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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옥(玉)이고, 자는 자성(子成)이며, 초명은 주관(周觀)이고, 호는 우천(牛川)이다. 정씨는 본래 서원(西原)의 저명한 성씨로, 고려조 별장(別將) 극경(克卿)의 후손이다. 2대를 전하여 대장군(大將軍) 의(顗)가 나왔는데, 그는 도끼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 서경(西京)의 역적 최광수(崔光秀)를 찍어 평정하였고, 나중에 필현보(畢玄甫)의 반란에 죽었다. 조정에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성천(成川)의 포충표절사(褒忠表節祠)가 그것이다. 이로부터 저명하고 박학한 선비들이 대를 이어 나왔다. 소부 소윤(少府少尹) 침(賝)에 이르러, 그는 우리 조정이 천명을 받을 때에 의리상 벼슬하지 않고 안동부(安東府)에 은둔하여, 자손들이 마침내 영남 사람이 되었다.
휘 탁(琢)은 호가 약포(藥圃)이고 관직은 좌상(左相)을 지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며, 울연히 선조(宣祖)의 명신이 되었다. 그의 아들 휘 윤저(允著)는 집의에 증직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시영(時英)은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집(輯)은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 휘 석제(碩濟)는 관직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삼대의 조상에게 소급하여 관작이 내려졌다. 공의 신분이 귀해지자, 조정에서 부모를 추은(推恩)하여 동추공(同樞公)을 이조 참판에 증직하고 어머니 함창 김씨(咸昌金氏)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하였다.
정간공의 체구가 작아서 선조가 일찍이 장난을 잘하였는데, 공의 체구는 정간공을 닮았다. 공은 집안에서 지낼 때 단정하고 확고하며 신중하고 진중하여, 거칠게 말하거나 사나운 표정을 짓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했으며, 일을 만나 조용히 조치하면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재상의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10세 때 〈요전(堯典)〉을 배우자, 이에 방문을 닫아걸고 독서를 그쳤다. 참판공이 괴이하게 여기고 방문을 열고 보니, 단지 산가지가 앞에 종횡으로 놓여 있었다. 참판공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기삼백(朞三百)의 산가지입니다.” 하였다. 공은 창설(蒼雪) 권공(權公)에게 수업하여 학문하는 방도를 들을 수 있었고, 때로 문사(文士)의 모임에 달려가면 반드시 묵묵히 단정히 앉아 있어서, 또래 벗들이 감히 깔보거나 장난을 걸지 못하였다.
계묘년(1723, 경종3)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함으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예를 다하였다.
을사년(1725, 영조1)에 상복을 벗고 국자 상상(國子上庠 성균관 생원)에 올랐다.
정미년(1727)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승문원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 섭기주(攝記注)로서 경연에 오르자, 상이 물어보고 공이 정간공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대면해 주셨다.
다음 해인 무신년(1728)에 역변(逆變)이 영남 하도(嶺南下道)에서 일어나자, 공은 집안일을 내던지고 밤낮으로 안동의 창의소(倡義所)로 달려갔다. 영천(榮川)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공은 본군(本郡)으로 돌아와서 부장(副將)이 되어 역적을 토벌할 계책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적의 괴수가 죽고 관병이 파하자 공은 이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공의 차분한 태도는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듯하였다.
신해년(1731)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이때 기근이 심해 역졸이 모두 부황이 들어 생기가 없자, 급히 말이 먹을 콩과 조를 옮겨 죽을 쑤어 역졸들을 구제하고, 산에서 칡덩굴을 꺾어 와 삶아서 말을 먹였는데, 말도 손상이 없었다. 녹봉 1만 민(緡)은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으며 진휼에 뜻을 다하여 마침내 굶어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사가 그 일을 상주하자, 상이 내구구(內廏駒)를 하사하여 권면하였다. 공이 체직되어 돌아올 때, 역졸들이 모두 수레를 붙잡고 차마 보내지 못하고, 비석에 새겨서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10년 뒤에 공이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어 역참을 지나가자, 역졸의 남녀가 앞길을 가득 메우고 빙 둘러서서 절하며 말하기를 “이분은 여러 해 전에 우리를 살려 준 부모이시다.” 하고, 각자 술병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조금이라도 맛보기를 바랐다. 전적(典籍)으로 승진했다가 감찰로 자리를 옮겼으며 다시 병조 좌랑으로 바뀌었다.
