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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사맹(思孟),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능성 구씨는 대성(大姓)으로 휘 존유(存裕)는 고려에서 벼슬하였고 연(珚)과 민첨(民瞻)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휘 예(藝)에 이르러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훈봉(勳封)되었다. 아들 영검(榮儉)이 면성군(沔城君)에 습봉(襲封)되었고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문정공(文貞公) 휘 의(禕)를 낳았다. 문정공의 아들은 휘 성로(成老)인데,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성로는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휘 양(楊)을 두었는데,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 치홍(致洪)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증조 휘 수영(壽永)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고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조부 휘 희경(希璟)은 영유 현령(永柔縣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와 능평군(綾平君)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순(淳)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영의정과 능성군(綾城君)에 추증되었으며 종실 의신군(義新君) 징원(澄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 9월 병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어린나이에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부 능평군과 외조부 의신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여러 손자들 중에 이 아이가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성장하자 스스로 알아서 배움에 힘썼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기유년(1549, 명종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신해년(1551)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갑인년(1554) 한성시(漢城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삼장(三塲)의 답지가 모두 우등에 들어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무오년(1558) 대비(大比)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얼마 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천거되어 임명되었고 대교(待敎)로 자리를 옮겼다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 임명되었다.
경신년(1560, 명종15) 가을에 명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 얼마 뒤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고 병조 좌랑, 지제교 겸 시강원사서(知製敎兼侍講院司書)로 옮겨 임명되었다. 신유년(1561)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임술년(1562)에 병조 좌랑, 사간원 헌납(獻納),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다.
계해년(1563) 겨울에 부교리 겸 지평(副校理兼持平)으로서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이 되었다. 갑자년(1564)에 복명(復命)하고 천거되어 이조(吏曹)로 들어가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정랑 겸 교서교리(正郞兼校書校理)로 옮겼다. 의정부(議政府)의 천거로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다. 사인에 임명된 것이 세 번에 이르고 사간에 임명된 것이 두 번에 이른다. 체직되어 예빈시(禮賓寺)와 내섬시(內贍寺)의 정(正)에 임명되었다.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사헌부로 들어가 집의가 되었다.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司藝), 사재감 정(司宰監正)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567) 여름에 명종께서 승하(昇遐)하시자, 빈전도감 도청(殯殿都監都廳)에 차출되었다. 일을 마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겨울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천조(天朝)의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왔을 때 도사 영위사(都司迎慰使)로 차출되어 서로(西路 평안도와 황해도)를 왕래하였으나 향관(享官)에 참여하지 않은 일에 연좌되어 벼슬자리에서 떨어졌다. 서용되어 다시 승정원으로 들어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기사년(1569) 여름에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함께 교체되어 호조 참의(户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선조(宣祖)가 처음 즉위했을 때라 해조(該曹)에서 성태(聖胎)를 찾아 춘천(春川) 지역에 자리를 골라 묻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옛 무덤을 만나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 지역에 자리를 잡아 막 터를 닦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마침 작은 항아리가 나왔다. 혹자가 또 옛 무덤인가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곳은 정혈(正穴)이 아니요, 또한 발견된 것도 하나의 작은 그릇일 뿐이니 이것 때문에 갑자기 대역(大役)을 멈춰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중론이 마침내 정해졌다. 경오년(1570, 선조3) 봄에 사헌부에서 이 소식을 듣고 공을 불경(不敬)하다고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다른 산으로 다시 터를 잡자, 이를 논하는 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금 있다가 서용되었는데, 어버이 봉양을 청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었다.
임신년(1572)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해년(1575) 봄에 상기를 마치고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임기가 다하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병자년(1576) 가을에 하지사(賀至使)로 연경에 갔다. 정축년(1577) 가을에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기묘년(1579) 여름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경진년(1580)에 체직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신사년(1581)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으나 권력을 잡은 자의 뜻을 거스르고 유언비어에 휘말려 파직되었다. 임오년(1582)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다. 갑신년(1584) 겨울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을유년(1585) 가을에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586) 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기축년(1589) 봄에 판결사(判決事)로 있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경인년(1590) 여름에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병조 참판에 특배(特拜)되었다.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임진년(1592) 봄에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우윤 겸 동지의금부사(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5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여 공이 평양 행조(行朝)에 따라갔을 때 겸 도총부부총관(兼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다. 6월에 왕명을 받들어 왕자를 모시고 산간 지대에 있는 군(郡)으로 피란하였다. 7월에 의주 행재소에 도착하여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왕자를 보호하느라 외방(外方)에서 오래 수고했다는 이유로 자급을 뛰어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겸 지경연사(兼知經筵事)에 올랐고 행 참판(行參判)이 되었다.
