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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임금은 지극히 성스럽고 신령하여, 무릇 옥사를 다스리면 사람들이 모두 억울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오직 당인(黨人)은 제 소견만 내세우며 짧은 안개로 하늘을 가로막으려 하였다. 이에 제산(霽山) 김공(金公)과 같은 이는 억울함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10년 뒤에 성심(聖心)이 조금씩 깨닫고 완전히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795, 정조19)에 이르러 상이 공의 죄가 아님을 통찰하고 직첩(職牒)을 내려 주었으니, 공을 불쌍히 여긴 것이 자못 지극하였다. 대개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근심이 없는 이는 오직 영조 임금이로세.” 하였다. 비록 당인일지라도 해와 달 같은 밝음을 어찌하겠는가.
공의 휘는 성탁(聖鐸)이고,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이다. 고려 때에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라는 분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서 김씨가 그로 인하여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휘가 진(璡)이고 호가 청계(靑溪)인 분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극일(克一)은 호가 약봉(藥峯)으로 아우 구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과 함께 모두 퇴도(退陶)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이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사빈서원(泗濱書院)의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약봉은 자식이 없어서 구봉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는데, 철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시온(是榲)이고 호는 표은(瓢隱)이며,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에는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임금이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조부의 휘는 방렬(邦烈)이고 성균 생원(成均生員)이다. 아버지의 휘는 태중(泰重)이다. 어머니 순천 김씨(順天金氏)는 부사(府使) 김윤안(金允安)의 후손이고 처사(處士) 김여만(金如萬)의 따님이다.
공은 17세 때 금수(錦水)의 북쪽에서 스승을 따르며 사자(四子)와 성리(性理)의 글을 강명(講明)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고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연로하여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도 함께 하였다. 공이 일찍이 증광 문과(增廣文科)의 복시(覆試)에 응시하러 가다가 서울에 천연두가 유행한다는 말을 듣고 중도에 돌아왔다. 공의 친한 벗이 이때 서울에 있다가 공을 딱하게 여기고 예조에 진시장(陳試狀)을 올릴 것을 꾀하였는데, 공이 마침 종질(從姪)의 상을 당한 것을 가지고 중복(重服)이라고 글을 엮었다. 공이 말하기를 “국법은 기복(朞服)이 아니면 진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소공복을 기년복이라 한다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하고, 편지를 써서 친한 벗을 꾸짖으니, 친한 벗 역시 사죄하여 마지않았다.
을사년(1725, 영조1)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대부인이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비록 어머님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나 집안사람을 신칙하여 감히 초목(草木)의 자미(滋味)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슬퍼하여 몸이 몹시 야위어 마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듯하자, 밀암(密菴) 이공 재(李公栽)가 누차 편지를 보내 경계하였으나,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무신년(1728)에 난적이 영남 하도(嶺南下道)에서 일어나자,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재빨리 편지로 공에게 난적을 토벌할 방략을 상의할 것을 청했는데, 공이 즉석에서 유용와 승현(柳慵窩升鉉), 권강좌 만(權江左萬) 및 향중(鄕中)의 여러 공과 함께 달려가 안무사를 만나 보고서 창의소(倡義所)에 달려가 문장을 지어 사방을 깨우쳤는데, 내용이 엄정하고 강개하였다. 머지않아 전투에 달려가려 하는데, 갑자기 적을 격파했다는 첩보(捷報)가 이르러서 이에 중지하였다.
경술년(1730)에 영남 안핵사 오공 광운(吳公光運)이 일부러 찾아왔는데 예모가 몹시 공손하였다. 조정에 돌아가자 공을 수망(首望)으로 천거하며 말하기를 “금옥(金玉)처럼 훌륭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해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사은(謝恩)하고 곧 돌아왔다.
