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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 아닌 멸절자>의 줄거리 :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종교의 파괴자, 멸절자로 소개합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종교의 필요성을 뿌리로부터 끊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왜냐면 종교란 사람이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술인 반면 예수님의 복음은 실제로 개인이 인격적으로 신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만들어진 가짜 하늘인 종교의 존재 이유를 근절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 아닌 멸절자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사도 바울의 서신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수신자에 대한 언급과 인사도 없으며 곧바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목에서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가 아닌 멸절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무섭고도 조심스럽습니다. 저 또한 기독교 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많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며 종교의 필요성을 뿌리부터 잘라내시는 멸절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신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이 신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으로 느끼고 대하고 가지기를 바라는 이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을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좋아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기쁘기만 하고 행복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요구합니다.
이렇듯 마음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고 땅에 붙어버린 사람들은 신을 부르고 찾기 위해 실제로 신이 계신 하늘을 대신할 영역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나타난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땅에 있는 가짜 하늘입니다. 하늘이 가짜이기에 그 안에 담고 있는 신 또한 가짜이거나 이름뿐인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종교는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을 부르고 찾는 기술입니다. 하늘에 계신 신을 만나려면 마음이 땅을 떠나야 하는데 오히려 땅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신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한 기술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히브리서는 저자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기록 시기는 거의 분명합니다. 기록 시기를 파악함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저자가 히브리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보면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멸절됩니다. 한편 히브리서의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언급들이 등장합니다. 이로부터 히브리서는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한편 13장 23절을 보면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사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언급되는 반면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히브리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한 67년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생전에 디모데가 감옥에 갇혔다는 언급은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 바울이 순교한 67년 이후에 디모데는 수감되었고 히브리서도 이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기록 연대는 67~70년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67~70년 사이에 있었던 중요 사건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심각한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로 그리스도인 중에서 배교자가 속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배교하는 자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히브리서는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의 배교 가능성을 줄이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했기에 저자는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박해였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가 그리스도의 교회보다도 훨씬 더 탁월한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직 조직화 된 종교의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유대교는 완전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이에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종교가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탁월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 배교하여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빈번했고, 저자는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러한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역점을 둔 기록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 한 분의 우월성이 유대 종교 전체의 우월성보다 뛰어넘고도 남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될 히브리서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네로 황제의 박해가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 교회의 기둥 같았던 분들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 종교는 종교로만 보자면 참으로 탁월하고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정된 고등 종교였습니다. 율법을 받고 말씀을 체계화 한 모세를 기점으로 보아도 유대교는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조직화 되고 제도화되고 율법과 제사 등의 요소들로 잘 정비된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나무랄 데 없는 뛰어난 체계를 갖춘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작된 지 30년 남짓 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라 일컫고 있지만 당시의 교회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전이나 회당처럼 공적 모임을 위한 장소도 없었으며, 유대교에 비하면 종교적인 조직 체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체계를 정비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탁월한 이론적 소양을 가진 인물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교회가 종교로써 조직화 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복음 자체에 종교적 요소를 갖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신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속사정은 따로 있을지언정 겉으로 표방하는 존재 이유는 신과의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착각이 하나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신을 관계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신과 관계해서 무엇인가 구하기 위해서는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분명히 신을 말하고 있었으나 종교적인 조직을 갖추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전이나 회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유대 종교처럼 제사나 율법 혹은 절기 등을 지킬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성전에서 활동하며 신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형식적 요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가정에서 모여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러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던 이유는 복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복음의 요구는 예수님에 대해 갖는 인격적인 믿음 하나뿐입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종교적 요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인격적인 믿음 하나로 실제 존재하는 신이신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의 이름 아래에서 만들어진 종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울타리가 없더라도 순전히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개인의 영역 속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근원적으로 종교의 형태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실제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과 만나고 연합함으로써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곧 신을 만나게 해주는 길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만남의 결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바뀝니다. 완전히 바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가진 그 어떤 요소로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자신이 인격적으로 연합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종교의 멸절자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전에 유지돼왔던 삶의 방식의 멸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삽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구원받아 살게 됩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은 종교만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까지 멸절하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노후보장을 참 좋아합니다. 미래가 보장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보장이라는 말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미래가 보장될 만큼 돈이 있든 없든, 몸이 건강하든 약하든,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종교가 필요 없고 이제까지 애를 쓰며 유지해 왔던 삶의 방식 자체가 근원적으로 필요 없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복음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한 분만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인 면이나 세상적인 면에서 동일합니다. 세상을 살려고 해도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되고, 영생을 살려고 해도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하늘의 삶과 땅의 삶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시작부터 독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신자에 대한 안부 인사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히브리서가 역점을 두고 있는 내용은 신은 종교 속에 있지 않으며 오직 예수님 안에 계시기에 유대 종교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 가지면 신을 만날 수 있고, 신을 나의 아버지로 가질 수 있고,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방식 자체를 유지하거나 애써 지킬 필요도 없을 만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있는 가짜 하늘인 종교로 돌아가고자 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서를 알고 있고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313년에 공인된 이후로 기독교 종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포함하여 땅에 있는 가짜 하늘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진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 하늘을 만들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다 놓고는 믿는다고 주장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종교를 의식하고 본서를 기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복음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한 분이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형태로 발전한 현재에도 여전히 필요한 말씀입니다.