갑인년(1734)에 외직으로 나가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어 검전 경차관(檢田敬差官)을 겸임하였다. 또한 과장(科場)을 관장할 때는 원근에서 청탁하는 편지가 자못 모여들었는데, 공은 웃으면서 받아 놓았다가 과장으로 출발할 무렵에 모두 말 머리 앞에 놓고 불살라 버렸다. 토지를 검사할 때는 한결같이 법에 따라 판단하여, 비록 관찰사가 말을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관찰사 유공 척기(兪公拓基)가 공을 큰 그릇으로 여기고, 매번 평상복 차림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사(亞使)의 풍도가 단정하고 근엄하니, 마땅히 흑두(黑頭)의 공경(公卿)이 되리라.” 하였다.
정사년(1737)에 공은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자 소를 올려 6가지 조목을 진달하며 당시의 폐단을 설명한 것이 매우 절실하였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기고, 소는 궁궐에 남겨 둘 것을 명하였다. 공이 드디어 대청(臺廳)에 나아가 관찰사가 인망(人望)에 부합하지 않은 것, 수령이 이익을 노리고 공물(貢物)을 배에 실은 것, 진영장(鎭營將)이나 포도대장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것을 논열(論列)하며 혹은 파직을 청하고 혹은 잡아다 추문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의(公議)가 대각(臺閣)의 위엄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탄핵을 받은 이들은 모두 당시에 권력을 가진 자들로, 수찬(修撰) 이정보(李鼎輔)가 소를 올려 공을 배척했는데, 상은 그가 사당(私黨)을 비호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정보를 삭직하였다. 다음 해에 이전의 직함으로 그에게 소명(召命)을 내렸는데, 당시에 상은 신하들이 사사로이 편당을 짓는 폐단이 더욱 치성한 것을 아파하며 칙교를 지엄하게 내려, 이제부터 다시는 감히 이전처럼 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이어서 먼동이 트기 이전의 일들은 혼돈(混沌)에 부치고 먼동이 튼 이후는 개벽이라 부르도록 지시하였다.
공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임금이 변화의 기틀을 잡고 화육(化育)에 참여하고 돕는 공(功)에는 참으로 하늘을 열고 땅을 열며 혼돈을 깨끗하게 없애 버리는 뜻이 있더라도 정령의 조치나 언어와 말투로 강제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말씀하신 ‘개벽’이란 구구하게 사온(賜醞)하고 선반(宣飯)하거나 자질구레하게 호령을 발하고 시행하는 말단을 면하지 못하는데, 스스로 혼돈을 가르는 첫 경계나 개벽을 크게 돌이키는 신묘한 공로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건대, 혼돈은 거의 이전 시대보다 심한 점이 있고 개벽하는 일은 아득하여 당대에는 기약할 수 없으므로, 신은 그윽이 명군(明君)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일에 응하고 사물을 접할 때에 꾸밈을 일삼지 마소서. 이런 자세를 오래 유지하며 한결같이 진실무망(眞實無妄)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전하의 마음속 하늘이 먼저 스스로 개벽하여, 하늘의 도(道)가 말을 하지 않아도 한 해 농사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게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만물이 모두 개벽의 효과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였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자 시무를 조목조목 진달하며, 또한 호서 관찰사 이보혁(李普爀)과 예안 현감(禮安縣監) 이매신(李梅臣)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죄까지 아뢰었다. 그 뒤에 임금 앞에 나아가서는 대신(大臣)이 아무리 탄핵을 받은 자를 신구(伸救)하더라도 공이 힘껏 간쟁하였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대신(臺臣)이 체재를 얻었으니, 내가 마땅히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공이 물러갈 때 상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르기를 “대신의 풍도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그 뒤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잇따라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힘써 사직하였다.
