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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8년 4월 1일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 당시 금산군수이셨고 6남2녀의 형제 중에 나는 4남으로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
형제들은 모두 그림에 대단히 소질들이 있었으며 부친과 큰누이의 영향으로 집안에는 항시 클래식의 은은한 선율이 넘치고 있었다. 부농의 둘째로 태어나신 부친은 침착하고도 명석한 두뇌로 전주고보를 나와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셨다.
이후 아직도 일제치하이지만 학력덕분에 군청서기로 곧바로 채용이 되셨고 해방되자 바로 내무과장으로 전보 받았으며 이후 몇 년 되지 않아서 승진시험을 통해 군수로 발령받게 되었다. 부친은 좋은 학력과 고위행정직, 그리고 꽃이나 새를 기르는 등 맑은 취미로 인하여 물욕이 없으셨고 게다가 수려한 외모 덕분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관료로 통하셨던 것 듯하다. 그런데 술을 몹시 즐기셨던 덕분에 여난이 끊이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유관된 사건으로 퇴직하게 되셨다.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 초등학교를 다섯 개나 거쳐 다녔기에 그 시절에 나는 별로 말이 없었고 그림이나 음악감상, 그리고 책을 읽는 취미가 있었다. 그 중에 장발장
-레 미제라블-이라는 간략히 출판된 소설은 어린 나를 매료시켰다.
그러다가 부친의 사직에 따라 다시 김제란 지방도읍으로 이사 오게 된 나는 더욱 말이 없어지며 무언가 골돌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고교에 진학하려는데 적어도 도시로 보내려는 모친의 마음에 裡里라는 도회지로 가서 큰집에 얹혀살게 된다. 1년 동안을 거저 얹혀살면서 상당히 우울한 나날들이 많았다.
겨울에는 찬물로 세수하다가 손에 열군데 쯤의 동상에 걸린 일도 있었다.
그 때부터 내가 가는 길에 평탄한 날이 별로 없었다. 대입에 낙방하고 다음해 겨우 선교사가 세운 서울 사립대에 진학하던 일, 거기서도 다시 낙제를 두 번하여 제적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복적했던 일, 병적의 누락으로 인하여 늦은 나이로 입대하고 공병작업대에서 몹시 고생했던 일, 다시 복적은 했지만 거의 졸업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학점제의 변경으로 다시 기적적으로 졸업했던 일등은 정말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 되었다.
정말이지 나는 내 실력으로 내 앞길을 헤쳐나간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국내굴지의 건설회사 입사시험도 인해전술로 밀어 붙인 동급생들의 협조와 그리고 갑자기 생긴 배경으로 말미암아 합격되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 당시 집안의 어려움이 있었던 한 자매와 만나기 시작했고 무언가 동병상린의 마음이 통하여 7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였다. 갑작스런 배경도 그 자매로 인하여 생긴 급조된 것이었다.
해외현장의 시작도 아주 꿈과 낭만을 널리 폈던 때였다. 중동의 세 현장을 7년여에 걸쳐 돌아다녔는데 어디를 가나 아주 젠틀하고 생각 있는 사람으로 통했으며 이상하게도 맡은 업무마다 아주 훌륭히 해결되곤 하였다. 테니스, 스쿠버다이빙, 헬쓰 등의 운동을 즐겨서 중동생활이 노상 즐거웠던 때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작게 쥐어준 현지 업자들의 커미션에 눈이 팔리기 시작했고 그 일이 계속되면서 아무 죄의식 없는 단계까지 올라가자 어느 날 현장직원과 음주하면서 다툰 끝에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또 술을 즐긴다는 이유로 귀국 당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시 쿠웨이트 현장으로 나갔지만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다 꼬이기 시작하면서 모친의 소천소식에 귀국하면서 사직하게 되었다.
회사친구와 같이 창업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다툼과 갈등이 연속되었으며 어느 날 눈을 들어보니 친구라는 사람들은 다 떠나거나 원수가 되었고 부모형제도 금전관계로 인하여 疏遠하게 되었다.
특히나 어떤 친구와의 금전갈등은 아주 극도에 달해서 도저히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너무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웠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미사리 강가에서 물 흐르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절대 가장으로서나 남자로서는 하면 안 되는 말을 무심코 아내에게 건넨다. “ 여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 말이 없던 아내는 갑자기 성수동의 한 교회에 가보자고 권했다. 기억을 더듬어 겨우 찾아가서 그 교회 목사 사모님을 만났는데 막 외출하려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드려다 보더니 기도를 하여 주셨다. 로마서 16장을 잠간 읽고 나서 백향목에 관해서 잠간 말씀을 주시며 세상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시고 항상 하늘방향 으로만 그 줄기를 뻗으라고 권면하신다. 그 때 말씀이 닿으면서 처음으로 내 영혼이 깊이 감동을 받았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때 부터는 운영하던 경정비 사업장은 종업원들에게 다 맡기고 어디든 은혜가 있음직한 자리만 찾아서 다니다가 어느 선교단체에서 영성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이 학교를 지원하여 3년 과정을 수료한다.
