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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 빌립보서>의 줄거리 :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이지만 내용은 이런 상황과는 다르게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입니다. 그 하늘 기쁨은 빌립보 교인들을 사도 바울의 평생 동역자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즉 하늘 기쁨으로 인해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평생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한 후원자 되기를 중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을 유지하고 더 크게 하기를 위해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셨습니다.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 빌립보서
(빌립보서 1:1~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는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입니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살펴봤던 에베소서와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와 마찬가지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게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은 빌립보 교회 전체가 사도 바울과 동역자의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빌립보서는 분위기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서신들에는 모두 서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문에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임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로 소개하지는 않고 디모데와 함께 그리스도의 종이라 언급하기만 합니다. 언뜻 지나갈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조금 신경 써서 살펴보면 이러한 언급에 담긴 내용이 상당히 특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사도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교하기 위하여 에베소서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서신을 시작하였고, 갈리디아서 1장 1절에서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에 대한 언급은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특이하게도 빌립보서에는 자신을 사도라 언급하지 않습니다. 결코 무의식중에 깜빡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보서의 특이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5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도움이 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 막바지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시점은 61~63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한편 빌립보 교회는 49~52년까지 이어진 2차 선교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은 사도행전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는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영접하게 되었고, 교회 모임을 위해 자기 집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귀신 들려 점을 치던 여종을 고친 것을 계기로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와 찬양을 하였고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렸음에도 탈옥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보 교회는 세워진 첫날부터 특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에 대한 물질적인 후원입니다. 여기서 첫날이란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자기 집에 영접했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운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곳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러한 기간으로부터 로마 감옥에 갇힌 시점까지도 물질적인 후원을 끊지 않았던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동역자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사도로 소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란 복음 사역을 위해서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동역자는 같은 사도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은 보내진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빌립보라는 지방에 머물며 살던 보통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들 모두를 사도와 같은 동역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 사역을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 사역을 해나가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사도직 수행을 100%라고 본다면 여기서 빌립보 교인들은 20~3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는데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도 몸이 있는 사람이기에 먹어야 했고, 입어야 했고, 잠도 자야 했습니다. 사방을 다니면서 먹고 입고 잠을 자야 하니 필연적으로 경비를 포함한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는 앞장서고 도맡아서 재정적 지원을 해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직 사역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맡은 사도직에는 바울만의 일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맡고 있었던 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내가 너희의 사도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 안에 이미 빌립보 교인들이 차지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까지의 서신에는 각각의 특별함이 있었습니다만 빌립보서 역시도 무척 특이한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재정적 지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어떤 교회에서도 확인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늘 기쁨이 빌립보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빌립보 교인들은 하늘 기쁨을 가졌기에 사도직의 부분을 떠맡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직에 대한 동참과 동역은 기쁨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일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빌립보서의 주제가 나타납니다. 빌립보서는 이 하늘 기쁨을 어떻게 유지해갈 것이며, 더욱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명확하게 드러난 구절이 4장 4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3~6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직 사역에 동참해 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개인적 심정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심정이 다른 서신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유대민족을 향하여 근심하는 심정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후서나 갈라디아서에서도 교회를 위하여 근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서 드러나는 심정은 대조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이 솟아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실한 동역자 관계가 주는 힘입니다.
이 동역자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함께 동역자가 된 상황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과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대로 오직 빌립보 교회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점이 무척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영접하던 날로부터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한편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유럽 지역에 첫 번째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복음의 역사는 소아시아 중심에서 유럽 중심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는 이 전환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대단한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방문한 것에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부르는 꿈을 꾸었고 그리스 반도로 향하게 됩니다. 빌립보는 바로 현재의 그리스 반도 북부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북부도시였습니다.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이 루디아입니다. 이 시점 이후로 사도 바울이 사역하는 모든 장소와 모든 때에 빌립보 교인들은 후원을 통하여 동참하게 됩니다.
6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심에 대해 고린도후서를 참고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1절을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가 빌립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 반도 남부의 아가야 지방에 속한 곳이었습니다.
이어서 2~4절을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헌금하고 구제하는 선교에 참가하는 일을 억지로 떠맡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 자신들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또 5절을 보면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서 선교 후원금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 속에서 이루신 착한 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기쁨이 넘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련이 켜켜이 쌓이고, 재정적인 상황이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은 환경적 차원의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에 대한 실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늘 기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크게 실감될수록 이 세상의 것들이 없어도 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실감이 약할수록 이 세상 것에 대한 필요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실감 정도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인들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 비해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실감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그 기쁨의 표현으로 사도 바울에 대한 끊임없는 후원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기 전까지는 돈 한 푼이 피 한 방울처럼 느껴집니다. 타인을 위해 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많은 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차원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고, 자기 코가 석자라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도울 마음도 생길 수 없었습니다.
한편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보다도 환난의 시련이 많았고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었음에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착한 일, 다시 말해 선하신 일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크게 실감하던 빌립보 교인들은 어떤 교회보다도 가난했으면서도 어떤 교회보다 재정적으로 아량 있고 풍부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처럼 끊임없는 선교 후원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치 한턱내듯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 수행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로 그 하늘 기쁨의 상황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며, 더욱 더 크게 키워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지 빌립보 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기쁨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사도 바울의 사도직 수행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을 사도의 동역자가 되게 만든 하늘의 기쁨을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7절을 보면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였다는 것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이란 복음이 공격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왜 진리이며, 십자가 사건이 왜 구원의 사건인가를 설득하고 변증하고 방어하고 선포하였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이 공격을 받으면 변증하여 지켜내고, 복음을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한 것은 그러한 모든 순간에 빌립보 교회가 함께 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지키고 선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넥타이 선물을 많이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넥타이를 맬 때면 선물해주신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곳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는 참 애틋합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이처럼 살뜰하게 애정이 담긴 관계는 빌립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은 9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심장은 곧 애정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졌고,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애정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하겠다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절실한 관계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들에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며 기뻐합니다. 그러자 가난한 중에도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잉여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내어 사도 바울의 사도직 수행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은 너무나 예쁘고 애틋한 존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바라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기준과 예수님의 인격적 속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알아야 주님을 위해 살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애틋하게 보시는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보며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통해 하늘 기쁨은 유지될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크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온전한 하늘 기쁨의 사람들이 되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함을 담고 빌립보서는 시작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빌립보서를 통하여 빌립보 교인들의 하늘 기쁨을 우리도 받아 누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