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답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 2023년 1월 1일 주일 예배
본문 / 전도서 12:1-14
할렐루야! 2023년 새해 첫 날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특별히 새해의 첫 날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릴 수 있게 되어 더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희망과 복을 기대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빌기도 하고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를 하며 기대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불신자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나 진짜 복이 무엇인지 또 그 복을 이루는 길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지겹고 힘듭니다. 공부하려는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적당히 대충 하는 아이들도 많고 아예 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의 가장 큰 본분은 학교에 성실하게 출석하여 배우는 겁니다. 어떤 학생이 하루는 학교에 갔다가 이틀은 빠진다면 공부에 관심이 있거나 잘하는 학생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학교를 그런 식으로 다닌다면 어떻겠습니까? 왜 학교에 안 가니? 방을 청소하려고요. 게임을 해야 되요. 친구가 놀러 왔어요. 이런 핑계를 댄다면 다 이유가 있구나 하며 방문을 닫을 부모가 있습니까? 아마 혈압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부모님 뒷목을 잡게 하고는 새해가 되었다고 용돈을 올려달라고 한다면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생각만 해도 뒷골이 뻐근해 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떫거든 시지나 말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자기 주제도 파악을 못하는 겁니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불교에서 49제를 했다는 기사를 언뜻 보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이제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을 믿던지 죽기만 하면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쉴 수 있다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회개하고 거듭나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영원한 세계에서 정말 편히 쉬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예수님께 나와야 하고 나온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로 믿지 않으면 말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만나 마음과 영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고, 천국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갈 자들이 많다고 말입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학교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학생이 공부에 관심이 있는 겁니까? 원서만 내면 오서오라는 대학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곳은 성실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학교를 제 사정에 따라 마음대로 다니면서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것은 자기주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는 학생으로서의 지켜야 할 의무과 도리인 본분이 있습니다. 친구가 놀러왔다고, 영화 보러 간다고 학교에 안 간다면 그 부모는 기가 막혀 네가 무슨 학생이냐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제가 선생도 아닌데 왜 학교와 학생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저는 교회와 성도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행복하다 하시며 정해놓으신 본분이 있는 겁니다. 그 본분대로 살려고 나온 곳이 교회이고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본문대로 사는 사람이 아주 적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적다는 말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대학에 가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어떻게 부자가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땀 흘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고 가끔 그런 행운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는 어떤 요행이나 행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두게 하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 본분을 떠나 사는 자들은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본분대로 사는 자들은 영원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며 어떤 희망과 복을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사람의 본분대로 살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도 복도 없습니다. 사람의 본분대로 사는 자들만이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만이 복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즉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본분이 뭡니까?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인생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 성도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지식으로 그렇다고 인정할 뿐이지 정말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장차 나를 심판대로 부르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렇게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세상에 보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의 본분이 뭔지 배우라고 보낸 것입니다. 사람의 본분, 내가 당연히 따라야 할 도리와 의무,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배우라는 겁니다.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까? 어떻게 내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살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람의 그 본분을 배우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인생을 주시고 세상에 보낸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영혼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믿고 그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을 즉 사람의 본분을 배우는 성도들이 교회에 얼마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드믄 겁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과 생각과 감정과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타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내가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왕 됨과 주인 됨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감정과 정욕과 탐심과 그 욕심과 자아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육신대로 자신을 위해 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한 소리라도 들으면 억울해서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은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말입니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십자가의 진리로 가르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지식은 전달해도 인성을 가르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수업에 방해하는 학생이 있어 훈계를 했더니 선생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 봉변을 당하는 겁니다. 그 분은 얼굴에 상처도 치료해야 되지만 마음의 상처로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겁니다. 수업을 방해하고 떠드는 놈이 있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됐습니다. 성도들이 제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제 멋대로 해도 목사들은 가르치지를 못합니다. 말했다가는 그런 성도들이 많으면 목사가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고 적으면 혼자서 조용히 나가던지 다른 사람을 선동해서 무리를 지어 다른 교회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는 이래도 저래도 말하기가 두려운 겁니다. 이제 목사들은 그저 성도들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고 누구나 들어도 부담 없는 복음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지식과 정보를 파는 장사꾼들이 된 것입니다. 도둑이 들어와도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애완견이 짖지 못하도록 수술하듯이 교회는 이 벙어리 개들에게 목회를 잘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 선팅지에 있는 글을 읽어 본 분도 없을 겁니다. 거기에 교회는 무덤이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성도의 무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세우신 교회에서 내가 하나님이고 주인이라는 그 타락하고 교만한 자아가 죽으러 온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그러나 자기 목숨을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세운 교회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죽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기에 나도 주님과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십자가의 믿음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누구든지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이 아니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기 죄를 대속해주신 그 주님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자신의 자아를 못을 박는 사람은 적은 겁니다. 예배하고 헌금내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말입니다. 자기 자존심이 거슬리고 감정에 상하는 일을 만나면 시퍼렇게 살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몇 십 년을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래 다니고 직분 있고 열심이 있다고 믿음 있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다닐수록 더 고집 세고 더 강퍅하고 더 교만하고 더 미련하고 더 악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한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말씀합니다.