임자년(1732)에 풍원군(豐原君) 조공 현명(趙公顯命)이 영남 관찰사로서 또한 공을 수망으로 천거했는데, 그 천거하는 글에서 아뢰기를,
“김성탁(金聖鐸)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겸손하게 사양하고 물러나 힘써 자신의 재주와 덕을 감추었으나 해박한 학문과 정밀하고 명확한 견해는 영남 선비의 교초(翹楚)로 삼기에 마땅합니다. 나이는 비록 적지만 명예를 이미 이루었는데, 한번 수용(收用)한 뒤에 다시는 기용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있으니, 인재를 샅샅이 찾아내어 밝게 드날려야 하는 도리로 헤아려 보면 이미 지극히 개탄스럽습니다. 이제부터 이전의 투식을 따르지 말고 검사하고 등용하는 데에 머물지 않으며, 도신(道臣)과 수령으로 하여금 그에게 일어날 것을 도탑게 권면하게 하여, 때때로 불러 보시며 마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고사처럼 혹은 경전의 뜻을 따져 물으며 혹은 치도(治道)를 두루 자문한다면 암혈(巖穴)의 선비가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어, 아마도 숨은 인재를 널리 불러 모으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가을에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사은숙배하고 또 돌아왔다. 두어 달 뒤에 풍원군이 상께 아뢰기를 “지난번에 김성탁이 은명에 숙배하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왔다가, 모친이 병들었다고 말하고 갔습니다. 이런 사람을 단지 침랑(寢郞)에 제수하는 것이 어찌 격려하고 권면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다.
계축년(1733)에 본도(本道)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이 별천(別薦)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 당시 공의 나이는 30여 세였는데, 명성이 날로 성대하여 위포(韋布)로부터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공을 한번 보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당로자나 명재상일지라도 사명을 받들고 조령(鳥嶺)을 넘으면 몸소 와서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겨울에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상이 도신(道臣)에게 권가(勸駕)할 것을 명하고, 대궐에 이르러 은명에 숙배할 때에는 속히 접견하시고서 묻기를,
“영남은 선정(先正 이황(李滉)) 이래 반드시 전수받은 유훈이 있을 것이다. 사양하지 말고 대답하라.”
하였다. 공이 사례하고 나서, 《대학》 1부(部)는 격치(格致)에서 치평(治平)까지 그 요체가 ‘성경(誠敬)’ 2자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유(先儒)들이 경(敬) 자의 뜻을 설명한 것이 많은데, 어떤 설명이 요긴한가?”
하여, 대답하기를,
“정자(程子)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말하고, 또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말했으며, 사상채(謝上蔡)는 ‘상성성(常惺惺)’으로 말하고, 윤화정(尹和靖)은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로 말했습니다. 선유들이 경 자를 풀이한 것은 이렇게 서너 가지입니다. 그러나 ‘주일무적’과 ‘상성성’과 ‘불용일물’은 모두 마음에 나아가 말한 것이어서 공부를 착수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거니와, 만약 그 의거할 곳을 논한다면 정제엄숙이 더욱 친절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한 정치의 요체를 묻자, 공은 맹자(孟子)의 ‘생형벌 박세렴(省刑罰薄稅斂)’과 공자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가지고 우러러 대답하니, 상이 모두 칭찬하였다. 하루 뒤에 상이 공을 불러 보고 묻기를,
“그대는 천연두를 피하기 위해 돌아가야 하니, 진달하고 싶은 것을 진달하라.”
하여, 공이 답하여 아뢰기를,
“평소 배운 것은 오직 ‘성의정심(誠意正心)’ 4자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것을 더욱 실천하소서.”
하니, 상이 또한 칭찬하고, 납약(臘藥) 4종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경연(經筵)의 신하에게 주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을묘년(1735) 봄에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4월에 경과(慶科) 증광(增廣) 향해(鄕解)에 합격하여 복시(覆試)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갔다. 상이 예위(禮闈)의 시험을 주관하는 자를 불러 하교하기를 “영남의 현사가 지금 과장에 들어왔을 터인데, 과연 보배를 버려둘 수 없지 않겠는가.” 하였다. 탁호(拆號)하고 보니, 공이 과연 급제하였다. 상이 즉시 공을 사옹원 주부에 제수하여 공으로 하여금 여관 생활의 궁핍함을 해결하게 하였다. 방방(放榜)하던 날에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상이 공에게 어사화를 쓰고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고 어제시(御製詩) 절구 1수를 친히 내렸는데, 그 시에,
어제 영남에서 과거 보러 온 사람 / 昨日嶺南貢擧人
오늘 머리 위에 계화꽃 새롭도다 / 今辰頭上桂花新
어찌 다만 그대의 어버이만 기쁘랴 / 豈徒於爾榮親喜
내 금마문에 문학의 신하 되었노라 / 爲我金門文學臣
하고, 어전에서 차운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 당시에 영광과 특별한 은총이 한 시대를 울리고 빛냈다. 며칠 뒤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관직을 띠고 귀근(歸覲)할 것을 명하였다.