갑오년(1594) 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고 중전을 호위하는 재신으로 차출되어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을미년(1595)에 중전이 환도(還都)하자,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신년(1596) 가을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서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옥사를 추국(推鞫)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정유년(1597) 가을에 왕명을 받들어 왕자와 후궁을 모시고 성천(成川)으로 피란하였다. 무술년(1598) 봄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조정으로 돌아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경자년(1600) 6월에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고 그로 인하여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신축년(1601) 봄에 이조 판서가 되었고 역적 길운절(吉雲節)의 옥사를 국문(鞫問)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겨울에 좌찬성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임인년(1602) 봄에 공의 장자 능해공(綾海公)이 당화(黨禍)에 휘말려 유배되었으므로 공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서반(西班)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또 지경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얼마 후 판중추부사까지 아울러 사직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서반으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가례도감 당상(嘉禮都監堂上)으로 차출되었으니 바로 우리 대왕대비께서 정위(正位)하실 때이다.
계묘년(1603) 조정에서 기로소(耆老所)를 부활하자, 공은 찬성(贊成) 최황(崔滉), 지사(知事) 이제민(李齊閔)과 함께 세 사람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주상께서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여 영화롭게 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 2월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공은 평소 산증(疝症)을 앓았는데, 이때에 한창 발동하였다. 같은 해 3월에 의정공(議政公)의 휘일(諱日)이라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재숙(齋宿)하고 발을 씻자, 자손들이 서로 뵙고 번갈아 간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제사를 마친 뒤에 병이 났는데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이 병 때문에 세상을 떠났으니 4월 2일 임진일이었다. 향년 74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선조께서 조회를 폐하시고 한결같이 전례(典禮)에 따라 부제(賻祭)하셨다. 이 해 6월 12일 경인일에 양주(楊州) 치소 동쪽 군장리(群場里)의 팔곡산(八谷山)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자리를 잡아 장사 지냈으니 선영에 모신 것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간략하고 중후하여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정도(正道)를 따르는 데에 밝고 우러러 사모하기를 돈독히 하여 한 시대의 석유(碩儒)인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등이 모두 허여(許與)하였으며 시종 허물이 없이 지냈다.
이량(李樑)이 권력을 잡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으나 일체 발을 붙이지 않았다. 계해년(1563, 명종18) 봄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謁聖)하시고 인재를 뽑을 때 그 아들 정빈(廷賓)이 1등으로 급제하였다. 합격자를 호명하여 먼저 들어가면 온 조정의 신하들이 후배(後拜)가 되고 친구들이 뒤에서 절하는 것은 예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공은 그 자리에서 홀(笏)을 단정히 잡은 채 침착하고 차분하여 망동하지 않았다. 축하연을 베푼 자리에 진신(搢紳)들이 모두 모였는데, 이량이 공을 간곡히 초청하여 공이 처음에는 가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았다.
공은 스스로 청운에 올랐고 남의 추천을 빌리지 않았다. 중년에는 배척을 당한 것이 거의 일기(一紀 12년)에 가까웠으나 여전히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찍이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전랑(銓郞)을 맡았을 때 세정(世情)을 충분히 경험했는데, 비록 명류(名流)로 이름난 사람이라도 영진(榮進)의 길에 대한 뜻을 끊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라고 하였다. 공의 지조가 확고하였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전후로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일찍이 피차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인재를 수습하기에 힘썼다. 무릇 해국(該局)에서는 공무에 임하여 공경하고 근실했으며 조용히 정밀하기를 힘썼다.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있을 때 그 지역에 목장이 있었다. 상소하여 감목관(監牧官)을 둘 것을 청하였는데, 그 규정이 매우 잘 갖추어져서 지금까지도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 가례도감 당상(嘉禮都監堂上)에 차출되었을 때 연세가 이미 70세가 넘었으나 직무를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아서 동료들이 칭송하였다. 공은 이미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구차히 시류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면 비록 사람들이 모두 버린 자라도 초심을 바꾸지 않고 반드시 신의(信義)를 우선하여 형적(形跡)의 혐의를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공은 젊어서부터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재산이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아 종신토록 장원(莊園)이 없었으니 자손들은 녹을 받아 먹여 살렸다. 세상의 성색(聲色)과 기호(嗜好)에 대해서는 담담하여 한결같이 연연하지 않았고 오직 경서와 역사서로 즐거움을 삼고 시를 읊조리면서 회포를 풀었다. 만년에는 정신을 집중하여 《주역》을 읽었는데, 날마다 과정이 있어서 비록 밤이라도 책을 놓지 않았다.