신학교를 다니던 3년은 아주 꿈과 같이 달콤했고 즐거웠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많은 학우들이 찾아와 내게 도움을 청했고 때로는 상담도 했으며 점심을 거르는 학우들을 몰래 불러내어 같이 식사를 했으며 또 부산에서 유학 온 학우에게는 주 1회 잠자리를 제공했다. 회장을 뽑는 선거철이 다가오자 죄송하게도 내 상대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만 나오면 다 사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생애의 두 번째 교만의 열매였음을 몰랐다.
어느 날 너무 외롭다고 모임에서 호소하는 어느 선교 단체의 지도자에게 모든 협조를 다 하겠다고 약속을 하니 갑자기 그 분은 모든 대소모임에 나를 동행시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바람에 많은 공격을 은연중에 느끼기 시작하는데 그런 중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코앞에 닥쳐온 세 가지 영광이 일거에 다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 학생회장의 건, 선교단체 미국파송의 건, 유학의 건 ---
뿐 만 아니라 온갖 충성을 아끼지 않던 그 선교단체에서 모든 활동을 중지 당하게 되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다시 역삼동의 한 대형교회를 나가려는 데 그 교회가 내부 분열로 진통중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깊은 숙고 끝에 떨어져 나온 개척교회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계속 성장하는 그 교회에서 찬양인도자로 봉사했고 또 정신지체부 주일학교를 맡으면서 그 교회에서 매우 사랑을 받았다.
나는 어떤 모임이든 가면 주님은 항상 아주 단시간에 그곳에서 제 2인자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항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 잠간이 끝이었다.
매번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또 다시 어둠은 나를 가만두지 아니하였다. 잠시잠간의 교만이 은연중에 나를 방문하였을 때 교회사무실에서 갑자기 내 책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청계산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 바로 그 교회를 사직하고는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친이 소천하신다. 이어서 바로 분당의 셋집을 정리하고 나서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광주 오포면이라는 데로 이사를 한다. 이미 경제권을 상실한지 오래된 나는 항상 월말이면 아내와 잦은 다툼이 있었는데 오포로 이사 와서는 아내가 경영하던 유치원도 주님이 거두어가셨다. 그러자 잦은 다툼이 끝나면서 잠시 동안 평안해진 듯 하였다.
그러자 98년도 말 한국에 IMF가 터졌고 모든 국민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하는 전대미문의 소리없는 경제전쟁의 와중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잔 물줄기 처럼 오는 지원도 다 끊어졌고 정말 주머니에 한 푼도 없이 사는 시골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정말 하늘만 쳐다볼 수 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엘리야의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님만 마라보고 사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시골이라 여기저기 공터가 많았는데 있기만 하면 계속 뭔가를 심었다.
우리 인근에는 연립 두동이 있었고 22세대가 같이 살고 있었다.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만 끝나면 앞 벌판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공장이 철거된 앞터에 채소를 가는 것을 보았다. 문득 주님께 불평한다. “왜 내 교회에는 저 영혼들을 안 보내주고 술 좋아하는 어느 노인이 일군 밭에는 동네 엄마들이 다 갑니까?”
그 노인은 평소 자기와 같이 밭을 일구자고 내게 항상 청해왔다. 그러나 시골사는 것도 분한데 또 농사까지 지어야 하는가 하고 반발했었지만 이제 그 노인에게 찾아가서 농사강의를 청했다.
2-3일간의 극심한 훈련을 마치고 같이 일구었는데 갑자기 그 노인이 폭음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장 노인의 딸이 그 분을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1500평, 이 넓은 땅이 다 내 땅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자연히 내 도움을 안 받는 가정이 없게 된다. 반 평도 안 되는 땅에 상추를 심었는데 이건 너무 많이 나와서 잎을 잘라서 이집 저집에 나눠주기 시작했다.
읍네 시장에서 여러 가지 모종을 사다가 분양해주기 하며 같이 교제의 틀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잘 아는 장애우 한사람이 찾아왔다. 같이 살자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문득 주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졌다.
“ 어찌해야 합니까?”
“어떻게 배웠느냐?”
“유리하는 나그네를 맞으라고는 배웠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해라.”