5월에 사직소를 올렸다. 상하 수천 마디 말로 시폐(時弊)를 논하고 성학(聖學)을 권면했는데 글자마다 절실하여, 상이 가납하고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이 〈십조소(十條疏)〉를 올리자, 상이 온화하게 타이르는 말을 내렸다. 이어서 도신에게 권가(勸駕)할 것을 명하고, 잠시 뒤에 부사직(副司直)에 제수하였다.
병진년(1736)에 사간원 정언으로서 사직소를 올렸는데, 사직소의 끝부분에서 조정에서 당론이 고질병이 된 것과 향촌에서 선비들의 습속이 바르지 못한 것과 백성이 기근에 괴로운 상황과 부세가 과중하여 생긴 괴로움을 논하고, 이어서 경상도 관찰사가 농사철에 성을 쌓는 폐해를 언급하였다.
정사년(1737)에 공조좌랑 겸 지제교로 옮겼다. 잠시 뒤에 영선(瀛選)에 들어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가 곧 교리로 옮겼다. 이때 임금의 총애가 날로 융숭하여 장차 조만간 크게 등용할 것 같았는데, 질투하는 무리가 옆에서 엿보다가 몰래 사주하였다. 이에 호남과 영남의 유생 이해로(李海老)ㆍ신헌(申𨯶) 등이 이미 공의 지난번 상소에서 “향촌에서 선비들의 습속이 바르지 못한 것” 등의 말에 대해 노기를 품었는데, 게다가 처신을 바꾸어 당로자에게 아첨하며 상소문을 올려서 무고하여 모욕이 공의 스승에까지 미쳤다.
공이 소를 올려 변론하여 아뢰기를,
“신의 스승 이현일(李玄逸)이 지금까지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는 것은 기사년(1689, 숙종15) 가을에 올린 응지소(應旨疏) 중의 한 구절 때문인데 그 소장 전문의 뜻을 가지고 본다면 실로 국모를 위해 편안히 모시는 도리를 다하고 선대왕을 위해 처변(處變)의 의리를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기묘년(1699)의 사면과 신사년(1701)의 완전 석방과 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의 복관이 비록 혹은 행해지고 혹은 중지되었으나 이미 성상께서 통촉해 주셨고 또한 상신(相臣)의 평번(平反)이 있었으니, 그 본정에 다른 것이 없었음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현일은 기사년 연초에는 멀리 향읍에 있었고 사업(司業)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4월이며 걸음이 광주(廣州)에 도달했을 때 곤성(坤聖)을 위하여 소를 올렸으나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막혀서 정철(呈徹)하지 못하였으니, 흉론을 주장했다고 그를 평하는 것은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기사년의 일에 대해 선천(先天)에 부친 것을 알지만 신 때문에 모욕이 스승에까지 미친 것을 스스로 통탄하며 분수에 넘침을 피하지 않고 기휘를 무릅쓰고 범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의 상소가 정원에 도달하자, 승지 유엄(柳儼)이 별도로 계사(啓辭)를 작성하며 한껏 모함하여 성상의 귀를 놀라게 하는 계책으로 삼고 공의 소와 함께 성상께 올려 열람하시게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게 명하여 영남에 있는 공을 체포하게 하였다. 고문하고 신문하는 데에 이르러 공의 숨이 간당간당하자, 형장(刑杖)을 잡은 옥졸들도 공을 가엾게 여겨 공으로 하여금 기절한 척을 하게 하였다. 대개 죄인이 기절하면 형장을 멈추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당인이 들추어내어 죄안을 이루고 공을 사지에 빠뜨린 것은 ‘선천’ 2자에 지나지 않는데, 선천이란 오래고 멀다는 뜻이다. 공의 뜻은 기사년이 지금으로부터 반백 년이 된다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성상의 효성이 다함이 없어 그때의 일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어찌 일찍이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풍원군이 소를 올려 공을 구원하다가 죄를 입어 삭직되고 오랜 뒤에 죄에서 풀려나자 또 상소하여 변론하는 데 더욱 힘썼다. 이에 공을 정의(旌義)에 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옥살이한 것이 모두 다섯 달이고 참혹함이 지극했는데, 능히 옥을 나와서 태연히 바다를 건너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외딴섬에 서책은 없었으나 《심경(心經)》 1부와 《한비문(韓碑文)》 1책을 가지고 와서 아들 낙행(樂行)과 함께 매일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을 일삼았다. 다음 해 여름에 상이 공을 광양현(光陽縣)으로 양이(量移)할 것을 명하였다.
