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聖上 영조) 32년 병자년(1756)에 간지가 세 번 돈 것에 감회가 일어나서 남한산성에서 절의를 지키다 죽은 신하들을 잘 갖추어 표창하고 선양하였으니, 이에 제사를 내리고 시호를 내렸다. 다만 증(贈) 집의 허공(許公)에게는 제사와 시호가 내리지 않았다. 공의 증손인 생원 첨(䄡)이 상언(上言)하여 “공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상황이 자못 상세하니, 바라건대 해당 조(曹)로 하여금 위로하는 은전을 모두 거행하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역시 비답을 받지 못하여, 군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대개 공은 인조조 병자년(1636, 인조14)에 호조 정랑으로서 원수부 종사관(元帥府從事官)을 겸대하며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고 명을 받들어 동로(東路)의 군량을 감독하였다. 이때 적의 기병이 경기를 공격하였으므로 공을 위해서 위태롭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걸음이 지평(砥平)의 백동역(白洞驛)에 도착했을 때 오랑캐가 비바람처럼 들이닥쳤다. 공은 사세가 위급함을 알고 수행자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희는 함께 죽을 필요 없다. 어찌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했다가 내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느냐.”
하였다. 군교(軍校)가 공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가겠느냐.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족하다.”
하였다. 이에 적이 칼로 공의 상투를 잘라 상투가 땅에 떨어졌다. 공이 천천히 일어나 몸을 구부려 상투를 주워서 품에 넣고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적이 칼로 공을 위협하고 말로 겁을 주었으나 공은 굽히지 않고 적을 끊임없이 욕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때는 정축년(1637) 1월 20일이었다.
공의 두 아우 적(積)과 진(稹)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품에 상투가 있는 시신을 찾아보니 상투가 완연히 품 안에 있었다. 아, 어찌 그리 장렬한가. 본현(本縣)에서 그 일을 상주하자 인조 임금이 크게 놀라고 애도하며 공을 사헌부 집의에 증직할 것을 명하였고, 한 시대의 명공(名公)들이 모두 만가를 지어 공을 애도하였다.
공은 경오년(1630)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미년(1631)에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632)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고, 이해에 정시(庭試)에 제2등으로 입격하여 《소학》 1부(部)를 하사받았다.
계유년(1633)에 대과(大科)에 뽑혀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고 박사(博士)로 옮겨졌다. 다음 해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했다가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외직으로 나가 보안 찰방(保安察訪)이 되었다. 이것은 전형을 맡은 관리가 공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을 대각(臺閣)에 들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보안 찰방이 된 지 열흘이 안 되어 관향사(管餉使)가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가 조석간에 들이닥칠 것 같아서 조정이 서쪽 변방의 양식과 군량미를 염려하여 공을 외직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소환한 것이다. 공이 양서(兩西)를 검찰하며 위엄을 주군(州郡)에 떨치니, 군량미 비축이 그 덕분에 완비되었다.
병자년(1636)에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오랑캐가 크게 침략해 오자 공은 원수부 종사관을 겸대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크고 깊었으며, 조금 자라서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며 문장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붕우들에게 존중받았다. 공이 호조 정랑이 되었을 때 판서 김공 시양(金公時讓)이 아랫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했으나 공은 비리를 적발하는 것이 신명과 같아 엄하게 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어서 아전과 서리 들이 서로 말하기를 “판서가 본래 두렵지만 판서에 대한 두려움은 정랑에 대한 두려움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는 데에 이르렀다. 공이 원수부를 보좌할 때 지부(地部 호조)의 금과 비단을 강화도로 수송했는데 움직임이 시의에 맞아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재능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공에게는 모두 작은 일이었다.
공은 충주(忠州)의 청계산(淸溪山)에 있는 청룡사(靑龍寺) 동쪽 해방(亥方)을 등진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는 34세였다. 의정공(議政公 허치(許穉)의 아버지 허한(許僴))이 공의 시신을 어루만지고 곡하며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의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느냐.”
하였다. 공의 아우인 적(積)은 매번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백씨(伯氏)는 문장이 왕의 계책을 빛내기에 족하고 재능이 공훈을 세우기에 족하고 기량이 만물을 진정시키기에 족하여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백씨가 수립한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의 휘는 치(穉)이고, 자는 여유(汝孺)이다.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본래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휘 선문(宣文)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훈으로 공암백(孔巖伯)에 봉해졌다. 그 후에 종족이 크게 번창하여 고려에서 성조(聖朝)까지 이름난 석학이 성대하게 서로 이어졌다.
휘 초(礎)는 중종 기묘년(1519, 중종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책문(策文) 시험을 보지 않고 물러나 충주의 북촌(北村)에서 살았고, 《기묘록(己卯錄)》에서 “지조가 구차스럽지 않았다.”라고 칭송하였으며, 나중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휘 잠(潛)은 현량과를 통해 벼슬에 나아가서 임진왜란 때 왕실에 충성을 바쳤고 재차 청백리에 뽑혀 선조 임금의 명신이 되었으며,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분들이 공의 증조부와 조부이다.
아버지 휘 한(僴)은 관직이 부사(府使)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7개 군(郡)을 맡아 다스릴 적에 청렴과 근실로 저명하였고, 광해군 시절에 친족이 후궁에 들어가자 드디어 과거 공부를 접었는데, 선비들이 장하게 여겼다.