“우리가족들의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앞집이 비었잖느냐? 거기서 재우고 식사와 예배시만 네 집에 들여라.”
같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건축주가 찾아와서 대노를 하기에 할 수 없이 가진 차를 팔아서 새 차를 할부로 바꿔 구입하고 잔액으로 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 찾아오는 교우들을 재우기 시작했다. 셋방에 사는 교우가 5인 , 그리고 서울에서 오는 교인이 3명, 가끔씩 찾아오시는 지인들도 끊이지 않아서 예배를 드리는 거실이 가득하여 기분이 좋다.
근처 공장에 있는 스리랑카인들도 우리 집을 가끔씩 방문하여 교제를 나눈다.
거기다가 오후에는 주일학교도 생겼다. 아, 교회는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깨달음이 있는 사람처럼 무릎을 탁 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 잠시 다녀 저녁에 돌아왔는데 셋방에서 기거하는 한 교우가 항상 술에 취하여 살고 있기에 경고차원에서 쌀을 안주었더니 그 방에 불을 질러 그 집이 반소했다고 한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그 집 안주인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눈앞이 노래졌다. 어떻게 겨우 수습은 시켜서 차차 배상하기로 하고 반 무마는 시켰지만 그 동네에 머물 생각이 안 난다. 겨우 모아놓았던 교우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그 와중에 한 장애우는 서울에 갔다가 시신으로 돌아왔다고 병원에서 통보가 온다.
웬일인지 서울에서 오시던 분들도 발걸음조차 안한다.
우리부부는 아침만 먹고는 얼른 서울로 피신하여 살다시피 하며 어두워지면 돌아오곤 했다.
아내는 친구가 경영하는 식당으로 가서 일도 돕고 말동무도 하는데 나는 작은 장애우공동체에서 살다시피 한다. 거기도 장애우공동체지만 술 좋아하는 식구들이 많아서 아침에 예배드리면 저녁에 상담할 일 있다면서 술집으로 데려가서 술친구로 만든다.
그러는 중에 또 한 주먹세계에 있다가 나온 집사는 가끔씩 불러내어 옛 동료들이 모인 곳으로 인도한다. 그 동료들은 항상 나를 반가워했다.
아, 전도사님이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저녁을 대접하지요. 하면서 데려가는 곳도 삼겹살집인데 고기는 본 척도 않고 계속 술만 마셔댄다. 술 끊은지 한 4년째 되는 것 같은데 어찌 된 셈인지 다시 그들의 술친구로 돌아왔다. 신기한 일은 그들의 3분의 1만 마셔도 취중농도가 넘어가는 상황인데 어찌된 셈인지 도로 음주단속에서 한 번도 검문당한 일이 없다는 것도 기적이다. 단 한번이 있었는데 그 때는 한밤중에 차비가 떨어진 작은 아들을 만나려고 할 수없이 단속을 받게 되어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고 면한 일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이의 시모님이 소천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병원장례식장에 찾아가서 오랜만에 형제들과 조우하고는 같이 예배를 드린다. 그 다음날 장지에 가서 일단 평토장 상태에서 홀로 기도를 하는데 가자기 장암으로 고생하셨던 그 분의 인내하심이 생각이 나며 주님께서 내게 권면하시는 것은 인내라고 깨달음이 왔다. 조용히 기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고원묘지에서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옆쪽 억새밭에서 불꽃이 보인다.
깜짝 놀라 차를 빼는데 이상한 것은 불꽃은 모이는데 이게 억새가 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 갑자기 내게 전율처럼 다가오는 음성은 출애굽기 3장 말씀이었다.
“ 내 백성에게 가라.” “ 당신의 백성이 어디 있는데요?” “서울역 부근 서소문공원에 있다.”.
“ 예, 한번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확인하기에는 훨씬 뒷편에 있는 쓰레기장의 불꽃이 오버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이때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나는 신학을 시작할 때 인생의 경력이라던가 학력 그리고 해외경력 특히나 중동의 사막지대를 보고 왔었고 그리고 세계각국사람들을 만나 교제했었으며 더구나 이라크에서는 창세기에 나온 많은 유적지역을 보고 왔었기에 성경이해도가 남달랐다.
그 위에 기타로 반주하며 찬양을 인도하는 달란트를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많은 은혜를 받았었다. 그래서 이만하면 강남지역에서 몇 백의 성도를 거느리고 그랜져를 타고 다니며 심방하고 40여 평의 아파트에 살 자격은 충분하다고 자위했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전혀 엉뚱한 곳에 계셨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서소문공원에가면서 엄청나게 많은 실직가장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이 많으셨던 백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단체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었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이 다 기독교 단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런 정도이니 서울역 광장이 있는 민중들에게 노숙자라는 칭호가 붙게 된다. 길에서 자니 路宿, 이슬맞고 자니 露宿 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남들에게 자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을 위한 작은 단체를 결성할 생각이 불현듯 솟아 올랐다.
