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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같은 사람과 환경이 매일 초면인 나그네>의 줄거리 :
베드로 사도는 이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교회들의 교인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나그네'라는 단어는 '산 소망' '인내'와 더불어 베드로 전서의 취지를 드러내고 있는 핵심 단어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나그네는 세상에 대해서는 날마다 초면인 사람입니다. 대신에 천국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에 친숙하고 익숙한 사람이지요. 예수님 믿는다는 교인이 천국에 대해서 나그네처럼 살면 안 됩니다.
같은 사람과 환경이 매일 초면인 나그네
(베드로전서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같은 사람에 대해서 ‘처음 뵙겠습니다. 초면입니다.’라고 대하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고자 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왜 이렇게 낯설지? 이런 낯선 환경에서 뭘 어떻게 해야 되지?’라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입니다.
본문은 흩어진 나그네가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순종하게 하심, 예수님의 피 뿌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마치 나 한 사람의 인격이 삼위 하나님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나그네라는 단어에는 낯섦, 어색함, 초면, 서먹함이 담겨있습니다. 반대로 나그네의 친숙함, 익숙함은 이 세상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64년 7월에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는 직전이나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서신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전체 내용은 고난이 다가올 때 인내하라는 것이며, 그 고난을 인내할 때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네로의 박해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겠지만, 이전에도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의 박해는 있었습니다. 다만 64년 네로의 박해를 기점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313년까지는 2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이 세월 동안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박해로 인한 고난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극복하거나 회피해 보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극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장기간에 걸친 고난을 숙명처럼 내리셨던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취할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를 살펴보며 당신의 아들들에게 250년 동안 이어지게 될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안겨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서는 그 속마음이 ‘나그네’라는 표현을 통해 정의되고 있습니다. 250년이라는 세월은 한 나라가 생겼다가 없어지기에도 충분한 세월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280년 동안 유지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또한 250년이면 조선 시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당신의 백성이자 아들들이 박해받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 속에는 ‘나그네’라는 단어가 중심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전서 전체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나그네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지만 실제로 스스로를 나그네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살아가는 영역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라는 환경은 굉장히 친숙합니다. 가족 또한 익숙한 관계입니다. 직장에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3개월만 지나면 익숙하고 친숙해집니다. 환경도 사람도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나그네의 특징은 낯섦입니다. 언제나 마주하는 상황이 어색하고 서먹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초면입니다.’라는 어색한 인사를 하게 됩니다.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화하여 말해보자면 마치 ‘환경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 맞이하네요.’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그네인 셈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의 나그네는 실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삶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 지역인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인들을 흩어진 나그네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만들어진 영적 환경에는 익숙하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4~38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친숙한 존재입니다. 지금까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친숙하고 익숙하게 여겨졌던 관계를 십자가로 끊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에서 친숙하고 익숙하게 여기던 모든 관계들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본문에서 피 뿌림으로 언급된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여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나타나는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야고보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가 막히는 기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보면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벗 됨은 세상과 친숙하고 익숙해짐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 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숙해지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낯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색하고 서먹합니다. 천국이 낯설기 그지없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천국 패밀리에 대해서는 나그네처럼 낯설어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주일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만족하는 삶이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교리적으로 죽은 다음에나 갈 곳 정도로 여기며 잊어버린 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을 살 때 천국에 대한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과 벗 되어 세상을 친숙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안정을 찾는 삶이었습니다. 나그네의 상황과 정반대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는 뿌리를 내리는 안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서 안정적인 조건을 바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250년이라는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한 고난을 내려주신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을 통해 절대로 이 세상에서 안정된 뿌리를 내리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세상은 나그네로 맞이하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나그네로 맞이하지 못하고 친숙하고 가깝게 여기는 벗이 된다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에 점점 더 친숙하고 익숙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을 상대로 우리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구분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섞여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럴 때 이들을 구분되게 하는 요인이 바로 성령님이 안에 들어오심입니다.
성령님이 안에 들어오신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모든 내용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만이 세상과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함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거룩함이 주어지려면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날마다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영적 환경에 친숙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에 나그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환경이 낯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마치며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이 갈라짐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쪽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내 삶에서 몸으로 맺는 모든 관계에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들어올 수 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감으로써 자리를 비워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늘 쪽으로 넘어간 마음에는 하나님이 유일한 보물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친해지고 하나님을 아주 많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하고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하늘로 올라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이 바로 세상에서 나그네 됨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만을 익숙하게 여기는 상태에서 몸과 관계된 상황을 만날 때 나그네가 됩니다.
