子)》 〈해폐(解蔽)〉에 “성인이란 인륜을 극진히 한 사람이다.[聖也者, 盡倫者也.]”라고 하였다.[주-D025] 새 사당 : 사도세자의 사당을 말한다.[주-D026] 바다 장기 : 정운유가 유배 갔던 전라남도 고흥을 뜻한다.[주-D027] 경월(卿月) : 조정의 경(卿)ㆍ대부(大夫)를 가리키는 말로, 《서경》 〈홍범(洪範)〉에 “왕이 살필 것은 해이고 경사는 달이고 사윤은 날이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