평소에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천박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태만한 용모를 사체(四體)에 드러내지 않았다. 아랫사람 대하기를 엄숙하게 하였고 뭇사람 대하기를 온화하게 하였다. 비록 천민(賤民)이나 어린 사람이라도 대하기를 신의와 후한 덕으로 하였고 일찍이 안색과 말을 오만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남들도 또한 감히 함부로 하지 않았다. 비록 소인들이 한 때에 지향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업신여겼으나 또한 감히 추악하게 비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모두들 칭송하여 덕성과 명망이 높은 노성(老成)한 분이라고 하였으니 남들이 복종하는 것은 대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공은 20세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항상 종천지통(終天之痛)을 품고 날을 아끼는 정성을 더욱 간절히 하여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 항상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을까 걱정하였다. 전후로 두 상을 당해서 3년씩 시묘살이를 하였고 조상을 받듦에 예를 다하고자 하였으니 제사를 행함에 반드시 공경을 다하여 질병이 아니면 일찍이 남들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동성(同姓)에게는 돈독히 하였고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을 더욱 구휼하여 힘을 다해 보살폈으며 혼인할 때가 되면 살 곳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모두 세 읍의 수령을 지냈고 다섯 차례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진실하고 꾸밈이 없어 겉을 꾸미고 장식하지 않았으므로 문득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였다. 만년에 비록 왕실과 혼인을 맺었으나 한 가지 일도 간여함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끝내 세간의 의논에 지적을 받지 않았으니 이 또한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부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사대부 집의 상례를 보니 혹 시신을 안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잡아끌고 울부짖기를 예에 지나치게 하는 부인이 있었소. 그러면 문득 죽은 사람이 지나치게 부인을 사랑했다고 의심할 것이니 내가 늙어 장차 죽게 되면 부인은 삼가 이런 행동으로 내게 누를 끼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사리를 알고 마무리를 삼감이 또한 이와 같았다.
시문을 지음에 힘써 전아(典雅)함을 위주로 하여 화려하거나 까다롭고 특이한 문사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시험의 합격자를 결정할 때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칭찬하는 자가 말하기를 “비록 문병(文柄)을 주관한다고 해도 마땅히 동배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다. 함께 시문을 주고받으며 왕복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말없이 스스로 감상하였으므로 세상에서도 아는 자가 적었다. 저서로 《팔곡난고(八谷亂稿)》 약간 권(卷)이 있다.
조정에 선 뒤로 50년 동안 말로써 드러내고 행동으로 시행한 것 중에 후세에 드리울 만한 것이 틀림없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난리를 겪은 나머지 문적(文跡)을 징험할 수 없고 가승(家乘)에 실려 있는 것 중에도 탈루(脫漏)된 것이 많아서 감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대략을 간략하게 진술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초취부인(初娶婦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바로 별제(別提) 극공(克恭)의 딸이다. 후취부인(後娶婦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화국(華國)의 딸이요, 기묘(己卯) 명현이고 이조 판서이며 시호가 문절공(文節公)인 상(鏛)의 손녀이다.
4남 6녀를 두었다. 장남 성(宬)은 을유년(1585, 선조18) 문과에 급제하여 통현직(通顯職)을 역임했으며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능해군(綾海君)에 봉해졌다. 차남은 횡(宖)인데, 공의 백씨(伯氏) 능원위(綾原尉)가 후사가 없어 횡을 후사로 삼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삼남 용(容)은 사헌부 감찰로 재주의 명성이 있었으나 또한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남 굉(宏)은 무신년(1608, 선조41) 무과에 급제하였고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지금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다.