임술년(1742)에 보령 현감에 제수되었다. 지성으로 백성을 다스리며 추호도 비리에 물든 바가 없었다. 관찰사 이공 종성(李公宗城)이 공의 행정에 탄복하여 공이 청한 폐막(弊瘼) 다스리는 방도를 곡진히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는데,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병인년(1746)에 다시 정언으로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진전(陳田)을 조사하며 궁결(宮結)을 감축할 것을 청하고, 또한 시무 5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한 시대를 견주어 보면 무릇 조정에 있는 신하는 모두 나의 형제인데, 이역(異域)의 사람들처럼 갈라져서 지력(智力)을 서로 엿보는 데 다 써 버리고 형적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풍파를 일으킵니다. 심지어 조정의 원대한 계획이 모두 당론이어서 어전 가까운 곳조차도 경색(景色)이 좋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건극(建極)의 정사에 힘써서 조정을 조용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하게 하소서.”
하고, 끝에서 또한 아뢰기를,
“동궁(東宮)을 교도할 때는 의당 내관(內官)과 설어(褻御)의 신하를 가려서 써야 합니다. 옛날 명 효종(明孝宗)은 담길(覃吉) 한 사람을 얻어서 홍치(弘治) 연간의 아름다운 치적의 기반을 만들었고, 무종(武宗) 때에는 동궁에 있으면서 거처에서 놀고 잔치를 벌인 자가 곧 마영성(馬永成)ㆍ유근(劉瑾) 등의 무리여서 끝내 유련(流連)으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에서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때 엄우(嚴瑀)가, 상소문 끝에서 진달한 것은 마땅한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을 논척(論斥)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유(先儒)도 근습(近習 근신(近臣))을 가려야 한다고 했으니, 정옥(鄭玉)의 말을 어찌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동추공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 공은 불훼지년(不毁之年)으로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복을 벗은 뒤에 지평에 제수되었다. 온천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체직을 명하였다. 이어서 목천 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미년(1751)에 경성 판관이 되었다. 이때 북로(北路) 지방에 흉년이 크게 들었다. 공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관가의 건물을 선택하고 그 온돌을 따뜻하게 하여 각 마을의 굶주린 백성을 모아 안치하였으며, 늠료로 받은 쌀을 덜어 죽을 쑤어서 하루에 두 번씩 먹였다. 상부에 알리고 호남과 영남의 좁쌀을 육로와 수로로 운반하여 각 마을에 나누어 진휼하고, 남은 것은 번번이 공문에 의거하여 공이 이웃 고을로 보냈다. 진휼을 감독하는 자가 후일을 위한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웃 고을의 위급함은 곧 나의 위급함이다. 백성을 살리는 데에 어찌 봉강(封疆)의 제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어느 날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했다는 보고가 이르러 백성이 모두 밤에 곡을 했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공이 절도사와 다투어 군량미를 얻어서 양식을 대 주었는데, 관아의 종에게 쌀, 콩 및 작은 솥을 지우고 말 한 필을 타고서 동자 두어 명을 거느리고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를 멀다고 하여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굶주려 쓰러진 백성을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죽을 쑤어 먹이고, 굶주려 밭을 갈지 못하는 농부가 있으면 또한 저와 같이 죽을 먹이고서 쌀을 주어 다음 날도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 한 도에서 굶어 죽은 시체가 쌓였는데, 경성의 백성만 홀로 전처럼 편안히 지냈다. 보리가 익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휼을 중지하고 관가의 건물에 머물던 굶주린 백성들을 내보냈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울었으며 들나물을 캐 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정으로 드리는 음식입니다. 친히 한번 맛보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공이 그들을 위하여 한번 먹었다.
