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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뇌경(雷卿)이고, 자(字)는 진백(震伯)이며, 호(號)는 운계(雲溪)이다. 그의 선조는 온양인(溫陽人)으로, 시조(始祖) 정보천(鄭普天)은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정희공(貞禧公)이다. 이로부터 고려와 조선 양대를 거치면서 고관들이 줄지어 계속 이어졌다. 고조인 정순붕(鄭順朋)은 우리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두 임금을 섬겨 좌의정을 지냈으며, 증조인 정담(鄭䃫)은 호가 십죽헌(十竹軒)으로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는데,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동생이고, 고옥(古玉) 정작(鄭碏)의 형이다.
조부 정지겸(鄭之謙)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시골에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지켰으며, 고(考) 정환(鄭晥)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일찍 죽었다. 비(妣)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증 병조 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 7월 4일에 태어나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어른다운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이모부인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장이 날로 진보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름을 사림(士林)에 드날렸다. 성품은 충효스럽고 강개하였으며, 큰 절조가 있었다.
경오년(1630,인조8) 10월에 황자(皇子) 탄생을 축하하는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북저(北渚) 김류(金瑬)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장원으로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공조와 예조 두 조의 좌랑으로 옮겨졌다. 북저 김류가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일로 인해 공과 함께 북도(北道)로 갔는데,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윤의립(尹毅立) 공이 공을 보고는 나라의 그릇이라고 칭송하였으며, 김공이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공을 극히 칭송하였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이 이 때 이조 판서를 맡고 있으면서 역시 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는 즉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승진시켰다. 공은 선대에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시론(時論) 역시 훌륭하게 여겼다.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가 곧바로 옥당(玉堂)으로 들어가 수찬(修撰), 교리(校理)가 되었는데, 사헌부와 홍문관에 있으면서는 일을 논함에 풍도(風度)가 있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봄에 차자를 올려서 오랑캐와 화의(和議)하는 것이 그름을 논하였다. 그 해 겨울에 청 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공이 교리로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인 정축년 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볼모로 잡혀 청 나라로 끌려가자 세자를 따르던 관원들이 대부분 따라가지 않기를 도모하였는데, 공은 개연히 따라가기를 청하니, 상이 가상히 여겼다.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따라 가면서 일행의 전곡(錢穀) 수지(收支)를 관장하였는데, 세자가 사사로이 청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응당 써야 할 것이 아닌 경우에는 공이 고집스럽게 안 된다고 하였다. 동료들 가운데 혹 몸가짐을 근실하게 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공이 조금도 용서치 않고 사정 없이 꾸짖어 경계시켰으며, 어떤 한 재상이 뇌물을 바치고서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자 공은 침을 뱉으면서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해 겨울에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본국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청 나라로 가 복명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 17) 봄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뒤에 역적 정명수(鄭命壽)의 모함에 걸려들었다.
정명수는 은산(殷山)의 관노(官奴)로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있었던 건주(建州)의 전역(戰役에 우리 나라의 천한 종인 김돌이(金突伊)와 함께 청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자인데, 성품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웠다. 병자년에 조선말을 해득한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로 나왔는데, 그 뒤에 더욱더 청 나라의 총애를 받아 우리 국사(國事)를 전적으로 담당하여 처리하였는데, 임금을 능멸하고 조정 신하들을 욕보이는 등 우리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청 나라 사람이 정명수 등이 우리 나라를 침학한 실상을 고발(告發)하자, 청 나라 황제가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공이 이 사실을 듣고는 이 기회를 틈타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때에 심양(瀋陽) 관소(館所)의 요속(僚屬)과 빈객(賓客)으로는 재신 박로(朴𥶇)ㆍ신득연(申得淵), 보덕(輔德) 박계영(朴啓榮), 필선(弼善) 신유(申濡), 문학(文學) 공(公),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ㆍ정지화(鄭知和) 등 여러 명이 있어, 모두 이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공이 스스로 이 모의를 주도하였다. 그 해 정월에 김종일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하리(下吏)들 가운데 충근(忠謹)하여서 이 일을 맡을 만한 자로는 강효원(姜孝元)보다 더 나은 자가 없다.”