장애우공동체에서 확인한 많은 허위, 비리와 음란함 그리고 방탕함들을 확인하였기에 정말 제3의 선교대상인 도시빈민들을 진정하게 섬기기 위한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역자들이 모여 기도모임을 계속하던 중 1999년 4월 23일 민족사랑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여 설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 모임을 대표하실만한 저명한 분이 필요했다.
우연히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강원룡목사님을 뵙게 된다. 그리고는 기독교인들의 타종교에 대한 정신자세를 듣고는 이 분이야말로 우리를 상징하실 만한 분이시다 라는 확신으로 여러 번 비서실을 통하여 부탁을 드렸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곤 했다.
에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국민일보에 민족사랑회 창립예배를 광고하는 자리에 강목사님의 근영을 크게 실어서 게재하게 된다. 비서실의 항의는 말로 못할 정도로 준엄했다. 전화기에 굽실대며 우리는 초죽음이 되었는데 약 10여분 후 또 전화가 걸려왔다. 그 목소리는 강목사님 음성이셨다. “나는 빈민들을 위한 단체에는 별로 연관된 일이 없오. 그래서 비록 재정적 지원은 어렵지만 그냥 내 명의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겠오.”
우리는 다시 전화기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감사했다.
명의를 도용하여 반포한신교회를 빌려 설립예배를 드렸는데 준비하던 중에 무슨 기관 종교담당이라면서 전화가 걸려온다.
“좀처럼 이런 모임에 총재명의를 수락하지 않는 분이 어찌 수락했습니까?”
우리는 솔직하게 경과를 알려드렸다.
“내 지금까지 이런 모임은 처음 봤오. 그래요. 앞으로도 계속 주시할 것이니 더욱 열심히들 하시오.”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고 이 모임은 발족되었다.
그리고 당장에 장지동 화훼마을 화재현장을 찾아가 그 분들을 위로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였고 서울역의 노숙가족들을 위한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전에 Tres Dias 라는 제자훈련을 수차례 경험했기에 우선 이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99년 6월 초순 나는 작은 차 몇 대와 더불어 같이 봉사하실 신학생 10여명과 그리고 용산 역전에서 45명을 태우고 주머니에 십여 만원 있는 채로 4일간의 일정을 시행하려 양수리로 출발했다.
출발 전 10여 일간은 정말 말 못할 상황이 계속 찾아와서 벽에다 컵에다 머리를 찧는 등 자학을 하는 고초가 계속되었다.
참 기막힌 출발이었지만 주님의 침묵은 여기서 끝이 났다. 출발 10분후에 어느 교회에서 135만원을 입금했다고 연락이 온다. 도착한 후에 또 어느 장로님이 200만원을 송금했다고 연락을 주신다. 행사 내내 이단시비도 있었고 또 자신의 행사라고 사칭하는 단체도 있었으며 어느 봉사를 자청해서 오신 한 목회자는 자신이 선배라며 계속해서 나를 어지럽게 한일도 있었지마는 어쨌든 은혜롭게 마쳤고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지독한 디스크, 무념증과 무력증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 살았다.
한 달이 꽉 찬 마지막 날, 나는 이유모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머릿속은 고통에 가득한데다가 맥박소리조차 아주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탕-탕-탕
마치 북치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이러다가 어디 한 구석의 핏줄이 터지면 속절없이 반신불수가 되겠군, 하는 생각으로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말이 잘 안 된다. 찬송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옆에서 방언기도를 권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몇 분간의 신음 소리를 내던 나는 어느 듯 혼수상태로 빠져버린다.
두어 시간 후 깨어났는데 머릿속이 맑아져왔다. 감사의 마음이 넘쳐나는데 또 이상한 음성이 들어온다.
“얘야, 일어 나거라.” “일어나서 무엇 하라는 말입니까?” “다음 행사 준비해야지.”
참 기막힌 분이시다. 나는 죽어 가는지 살게 되었는지 전혀 생각없이 두 번째 행사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같이 동역하는 좀 명석한 전도사에게 모든 지도권을 넘겼다. 그러나 그가 남의 행사하듯이 진행하는 것을 보고 너무 속이 상해서 아침에 차를 타고 근처 다른 수양관으로 간다. 그리고는 비를 맞으며 돌계단 중간에서 기도하는데 또 음성이 들린다.