모든 만사에는 때가 있는 겁니다. 90이 된 할머니가 젊었을 때 그만두었던 대학공부를 71년 만에 마치고 졸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할머니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기저귀를 차고 있었으면 90이 아니라 60이어도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습니까? 나이가 90이어도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지혜와 건강이 남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때와 그 기회를 잃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의 때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때가 언제까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2023년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젊다고 인생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은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은 나이 먹고 늙고 힘 빠지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지난주에 말했지 않습니까? 무당도 늙으면 전도가 안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청년의 때는 내 의지와 힘으로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입니다.
바로 지금인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성도들은 자기 의지와 힘이 있을 때는 자기 영혼의 구원에 힘쓰지 않습니다. 오래 살 줄 알고 죽을 때까지 자신을 위해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힘과 의지로 살 수 없는 때가 오면 그때 부랴부랴 이제는 하나님을 찾고 천국 갈 준비를 해야지 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 이렇게 믿다가 내가 생각지 못한 날 덜컥 하나님이 부르시면 나 구원받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내 힘과 의지로 다니며 교회도 나오고 기도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내 힘과 의지로 다닐 수 없어 교회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기도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나는 건강할 때 준비한 믿음으로 구원의 소망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 말입니다.
지금 내 힘과 의지를 사용하여 얼마든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회개할 수 있을 때 열심을 내고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지금 살아있다고 죽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 만날 날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영원히 당할 그 고통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수많은 기회를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을 때 속이 상해서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것도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학교에 안 다니고 공부 지질히 안한 사람들 중에서 돈을 더 잘 버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의 때는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때와 기회에는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목사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성도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답답해서 빨리 그만 두고 싶습니다. 교인들이 많은 목사들은 속 터져서 어떻게 목회하나 궁금합니다. 왜 저렇게 하나님을 섬기나? 왜 저렇게 믿나? 왜 예수님께 마음을 다 드리지 않나? 왜 천국에 목숨을 걸지 않나? 왜 자기 마음대로 대충 믿나? 이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탄식만 나오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내년도 나에게 있겠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올해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지금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본분을 배우지 못하면 내일과 내년은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기회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간이 갈수록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해도 성도들이 듣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네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 말에 순종했더라면 네 입에서 나오는 내 말도 들었을 것이다.
성도들은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과 그 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지 않지만 이 세상의 힘인 돈과 자기 육신의 유익과 건강에 관련된 일에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는 겁니다. 얼마나 미련한 자들입니까? 얼마나 미련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멸망하는 짐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새벽에 믿음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천국에 간 분들도 있고 지금 살아있는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전도사님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적을 겁니다. 그런데 믿음은 저보다 훨씬 귀한 분들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우리교회에 있습니다. 누굴까요? 백경이입니다. 한 번은 이명화 집사님이 밥을 먹고 나가는 백경이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한 겁니다. 제가 여기서 보고 있는데 왜 하기 싫은 것을 시키냐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발걸음은 부엌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그때 마음에 확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백경이는 하기 싫어도 하는구나! 저게 믿음인데. 나도 저걸 본받아야겠다! 그때부터 새벽마다 하나님 저도 백경이처럼 하기 싫어도 하나님이 시키면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게 절대로 쉬운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합니다. 지옥에 간다고 해도 안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목사가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뭘 하라고 하면 합니까? 내가 할 만한 것은 해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 겁니다.
회개하고 거듭났는지가 십자가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성도들이 주여 주여 하며 교회를 수십 년을 다니며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다고 눈물까지 흘려도 막상 심판대 앞에서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다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는 했지만 사실은 자기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원치 않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는 순종은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하지만 마음에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기가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교회에는 이런 성도들이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게 새겨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지금 교회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행하면 이건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 천국은 당연히 맡아놓은 사람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심판대 앞에 서니 누구도, 자기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라 하시고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될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구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열심을 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열심이 없어도 안 되지만 열심만 있다고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부자 청년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저 청년처럼 믿어야 된다고 그래야 복 받는다! 본인도 당연히 천국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서니 웬일입니까? 부족한 자였던 겁니다.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는 선지자 노릇도 안했고, 귀신을 쫓아낼 능력도 권능도 없으니 상관없습니까? 자기 실력으로 1, 2, 3등이 다 떨어졌다면 4, 5등은 해서 뭐합니까?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원하는 열심과 순종은 자기 열심과 순종이 아닙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그 믿음에서 나오는 열심과 순종인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에서 나오는 열심과 순종,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에서 – 죽어야 할 내 죄를 대속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도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라고 가슴을 친 세리가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은 줄 알았던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의 많은 헌금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즉 순종할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이 없이는 사람의 본분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저주를 받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본분대로 살아야 복 있는 자입니다. 나는 복 있는 자입니까?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순종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은 오직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023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와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워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위에 서는 복 된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