하고는, 사람들이 함께 앉은 자리에서 강효원을 불러 이르기를,
“정명수와 김돌이 두 역적이 하는 짓은 네가 알고 있는 바이다. 청 나라 역관(譯官) 하사담(河士淡) 역시 그를 죽이려고 하여 지금 고발하였는데, 청 나라 황제가 정명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 이 두 역적을 제거하면 우리 나라의 형세가 높아지고 진헌(進獻)하는 일에도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전에 대간(大諫) 박황(朴潢)과 필선 민응협(閔應協)이 이곳에 있을 때 무오년에 포로로 잡혀 왔던 김애수(金愛守)와 심천로(沈天老) 등을 시켜 청 나라 형부(刑部)에 정문(呈文)을 바치려고 하다가 바치지 못하였는데, 그 때 작성한 정문이 지금 심천로의 처소에 있다. 요즈음 두 역적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더욱 심하여 진헌하는 배와 감을 각 1천 개씩 훔쳐 먹었고, 최상국(崔相國)이 올 때 가지고 온 은자(銀子) 2백 냥, 역관(譯官) 최득남(崔得男)이 싸 가지고 온 은화(銀貨) 7바리를 전부 빼앗았는데, 그에 관한 문서가 모두 그곳에 있다. 이것은 그를 죽일 만한 죄안(罪案)이니, 너는 심천로 등과 함께 정문하여 그의 간악한 실상을 고발하되, 청 나라 관원이 캐물을 경우, 너는 ‘시강원 관원이 알고 있다.’고만 대답하라. 만약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두 사람이 곧장 사실대로 말할 것이니, 너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그러자 강효원이 드디어 개연히 명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심천로 등이 청 나라 형부에 정문을 바치자, 청 나라 관원이 시강원의 관원들을 급히 불러들였다. 이에 김종일이 나아갔다. 청 나라 관원이 정문 안에 있는 내용에 대해 캐묻자, 김종일이 말하기를,
“시강원 관원들은 관장하고 있는 일이 각각 달라서 사서(司書)는 예방(禮房)의 일을 맡고 있고, 문학(文學)은 호방(戶房)의 일을 맡고 있으니, 물화(物貨)의 들고나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이 알고 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을 불러 캐묻자, 공이 사실대로 답하였으며, 또 강효원을 불러 캐묻자, 강효원 역시 공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뒤로도 청 나라 관원이 여러 차례 불러 조사하면서 캐물었으나 대답이 한결같았다.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문서가 공의 처소에 있었는데, 두 역적이 그 사실을 알고 박로에게 사주하여 그 문서를 불태우게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서 청 나라 관원이 증거할 만한 문서가 있느냐고 물으니, 공이 불태울 때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르기를,
“재신 박로가 함께 앉아 있으면서 불태웠다.”
하였다. 박로는 공에게 유감을 품고 있어서 이 틈을 타 공을 중상하려고 하였다. 이에 청 나라 관원이 불러캐묻자, 답하기를,
“그런 일이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망녕된 것으로, 이는 두 역관을 해치고자 해서 그런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청 나라 관원이 즉시 박로를 석방하고 공과 강효원을 옥에 구금한 다음,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그 일에 대해 캐물었다. 이에 상이 처음에는 공을 구원해주려고 하였는데, 박로가 치계(馳啓)하여 아뢰기를,
“본국에서 엄하게 죄주기를 청할 경우 혹 풀려날 수도 있지만, 만약 신구(伸救)하려고 할 경우 단지 청 나라의 노여움만 촉발시킬 것입니다.”
하고, 재상으로 있던 최명길(崔鳴吉) 역시 박로의 말을 옳게 여기니, 상이 그 말에 따라서 그런 일이 없다고 회자(回咨)하였다. 남을 모해(謀害)한 자는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어 청 나라 관원이 사형죄로 판결하려 하자, 세자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면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화를 늦추라고 하였는데, 공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혼자서만 죄를 뒤집어 썼다.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을 때 재신(宰臣)이 속(贖)하기를 청하자, 정명수가 발끈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그러면 정운계와 강효원이 장차 살아 돌아갈 것이 아닌가.”
하였다. 세자가 친히 청 나라 관부에 나아가 속하기를 청하려고 하여 막 출발하려 하는데, 정명수가 뛰어와서는 길을 막고 소리치기를,
“내 머리를 자른 뒤에나 갈 수 있다.”
하였다. 사서 정지화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어떤 놈인데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하자, 정명수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정명수다.”