“얘, 나는 이 일을 네게 맡겼다. 어서 가서 다시 인도하도록 해라.”
“ 주님, 죄송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다시 와 본 집회장소는 프로그램 하나가 펑크난 때문에 담배물고 다니는 사람, 술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로 소란하고 있었다. 인도자라고 맡긴 전도사는 의자에 두 다리 올리고는 음치에 가까운 찬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과감히 봉사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무릎 꿇을 것과 기도할 것을 명했다. 우리들은 거의 30분 동안 기도한 것으로 기억된다. 갑자기 이스라엘족속의 장자를 지키기 위한 안개같은 기운이 온 수양관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란을 만들던 모두가 그 연기에 취한 듯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 행사가 끝나고 한 번 취소되었던 나에게 미국비자가 나왔고 한 주일동안 선교여행을 하고 왔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의 형제들의 생활환경과 집안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재간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감사함이 넘치고 있다.
친구가 장로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우리 부부를 목회자로 청빙해왔다.
그 장로친구에게 감사하면서 나는 이제 불행의 끝이 왔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교회로 들어갔다.
그러나 --- 성격이 괄괄한 한 노인노숙인이 내게 자꾸 서울역부근에서 같이 주일예배를 드리자고 졸라온다. 어느 은사집회로 유명한 신학교를 방문했는데 미국인 목회자 한 분이 있었다. 친구전도사 하나가 같이 기도 받자고 조른다. 마지못해 사정을 얘기하니 그 즉시 기도하는데 서울역 사역은 주님이 지극히 기뻐하시는 사역이라고 통변해준다. 그럼 현재하는 교회사역은요 하고 물으니 입을 꼭 다물어버린다.
다시 교회로 돌아왔는데 막 담임목회자로 청빙된 노인목사가 아주머니집사님들 모아놓고 약 팔듯이 수다를 떨다가 시계를 보더니 참 예배시간 되었네 하고는 바로 강단에 서서 찬송 하나하고 기도 잠간하더니 아까 떨던 수다의 다음 줄거리로 들어간다.
너무 분해서 바로 사직을 하고는 서울역 지하도로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2000년 1월 23일이다. 그 때 영하 27도 쯤 된 것으로 기억되며 지하도 안에도 고드름이 매달릴 정도로 추웠다. 지하도 예배에 누가 오겠나 싶지만 그러나 매번 7-8분은 꼭 참석했다. 6월쯤 그 예배가 끝이 나고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영등포 광야교회에서 몇 번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한 청년의 도움으로 용산 쪽방에서 다시 예배가 재개되었다.
3개월 정도를 드리는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평촌의 한 교회를 방문하자고 하신다. 평촌교회에서 설교를 한번 하니 그 교회 목사님이 바로 용산 역전 윤락가 중심에 있는 한 지하실을 계약하여 주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바로 다음날부터 이 교회를 인도할 것을 간청했다.
갖가지 고생이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기에 나는 어색히 웃으며 그만 그 자리를 조용히 거절했지만 이 후 사흘 동안을 그 노인은 나 있는 자리에 나타나서 큰 소리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듣기 싫어서 할 수 없이 담임 목사직을 수락한다.
그로부터 고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술 취해 들어와서 기물을 때려부수는 것은 보통이고 예배드릴 때는 거의 3분의 1은 취해있었다.
소위 심복이라는 형제들이 있어서 소란을 부리면 그 들이 나서서 막아주었으나 맞은 형제들이 강력히 항의하면 자격지심 때문에 넘어져 그들도 음주하곤 했다.
그런 지경이면 어디 호소할 데가 없다. 경찰을 불러도 여기 식구 아닙니까? 자기 집 물건 부수는데 우리가 어찌 말립니까, 하면서 돌아갔다.
나는 점점 미쳐가기 시작한다. 이건 안 미치고 견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1년 반을 견디다가는 어느 날 미친 사람이 들어와 행패부리면 나도 같이 미치기 시작하여 온 몸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개월을 버티다가 두통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뛰어갔다. 몇가지 검사를 하더니 간경변이라고 한다.
이후 1년은 완전히 지옥 그 자체였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피를 뽑아냈고 심지어는 사타구니와 복숭아뼈 위에서 채취할 때는 견디기 힘들었으며 식사를 하다가 잘 안돌아가는 혀를 크게 깨물렸을 때 피가 멈추지 않아서 마땅히 지혈시킬 방법도 없이 피를 쏟는데 그러다가 죽는 줄 만 알았다. 혀가 굳어졌고 생각도 잘 안 떠올랐으며 무슨 말씀을 묵상할 때는 머리가 깨어지는 정도로 통증이 왔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불면 비슷한 증상으로 뒤척이다 겨우 잠들면 같이 입원한 5인의 환자 전화가 시간마다 교대로 울려서 잠을 깨워놓았고 그 때마다 다시 잠들려고 또 두어 시간을 뒤척거리곤 했다. 성경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묵상도 안 되었고 옆방의 한 권사님이 말씀을 청해도 머리와 입안에서만 맴돌곤 하였다.
