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전 원어 공부와 더불어 데이비드 리트와(M. David Litwa)의 책을 반복해서 찬찬히 읽고 있다. N. T. 라이트, 도미닉 크로산, 마커스 보그 같은 거장들이 1세기 유대인과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예수를 읽어냈다면, 리트화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고대인들이 신화와 역사를 다루었던 문학적·수사학적 안목”을 파헤친다.
글을 읽으며 처음에는 다소 낯설고 아득한 ‘지적 멀미’를 느꼈다. 하지만 텍스트를 두 번, 세 번 반복해 거닐고, 선배 학자들의 견해를 곁에 두고 함께 묵상하다 보니 비로소 고대 텍스트가 가진 다면적인 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 고대인의 VFX: 신화적 상상력으로 역사라는 스크린에 진리를 렌더링하다
근대 이후의 오만한 통념은 “고대인들은 미신에 빠져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사실로 믿었다”고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리트와의 지적처럼, 고대인들은 결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화(Mythos)와 역사(Historia)의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깨달은 우주적·영적 진리(Truth)를 지상이라는 사실적 시공간(Fact) 속에 안착시키는 탁월한 수사학적 기술자들이었다.
오늘날 영화감독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감독의 철학이나 우주적 비전을 실감 나게 전달하기 위해 최첨단 VFX(시각 효과)를 동원하듯, 고대의 역사가들과 복음서 저자들도 ‘당대 최고의 VFX 기술’이었던 역사 서술 기법(Historiographical Tropes)을 사용했다.
세부 장소화 (Syntopy): 실제 존재하는 도시, 우물, 성문의 이름을 배치하고
연대기 고정 (Synchronism): 특정 황제나 총독의 치세를 명시하며
절제된 산문체 (Sober Prose): 단정한 산문으로 기록하여 사실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경험한 가장 숭고한 보편적 진리와 가치(Ethos)를 대중의 눈앞에 만져질 듯 가시화하기 위해 이 정교한 수사학적 틀을 사용했던 것이다.
2. 베르길리우스와 루카, 그리고 저마다의 에토스(Ethos)
같은 ‘신화적 역사학’ 기법을 사용했음에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복음서가 다른 길을 간 이유는 그들이 담고자 했던 내면적 기질과 가치관(Ethos)이 달랐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질서와 권력의 신성함을 정당화하는 ‘지배층의 제국 신화’를 렌더링했다면,
복음서 저자들은 로마의 가장 비열한 처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주(Kyrios)로 고백하며, 약자와 변방의 구원을 선포하는 ‘역설적 반전의 서사’를 렌더링했다.
나아가 복음서 안에서도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이 저마다 예수를 다채롭게 그린 이유 역시, 각 저자가 속했던 공동체의 상황과 에토스가 달랐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붓질(Tropos)을 통해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예수의 초상이 완성된 것이다.
3. 해석학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화, 그리고 도그마의 위험
여기서 한 가지 깊은 질문이 남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나 현대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탐구’ 역시, 결국 현대라는 시대정신(Zeitgeist)의 렌즈를 통해 예수를 다시 재구성해 낸 ‘현대판 신화화(Re-mythologization)’가 아닐까?
실제로 과거를 파헤친 많은 연구자가 고대 예수를 찾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우물 밑바닥에 비친 것은 자기 시대의 얼굴이었을 때가 많았다.
문자나 특정한 학설을 절대화하고 정답이라 고집하는 순간, 진리를 가리키던 풍부한 상징은 타인을 배척하는 ‘배타적 도그마’의 철창이 되고 만다.
4. 길을 잃은 곳에서 다시 발견한 본질
학자들의 서로 다른 견해 속에서 잠시 길을 잃은 듯한 아득함이 들 때,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사람의 선택과 행동 뒤에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성향이 숨어 있듯, 모든 글 뒤에는 저자의 내면적 작동 원리와 에토스(Ethos)가 숨 쉬고 있다.
톰 라이트, 크로산, 보그, 리트와 같은 선배 학자들은 정답을 강요하는 벽이 아니라, 그 내적 원리를 다각도로 비춰주는 ‘유용한 돋보기들’이었던 셈이다.
내가 원어를 직접 공부하고 고전을 읽는 이유는, 특정 도그마에 포박되기 위함이 아니다. 고대인들이 쳐놓은 수사학적 장막을 겸손하게 걷어내고, 그들이 그 신화적 역사라는 유연한 그릇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인류 보편의 영원한 진리’와 직접 호흡하기 위함이다.
지적인 멀미를 지나 텍스트를 천천히 거니는 이 시간, 고대인의 숨결과 현대의 질문이 만나는 이 자리가 참 감사하고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