하면서 정지화를 주먹으로 마구 때려 정지화의 갓끈이 끊어지고 옷고름이 풀어졌다. 세자가 공으로 하여금 독약(毒藥)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면서 문학 신유(申濡)로 하여금 독약을 구해 주게 하였는데, 독약이 적어서 자살하지 못하였다. 공이 강효원과 옥문(獄門)을 나서 말에 오르자, 재자관(䝴咨官) 이응징(李應徵)과 선전관(宣傳官) 정윤길(鄭胤吉)이 압송해 갔는데, 두 역적이 몰아치기를 몹시 급하게 하였다.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사형장에 도착해서 막 참수(斬首)하려고 하는데, 이응징이 힘껏 다투면서 말하기를,
“조령(朝令)에는 사대부의 경우 교형(絞刑)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 마땅히 본국의 법을 써야 한다.”
하니, 드디어 그 말에 따라 교형에 처하였다. 강효원은 공과 함께 죽을 때 재신을 욕하면서 한 마디도 자신에 대해 변명하지 않아 참으로 훌륭하였으며, 심천로도 마침내 참수당하였는데, 바로 4월 18일이었다. 이날 하늘의 해는 흐리고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부니, 보고 있던 오랑캐들조차도 모두 혀를 끌끌차며 칭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로가 두 역적에게 시신(屍身)을 거두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에 선전관 박형(朴泂)과 질자(質子) 이열(李悅) 및 공의 가노(家奴)가 시신을 수습하였다. 공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시를 읊은 것이 많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두 수의 율시(律詩)가 있는데, 그 하나에,
현우 모두 예로부터 다 함께 죽었거니 / 賢愚終古同歸盡
목숨의 길고 짧음 제맘대로 못하는 법 / 脩短元非力所營
삼십이 년 지난 세월 모두가 꿈이 됨에 / 三十二年成一夢
수천 리 밖 외국 땅서 고혼으로 돌아가네 / 數千里外返孤旌
죽는 날엔 우국충정 눈물 줄줄 흘리고 / 死日尙流憂國淚
살아서는 부모 봉양 제대로 못하였네 / 生時亦闕慰親誠
변방 땅에 이로부터 울어 예는 두견 있어 / 關山自此啼鵑在
남쪽 가는 기럭 좇아 한양 땅 찾아가리 / 倘逐南鴻過漢城
하고, 또 하나에,
나이 어려 고향 떠나 밝은 임금 섬겼음에 / 早離蓬蓽奉明君
옥당 벼슬 한림 벼슬 분수 밖의 은혜였네 / 玉署金鑾分外恩
운명 박해 임금 은혜 보답할 뜻 이루었고 / 命薄可成圖效志
미치광이 성품이라 재앙문에 들어갔네 / 性狂宜入禍殃門
봄이 옴에 만물 모두 생기롭게 싹트는데 / 靑春百物皆生意
바다 밖 천리 땅서 혼백 못 돌아가네 / 滄海千里未返魂
노모와 고아야 부탁할 곳 있거니와 / 老母孤兒猶有托
제현들은 끝끝내 한 원문 1자 빠짐 보존하라 / 諸賢終必一□存
하였다. 또 형벌에 임하여 붓을 달라고 하여 시를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진 세 분 지난날 요하 가에서 죽었으니 어진 세 분은 삼학사(三學士)를 가리킨다. / 三良昔死遼河濱
변방 땅서 떠도는 혼 이웃이 있으리라/ 關塞浮雲鬼有隣
지금 나 진백(震伯) 불러 새로 짝을 이뤘으니 공의 자(字)가 진백이다. / 今招阿震添新伴
우리 함께 영위찾아 주인으로 정하세나 / 共訪令威作主人
또 부채에 제(題)하기를,
“비록 곽자의(郭子儀)와 같은 해를 꿰뚫는 충성을 품고 있으나 일찍이 복이 없어서 마침내 이임보(李林甫)의 언월(偃月)의 계책에 빠져들었으니, 누가 그 원통함을 구해 주겠는가”
하였는데, 말투가 여유가 있고 침착하여 평소와 같았다. 자리를 깔라고 하고서 동쪽을 향하여 임금과 부모에게 각각 두 번씩 절하였는바, 여기에서 공이 평소에 함양한 바를 알 수가 있다. 세자와 대군이 몹시 측은해하면서 옷을 벗어서 시신을 감싸고 전(奠)을 올려 제사지내었다. 부음(訃音)이 본국에 도착하자 공을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고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흐느껴 울었다.