경신년(1740, 영조16) 겨울에 대부인이 세상을 버리자, 공이 모친의 유의(遺衣)로 신위(神位)를 설치한 뒤에 땅을 치고 울부짖었는데, 상이 듣고는, 돌아가 장사 지낼 것을 특별히 윤허하였다.
신유년(1741) 봄에 비로소 안동의 옛집에 달려가 곡하고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를 마치자마자 유배지로 돌아갔다. 상일(祥日)이 되자 제수를 진설하고 상을 마쳤다.
을축년(1745)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강진현(康津縣)의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듬해 봄에 다시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공은 슬픔으로 몸이 상한 이래로 건강이 더욱 훼손되었는데, 겸하여 수토(水土)와 장려(瘴癘) 때문에 병이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정묘년(1747) 4월 30일에 현의 북쪽 용선암(龍仙菴)에서 생을 마쳤다. 공은 숙종 갑자년(1684, 숙종10)에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이다. 그 한 달 전에 절구 10수를 지어 아들 낙행에게 주었는데, 모두 가학(家學)을 면려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어서 낙행에게 이르기를 “내가 병든 가운데 《역(易)》을 보아 대략 이해하는 것이 있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오래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공은 병세가 위중해지자 동자에게 앞에서 옛글을 외우게 하고 한마디도 집안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영구가 물길을 따라 돌아왔기 때문에 10월에 부(府)의 동쪽 이현(梨峴)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자질이 매우 아름다워 수양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몸가짐의 청렴함과 집안 다스림의 근엄함이 자연히 모두 법도에 맞았다. 모부인의 곁에 있을 때는 해학과 유희로 반드시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였고, 아우 경탁(警鐸)과는 마치 손발과 같이 우애로웠다. 고아가 된 조카 중에 먼 곳에 사는 이들을 데려와서 한집에 살면서 마치 친자식처럼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은의(恩意)와 성신(誠信)으로 종족을 조처하고 이웃 마을 사람을 대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에 감격하고 은덕을 그리워하게 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옛날 사람처럼 될 것을 스스로 기약했는데, 매번 배우는 이들에게 말하기를,
“처음 배우는 선비는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뜻의 높낮이에 따라 성취한 것의 크기가 나뉘고, 뜻의 강약에 학업의 진퇴가 걸려 있다. 같이 산을 만들더라도 백 장에 뜻을 둔 자는 백 장 높이의 산을 만들고, 열 장에 뜻을 둔 자는 열 장 높이의 산을 만든다. 같이 길을 가더라도 만 리에 뜻을 둔 자는 만 리를 가고, 백 리에 뜻을 둔 자는 백 리를 간다.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을 뿐이다. 과업(科業)에 뜻을 둔 자는 과업을 할 뿐이고, 문장에 뜻을 둔 자는 문장을 할 뿐이다. 가령 더 나아가서 숙손 목자(叔孫穆子)가 말한 가장 높은 것에 뜻을 둔 자라면 그가 안자(顔子)와 맹자가 되고 정자와 주자(朱子)가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대저 뜻이란 나의 뜻이다. 내가 뜻을 세우고자 한다면 곧 뜻이 설 뿐이다.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으며 어찌 남에게서 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고재(顧齋) 이공 만(李公
)과 서로 허여하여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무릇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과 훈고명상(訓詁名狀)의 의리에서 중요한 핵심과 의심스러운 부분을 서신을 왕복하며 논란하여 옛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왕왕 밝혔다. 기삼백(朞三百)에서 19분도(分度)의 7은 선유의 설이 갖추어져 있으나 오히려 완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통분납자(通分納子)의 법을 《전의(傳疑)》에 실었으나 그 단락을 따라 산가지를 펼친 것이 얽히고설키고 미묘하여 깨달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공이 한 가지 방법을 터득하여 미루어 밝히고 분석하여 요결을 만들었는데, 배우는 이로 하여금 깨닫기 쉽게 하였다. 윤법(閏法)은 그 상세한 설명이 이미 《서전집주(書傳集註)》와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소주(小註)에 갖추어져 있으나 처음 배울 때 늘 어지러이 얽혀서 이해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다. 공이 그 대강을 논설했는데 “기영(氣盈)과 삭허(朔虛)의 분한(分限)이 고르게 된다.”