장녀는 현감 심엄(沈㤿)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현령 홍희(洪憙)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판관(判官) 권유남(權裕男)에게 시집갔다. 사녀는 좌랑(佐郞) 김덕망(金德望)에게 시집갔다. 오녀는 바로 계운궁(啓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모(某)의 배필이며 실로 우리 성상(聖上 인조(仁祖))을 낳으신 분이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이 호를 받았다. 육녀는 이박(李璞)에게 시집갔다.
성의 초취부인은 별제(別提) 정억령(鄭億齡)의 딸로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인기(仁基)는 배천 군수(白川郡守)이다. 차남 인후(仁垕)는 계묘년(1603, 선조36) 무과에 급제하였고 정사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삼남 인학(仁壆)은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이다. 장녀는 종실(宗室) 풍해군(豐海君) 호(浩)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찰방(察訪) 유충걸(柳忠傑)에게 시집갔다. 후취부인은 정랑(正郞) 이갱(李鏗)의 딸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진사 박린(朴潾)에게 시집갔다.
횡은 주부(主簿) 신사정(申士楨)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인후를 후사로 삼았다. 용은 찰방 안경사(安景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인중(仁重)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이고 딸은 진사 김신(金愼)에게 시집갔다. 굉은 사의(司議) 조정(趙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인기(仁墍)는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정사 공신에 참여하였다. 장녀는 별좌(別坐) 이입신(李立身)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유구(柳䪷)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정사 공신에 참여하였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서출로 아들 셋을 두었다.
심엄은 7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광세(光世)는 홍문관 응교이다. 차남 정세(挺世)는 인천 현감이다. 삼남 명세(命世)는 또한 정사 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다. 사남 장세(長世)는 의금부 도사이다. 오남은 안세(安世)이다. 육남은 필세(弼世)이다. 칠남은 희세(熙世)로 진사이다. 장녀는 유준(柳儁)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성여용(成汝容)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대사간 이식(李植)에게 시집갔다. 사녀는 이승형(李承亨)에게 시집갔다.
홍희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진도(振道)는 남양군(南陽君)이다. 차남 진문(振文)은 장성 현감(長城縣監)으로 아울러 정사 공신에 녹훈되었다. 삼남은 진례(振禮)이다. 딸은 전 집의(前執義) 이형원(李馨遠)에게 시집갔다. 권유남은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극길(克吉)은 생원(生員)이다. 딸은 윤홍필(尹弘弼)에게 시집갔다.
김덕망은 5남 5녀를 낳았다. 장남 자중(自重)은 진사이다. 차남 자회(自晦)는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이다. 삼남은 자남(自南)이다. 사남 자구(自久)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오남은 자수(自粹)이다. 장녀는 현감 이엄(李儼)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진사 황시중(黃是中)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박상(朴湘)에게 시집갔다. 사녀는 최문오(崔文澳)에게 시집갔다. 오녀는 박문도(朴文度)에게 시집갔다.
우리 전하께서는 중씨(仲氏)와 계씨(季氏)가 있으니 능원군(綾原君) 보(俌)와 능창군(綾昌君) 전(佺)이다. 전하께서는 동궁과 세 대군, 아(我)와 요(㴭)와 곤(滾)을 낳으셨다. 이박(李璞)은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생원 정기풍(鄭基豐)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진사 윤의지(尹誼之)에게 시집갔다.
공은 일찍이 광국 평난 원종공신(光國平難原從功臣)에 참여하였고 갑진년(1604, 선조37) 가을에 호성 청난 원종공신(扈聖淸難原從功臣)에 추록(追錄)되었다. 장남 성이 호성 공신에 녹훈되었기 때문에 추은(推恩)되어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으로 추증되었는데, 사남 굉때문에 추영(追榮)되어 병의(秉義) 두 자가 가증(加贈)되었다.
