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제도가 처지에 따라 사람을 규제하고 있어서 비록 명가(名家)의 자제가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더라도 적출(嫡出)이 아니면 으레 현달할 수 없으니, 군자가 애석하게 여긴다. 금상 6년(1782, 정조6) 봄 내가 조정을 떠나 마호(麻湖)에 가 있을 때 성군 훈(成君塤)이 사는 집을 빌려 거처하였는데, 이윽고 성훈이 선대인(先大人) 동지중추부사 군의 행장을 꺼내 나에게 매우 간절하게 묘지를 청하였다. 군은 일찍이 처지에 제약을 받던 사람이기에 실로 내가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아들이 부친의 숨겨진 행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지극한 효성이니, 내가 어찌 한마디 말로 그 행실을 드러내는 일을 아까워할 수 있겠는가.
군의 휘는 윤량(胤良), 자는 선보(善甫)이고, 창녕(昌寧) 사람이니, 고려(高麗) 중윤(中尹) 인보(仁輔)가 그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 송국(松國)은 관직이 시중(侍中)인데 효성으로 《삼강록(三綱錄)》에 등재되었다. 5대를 내려와 문효공(文孝公) 사달(士達)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호는 역암(易庵)이다. 다시 4대를 내려와 희옹(希雍)에 이르러서는 공훈으로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8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대현(大顯)이니 관직은 현령이다. 증조의 휘는 익(釴)이니 평안 절도사(平安節度使)이다. 조(祖)의 휘는 응유(應裕)이니 창천군(昌川君)이다. 고(考)의 휘는 준(儁)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이 동지중추부사가 된 것은 이분의 영광이 미친 것이었다. 모친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이니 참의 원진탁(元振鐸)의 따님이다.
군은 숙종 을해년(1695, 숙종21)에 태어났다. 나이 70에 영조께서 노인을 우대하는 정사를 만나 수직(壽職)으로 종2품에 이르렀다. 무자년(1768, 영조44)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4세이다. 군은 용모가 풍성하고 기국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처지에 제약을 받아 일찍이 “곤궁하고 가난한 것은 분수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 역시 그를 천거하지 않았다. 늙어서는 한 아들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좌우에서 보살피는 봉양을 받았고 손자들이 늘어서서 빼어난 시문(詩文)으로 시봉(侍奉)하여 만년의 복이 화락하였으니, 하늘의 제도는 나라의 제도와 달랐던 것이다. 처음 수주(隋州)에 장사 지냈다가 후에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 오리(梧里)의 언덕에 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의 무덤과 합분(合墳)하였으니, 곧 사좌(巳坐)의 언덕이다.
부인은 동복 오씨(同福吳氏)이니, 오상백(吳尙伯)의 딸이자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증손녀이다. 신사년(1701)에 태어나서 을묘년(1735) 10월 22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35세이다.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훈(塤)은 첨지(僉知)이고, 두 딸은 이성로(李星老)와 정희신(鄭煕臣)에게 시집갔다. 첨지는 윤황(尹㨪)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원진(遠鎭)이고, 뒤에 김도호(金道浩)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진(邇鎭)이다. 두 딸은 어리다. 또 아들 둘이 있으니 용진(龍鎭)과 호진(虎鎭)이다. 이성로의 아들은 이재영(李再榮)이다. 정희신은 후사가 없다. 원진은 별제(別提) 심득빈(沈得彬)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이진은 생원 이온중(李蘊中)의 딸에게 장가갔다. 용진은 이양명(李陽鳴)의 딸에게 장가가서 딸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호진은 서기로(徐錤老)의 딸에게 장가갔다. 내외의 증손들이 몇 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