진휼을 마치자, 백성들로 하여금 제방을 쌓게 하여 관개(灌漑)를 편리하게 하였다. 고을의 선비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양사청(養士廳)에 머물게 하였다. 지친(至親)이 서로 송사하는 일이 있으면 효제(孝悌)로써 깨우쳐 주며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백성도 감격하여 울면서 물러갔다. 어사가 포계(褒啓)하고 관찰사도 치행제일(治行第一)로 보고하니, 상이 특명으로 공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렸다. 공이 체직되어 돌아올 때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를 살려 주신 어진 수령인데, 이제는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곳곳에 연회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니, 공이 번번이 말에서 내려 조금씩 맛을 보고 일어났다. 관찰사 황정(黃晸)ㆍ윤득재(尹得載)가 함경도에서 조정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서한(西漢)의 순리(循吏)에 대해 옛날부터 그 말을 들었는데, 지금 정옥에게서 그런 풍도를 보았다.” 하였다.
공이 영남에 돌아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전(傳)에서 이르기를 ‘혈기가 이미 쇠하였으면 얻으려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내가 처음에 율봉도 찰방에서 체직되어 돌아올 때 행낭을 살펴보니, 단지 돈 150문(文)이 남아 있어서 부모님께 드리기 위하여 반찬을 사 왔고, 보령에서 체직되어 돌아올 때는 아전이 선여(羨餘)를 올리기에 4민(緡)을 취하여 빚을 갚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이번에 경성에서 체직되어 돌아올 때는 길이 먼 까닭에 말 두 필을 사서 돌아오며 얻을 수 있는 100금을 물리쳤다. 이후에 만약 고을을 얻게 된다면 돌아오는 여장이 어찌 이보다 더하지 않을 줄 알겠는가. 심히 두렵다.”
하고, 잇따라 온성 부사(穩城府使),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년(1756)에 초산 부사(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어전에서 하직을 고할 때, 상이 매우 지극히 위로하고 타일렀는데, 이날 밤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조회 시간을 기다리며 바쁜 공무를 본 것이 모두 7개월인데 날마다 관디(冠帶)를 갖추고 똑바로 앉아서 지쳐 몸을 기대는 일이 없었다. 동료가 모두 자신들은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고, 상도 누차 칭찬하였다.
어느 날 상이 정간공의 화상(畫像)을 올릴 것을 명하고 친히 화상찬(畫像贊)을 지어 공에게 두루마리의 머리에 글씨를 쓸 것을 명하니, 조야가 영화롭게 여겼다. 승진하여 좌승지에 이르자, 상이 매번 어가를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공을 동조(東朝)께 문안하는 승지에 임명하고 전교하기를 “술과 음식을 내리고 특별히 신칙(申飭)을 더하는 뜻을 이미 대비전(大妃殿)에 우러러 아뢰었다.” 하였다. 겨울에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759) 봄에 임기가 찬 것을 보고하고 돌아왔다. 여름에 특별히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상소문을 올려 특별한 은총으로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말뜻이 귀착되는 바가 있어서 공이 힘껏 사직하였다. 상이 엄한 분부를 내려서, 공이 결국 서울에 들어가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상이 특별히 죄 때문에 외직에 보임할 것을 명하여, 어쩔 수 없이 나가서 명을 따랐다.
공이 청렴하고 결백하며 공정하고 정직한 것으로 한 세상에 저명하였으므로 귀족 출신 자제로서 수령 된 자들이 소문을 듣자 인끈을 풀어 놓을 마음을 많이 가졌는데, 공이 부임하여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며 고을의 폐해를 듣는 대로 개혁하니, 한 도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공에게 대단하게 쏠렸다. 인사 고과를 할 때 가장 강포한 자 두 사람을 봐주지 않자, 상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정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임한 이래로 청나라 칙사를 두 번 접대했는데 예가 정성스럽고 일이 잘 다스려지니, 청나라 칙사도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선정을 펼치는 관찰사는 참으로 대인(大人)이다. 우리가 어떻게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전례에 따라 수여하는 은화(銀貨)를 퇴짜 놓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접반사(接伴使)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관찰사의 위엄 있는 명령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며, 탄복하면서 갔다.