인기(仁基)는 3남 3녀를 낳았다. 인후는 1녀를 낳았다. 인학은 3녀를 낳았다. 풍해군은 7남 2녀를 낳았다. 유충걸은 1남을 낳았다. 박린은 1남 2녀를 낳았다. 인중은 1남 2녀를 낳았다. 김신은 3남 1녀를 낳았다. 인기(仁墍)는 1남을 낳았다. 유구는 2남 3녀를 낳았다. 심광세는 4남 2녀를 낳았다. 정세는 1남 1녀를 낳았다. 명세는 1남을 낳았다. 장세는 1녀를 낳았다. 희세는 2녀를 낳았다. 유준은 1남 1녀를 낳았다. 성여용은 1남 1녀를 낳았다. 이식은 3남 3녀를 낳았다. 홍진도는 1남을 낳았다. 진문은 2녀를 낳았다. 진례는 1남 1녀를 낳았다. 이형원은 1남 2녀를 낳았다. 윤홍필은 아들 딸을 낳았다. 김자중은 2남을 낳았다. 자남은 1녀를 낳았다. 이엄은 2녀를 낳았다. 윤의지는 2남을 낳았다. 내외의 현손이 모두 약간 명이 있다. 공의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여 고금에 짝할 이가 없을 정도로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선을 쌓으면 남은 경사가 있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니겠는가. 삼가 행장을 짓는다.
[주-D001] 약관(弱冠)의 …… 합격하였다 : 구사맹은 1549년(명종4) 진사시에서 19세의 나이로 3등 45위에 합격하였다.[주-D002] 한성시(漢城試)에서 …… 자자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에는 한성시와 향시(鄕試)가 있었다. 복시(覆試)는 회시(會試)라고도 하며 예조에서 실시하였다. 그런데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와 복시에는 초장(初場)과 종장(終場) 두 차례의 시험이 있었다.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삼장(三場)은 원래 대과(大科)의 초시와 복시에서 초장ㆍ중장(中場)ㆍ종장의 3단계로 나누어 실시한 시험을 말한다. 《조화태 외, 교육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9》 여기서는 구사맹이 대과에 응시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으므로 한성시의 초장ㆍ종장과 복시의 초장ㆍ종장 중에서 세 차례의 시험 성적이 우수했던 것으로 보인다.[주-D003] 대비(大比) : 3년마다 현능(賢能)한 사람을 등용하는 시험 방법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향대부(鄕大夫)〉에 “3년이 되면 크게 과거를 보여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사하여 현능한 자를 일으킨다.” 하였다.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과거를 대비과(大比科)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실행하였고 식년과(式年科)라 칭하였다. 《大典會通 禮典 諸科》[주-D004] 천조(天朝)의 …… 때 : 1568년(선조1) 명나라 목종(穆宗)이 태감(太監) 장조(張朝)와 행인(行人) 구희직(歐希稷)을 보내 제전(祭奠)과 시호(諡號) 및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大東野乘 歷代要覽 隆慶》[주-D005] 성태(聖胎)를 찾아 : 《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 기사에 “상이 즉위하였을 때 성태를 구례(舊例)에 의하여 좋은 자리를 골라 묻어야 한다는 조정 논의가 있어 잠저(潛邸)를 뒤져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찾아내었다.”라고 하였다.[주-D006] 다른 …… 여겼다 : 《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 기사에 “대신이 다시 깨끗한 자리를 골라야 한다고 건청(建請)하여 임천(林川)에 묻게 되었다. 당시 굶주린 백성들이 돌을 운반하는 데 동원되어 성태 하나를 묻느라 그 피해가 3개 도시에 미쳤으므로 식자들이 개탄하였다.” 하였다.[주-D007] 기축년 …… 나갔다 : 판결사(判決事)는 공사(公私) 노비 문서의 관리와 노비 소송을 맡아보는 장례원(掌隷院)의 정3품 관리이다. 구사맹은 판결사의 임무를 이행하다가 1589년(선조22)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宣祖修正實錄 22年 1月 1日》[주-D008] 6월에 …… 피란하였다 : 《선조실록》 25년 5월 3일 기사에 “유홍(兪泓)과 이항복(李恒福)을 시켜 왕자 신성군(信成君)과 정원군(定遠君)을 모시고 평안도로 가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구사맹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주-D009] 능해공(綾海公)이 …… 유배되었으므로 : 능해공은 구성(具宬, 1558~1618)으로, 본관은 능성, 자는 원유(元裕), 호는 초당(草塘),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602년(선조35)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기축옥사 문제를 다시 거론함에 따라 홍주(洪州)로 유배되었다. 1604년에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주-D010] 바로 …… 때이다 : 1600년 6월 27일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가례(嘉禮)를 올린 때를 말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이 없이 승하하자, 선조는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았다. 당시 선조는 50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주-D011] 최황(崔滉) : 1529~160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담(月潭)이다. 평난 공신(平難功臣),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각각 3등으로 녹훈되었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에는 평양까지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왕비와 세자빈을 배종(陪從)하여 희천에 피란하였다.