라고 한 곳에 대해 특히 상세히 풀이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지지(地志), 복서(卜筮), 의약(醫藥), 병률(兵律)의 부류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여 풀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겸춘추(兼春秋)로서 입시했는데, 상이 여러 신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김성탁은 고사(古事)의 출처에 대한 응대에 막힘이 없다. 아무리 유경(幽經)과 벽서(僻書)일지라도 또한 그러하니, 과연 경학(經學)을 하는 선비이다.” 하였다. 공이 저술한 글을 깨끗하게 베껴 써서 8책을 만들었으니, 후대에 열람하는 자도 그것이 인의(仁義)의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인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후손이고 통덕랑(通德郞) 박진상(朴震相)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다. 장남은 곧 구사당(九思堂) 낙행으로 문학과 행의로써 사림에게 존중받았다. 차남은 제행(霽行)이고, 딸은 이동영(李東英)에게 시집갔다.
낙행은 아들이 없어서 제행의 아들 시전(始全)을 후사로 삼았다. 사위 4명은 장수학(張壽鶴), 이우필(李宇弼), 박한장(朴漢章), 유윤문(柳允文)이다. 제행은 3남을 두었다. 장남은 시흡(始翕)이고, 둘째는 시전이고, 셋째는 시여(始畬)이며, 사위 3명은 이정응(李鼎凝), 이우명(李宇鳴), 생원 이헌석(李憲錫)이다. 이동영의 외아들 이만운(李萬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증손 남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저(當宁) 을묘년(1795, 정조19)에 공의 손자 시전이 연로(輦路) 아래 엎드려 억울하다고 외쳤다. 상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문자를 들추어내는 것은 태평성세에 할 일이 아니다. 내가 김성탁의 억울함을 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홍문관 교리의 직첩을 지급하고 판부(判付)로써 시전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그 조부는 행의(行誼)로 선조(先朝 영조)의 은전을 두텁게 입었고, 그 아버지의 행의도 자자하게 칭송하는 일이지만 생전에 거두어 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흠이 되는 일이다.” 하였다. 양세(兩世)에 높은 벼슬을 내리는 포상이 황천으로 떠난 지 수십 년 뒤에 미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천고에 드문 은전이다. 후손과 사림이 서로 더불어 눈물을 훔치고 명(銘)을 요청하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는 명을 알아 / 君子知命
천명을 순하게 받을 뿐이었네 / 順受天而已
부들 수레 타고 옥서에 드니 / 蒲輪玉署
이는 받든 것이네 / 斯受之矣
험한 바다 건너 산속에 갇히니 / 鰐海囚山
이는 맡은 것이네 / 斯任之矣
성인의 경서가 손에 있으니 / 聖經在手
도산이 가까이 있었네 / 陶山在邇
영화와 모욕은 만번 바뀌나 / 榮辱萬變
나의 마음은 한결같았네 / 我心則一
죽음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 死以爲寧
낙동강이 그윽이 흐느꼈네 / 洛水幽咽
화고를 이에 돌려주니 / 華誥載還
대를 이은 임금의 은전이네 / 嗣聖之恩
공의 영령이 피눈물을 흘리겠네 / 公靈血泣
저 구원에서 / 于彼九原
선행을 게을리하지 말라 / 爲善勿怠
아, 너희 영남 사람들아 / 咨爾嶺人
공의가 정해지는 데 / 公議之定
백 년 기다릴 것 없었네 / 無待百年
[주-D001] 진(璡) : 김진(金璡, 1500~1580)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이다.[주-D002] 퇴도(退陶) : 이황(李滉, 1501~1570)의 별호이다.[주-D003] 사빈서원(泗濱書院) : 청계 김진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11)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워진 서원이다. 묘호는 경덕사라 하였다. 1709년 사수(泗水) 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1882년(고종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해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사의리(四宜里)에서 천전(川前) 2리로 이건하고 복원하였다.[주-D004] 금수(錦水) :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의 옛 이름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강론한 곳이다. 금소(錦昭), 금양(錦陽)이라고도 한다.[주-D005] 사자(四子) :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말한다.[주-D006]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한 학문으로, 남을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라고 하였다.