경진년(1760) 12월에 공이 우연히 감기에 걸리더니, 4일 선화당(宣化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이 숙종 갑술년(1694, 숙종20)에 태어났으므로 춘추가 67세이다. 한 도의 백성이 시장을 열지 않고 목 놓아 슬피 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친척을 슬퍼하는 것과 같았다. 상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이르기를 “내가 중용하려 했는데, 어찌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고, 여러 번 탄식하며 애석해하였으며, 이조에 명하여 상기가 끝나거든 그 아들을 등용하게 하였다.
신사년(1761, 영조37) 1월에 영구를 모시고 영남으로 돌아와 3월 6일에 단양(丹陽) 금수산(錦繡山)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효우(孝友)는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동추공이 만년에 풍비(風痺)를 앓아서 돌아누울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공이 밤낮으로 부축하며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동추공이 영면한 뒤에는 평소 섬기던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부친이 살아계실 때처럼 공경하고 삼갔다. 한 아우가 기이한 병을 앓을 때 공이 직접 간호했는데 시종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우가 감격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형님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다시 일어나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공의 몸은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할 듯했으나 의리를 판단할 때에 이르면 조금도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 공이 겨우 7세 때에 명화적(明火賊)이 한밤중에 갑자기 침입하여 온 집안사람이 달아나 피했는데, 도적이 물러난 뒤에 급히 들어와 보니 공이 알몸으로 방 안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동추공이 묻기를,
“너는 놀라고 겁나지 않았느냐?”
하니, 공이 아뢰기를,
“제가 이미 스스로 옷을 벗어서 몸에 아무 물건이 없는데, 도적이 어찌 저를 해치겠습니까. 이 때문에 놀라고 겁나는 일이 절로 없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밤에 측간에 가는데 개가 따라왔다. 호랑이가 개를 물어 가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 공에게 다시 들어오라고 재촉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개를 잡아먹었으니 필시 다시 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태연히 측간에 갔다.
정미년(1727)에 공이 성시(省試 복시(覆試))에 응시하고 동반자들과 남한산성으로 나가서 기다렸는데, 이튿날 종이 도성 안에서 나와서 급제 소식을 알렸다. 공은 밥을 먹고 있었는데 전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은 뒤에 동반자들과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람들은 공이 놀라 기뻐하는 기색을 보지 못하였다. 어릴 적부터 이미 공의 심지가 굳게 세워졌던 것이다. 공이 벼슬길에 나가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해야 할 말은 다 말하고, 이해 관계 때문에 두마음을 품지 않았으며, 세상일에 대하여는 마음을 빼앗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은 마음이 담박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고 물욕과 분수가 조금 적으나, 학문에 힘써 역량을 확충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공은 늘 집에서 지내는 날에는 하암(霞巖)의 천석(泉石) 사이에서 소요하였는데 즐거워하며 늙는 것을 잊었다. 하암 아래에는 헤엄치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이웃 마을 사람이 매번 독약을 풀어 다 잡아 갔다. 공이 마을의 벗에게 편지를 보내 못의 물고기를 다 잡아 가지 말라고 경계하고, 또한 ‘물약어(勿藥魚)’ 3자를 하암대(霞巖臺) 앞 두 바위 사이에 써 놓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지금까지 준수하고 있다.
공이 일찍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장(長)을 지낼 때 관찰사가 서원을 살펴보고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소수서원의 주인은 보기에 키가 매우 작은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온 방 안이 점점 충만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소수서원의 주인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약산(藥山) 오공 광운(吳公光運)이 일찍이 온 조정의 인물을 논평하여 말하기를 “정옥은 공평하고 충직하고 청렴하다.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을 맡아 인재 선발에 한 번도 실수가 없었으니, 이 사람의 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청대(淸臺) 권공 상일(權公相一)이 승지로서 상을 모시는데, 상이 영남 사람 중에 누가 등용할 만한 자인지를 묻자, 대답하기를,
“정옥은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담박하여 욕심이 없습니다. 관직 생활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이르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고 일컬어지니, 마땅히 영남 사람 중에 으뜸이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 사람을 안다.”