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왕과 함께 환도하여 좌찬성(左贊成),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주-D012] 이제민(李齊閔) : 1528~160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은(景誾), 호는 서간(西澗)이다. 이조 정랑, 양주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대사간, 대사헌을 맡아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그 후 형조 판서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자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주-D013] 산증(疝症) : 생식기와 고환이 붓고 아픈 병증으로 아랫배가 땅기며 통증이 있고 소변과 대변이 막히기도 한다.[주-D014] 홍인우(洪仁祐) : 1515~1554.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길(應吉), 호는 경재(敬齋)ㆍ치재(耻齋)이다. 서경덕(徐敬德)과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노수신(盧守愼), 김안국(金安國) 등 당대 명사들과의 학문적인 교류가 많았다. 저서로 《치재집(恥齋集)》, 《관동일록(關東日錄)》이 있다.[주-D015] 기대승(奇大升) :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쟁하였다. 저서로 《고봉집(高峯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이 있다.[주-D016] 신응시(辛應時) : 1532~1585.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鹿),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배웠고 성혼(成渾),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선조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주문문례(朱門問禮)》를 간행하였다.[주-D017] 구봉령(具鳳齡) : 1526~1586. 본관은 능성,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이황의 제자이다.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과 비견되었고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백담집(柏潭集)》이 있다.[주-D018] 이량(李樑) : 1519~156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거(公擧)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으로, 명종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으며 비리를 저질렀다. 1563년(명종18)에 사림을 숙청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심의겸(沈義謙)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기대항(奇大恒)에게 탄핵받고 강계(江界)에 유배된 뒤 죽었다.[주-D019] 계해년 …… 급제하였다 : 《후광세첩(厚光世牒)》 권2 〈동서당화록(東西黨禍錄)〉에 “이량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은 어리석고 우둔하여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계해년의 알성시(謁聖試)에 장원(壯元)으로 뽑히자, 중외(中外)에서 쑥덕거리며 말하기를 ‘술책을 써서 장원이 되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20] 후배(後拜) : 과거 급제자들이 왕에게 사은(謝恩)할 때 함께 인사드리는 사람을 말한다. 신은후배인(新恩後拜人)이라고도 하였다.[주-D021] 스스로 청운에 올랐고 : 자신의 힘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음을 뜻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범수(范睢)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섬겼는데, 제(齊)나라와의 관계로 수가에게 오해를 받아 모진 매를 맞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간신히 도망쳐 진(秦)나라로 가서 마침내 정승이 되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니 보화(寶貨)가 왕실(王室)보다 많았다. 수가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범수를 보고 “나는 그대가 스스로 청운의 위에 오를 줄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주-D022] 남의 추천 : 취허(吹噓)는 입으로 불어 바람을 일으켜서 깃털을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남을 칭찬하고 장려하여 추천함을 이른다. 《송서(宋書)》 권74 〈심유지열전(沈攸之列傳)〉에 “날개로 알을 품어 주듯 입으로 불어 관작에 오르게 되었다.[卵翼吹噓, 得升官秩.]”라고 하였으며 《위서(魏書)》 권64 〈곽조열전(郭祚列傳)〉에 “주상이 이충의 취허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主上直信李冲吹噓之說]”라고 하였다.[주-D023] 천민(賤民) : 고대 중국에서 백성들을 열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여대(輿儓)는 그 가운데 가장 아래의 두 등급에 속하는 천민 계급이다.[주-D024] 항상 …… 하여 : 구사맹이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가슴에 품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는 말이다. 종천지통(終天之痛)은 하늘이 끝날 때까지의 비통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가리킨다. 날을 아끼는 정성[愛日之誠]은 부모를 봉양하는 데 날과 시간을 아껴 조금도 태만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양웅(揚雄)이 “오래도록 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므로 효자는 날을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法言 孝至》 여기서는 어머니를 모시는 정성이 지극함을 가리킨다.