[주-D007] 진시장(陳試狀) :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없는 경우에 예조에 올리는 문서로, 진시장을 올려 허가를 받으면 그다음 번의 회시에 응시할 수 있다. 특별한 사정이란 상중에 있는 자, 기복으로 장사를 지내지 못한 자, 부자가 함께 응시하게 될 경우이다. 《大典會通 禮典 諸科》[주-D008] 초목(草木)의 자미(滋味) :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반드시 초목의 자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생강과 계피 등을 말한다.”라고 하였다.[주-D009] 이공 재(李公栽) : 이재(1657~1730)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이다. 갈암 이현일의 아들로, 퇴계에서 학봉, 갈암으로 이어지는 영남 학맥을 이었다.[주-D010] 무신년에 …… 일어나자 :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하고자 일으켰던 반란으로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1724년 경종의 승하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소론이 남인을 포섭하여 반정을 도모하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영조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탕평책을 실시함에 따라 서울의 많은 소론이 이탈하였다. 이에 초조해진 지방의 세력이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고 청주에서 거병하였으나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이인좌 등 수뇌부가 체포되어 평정되었다.[주-D011] 박사수(朴師洙) : 1686~1739.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내헌(耐軒)ㆍ내재(耐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주-D012] 유용와 승현(柳慵窩升鉉) : 유승현(1680~1746)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이다.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주-D013] 권강좌 만(權江左萬) : 권만(1688~1749)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이다. 밀암 이재,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문인이며,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주-D014] 오공 광운(吳公光運) : 오광운(1689~1745)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이다.[주-D015] 조공 현명(趙公顯命) : 조현명(1690~1752)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ㆍ녹옹(鹿翁), 시호는 충효(忠孝)이다.[주-D016] 교초(翹楚) : 뛰어난 인재를 이른다. 《시경》 〈주남(周南) 한광(漢廣)〉의 “쑥쑥 뻗은 잡목 속에 회초리 나무를 베리라.[翹翹錯薪, 言刈其楚.]”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주-D017] 암혈(巖穴)의 선비 : 은둔한 선비를 뜻한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어진 이를 초빙하고 유능한 이를 등용하여 암혈의 선비를 드러낸다.”라는 말이 있다. 《文選 卷21》[주-D018] 이종백(李宗白) : 1699~175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소(太素), 호는 목천(牧川),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1732년 영남 어사를 지냈다.[주-D019] 위포(韋布) : 포의위대(布衣韋帶)의 준말로, 베로 지은 옷을 입고 가죽으로 만든 띠를 두른 빈한한 선비를 뜻한다.[주-D020] 권가(勸駕) : 현자(賢者)에게 직임을 맡도록 권하는 것으로, 한 고조(漢高祖)가 군수에게 명하여 현자가 있으면 몸소 찾아가 권면하여 거가(車駕)로 서울에 올려보내도록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高帝紀下》[주-D021] 격치(格致)에서 치평(治平)까지 :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을 가리킨다.[주-D022] 정자(程子)는 …… 말했습니다 : 《대학혹문(大學或問)》 경(經) 1장에, 경(敬)을 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은 데 대한 주희(朱熹)의 대답에 “정자는 이것에 대하여 일찍이 ‘주일무적’으로 말하고, 또 일찍이 ‘정제엄숙’으로 말하였다. 그 문인 사씨(謝氏)의 설에서는 또 이른바 ‘상성성법(常惺惺法)’이라고 하고, 윤씨(尹氏)의 설은 또 이른바 ‘기심수렴 불용일물’이라고 하였다. 이 몇 가지 설을 보면 힘쓸 방도를 알 수 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일무적은 마음을 집중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정제엄숙은 가지런하고 엄숙하게 유지하는 것이며, 상성성은 늘 마음이 깨어 있게 유지하는 것이며,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마음을 수렴하여 한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주-D023] 생형벌 박세렴(省刑罰薄稅斂) :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이다. 