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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의 세상 외향성, 세상 내향성>의 줄거리 :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만난 사도 베드로의 믿음과 요한1서에서 만나는 사도 요한의 믿음은 한 예수님과 한 하나님과 한 성령님과 한 천국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서로 색과 맛과 향이 다를까요? '산 소망' '나그네' 등의 단어들로 드러나듯이 사도 베드로는 이 땅에서 하늘을, 시간에서 영원을, 어둠에서 빛을 향합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땅으로, 영원에서 시간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향합니다.
믿음의 세상 외향성, 세상 내향성
(요한1서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오늘부터 요한서신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요한복음은 주후 85~90년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한편 요한서신은 그보다 늦은 주후 90~9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고, 요한계시록은 그 후에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썼던 것으로 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은 큰 간격을 두지 않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을 알 때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가졌던 신앙의 특징을 붙잡아 보고자 합니다.
앞서 우리는 베드로전후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가진 신앙의 특징은 한 마디로 ‘산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그네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본문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표현으로 시작했던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시작되는 본문 1~10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봅니다. 본문은 크게 네 문단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2절은 예수님께서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아들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 세상이 만들어진 뒤에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영원함 속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시간과 공간의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습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설명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되심의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과 그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님을 통하여 사귐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5~7절에서는 그렇게 우리가 사귀어야 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온전한 빛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말과 행동 속에 어둠이 배어 나온다면 하나님을 사귀는 것이라 할 수 없으며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10절까지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와 저주 속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 결코 예수님을 통한 생명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귈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반드시 빛이 발산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없어서 빛이 발산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 속에서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모든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사도 요한이 가진 믿음의 특징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와 비교해 봅니다. 요한서신은 베드로서신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망이나 나그네라는 표현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을 향한다는 ‘세상 외향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 천국을 향하고자 합니다. 또 시간 안에 있으면서 영원을 향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태초를 향합니다. 여기서 태초란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천국만 존재하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둠에 덮인 세상으로부터 빛의 원천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향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태초로부터 지금으로 들어오려는 ‘세상 내향성’을 보여줍니다. 영원함에서 순간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하늘이라 부르는 천국으로부터 땅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세상 외향성’을 띄고 있는 반면, 사도 요한은 빛의 세계인 천국으로부터 세상 안으로 들어오려는 ‘세상 내향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세상 내향성’이란 ‘세상 내 폐쇄성’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 내 폐쇄성’이란 세상에 갇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세상 외향성’은 마음이 이 세상 밖으로 나가 예수님이 가 계신 천국을 향하는 소망의 형태를 띤다면, 사도 요한의 ‘세상 내향성’은 이미 마음이 세상 밖 천국에 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사도 베드로에게는 천국이 소망이고 목적지였다면,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천국은 출발점입니다. 그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강한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빛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내 몸을 통하여 발산돼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몸이란 온전한 빛을 발산하기 위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전등과도 같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켜져야 하는 전등입니다. 그리고 전등을 켜는 빛은 하늘에서부터, 영원의 세계로부터, 태초로부터 지금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께 딱 붙어서 좇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예수님을 믿고, 한 하나님과 사귀며, 한 천국을 집으로 삼고, 한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맛과 색과 향기가 전혀 다른 믿음의 강조점을 띄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물론 이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까지 포함하여 생각해 보면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진리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 하늘길을 진리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같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보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가?’라는 의로움의 문제와 유착되어 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이 어떻게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편 말씀드린 대로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나그네의 삶이 될 정도로 세상 밖에 있는 천국을 향하는 소망의 길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과 주님이 계시는 하늘에 가 있게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어서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공생애 때 예수님처럼 영원함이 순간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었고, 천국의 빛이 어둠의 세상 속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 태초의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공생애 때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사귐은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어둠이 없는 온전한 빛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속에 있는 전등과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내 몸을 전등 삼아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공생애를 사실 때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각 사도들의 강조점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갈등이 없는 관계, 다시 말해 하나님과 불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써의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격적 친분 쌓기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에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가 강조한 소망의 문제가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에게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영원한 세계가 땅에 내려와 표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에게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두드러진 강조점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죄란 마음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라는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적 바탕 위에서 드러나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죄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를 의롭지 못한 상태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에게 죄란 마음이 세상과 벗하느라 세상 밖 천국의 예수님과 하나님을 소망함이 꺼진 상태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소망이 꺼진 상태, 의식에서 천국을 향한 소망이 켜져 있지 않은 상태를 죄로 보았던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죄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의 빛이 내려와 발산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8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란 곧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죄란 어둠이 없는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빛을 발산하는 상태가 아님에도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없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고, 진리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결국 구원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모습이 뿌리 깊은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표현들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발견한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이유는 말과 행동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면서 아버지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셨습니다. 반면 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지도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죄이며 죄의 상태에서는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보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죄고 어둠입니다.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귄다는 사람이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스스로 말하며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빛으로 표현하고 또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이 빛과 사랑을 연결하는 단서는 사귐입니다. 이 사귐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복음서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7장 21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 때는 제자들조차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사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던 일이 제자들에게도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생각이 예수님을 통하여 발산되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시간 속으로 몸을 입고 들어오셨고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도 아버지와 사귐을 이루셨다. 온전한 빛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몸을 전등 삼아서 비추고 계셨다.’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9~10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사도 요한의 기준이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같은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면 어둠이고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사람들이 이렇게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며 자기가 죄인임을 모른 채 살아가는 모습을 염려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인격의 입맛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오히려 쓰게 느껴집니다. 은혜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음을 반복하여 유지함으로써 예수님을 많이 알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앎이란 곧 예수님의 입맛과 기호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식에서 자라 가지 못하면 은혜를 달게 느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도 베드로가 했던 말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없다는 증거이고, 마음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밖에 있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들에게 심각한 재정문제가 닥쳤다고 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면 심각한 재정문제 앞에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마음에 맞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바라는 것이 의로움이고, 내 말과 행동이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사도 베드로였다면 심각한 재정문제를 우는 사자와 같이 마음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마귀로 보며 ‘내 마음을 재정문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겠다. 마음이 재정문제에 먹히고, 매이고, 물려서 이 땅에 남아있어서는 안 되며, 세상 외향성을 띠며 천국으로 가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점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심각한 재정문제 앞에서 ‘내가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의 빛을 받는 전등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분 사도는 동일하게 마음과 재정문제를 연관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붙잡기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붙잡는 방법에서 강조점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도 요한의 글을 읽을 때는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요한일서 또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라고 시작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바로 산 소망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오셔서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영원한 세계와 천국의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 때문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그 사귐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온전한 빛을 발산하는 전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전적으로 오직 하늘의 빛을 발함이 아니라면 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제시되었습니다. 7절에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보장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의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생각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있어서 완전한 입체감을 띄고 온전한 형태로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앞으로 요한서신을 통해 사도 요한의 특징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지녔던 특징들도 다 내 것으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입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을 띨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요한의 서신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그 특징과 비교되는 다른 사도들의 특징까지도 동시에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온전한 형태를 이룰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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