혈장수치가 계속 떨어져 7천 단위까지 내려 왔을 때(정상치는 15만개라던가?)는 갑자기 어디서 노란 물주머니 6개를 가져다가 주사해 주었다.
입맛이 떨어졌고 1cc 한방에 10만원하는 주사를 매주 한 번씩 내가 직접 주사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입맛과 체중은 계속 떨어졌고 더더군다나 믿음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져갔다. 고통 중에 갑자기 공포가 밀려오는데 이러다 만약 심판대 앞에 선다면 내 믿음에 대한 확신도 그리고 변명할 말도 하나도 없어서 설명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어떻게 처분하실 건가에 대한 것이 내 두려움이었다.
한 주일 만에 퇴원하여 나 혼자 집안에 누워서 잠자다가 겨우 기운이 나면 탄천가를 거닐다가 돈 5천 원 들고 무어 먹을 만한 것이 없는가하고 동네 식당가를 어슬렁거리는 날이 연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장면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껍질이 벗겨져 죽어가는 고양이새끼가 눈에 띄었고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까치가 보였으며 버려진 리본으로 포장된 작은 박스를 열어보니 한 마리 귀엽고 흰 토끼가 나왔다.
어느 새끼고양이는 구슬프게 울면서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는 녀석도 있었다. 주택가에 버려진 쓰레기, 옷가지, 병, 플라스틱, 전자제품, 버리고 간 가구나 침대, 홍수 후에 고수부지 웅덩이에 갇힌 물고기새끼들, 이런 것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보이면 그때마다 처리하여 주곤 했다.
이상하게 코피는 거의 매일 한 번씩 나왔는데 그 때마다 두통이 가라앉곤 하였다.
그때마다 피를 닦아 빨갛게 된 휴지를 멍청히 바라보는 때가 자주 있게 된다.
이 피는 내게 무얼 말하고 있는가,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어느 눈오는 날 밤에 갑자기 두통이 심해지고 너무 답답해서 눈밭으로 뛰어 나간다. 그리고는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처럼 하늘에 대고는 큰소리로 원망을 시작했다.
“이건 뭡니까?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무업니까?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눈밭에 내려가게 하고는 발을 끌면서 큰 글씨로 이렇게 쓰게 하였다.
--- 中 國 宣 敎 ---
4개 월을 그렇게 보내다가 어느 날 교회를 가게 되었다..
한눈에 대신 사역을 하고 있는 강도사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어 집에 보내서 쉬게 하고는 다시 교회로 출석하며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너무 피곤하여 한번 설교를 하면 온몸에 맥이 풀리고 정신이 혼미하여 정자동 지하실 집에 돌아가면 그냥 쓰러지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오지 않던 조선동포 전도사가 갑자기 나타난다.
“중국에 갑시다.” “이거 몸도 아프고 돈도 없우다.”
“그럼 중국선교 안 할거요?” 나는 그 말에 꼼짝 못하곤 했다.
명절 때 하던 노숙가족 위로잔치가 어언간 16차가 되었다. 갑자기 아내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손찌검 하려고 했더니 그 날 저녁 어디론지 나가버린다. 그리고는 소식이 없다. 아이구, 이거 재정부터 확보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아내가 모금을 잘했는데 내가 직접 해 보니 3분의 1도 못한다. 속이 까맣게 타오기 시작했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악세사리 만드시는 한 권사님을 찾아간다. 웬일인지 그 분은 그날 마침 길옆에 노점상을 하고 계셨다. 그 분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사정을 말씀드려도 건성이다.
집회 사흘 전에 아내가 돌아왔다. 뭐라고 나무랄 힘도 없어서 그냥 진행한다.
재정은 겨우 80% 만 채웠지만 신기하게도 참가자들은 60명이 채 안되어 식대가 많이 절감되며 내 손에 백만 원이 쥐어지게 된다. 마지막 저녁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바로 집에 돌아간다.
보름여 간을 가물던 하늘이 그날 저녁 비를 뿌려주셨다. 밤바람의 내음이 매우 싱그로워 온통 생기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짐을 싸고 다음날 아침 연길행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만난 조선동포전도사와 함께 延吉市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도로에 넘쳐 구두가 다 빠지며 전도사의 불평이 나온다.