하였다. 아, 영조 임금이 신하를 안 것이 이와 같고, 여러 명공(名公)이 떠받든 것이 또한 이와 같았는데, 끝내 공으로 하여금 지위가 덕에 차지 못하게 하고 구중궁궐에 애석한 탄식만 끼쳤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배(前配) 증(贈) 정부인(貞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이명(李溟)의 따님이고,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현손(玄孫)이다. 부인은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현감 이세술(李世述)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김헌(金
)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 증 정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호군(護軍) 성세진(成世瑨)의 따님이고 청백리 성이성(成以性)의 증손이다. 공이 율봉도 찰방을 지낼 때,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진 묵은빚을 갚기 위해 돈 두어 민(緡)을 보냈는데, 부인은 그중에 반으로 빚을 갚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공이 모범을 보이고 부인이 교화되었으니, 식자들이 탄복하였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참봉 유간(惟簡), 숭간(崇簡), 장간(章簡), 요절한 행석(幸石)이고, 두 사위는 이정현(李廷顯), 김한련(金漢鍊)이다.
유간은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필량(必良), 양자로 나간 필공(必恭), 필검(必儉)이고, 사위는 박한공(朴漢恭)이다. 재취(再娶)는 1녀를 낳았다. 또한 서녀(庶女)가 있는데, 채덕수(蔡德洙)에게 시집갔다. 숭간의 양자는 필공이고, 두 사위는 유낙휴(柳洛休), 이이연(李頤延)이다. 장간은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필양(必讓)이고, 사위는 교관(敎官) 김시찬(金是瓚), 성필로(成必魯), 권의도(權義度)이며, 막내딸은 아직 어리다. 증손과 외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참봉군(參奉君 정유간(鄭惟簡))이 불행히 장수하지 못하여, 장간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져와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지난날 공이 황해도 감영을 다스릴 적에 부용당(芙蓉堂)을 중수하고는 육위문(六偉文)을 얻어서 걸고 싶어 하기에, 내가 그 뜻을 받들어 정중하게 승낙했으나 미처 부응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어느덧 기다려 주지 않아서, 매번 생각할 적마다 미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다. 지금 비석에 새길 명(銘)에 정성을 담을 수 있게 되었으니, 지난날 지체하며 게을리했던 허물을 속죄하려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그 몸은 작으나 / 其體則小
그 담력은 매우 컸네 / 其膽甚大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 有祖有孫
어질다는 명성 무성했네 / 賢聲藹藹
누구만 못하기에 / 誰之不如
묘당에 앉지 못했나 / 坐弗廟堂
소부나 두모를 / 召父杜母
비강으로도 만들 수 있었네 / 陶鑄粃糠
방면도 영화로우나 / 方面亦榮
공은 이미 백발이었네 / 公髮已華
하늘이 백성에게 복을 안 주어 / 天不福民
일천 집이 들에서 곡했네 / 野哭千家
왕이 애석해하며 / 王用悼惜
등용 못 함을 한스러워했네 / 恨不尊用
하늘이 정한 것도 허무로 돌아갔으니 / 天定亦虛
저 수많은 사람들을 어이하랴 / 奈彼人衆
공은 혼탁한 세상 벗어났으니 / 公蛻溷濁
단구에서 즐거우리라 / 樂哉丹邱
명을 지어 감회를 담고 / 銘以寓感
비석에 새겨 후세에 보이노라 / 刻眎千秋
[주-D001] 극경(克卿) : 정극경(鄭克卿)은 청주 정씨(淸州鄭氏)의 시조이다.[주-D002] 대장군(大將軍) 의(顗) : 정의(鄭顗)는 고려의 무신으로 1217년(고종4) 거란군이 서경에 침입하자 이 틈을 타 서경 사람 최광수 등이 고구려 부흥을 내세워 난을 일으키자 일당 8명을 격살하고 성을 회복하였다. 1233년 필현보, 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에서 모반하자 선유(宣諭)의 임무를 띠고 서경에 갔는데 오히려 필현보가 그를 주장(主將)으로 삼으려 하여 유혹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주-D003] 최광수(崔光秀) : ?~1217. 고려 고종 때인 1217년 거란군의 침입을 틈타 서경을 탈취하고 고구려를 부흥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난을 일으켰으나, 바로 정의가 휘두른 도끼를 맞아 죽었다.[주-D004] 필현보(畢玄甫)의 반란 : 1233년 낭장(郞將)으로 동료 홍복원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선유사(宣諭使)인 대장군 정의ㆍ박녹전(朴祿全) 등을 죽인 뒤에 성을 탈취하여 배반하고 갖은 불법을 자행하다가 최우(崔瑀)가 보낸 가병(家兵) 3000명 및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붙잡혀 개경에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주-D005] 성천(成川) : 평안남도 중부에 있는 군이다.