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내용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성경 본래의 취지를 완성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는 구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구약성경을 믿고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 종교를 버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근간이 되는 모든 내용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예수님은 유대 종교에 갇힐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라는 종교에 가둘 분이 아닙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똑같은 권리를 예수님에게도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만유의 상속자이자 주인이신 예수님은 특정인이 만든 종교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 속에 국한된 존재로 생각합니다.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입으로 만유의 주라고 고백할지언정 실제로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자 합니다.
복음은 바로 이 만유의 주를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합니다. 개인이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만나는 일에 있어서 종교는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종교의 조직, 종교의 형식, 종교가 갖고 있는 요소들에 쉽게 현혹됩니다. 이 세상을 좋아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을 필요로 하면서 종교라는 가짜 하늘을 갖고자 합니다. 이것이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여 유대 종교로 되돌아가게 된 주된 이유였습니다.
또한 배교의 이유 중 하나는 박해였습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의 회귀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당시 로마는 이민족들의 종교를 승인하여 관리했습니다. 유대교는 그러한 로마 정부의 승인을 받은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사교 집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의 승인을 받고 안정적으로 종교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유대 종교로 회귀하는 배교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얼핏 이러한 박해는 우리와 무관하게 여겨집니다. 유대 종교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세워졌습니다. 기독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 한 분의 인격 안에 빨려 들어와서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친해지고,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한 종교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취지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도움 없이도 신구약 성경의 완성체인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에 어떤 종교에도 갇힐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 안에서만 하늘에 계신 참 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너의 인생에서 이제부터 모든 종교를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관계하며 나를 가지라. 네가 나를 가질 때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게 된다.’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라는 부분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다’라고 이해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풀어보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광채가 되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찬란하게 보이게 하시는 조명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무대 위의 배우에게 조명이 비춰질 때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을 비추는 조명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이상하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는 찬란한 빛을 받으시며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내 마음에서 보이는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 마음에서 보이는 대상은 배우자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내 미래도 아니고 몸 상태도 아니고 사업도 아닙니다.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보이게 됩니다.
이어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보이게 하시는 조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남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의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있게 하는 실체이지만 스스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산과 바다를 있게 하셨고, 지금도 나를 있게 하시며 벌레 한 마리까지도 있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하게 되면 하나님을 보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크신 분이기 때문에 유대 종교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유대 종교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정된 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승인되어서 박해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여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일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어서 3절 하반부를 보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본체의 형상이신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예수님께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한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을 아들 예수님께서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생각이 밖으로 나올 때 말이 되듯이,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이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아예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생각이 생기자마자 모두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깥으로 나온 생각이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이 되어서 세상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격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입니다. 그 인격적 특징인 말에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종교는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관되어 계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때 곧바로 예수님의 인격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마주하게 됩니다. 말이 생각의 표현이듯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표현이십니다. 아버지는 생각하시고 예수님은 그 생각을 받아 말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곧바로 생각하시는 아버지와 연결되기에 따로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 종교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십자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남과 동시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십니다. 정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가짜 하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를 멸절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종교의 존재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신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생활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일 수 없습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를 근절하셨듯이 기존의 생활 방식을 근절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종교와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 방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자유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히브리서를 나누는 동안에 예수님 한 분만으로 사는 농도가 짙게 해주심으로, 예수님 한 분의 탁월성이 우리의 뼈에 사무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