“한참 가물더니 웬 비야 !” 두 주일 동안 가물었단다.
화룡이라는 길림성 농촌마을에 갔는데 상하수도도 없고 냉장고도 없으며 잘 아시다시피 화장실에는 갈수도 없다. 온 야산이 다 농토인데 화학비료만 써서 너무도 땅이 딱딱하다. 도시빈민촌에도 가봤지만 너무도 열악한 생활모습에 내 아프던 것이 어디론지 다 날아가 버린다. 아, 이곳에 정말 할 일이 많구나 라는 감탄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도 계속 하루 한 번 씩 코피를 쏟는다.
이제 이 피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는 듯하다.
별로 만날 사람도 없어서 매일 조석으로 기도와 성경묵상을 하며 며칠을 보낸다.
돌아오는데 비행기 창 왼쪽으로 멀리 다 벗겨진 북한 강산이 보이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이 눈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다.
그리고는 중국농촌을 위한 새마을 운동연수회를 준비한다. 그런데 대상은 어디서 만날까,가 매우 걱정이었는데 심양에 사시는 한선교사님이 삼자교회 목회자 여러분들을 소개해 주셔서 그 분들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 학생들을 계몽하기 시작했다. 현금 중국농촌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다. 대도시나 해변공단 그리고 한국에 다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넓은 농토를 손 볼 사람이 없어 농민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들을 격려하면서 또 한편 공단 청년들을 게몽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늘에 요청하기 시작한다.
또 베이징 왕징지역에 사는 조선동포 중장년들을 위로하는 집회를 갖기도 한다. 경관좋은 마치 시내산 같은 돌산속의 수양관에 버스로 모셔다 놓았는데 우리를 매우 경계하는 눈치더니 저녁 후 숙소에 가보니 음주 후에 자욱히 담배피우며 도박을 한다. 뭐라고 잔소리를 했더니 다음날 아침 7명만 남고 35명이 다 하산해 버렸다. 자세히 모르고 시작한 것이 큰 오류였음을 깨달았다.
기가 막혔지만 남은 인원도 조선동포 봉사대원, 한국에서 간 인도자 대원 및 수양관 식구들까지 그럭저럭 30여 명이 되어서 잘 마칠 수 있었다.
말 안통하고 낯 설은 이국땅의 집회는 한 번도 우리 계획대로 된 일은 없었다.
4일간을 준비하면 단 하루만 하는 날도 있었다. 비용을 받은 분들은 입장이 곤란하면 어디론지 사라졌다. 거기다가 중간에 소개하는 분들의 농간도 매우 심했다. 우리는 매우 심각했지만 그들은 우리 하는 것이 너무 어설펐는지 모든 것이 다 농담조였다. 예배시간에는 어디론지 피하다가 돈 들일만 생기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쟁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거대한 파도에게 둘러싸인 한 작은 섬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일 터지는 코피는 내 투혼을 불사르게 했다.
우리는 기도하며 그들을 만나면 나무라며 무레한 요청을 거절했고 또 학생들에게는 뜨겁게 말씀을 증거했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 이었다.
같은 팀원들에게 일체 발안마를 금지했으며 조석으로 예배 묵상을 빠짐없이 드렸다.
어느 귀화하신 할머니가 내개 물어왔다.
“왜 중국 때문에 그리 애쓰시우?”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중국은 내게 뭐란 말인가? 그냥 중국에 가라고 해서 왔거든요. 라고 대답만 하면 끝나는가? 주님, 뭐라고 하면 될까요?
주님이 내게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각오와 헌신의 결단도 주셨다.
“ 중국도 제 조국입니다.”
2000년도 초에 어느 해 황사가 지독히 불어오던 해가 있었다.
그 때도 불평했다. “왜 중국이 우리나라 옆에 있어서 이렇게 차 보니트 위에 밀가루 뿌려놓은 듯한 고통을 받아야 됩니까?”
“ 너는 중국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
“ 왜 내가 중국을 위해서 뭘 해야 하는데요?”
“ 옛날 그들이 네 어려운 형편을 돕지 않았느냐?”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중국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2차로 응답이 떨어졌다.
저 중국 사막 땅에 나무를 심어라.
아닙니다. 나는 나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중국 땅에 가고 싶지도 않고요, 보시다시피 나는 혼자이며 또 경제사정도 넉넉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붙여댔다.
잘 생각해봐라 !
그렇다. 나는 이제까지 잊고 산 것이 하나있다. 기도는 내 할 말을 되는대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며 내 필요만 내 놓다가 응답받으면 언제 봤냐는 듯이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그 사명을 다 하다가 때가 오면 그냥 떠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센터도 아니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도도 아니다.