어머니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관찰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된 시호 문숙(文肅) 김제갑(金悌甲)의 따님이다. 김씨는 9세 때 임진왜란을 만났는데 아버지 문숙공이 영원성(鴒原城)을 지키다가 문을 닫고 순절하였는데, 충성스러운 여종이 자기 자식을 버려둔 채 어린 김씨를 업고 성을 나왔다. 김씨는 자라서 의정공 댁에 시집가서 규방의 규범을 한결같이 예법에 따랐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신씨(辛氏)는 징사(徵士) 신응망(辛應望)의 따님으로, 고아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잘 성취시켰고, 만년에 자식들의 봉양을 받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집 며느리가 된 후에 늘 집안이 대대로 청빈함을 보았다. 너희가 나를 과분하게 봉양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향년은 70세이고 공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공은 4남 1녀를 두었다. 해(垓)는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고, 전(塼)은 연원 찰방(連原察訪)이며, 호(壕)는 함흥 판관(咸興判官)이고 공의 아우 좌윤 질(秩)의 양자가 되었으며, 우(堣)는 순창 군수(淳昌郡守)이고 진(稹)의 양자가 되었다. 딸은 장령 유연(柳㝚)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낳은 아들은 중(重)이다.
서윤(庶尹)은 5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주부(主簿) 단(鏄), 도사(都事) 명(銘), 진사 조(錭), 홍(鉷), 약(錀)이다. 사위는 별검(別檢) 민원석(閔元錫), 참봉 권후(權厚), 윤사정(尹師定), 정희수(鄭煕叟)이다. 찰방(察訪)은 후사가 없다. 판관(判官)은 5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참봉 집(鍓), 생원 현(鋧), 오(𨫼), 교(䥞), 거(鐻)이다. 군수(郡守)는 4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만(𨭬), 선(銑), 진사 약(鑰),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인 추(錘)이다. 사위는 현감 유도중(兪道重), 판서 유명현(柳命賢), 직강 이중장(李重章), 송유적(宋儒迪), 오상석(吳尙奭)이다.
증손과 현손과 외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자취는 대각에 오르지 못하고 / 迹不登臺閣
임금은 얼굴을 알지 못하였네 / 君王不識面目
지위는 낭잠에 지나지 않았으니 / 位不過郞潛
수풀 사이 또한 살아가기 족했네 / 草間亦足求活
나라 위해 한번 죽기로 마음먹어 / 公之心一死殉國
머리 잘려도 무릎 굽힐 수 없었네 / 頭可斷膝不可屈
그때 모든 사람이 공처럼 마음먹었다면 / 當時人皆以公心爲心
어찌 예의의 나라가 항복하는 치욕 당했으랴 / 夫豈使禮義吾邦抱下城之辱
청계산 한 줌 무덤에 / 淸溪之山一抔之塋
지금까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곳 있네 / 烈烈然至今有耿光處
공언을 일삼으며 실질은 없는 선비들 / 士之空言無實者
이곳 지나면 얼굴 달아오르지 않겠는가 / 過此而能不面騂
[주-D001] 적(積) : 허적(許積, 1610~1680)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ㆍ휴옹(休翁)이다.[주-D002] 사산감역(四山監役) : 사산재식감역(四山栽植監役)의 줄임말로, 사산(四山) 즉 백악산(白岳山)ㆍ목멱산(木覓山)ㆍ인왕산(仁王山)ㆍ타락산(駝駱山)에 소나무를 심고 그 벌목을 금하는 일을 감독하는 벼슬이다.[주-D003] 김공 시양(金公時讓) : 김시양(1581~1643)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이다.[주-D004] 잠(潛) : 허잠(許潛)으로, 본관은 양천, 자는 경량(景亮), 호는 한천(寒泉)이다.[주-D005] 김제갑(金悌甲) : 1525~1592. 본관은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로 있었는데, 왜군이 침공해 오자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주-D006] 영원성(鴒原城) :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남쪽에 있는 산성이다.[주-D007] 징사(徵士) : 조정의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거한 선비를 말한다.[주-D008] 신응망(辛應望) : 1595~1654.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희상(希尙)이다.[주-D009] 의방(義方) : 정도(正道), 즉 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자식을 사랑한다면 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삿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于邪.]”라고 위 장공(衛莊公)에게 충간한 명언이 나온다.[주-D010] 지위는 …… 않았으니 : 허치의 관직이 낮았다는 말이다. 낭잠(郞潛)은 한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관(郞官)이 되어서 경제(景帝)와 무제(武帝) 때까지 불우하게 낭관에 머물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주-D011] 수풀 …… 족했네 : 허치는 높은 벼슬을 하지 않고 낮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나라가 어려운 때에 외직을 맡아 다스린 것이 합당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주의(周顗)가 패전한 뒤에 피란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듣고는 “내가 대신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신분으로, 조정이 결딴난 이 마당에 어떻게 다시 수풀 사이에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면서 밖으로 호월에 몸을 던질 수가 있겠는가.[吾備位大臣, 朝廷喪敗, 寧可復草間求活, 外投胡越邪.]”라고 말한 ‘초간구활(草間求活)’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晉書 周顗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