[주-D025]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 두려워하면서 :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고 한 말을 원용하였다.[주-D026] 외직으로 …… 없어 : 구사맹이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진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말이다. 구사맹은 1570년(선조3)에 남원 부사(南原府使), 1582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 1586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며 1569년에 황해도 관찰사, 1575년에 충청도 관찰사, 1579년에 전라도 관찰사, 1589년에 강원도 관찰사, 1591년에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곤핍무화(悃愊無華)는 진실하고 꾸밈이 없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권3 〈장제기(章帝紀)〉에 “안온하고 조용한 관리는 진실하고 꾸밈이 없어 일계는 부족할지라도 월계는 항상 유여하다.[安靜之吏, 悃愊無華, 日計不足, 月計有餘.]”라고 하였다.[주-D027] 만년에 …… 맺었으나 : 구사맹의 다섯째 딸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구씨(具氏)가 선조와 인빈(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원군(定遠君)과 결혼한 것을 말한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연주군부인은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주-D028] 상(鏛) : 신상(申鏛, 1480~1530)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용(大用), 호는 위암(韋庵),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김정(金淨), 김구(金球) 등을 비롯한 사림파 학자들의 등용에 크게 노력하였다. 사림파와 훈구 세력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양파의 중재에 힘썼고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죄를 입자 그들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다.[주-D029] 능원위(綾原尉) : 구사안(具思顔, 1523~1562)으로, 본관은 능성, 자는 중우(仲愚)이다. 1533년(중종28) 중종의 셋째 딸 효순공주(孝順公主)를 맞아 능원위로 봉해졌으나 얼마 뒤 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국법을 어기고 다시 결혼하였기 때문에 은권(恩眷)을 빼앗겼다. 그 뒤 1545년(인종1) 위사 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광덕대부(光德大夫)에 올랐으며, 1553년(명종8) 증조부의 훈봉을 이어받아 능원군(綾原君)이 되었다.[주-D030] 용(容) : 구용(具容, 1569~1601)으로, 본관은 능성, 자는 대수(大受), 호는 죽창(竹窓)ㆍ죽수(竹樹)ㆍ저도(楮島)이다. 저서로 《죽창유고(竹窓遺稿)》 가 있다. 시를 잘 지어 명성이 높았으며 석주(石洲) 권필(權蹕),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주-D031] 굉(宏) : 구굉(具宏, 1577~1642)으로, 본관은 능성,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강화(江華)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하였다.[주-D032] 심엄(沈㤿) : 1563~1609.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상지(尙志)이다.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냈다.[주-D033]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 저본(底本)에는 ‘聯珠府夫人’으로 되어 있는데, 《인조실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주-D034] 인기(仁基) : 구인기(具仁基, 1576~1643)로, 본관은 능성, 자는 백공(伯鞏), 호는 죽은(竹隱)이다.[주-D035] 인후(仁垕) : 구인후(具仁垕, 1578~1658)로, 본관은 능성,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2등으로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1644년(인조22)에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사건을 적발하여 처리한 공으로 영국 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36] 신사정(申士楨) : 1546~1593.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 1530~1584)이고 어머니는 중종(中宗)의 넷째 딸 경현공주(敬顯公主, 1530~1584)이다.[주-D037] 인기(仁墍) : 구인기(具仁墍, 1597~1676)로, 본관은 능성, 자는 계의(季依)이다. 인조반정 후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능풍부원군(綾豐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38] 이식(李植) :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 《택당집(澤堂集)》이 있다.[주-D039] 전하께서는 …… 낳으셨다 : 인조는 인열왕후(仁烈王后)와의 사이에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요(㴭)와 용성대군 곤(滾)을 낳았다. 봉림대군은 훗날의 효종으로 휘(諱)는 호(淏)이다. 아(我)라고 한 것은 미상이다.[주-D040] 장남 …… 가증(加贈)되었다 : 구사맹은 장남 구성이 호성 공신 2등에 녹훈되었기 때문에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이 되었는데, 다시 사남 구굉이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므로 병의(秉義)라는 두 글자가 첨가되어 순충적덕병의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이 되었음을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