6월에 내관(內官) 박지영(朴枝榮)에게 명하여 강효원과 함께 반구(返柩)하도록 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 장례(葬禮)를 치렀는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조정에서 돌보아 주었으며, 특별히 광주(廣州) 경안(慶安)에 있는 금지 구역인 성묘(成廟)의 태봉(胎峯) 아래 자좌(子坐)의 언덕을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하고, 다시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집에 월름(月廩)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효묘(孝廟)께서 각별히 슬픔을 표하였으며, 일찍이 한 공주(公主)를 지정하여 혼인(婚姻)을 시키려고 하는 뜻을 표하였으나, 뒤에 마침내 요절하였다고 한다. 영종(英宗) 계유년(1753, 영조 29)에 찬성(贊成)을 추증하였다.
공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윤상형(尹商衡)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정유악(鄭維岳)이다. 공이 해를 당할 적에 정유악은 겨우 8세였다. 효종(孝宗) 임진년(1652, 효종 3) 가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자, 상이 불러들여서 만나 보고는 이르기를,
“이 아이가 이와 같이 장성하였구나.”
하면서, 얼굴을 들라고 명하였다. 정유악이 얼굴을 들자, 상이 이르기를,
“너의 모습이 자못 너의 아비와 같다. 너는 더욱더 힘써서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기어이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 이일상(李一相)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의 아비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다가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져들었는데, 사람들이 구하지 못하였으며, 나 역시도 힘이 약해 어떻게 구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또 승지에게 명하기를,
“조정에서 늠록(廩祿)이 끊어지지 않도록 돌보라.”
하고, 또 이르기를,
“고아가 된 아들과 과부가 된 아내가 살아가기가 필시 어려울 것이니, 해조(該曹)에 말해서 내가 내리는 물품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하고는, 드디어 호피(虎皮) 1장, 백금(白金) 1백 냥, 쌀 10석, 포 10필, 종이 2속(束), 붓 5자루, 먹 5자루를 하사하였으며, 이어 술과 음식을 하사하니, 이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다음 해에 정유악을 특별히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하였다.
현종(顯宗) 정미년(1667, 현종 8)에 공의 어머니 서 부인(徐夫人)이 죽자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해 주도록 명하였다. 세 조정에서 돌보아 준 은전(恩典)이 지극하고도 극진하였는바, 공은 이에 유감이 없게 되었다.
아, 당시의 일에 몹시 개탄스럽고 한스러운 것이 있다. 박로는 비록 자기 말을 번복하였으나, 여러 관원들은 모두 그 모의에 참여하였은즉, 어찌하여 공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서서 본 채 구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세자가 이미 공에게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이라고 명하였는데도 공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죄를 뒤집어썼으니, 참으로 어질었다. 여러 관원들이 청 나라 관아로 가서 공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하였던 것은 무엇 때문이며, 또 청 나라 사람들이 자문을 보내면서 역시 두 역적을 의심하였는데, 박로가 치계(馳啓)할 즈음에 미쳐서 시강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째서인가. 조정에서 회자(回咨)하면서도 역시 말하기를,
“두 역적이 모두 본국의 천예(賤隷)로 임금을 배반한 채 도리어 물어뜯으면서 본국을 침해함이 끝이 없다. 그러나 다만 대국(大國)의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아뢰어 진달드리고자 하면서도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다가 장독을 깰까 걱정스러워서 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모두 다 말하겠다.”