[주-D006] 탁(琢) : 정탁(鄭琢, 1526~1605)으로, 본관은 청주(清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하고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들을 천거하였다. 정유재란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옥에 갇히자 힘을 다해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竝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주-D007] 윤저(允著) : 정윤저(鄭允著, ?~1582)는 정탁의 맏아들이다.[주-D008] 기삼백(朞三百) : 고대 역법(曆法)의 기초가 되는 이론으로, 해와 달의 운행과 달의 대소(大小)와 윤달에 대한 설명을 이른다. 《서경》 〈요전〉에 “제요(帝堯)가 말씀하였다. ‘아, 너희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야. 기는 366일이니, 윤달을 사용하여야 사시를 정하여 해를 이루어 진실로 백관을 다스려서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질 것이다.’[帝曰: 咨汝羲曁和, 朞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 定四時成歲, 允釐百工, 庶績咸熙.]”라고 하였다.[주-D009] 창설(蒼雪) 권공(權公) : 권두경(權斗經, 1654~1725)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이다.[주-D010] 무신년에 …… 일어나자 : 1728년 3월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이른다.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하고자 일으켰던 반란으로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1724년 경종의 승하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소론이 남인을 포섭하여 반정을 도모하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영조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탕평책을 실시함에 따라 서울의 많은 소론이 이탈하였다. 이에 초조해진 지방의 세력이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고 청주에서 거병하였으나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이인좌 등 수뇌부가 체포되어 평정되었다.[주-D011] 내구구(內廏駒) : 내구마(內廏馬)의 망아지이다. 내구마는 임금의 거둥에 쓰이는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에서 기르는 말을 이른다.[주-D012] 10년 …… 제수되어 : 정옥(鄭玉)은 1742년 5월에 보령 현감이 되었다.[주-D013] 유공 척기(兪公拓基) : 유척기(1691~1767)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주-D014] 아사(亞使) : 각 도의 관찰사를 보좌하면서 행정 업무를 총괄한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가리킨다.[주-D015] 흑두(黑頭)의 공경(公卿) : 젊은 나이에 공경의 지위에 오르는 것으로, 매우 훌륭한 인재를 뜻한다.[주-D016] 이정보(李鼎輔) : 1693~176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ㆍ보객정(報客亭)이다.[주-D017] 먼동이 트기 …… 지시하였다 : 오늘 새벽 이전의 과오는 모두 없던 일로 하고, 새벽 이후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이다.[주-D018] 사온(賜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것이다.[주-D019] 진실무망(眞實無妄) : 《중용장구》 제16장에 나오는 말로, 진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천리(天理)의 본연을 말한다. 사람은 천리처럼 진실무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여 진실무망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주-D020] 이공 종성(李公宗城) : 이종성(1692~1759)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이다. 시호는 효강(孝剛)이었다가 문충(文忠)으로 바뀌었다.[주-D021] 건극(建極) : 군주가 인륜(人倫)의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서경》 〈홍범(洪範)〉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요체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하면서 그 다섯 번째로 “표준을 세우되 황극으로써 한다.[建用皇極]”를 들었다.[주-D022] 설어(褻御) :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신하로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아뢰는 역할을 하였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신하들에게 늘 “내가 늙었다 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하고 조심하여 나를 경계시키라.”라고 말하였다. 《詩經 大雅 抑》[주-D023] 담길(覃吉) : 명(明)나라 헌종(憲宗) 때 태감(太監)으로서 동궁전새국랑(東宮典璽局郞)이 되어 훗날 효종이 된 태자를 모셨다. 