《孟子 梁惠王上》[주-D024]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답한 말이다. 《論語 顔淵》[주-D025] 성의정심(誠意正心) :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모두 《대학》의 팔조목에 속하는 말이다.[주-D026] 향해(鄕解) : 향시(鄕試)이다. 각 도(道)에서 보이던 생진과(生進科)로, 여기에 합격하면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주-D027] 예위(禮闈) : 사마시의 회시, 또는 그 회시를 보이는 장소를 말한다. 예조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주-D028] 보배를 버려둘 : 초야에 묻혀 있어 알려지지 않은 현인(賢人)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변주(汴州)의 판좌(判佐)가 되었다가 서리에게 무함을 당했는데, 당시 하남도 출척사(河南道黜陟使) 염입본(閻立本)이 그를 보고 “중니(仲尼)는 허물을 보고 그의 인(仁)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대는 창해(滄海)의 버려진 보배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舊唐書 狄仁傑列傳》[주-D029] 탁호(拆號) : 시권(試券)에 성명 등을 쓰고 봉한 부분을 개봉하여 급제자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다.[주-D030] 영선(瀛選) : 홍문관의 관직에 선발됨을 이른다. 조선의 홍문관과 같은 기관인 중국의 한림원(翰林院)을 영주(瀛洲)라고 부른 데서 온 말이다.[주-D031] 호남과 …… 미쳤다 : 1736년에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헌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 이어 이인지(李麟至)의 무욕(誣辱)에 대해 변해(卞解)하고, 또 “이현일이 기사년의 흉론(凶論)을 주장하여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묘비(墓碑)를 찬술하면서 이에 감히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자손록(子孫錄)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또 무슨 이변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12年 8月 20日》[주-D032] 이현일(李玄逸) : 1627~1704.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이다. 1691년 이조 참판을 지냈고 그 뒤 이조 판서까지 올랐으나 갑술환국(1694) 때 유배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33] 평번(平反) : 억울한 죄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처리하거나 감형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준불의(雋不疑)의 모친이 아들에게 “오늘은 평번을 해서 몇 사람이나 살렸느냐?”라고 묻고는,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는 대답을 들으면 기뻐서 웃곤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雋不疑傳》[주-D034] 곤성(坤聖) : 왕후를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인현왕후를 가리킨다.[주-D035] 풍원군이 …… 힘썼다 : 조현명의 상소에 “김성탁이 망언으로 장차 죽음에 이르는 것은 진실로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현일이 근본이고 김성탁은 지엽인데, 근본인 이현일은 집안에서 편안히 죽게 하고 지엽인 김성탁은 형장에 의해 죽게 한다면 본말과 경중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는 처음에 역률로써 이현일의 죄를 처단하지 않았는데, 난역을 비호했다는 것으로 김성탁을 책망한다면 거의 백성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금석(金石)의 법전은 스스로 절차와 차례가 있으니, 난역을 비호했다는 죄율을 가벼이 김성탁에게 시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13年 7月 15日》[주-D036] 한비문(韓碑文) : 한유(韓愈)의 비문을 모은 책으로 보인다.[주-D037] 낙행(樂行) : 김낙행(金樂行, 1708~1766)으로, 본관은 의성, 초명은 진행(晉行), 자는 퇴보(退甫)ㆍ간부(艮夫), 호는 구사당(九思堂)이다. 김성탁의 아들이고, 밀암 이재의 문인이다.[주-D038] 경신년 …… 돌아갔다 : 《제산집(霽山集)》 〈제산선생연보(霽山先生年譜)〉에 “경신년……12월에 어머니 김씨 상을 당하였다.……신유년 2월에 분상하며 집에 도착하였다.”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17년 1월 3일 기사에 “광양현에서 육지로 내보낸 죄인 김성탁에게 특별히 말미를 허락하여 돌아가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김성탁의 아들이 울면서 호소한 것 때문에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39] 대계(臺啓)로 …… 이배(移配)되었다 : 《제산집》 〈제산선생연보〉에 “선생 나이 62세 10월에 아들 낙행이 두 어버이께서 천 리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을 애통히 여겨 박 부인을 모시고 갔다. 