하면서, 그들의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짓을 다 말하고, 또 이런 뜻으로 청 나라 황제에게 상주하였다면, 두 역적의 머리가 그 즉시 심양(瀋陽)의 시장 바닥에 내걸렸을 것이다. 재상 최명길은 이런 의리를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아첨하여 굽신거리기만 일삼으면서 박로와 더불어 부화뇌동하여 마침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처형당하고 말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대저 예로부터 약소 국가는 부득불 대국을 섬기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를 당해서는 번번이 간사한 자들이 적에게 빌붙어서 본국을 협박하는 경우가 많았는바,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한 뒤 우리 나라 고려 말기의 일을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평상시에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법을 만들기를, “본국 사람으로 적의 위세를 끼고 본국을 해치는 자는 먼저 본인을 참수한 뒤 그의 종족(宗族)들을 처형하고, 조상들의 묘를 파헤친 다음 사유를 갖추어서 대국에 보고한다.”고 하면, 역시 조금은 그런 짓을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이 악인(惡人)을 미워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니, 대국의 입장에 있는 자도 또한 어찌 반적(叛賊)을 용서해 주어 한 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잃는 짓을 하겠는가. 그런데 매번 이와 같이 하지는 못한 채 한갓 굽신거리며 섬기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국사를 도모하는 자들은 마땅히 이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강효원은 일개 보잘것없는 소리(小吏)로서 능히 죽음도 겁내지 않은 채 쟁집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당시의 시강원 관원들과 비교해 볼 때 어질고 어리석음이 과연 어떠한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말하기를,
“사대부들이 아전만도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말하기를,
“저 금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쓴 자는 개[狗]도 그가 먹다 남긴 것은 먹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말하기를,
“어떤 한 재상이 정명수의 심복이 되어 임금을 억누르고 역적을 도왔으니, 후세 사람들의 붓과 혀를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악은 뒤에 병오년(1666, 현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정사충(鄭思忠)과 정사효(鄭思孝) 두 아들을 두었는데, 정사충은 진사(進士)가 되었고 정사효는 1697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及第)하였다.
강효원은 죽었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는데, 인조(仁祖)께서 그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겨 땅을 잘 가려서 안장(安葬)하게 하였고, 어미와 아내에게 월름(月廩)으로 쌀 6말[斗], 조기[石魚] 3속(束)을 종신토록 지급하게 하였으며, 어미와 아내의 장사 때에는 관에서 장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급해 주었다. 강후정(姜厚精)과 강이정(姜二精)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천(私賤)이었으므로 상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천(公賤) 2구(口)로 강후정과 그의 아들 강차석(姜次碩)을 속(贖)하게 하였다. 그 뒤에 강효원에게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였다.
진사공(進士公) 정사충(鄭思忠)의 증손인 정이원(鄭履元)이 그의 내종(內從)인 한경탁(韓儆鐸) 군과 함께 나에게 와서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공의 집안은 세화(世禍)에 걸려들어 고아와 과부가 줄지어 나온 탓에 문헌(文獻)이 모두 산일(散逸)되어서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지금 단지 고산 윤선도, 우암 송시열, 동명 정두경 세 분이 찬(撰)한 비명(碑銘)과 강효원의 가장(家狀) 및 믿을 만한 야사(野史)의 기록을 두루 찾아내어 병을 무릅쓰고 붓을 들어서 글을 지어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채택해 주기를 기다린다.
금상(今上) 13년인 기유년(1789, 정조 13) 9월 하한(下澣)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산(漢山) 안정복(安鼎福)은 삼가 찬하다.
[주-D001] 선대에……저지른 일 : 선조인 정순붕(鄭順朋)이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인 을사사화와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壁書事件)을 빙자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인 정미사화를 말한다.[주-D002] 건주(建州)의 전역(戰役 : 명(明) 나라가 후금(後金)의 건주(建州)를 칠 때 응원하기 위하여 출정(出征)한 일을 말한다. 이 때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2만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강홍립이 청(淸) 나라에 항복하였다. 정명수는 이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청 나라 말을 배워 우리 나라의 사정을 밀고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통역관으로 나와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주-D003] 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 때 청 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다 척화신(斥和臣)으로 몰려 청 나라에 끌려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말한다.[주-D004] 변방 땅서……있으리라 : 이 부분이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에는 “변방 땅에 떠도는 꿈속 혼이 이웃이 있네.[關塞浮遊夢有隣]”로 되어 있다.[주-D005] 영위 : 정영위(丁令威)를 말한다. 정영위는 요동 사람으로, 신선이 된 뒤 학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곽은 의구하나 인물은 아니로다.”라는 시를 지었다.[주-D006] 비록 곽자의(郭子儀)와……주겠는가 : 이 말은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 악후추봉(岳侯追封)에 나오는 말이다. 곽자의는 당 나라 때의 명장이고, 이임보는 당 나라 때의 간신이다. 언월은 이임보의 당호(堂號)로, 후대에는 권신(權臣)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죽이는 장소의 의미로 쓰였다.[주-D007] 저……자 : 송나라의 간신인 진회(秦檜)를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