나그네 된 사람은 어떤 상황을 보더라도 친숙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직접 그 상황을 보더라도 반응하지 않고 나그네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차창 밖 풍경에 관여할 수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마음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을 나그네처럼 지나가고. 이 세상에서 보고 듣는 환경과 사람에 반응한다면 세상에 대해 친숙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에 대해 나그네가 된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나그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 가정에서 우리는 배우자를 대하고 자녀를 대하고 부모님을 대하고 형제자매를 대합니다. 직장에서는 직장동료들을 대하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럴 때 몸으로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직접 반응한다면 친숙함과 익숙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흩어진 나그네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에 직접 반응하는 상태에서는 세상에 대한 나그네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에 대해 나그네가 됩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보고, 자녀를 보고, 부모를 보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사장님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내 앞에 있다.’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봅니다. ‘내가 지금 사장님과 마주하는 현장에 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 현장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내 보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가 있어야 한다. 내가 사장님으로부터 얻어야 할 기쁨과 만족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중심으로 구축해 놓으신 환경을 의식 속에서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언제나 초면인 상태가 됩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 의식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사위일체로 똘똘 뭉치는 상태가 되고, 배우자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을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만 따라서 말하고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마치 배우자를 초면인 것처럼 대하며 나그네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친숙하고 익숙해야 할 분은 배우자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내 몸이 처한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야 할 곳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하고, 이 상황에 친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대상들 앞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초면입니다.’라는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흩어진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입으로는 ‘나는 나그네야.’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가족에게 뿌리내리고, 직장에 뿌리내리고, 세상에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뿌리내렸다면 정착민이지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처럼 나그네를 이야기하면서도 진짜 나그네의 삶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그네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점은 마음의 뿌리를 내려서 ‘우리’를 이루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가족이 친숙한 대상으로 들어온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그네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이고 필요에 따라 찾을 뿐입니다.
‘죽으면 천국 간다.’라고 말은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의 마음 상태를 보면 이미 세상에 든든히 정착한 상태입니다. 대한민국 땅 어디에서 10년 20년을 산다고 마음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 있더라도 마음이 사람이나 대상에 닿아있고 뿌리를 내렸다면 세상에 정착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인 시점으로부터 네로의 박해는 심해지고 이러한 박해는 313년까지 250년 동안 계속됩니다. 긴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생명줄로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아들들에게 심술궂다 싶을 정도로 심한 고난을 장기간 내리십니다. 그 하나님의 내심에 들어있는 단어가 바로 나그네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는 불편과 고통을 끊임없이 마주합니다. 이러한 삶의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내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심을 규정하는 단어가 바로 나그네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지금 가족을 낯설게 대하고 있느냐? 나와 가족 중에서 누가 더 낯설게 느껴지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끔 하십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나보다 더 친숙하고 익숙하다면 안 될 일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세상과 벗 됨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을 의식 속에 켜 놓은 상태에서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익숙하지 않고, 하나님이 익숙하지 않고, 성령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 됨의 익숙함은 늘어나고, 개선되고, 증가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닫게 하시게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250년 동안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이들은 고난뿐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던 64년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죽을 때까지 박해를 당하며 고난만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나칠 정도의 고난을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친숙해진 저주의 상태는 절대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대신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는 매일 친숙함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을 의식에 켜놓는 일을 날마다 반복함으로써 친숙해짐은 깊어집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롭고도 낯선 은혜의 깊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낯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은 끊임없이 친숙함을 더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롭고도 낯선 은혜를 맞이하는 친숙함 속의 새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나그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환경을 의식 속에 켜심으로써 사위일체에 친숙하고 익숙한 상태를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으로 보고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버지! 내가 초면처럼 대해야 하는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에 대해서도 ‘환경님! 내가 처음 만나는 환경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직장에서 마주하는 업무에 대해서도 그 업무가 삼위일체 하나님보다 더 친숙해지면 안 됩니다. 업무도 나그네로 처리해야 되고, 배우자도 나그네로 관계해야 하며, 자녀들도 나그네 부모로서 관계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거울로 보는 몸에 대해서도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내 의식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바라보며 내 몸에 대해서도 낯선 나그네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흩어진 나그네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 똑같은 환경을 낯설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친숙하고 익숙하게 여기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언제나 세상을 낯설게 여기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낯설게 느끼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여기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야고보서는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내가 말하고 생각해야 될 답에 대한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지혜의 상황을 다른 측면에서 조망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내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우리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친숙해지라고 몸으로 만나는 환경 속에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기뻐할 일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고난은 하나님이 끌어당기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모두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어제 만났던 똑같은 사람과 환경을 만날지라도 나그네처럼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친숙함과 익숙함의 대상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는 상태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초면입니다.’라는 의식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는 동안 박해는 없었어도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내심에 대해 알았습니다. 나그네로 살아야 됨을 잊지 않게 해주셔서 오늘도 마주하는 똑같은 사람과 환경을 향하여 ‘처음 뵙겠습니다. 초면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