이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는데, 담길이 사서(四書)의 장구를 말로 가르쳐 주면서 고금의 정치 제도와 백성의 풍속 및 환관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처단하며 정사를 해친 까닭을 이야기해 주고, 태자의 행동거지에 대해 때로 간쟁하여 태자가 담길을 매우 경외하였다. 《明史 宦臣列傳 覃吉》[주-D024] 마영성(馬永成)ㆍ유근(劉瑾) : 명나라 무종 때 총애를 받은 환관들이다.[주-D025] 유련(流連) : 유람이나 놀이에 빠져 돌아오는 것을 잊는다는 뜻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뱃놀이를 하다가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돌아옴을 잊는 것을 유라 이르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돌아옴을 잊는 것을 연이라 이른다.[從流下而忘反, 謂之流, 從流上而忘反, 謂之連.]”라고 하였다.[주-D026] 불훼지년(不毁之年) : 부모상이라 하더라도 슬픔을 자제하여 몸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할 나이라는 뜻으로, 60세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정옥이 60세를 바라보는 53세에 부친상을 당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주-D027] 양사청(養士廳) :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교육받는 유생들이 머물렀다.[주-D028] 황정(黃晸) : 1689~1752.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양보(陽甫)이다.[주-D029] 윤득재(尹得載) : 1697~175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후(子厚), 호는 응휴(應休)이다. 1753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주-D030] 서한(西漢)의 순리(循吏) : 서한 때 선정을 베풀고 교화를 펼치며 학교를 일으켜 문풍(文風)을 크게 떨친 벼슬아치들을 말한다. 《漢書 循吏傳》[주-D031] 선여(羨餘) : 초과 징수된 세금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에 가구당 1인 이상 도역(徒役)을 시키지 못하게 한 규정을 초과했을 경우 그 초과분을 선(羨)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주-D032] 동조(東朝) : 한(漢)나라 때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長樂宮)이 황제의 거처인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하여 태후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당시 대왕대비인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를 가리킨다.[주-D033] 몸은 …… 듯했으나 : 몸가짐이 매우 공손하고 신중함을 뜻한다. 주공(周公)이 부친 문왕(文王)을 섬길 때에 너무도 공손하여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했다.”라고 하였다. 《淮南子 氾論》 《小學 稽古》[주-D034] 하암(霞巖) : 정옥은 43세 되던 1736년 마을 입구에 하암대를 짓고, 자신을 암대주인(巖臺主人)이라 불렀다.[주-D035] 물약어(勿藥魚) : 독약을 풀어 물고기를 잡지 말라는 말이다.[주-D036] 오공 광운(吳公光運) : 오광운(1689~1745)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 시호는 충장(忠章)이다.[주-D037] 권공 상일(權公相一) : 권상일(1679~1759)로,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 시호는 희정(僖靖)이다.[주-D038] 부용당(芙蓉堂) : 해주(海州) 객관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3 海州牧》[주-D039] 육위문(六偉文) : 상량문을 말하는데, 상량문에는 아랑위(兒郞偉)라는 글이 여섯 번 들어가므로 이렇게 칭한다.[주-D040] 소부(召父)나 …… 있었네 : 정옥의 재능은 극히 조금만 발휘해도 소부와 두모의 능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로, 정옥의 재능이 매우 훌륭함을 뜻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고야산(姑射山)의 신인(神人)은 그의 찌꺼기[粃糠]를 가지고도 요순(堯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였다. 소부와 두모는 수령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전한(前漢)의 소신신(召信臣)과 후한(後漢)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두 사람 모두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덕정(德政)을 베풀었으므로 남양 사람들이 “앞서는 소부가 있었고 뒤에는 두모가 있다.”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주-D041] 방면(方面) : 관찰사가 다스리는 행정 구역으로, 관찰사를 지칭한다.[주-D042] 단구(丹邱) : 충청도 단양(丹陽)을 가리킨다. 정옥의 묘가 단양 금수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