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은 1962년 목포중학교를 거쳐 1965년 목포고등학교를 졸업 했으며, 1969년 한양대학교(연극영화학사)를 졸업했다. 본명은 김남진(金南鎭)이며, 대한민국의 원로가수로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데뷔 50주년을 넘기고 70대인 지금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또한, 엘비스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벤치마킹 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속칭 뽕짝기가 없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이었고, 전성기에는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다. 출연작을 보면 외모로 여느 남자배우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장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했다. 목포중학교 재학 때부터 '닐 세데카' 나 '폴 앵카'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그는 서울로 전학하게 된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된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해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꾸었다. 남진의 집안은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였는데,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앞서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 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것을 제의 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 였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 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고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타고 히트 바로직전 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번째 음반도 실패하자, 그는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해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 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다.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 라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했기에 남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맨 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대 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 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 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 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 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 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 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별아 내 가슴에'는 1968년 <지구레코드공사>에서 <박춘석 작곡집>이란 부제로 영화 주제가를 타이틀로하여 발매한 앨범에 '저 언덕을 넘어서'와 함께 타이틀 곡으로 실렸던 곡으로 이후 1968년 정진우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주제가로도 사용된 곡이다. 이 영화는 김진규, 김지미와 함께 남진도 출연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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