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구 부채시 2인전
1. 이태규 시 「422 하늘과 바다」 「274 봄의 눈, 겨울의 눈」
422 하늘과 바다
바다는 아내가 물고기처럼 헤엄치던 곳이고
하늘은 남편이 새처럼 날던 곳이다
274 봄의 눈, 겨울의 눈
봄의 눈은 봄을 보고
겨울의 눈은 겨울을 본다
2. 나고음 시「100일 간의 향기」
100일 간의 향기
높은 키,
올려다보니 위에서 뚝뚝
향기가 떨어진다
카셀 도큐멘타 14에서
하나하나 투명 비닐에 싸여 밀봉된
10만 권의 금서로 만든 파르테논 신전을 본다
압도 당할 것만 같은 위용
세계의 지성이 자유와 반항이라는 열매를 매달고
당당히 서 있다
회색 구름뿐인 하늘을 뚫고 싱싱한 나무로 서 있다
아름다운 항의가 자라고 있다
끝없이 우뚝우뚝 서 있는 책나무들을 쓰다듬으며
책의 숲 속을 걸었다
지성이 뿜어내는 100일 간의 향기에 젖었다
≡ 부채시를 다시 시작하며
윤 정 구
방산 선생님의 제안으로 『문학과창작』 2019년 여름호에 최승범, 고창수, 강우식, 박제천, 김여정, 고정애 여섯 분의 부채시를 시작으로 2023년 여름호까지 4년 동안 17회에 걸쳐 90 분의 시를 썼다. 부족한 글씨와 산문을 겁 없이 휘두른 셈이다. 『문학의 창』 이명 주간의 제안으로 다시 연재를 재개하려니 방산 선생님을 비롯하여 최승범, 김여정, 노혜봉, 오탁번, 이섬, 송태옥 등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게 된다. 모두 시를 사랑하고 열심히 쓴 좋은 시인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쁜 놈이 시를 쓰겠나 싶어져서 시인이란 이름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부족한 재주라도 『문학의 창』에 도움이 된다면 세월이 허락할 때까지 성의껏 쓰려 한다. 여섯 개에서 네 개로, 다시 두 개로 줄은 부채라면 큰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다.
이태규 : 기적을 이루는 날
꾸준히 노력하며 나아가다 보면 기적을 이루는 경우가 있다. 이태규 시인의 경우를 통해서 기적을 본다. 제6시집 『허둥지둥』에 270수의 아포리즘을 실어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제7, 제8 시집 『오늘 사랑하라』와 『한 번쯤 미쳐보면 안다』를 동시에 발행하여 명상시 1,000수를 헌꺼번에 발표한 것이다. 시집을 받아본 많은 시인들은 놀랐을 터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건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 그야말로 올해의 사건이다.
이군아/ 예/ 니이 내 죽고나모/ 예/ 내 말 잘 기억했다가/ 예/ 아포리즘 한 권 내거라/ 예/ 삼각지 로타리/ 돌아가신/ 이형기 선생님/ 마지막 그 말씀만 남고/ 내 답변처럼/ 흩어/ 지는/ 음소/ 운소/ 기억/ 약속들
―이형우 「봄날은 간다」 전문
돌아가신 이형기 선생님을 회고하는 이형우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대가들에게조차 명상집을 낸다는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기적을 이루는 날이란 제목은 954번째 아포리즘 시에서 다온 것이다.
“오늘은/ 기적을 이루고 싶은 날이고/ 기적을 이루는 날이고/ 기적을 이룬 날이다”
부채시로는 가장 시적이라 느껴지는 두 수를 골랐다.
봄의 눈은 봄을 보고
겨울의 눈은 겨울을 본다
는 274번의 시와 422번의 시이다. 각각 ’봄의 눈, 겨울의 눈‘과 ’하늘과 바다‘란 제목을 붙였다. 익스큐즈할 때에는 동갑이란 것이 의외로 편리하다.
바다는 아내가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하늘은 남편이 새처럼 날던 곳이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향기롭고 의미 있는 명상시집 한두 권 정도는 캐내리라고 믿는다. 청계산에서 한양을 넘겨다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에게 충분히 그만한 광맥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고음: 시와 도예, 그리고 열정
2017년 <숲속의 시인학교>에서 가진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100일 간의 향기」는 읽을 때마다 공기청정기처럼 신선한 무엇을 느끼게 한다. 카셀은 내게 ‘EIN STEIN, EIN BAUM’이란 캐치프레이즈로 도시 카젤의 녹색 혁명을 이룩한 요젭 보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집트의 왕처럼 금분을 꿀에 개어 바른 얼굴로 죽은 토끼를 안고 작품을 설명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코요테와 전시장 한구석의 우리에서 같이 생활하는 퍼포먼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10만 권의 금서로 쌓아 올린 파르테논 신전을 보며 자유와 반항의 열매를 달고 아름다운 항의가 자라는 나무들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싱그러운가.
‘빗님이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고 숲으로 갔다’로 시작하여 ‘빗방울은 모두 둥근 입을 가졌다’에 이르는 「화담 숲」이나 ‘아직 당도하지 않은 나의 색, 흙과 물과 불의 시간을 통과하여 너에게로 가는 길, 문자향의 길’이라 선언하듯 다짐하는 『그랑드 자트 섬의 오후로 간다』의 시인의 말과 ‘흙을 빚어 벌건 불에 구워 눈물 사발을 만든다’는 「꽃잎 자화상」의 구절들을 보면 ‘한 손에 도예, 한 손에 시’를 들고, 예술을 살아가는 시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도예와 시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둘 중의 어느 것도 놓을 수 없어요”란 답변이 돌아오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도예전과 호평받았던 시집들에 주어진 <한국시문학상> <바움문학상> 등이 그 증거이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하여 유학을 감행한 용기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범인(凡人)의 꿈은 생각에 머물러 백일몽이 되지만 비범한 몇 사람에게는 평생을 바쳐야 할 꿈이자 운명이 된다.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한 뼘이라는 적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