그런 것은 응답받을 리도 없지만 만일에 응답받는다면 바로 이단의 괴수가 되는 것이다. 비근한 실례가 이 나라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
잘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동에서 근무할 때나는 조경공사를 2년 여 동안 한일이 생각났다. 사막에 나무와 풀을 심는 작업에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모래 속에 이끼를 넣어서 수분을 보충했던 방법도 생각이 났다.
Porous Tubing 이라는 시스템을 쓰면 뿌리만 수분을 공급하여 물이 증발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시켜 물을 절감하는 방법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 중국에 갈 때마다 비가 오던 일이 생각났다. 이 경험은 요즘도 매번 꼭 해주신다.
왜 사막이 되는가? 그것은 비가 안 오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사막조림은 절로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주로 삼자교회에서만 사역을 하였다. 그 삼자교회 목회자들을 설득하면서 시작해보자.
그 목회자들이 교인을 설득할 것이고 그 교인들은 자기나라 땅에 나무를 심으며 아주 굉장한 보람과 자부심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때마다 그들은 모여 기도할 것이다.
그 기도가 상달되어 반드시 사막지대에 비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막이 초장으로 변해가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장사꾼들에게 매를 휘두르셨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중국도 큰 주님의 성전이다. 무슨 다른 목적으로 나무 심는 자들에게는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는 백성들이 가서 기도할 때 주님은 너무 기뻐하실 것이다.
그들이 그 기적을 경험하게 되면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온 세계에 뛰어나가서 사막에 나무를 심을 것이고 굶주린 자들을 먹여줄 것이고 못 배운 자들을 가르칠 것이고 병든 자들을 치료할 것이다. 기도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연이어 내 사고의 세계를 계속 벋어가자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기 시작한다.
나는 거의 50대 초반, 신촌에 있는 대학의 신학과정을 잠간 밟은 일이 있었다.
교회사 교수는 우리들에게 교정에 서있는 유명한 선교사요, 설립자의 동상 아래 제막문을 암송해 오라 명하셨다. 글 내용도 잘 이해 안 되는, 개인을 찬양하는 듯 한 내용의 암송이 내게 강한 거부감을 주었다.
다음 시간이 되었을 때 교수님은 내게 먼저 암송을 요구했다.
나는 당당히 안 외었습니다, 라고 외쳤다. 순간 그 교수님의 얼굴은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무척 화를 내셨다. 아주 큰 망신을 당한 후, 할 수 없이 그 글의 암송을 시작했다.
... 박사는 29세에 이 땅에 건너와서 .... 그 분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작은 구리로 그 모양을 내어 .... (이상 정인보 박사의 글)
그 다음시간에는 다른 학생들의 순서로 진행되었고 나는 그 때마다 속으로 같이 따라 암송을 시작했다. 한 열 번쯤 따라했을까? 하는데 그 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20번이 넘어가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아! 주님은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나도 그 사람처럼 다른 민족을 위해서 살라는 명령이셨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중국에 갈 때마다 지면있는 삼자교회 목사님들에게 이 내용을 계속 전했다. 어느 좀 모자란 듯 한 조선동포 전도사를 통하여 중국정부 종교국의 간부도 만나서 협조를 약속 받았으며 국내에서는 어느 국회의원도 협조하겠다고 언질을 주었고 또 이 일에 연관된 많은 명사들을 주님이 그 전부터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믿는 자들도 죽음의 고통을 안고 산다고 어느 구도자가 말했다. 다만 안도하면서 그 고통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이어 말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우리 공동체 단원들은 요즈음 서울역광장에서 매주말마다 찬양집회를 갖는다.
그들이 열심히 하면 아마 서울역 앞 데모와 노숙가족들의 무질서가 정복될 것이다.
그들이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들을 같이 저 천안문광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광장에는 중국 온 지역에서 달려온 중국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들과 함께 사막녹화사업단의 창단식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전날 저녁 전야제를 가지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찬양제를 시작할 것이다.
창단식이 끝나면 모인 무리들은 그 다음날부터 각 지역의 사막에 달려 갈 것이다.
우리는 밤마다 그 꿈만 꾸고 산다.
첫댓글 하나님의 말씀 전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감사합니다...아 멘~~~
귀한 사역에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우리 주님은 항상 어렵고 힘들때 찾아 오시고 만나 주셔서 새 힘을 주시는 좋으신 분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면 하늘의 상이 큼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합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교회이군요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에서부터 온다지요
찬양하다 은혜받고 기도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봉사하는것은 믿음과 은혜없이는 볼사는 안되겠지요
봉사하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