이는 대개 유미암(柳眉巖)이 북쪽으로 귀양 갈 때 부인이 따라갔던 일에 의거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사간원의 계사가 나와서 이배의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주-D040] 경탁(警鐸) : 김경탁(金警鐸, 1687~1767)으로, 본관은 의성, 자는 진숙(振叔)이다.[주-D041] 숙손 …… 것 : 숙손 목자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를 말한다. 목자는 그의 시호이다. 숙손표가 진(晉)나라 범선자(范宣子)에게 오래되어도 썩어서 폐하지 않는 것 세 가지를 말하기를 “가장 높은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고, 그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여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을 말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주-D042] 이공 만(李公
) : 이만(1669~1734)으로, 본관은 재령,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이다.[주-D043] 천인성명(天人性命) :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주-D044] 훈고명상(訓詁名狀) : 사물의 명칭과 형태에 관한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것이다.[주-D045] 기삼백(朞三百) : 고대 역법(曆法)의 기초가 되는 이론으로, 해와 달의 운행과 달의 대소(大小)와 윤달에 대한 설명을 이른다. 《서경》 〈요전〉에 “제요(帝堯)가 말씀하였다. ‘아, 너희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야. 기는 366일이니, 윤달을 사용하여야 사시를 정하여 해를 이루어 진실로 백관을 다스려서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질 것이다.’[帝曰: 咨汝羲曁和, 朞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 定四時成歲, 允釐百工, 庶績咸熙.]”라고 하였다.[주-D046] 통분납자(通分納子) : 통분은 분모를 같게 만드는 것이고, 납자는 분자를 분모로 환산하는 것이다.[주-D047] 전의(傳疑) : 《계몽전의(啓蒙傳疑)》로, 퇴계 이황이 주희의 《역학계몽(易學啟蒙)》은 이치가 심오하고 난해하므로 이를 알기 쉽게 풀이하기 위하여, 해득한 것을 주기(註記)하고 해설을 가한 것이다. 이 밖에 명(明)나라 한방기(韓邦奇)의 《계몽의견(啓蒙意見)》 중에서 요의(要義)를 뽑아 추록하였다.[주-D048] 윤법(閏法) : 윤달을 계산하는 법이다.[주-D049] 서전집주(書傳集註) : 송(宋)나라 때 채침(蔡沈)이 저술한 책이다.[주-D050] 기영(氣盈)과 …… 된다 : 《서경》 〈요전(堯典)〉의 기삼백에 대한 주석에 “19년에 7번 윤달을 넣으면 기영과 삭허의 분한이 고르게 되니, 이것이 1장(章)이 된다.”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1년 360일 기준으로 기영은 해가 더 가는 시간을 말하고 삭허는 달이 덜 가는 시간을 말한다.[주-D051] 병률(兵律) : 군대의 규율을 가리킨다.[주-D052] 부들 수레 : 덜거덕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부들 잎으로 바퀴를 싼 수레이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학문을 중히 여겨 어진 사람을 초빙할 때 포륜(蒲輪)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고, 후대에 포륜은 현자 초빙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漢書 武帝紀》[주-D053] 산속에 갇히니 :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을 말한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에 귀양 가서 〈수산부(囚山賦)〉를 지은 뒤로 고달픈 유배 생활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주-D054] 맡은 것이네 : 김성탁이 스승 이현일의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제주도 정의로 유배 간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맡아 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주-D055] 도산(陶山) : 이황을 말한다. 이황이 만년에 강학하던 곳이 도산이므로, 일반적으로 이황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주-D056] 화고(華誥) : 직첩(職牒) 또는 고신(告身)을 말한다.[주-D057] 대를 이은 임금 : 영조를 이은 정조를 가리킨다.[주-D058] 공의 …… 구원(九原)에서 : 김성탁의 영령이 저승에서 정조의 은전에 감격하여 울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