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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게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의 줄거리 :
밧모섬에 유배 간 사도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알려주신 내용을 기록한 요한 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전에 있을 환란과 역사의 우주적인 종말 그리고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요한 계시록이 전적으로 성도 한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주적 차원을 담고 있지만 신비하게 한 개인이 듣고 지킬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내게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요한계시록 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오늘부터 요한계시록을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본문은 편지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그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1절의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는 부분에 착안한 것입니다. 여기서 ‘종들’이란 예수님을 믿는 성도 각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본문을 대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말씀의 내용이 각 개인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이며, 이 일들은 모두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사탄과 세상이 하나가 되어서 성도들을 향해 우주적인 차원의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한편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피조의 세계에 대종말이 임하고, 이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서론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일어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우주적 파국과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황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일을 다루는 책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3절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처럼 개인이 성경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정에 사람들이 모일 때면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을 필사하여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한 사람이 대표로 그것을 읽으면 여러 사람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3절 말씀의 원문을 보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라는 표현은 단수로 되어 있고, ‘듣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각자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주적 대종말에 관한 이야기와 어둠의 세력과 성도 사이에 일어나는 대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개인이 말씀을 지켜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은 근본적으로 나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주의 미래나 역사의 먼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론에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불식시키는 의미의 단어나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함에는 몇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모두 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은 십자가 복음에 입각하여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가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1절의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소개는 중요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완전히 다른 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오랜 시간 요한계시록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요한계시록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하는 가이드라인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예수님의 재림으로 임하는 우주적인 대종말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 사도 요한은 종말 직전에 일어나는 상황들을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그 일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주적인 대종말 후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18장까지는 바로 이 우주적 대종말 이전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아닌 7절을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독자적으로 직면하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고 인류는 현재 80억에 이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람들도 동시에 예수님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이러한 재림으로 이어지는 전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모든 시대의 교인들에게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1절을 보면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종들’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종들인 바로 우리를 가리킵니다.
앞서 ‘진리와 사랑’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의 삶은 결국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기에 종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결국 이 종들 개인에게서 반드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또 말씀 속에 나와 있는 뜻대로 지켜나가야 할 일들입니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은 당시의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성도가 읽어야 될 내용을 갖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요한계시록을 접할 때 어려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환란을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라고 여기며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막연하게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생각도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닌 것은 실제로 2,000년이 지나도록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상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광범위합니다. 실질적으로 2,000년 동안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세대가 얼마나 되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따라서 환란은 나와 관계없다는 관점을 가지고는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인 1,100년에 태어났던 사람이 70~80살쯤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종말 직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이러한 방향에서만 해석한다면 요한계시록의 본래 의도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100년에 태어나 죽은 사람에게도 요한계시록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중세 시대 때 1,000년에 태어나 죽은 사람에게도 요한계시록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요한계시록은 의미가 있는 책이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대종말 직전에 있을 상황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도록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이 점이 참 모순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누구에게나 유효하려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은 누구에게나 관련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0년에 요한계시록을 읽던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은 이미 일어난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요한계시록 서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말이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는 말씀대로 요한계시록은 모든 주의 종들에게 전해진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00년에 죽은 사람에게도 반드시 일어났어야 하는 일입니다. 다만 실제로 예수님의 재림은 100년으로부터 1,900년 이상이 흐른 지금에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모순 없이 이해되고 요한계시록이 의미 있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해석의 방향이 개인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도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로써 일어나야 하고 일어난 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경험하셨습니까? 혹은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우주적인 차원의 전쟁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어나고 있기에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갈 때 평강의 상태, 마음의 불안과 초조 혹은 기쁨과 만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증상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활 현장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강이 깨졌다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중에서 사탄과 귀신들이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빡빡하게 돌아가는 생활 현장에서도 평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사탄과 귀신들과 세상이 한편이 되어서 걸어오는 싸움에 대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이것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재림과 대종말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죽었든지 아직 살아있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의 재림 사건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의 재림과 간격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년 전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기 않았기 때문에 100년의 간격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아브라함은 4,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기에 재림과는 적어도 4,000년의 간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에 대한 오해가 만든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의 몸이 죽으면 영혼은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몸이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제대로 믿지 않다가 죽었다면 그리스도 밖에서 잠자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잠자는 상태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몸이 죽은 상태에서 잠자는 사람들에게는 100년이 지나든 1,000년이 지나든 의식이 1초도 지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브라함은 4,000년 전에 죽었지만 의식으로는 1초도 지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이나 모세나 사무엘과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죽은 지는 3,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다윗 또한 마찬가지로 몸이 죽은 뒤로 의식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잠자고 있기에 1초도 지나지 않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결국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뒤에 이루어진다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무려 6,000년이 지난 뒤에야 재림이 임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깨어나서 참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뒤로 1초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의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돈 문제로 걱정하다가 혈압이 올라서 죽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의식은 그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돈 문제로 걱정하던 의식의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죽은 그 순간의 의식으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 나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1,000년, 2,000년, 3,000년이 흘렀어도 1초도 경과되었다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때의 믿음의 상태, 영적인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다가 의식이 깨어나 예수님을 마주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42~43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 /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없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둘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병 낫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생각만 하다가 죽었다면 1,000년 뒤에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그 마음 그대로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건강에 사로잡혀 있는 의식으로 죽음에서 다시 깨어나서 예수님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다면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년 전에 예배당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세례받아서 교인이 되었고 지금은 집사라고 해서 항상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 출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깨어 있음이란 내 마음의 관심이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만을 직면하고 아버지만을 유일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깨어있어서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구원관에서는 한 번 세례받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관으로 따지자면 깨어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열중하며 살았습니다. 세례받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더라도 회사에서 승진만 생각하다가 죽었다면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가 믿었던 유일한 기쁨과 유일한 만족과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 승진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승진을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 재림 때 만나게 되는 내 의식이 진짜 나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죽는 그 시점이 예수님을 만나는 시점입니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 이전의 상황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000년 동안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에 죽은 사람이나 700년에 죽은 사람이나 모두가 다 예수님의 종말 이전의 상황을 살고 있었음에는 동일합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살고, 직장에서 살고, 시장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살아가는 나와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우주적인 차원의 이야기들은 무관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전쟁과 같은 세상의 사건 사고가 아닙니다. 세상에 먹히고 정복된 자들의 역사는 성도들을 위한 주변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관심의 핵심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독생자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붙잡고 있는 여러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시야의 중심점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큰 나라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들을 대단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나 한 사람의 인격은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천국이라는 차원과 마귀가 권세 잡고 있는 공중이라는 차원과 육체로 살고 있는 땅이라는 세 가지 차원이 겹쳐져 있습니다. 천국과 공중과 땅의 갈등이 빚어지는 전쟁터는 아마겟돈 전쟁이나 중동 땅이 아닙니다. 핵폭탄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시발점이 어디냐, 넓은 들판에 수많은 군대가 모여서 지구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에게 잡히실 때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며 2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계시받은 전쟁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쟁은 그런 전쟁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일 수 있고, 그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크기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는 곧 지구보다도 나 한 사람이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구보다 더 큰 마음의 크기는 발휘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 세상에 갇힌다면 스스로를 개미 한 마리로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삼십만 군대를 끌고 왔습니다. 이때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역사는 이처럼 사람을 개인으로 다루지 않고 삼십만의 무리로 기록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앞에 날아다니는 날벌레 한 마리조차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고, 28절에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고 계십니다. 나 한 사람의 인격이란 피조의 세계 전체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의 규모를 무시하고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일은 나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없다면 세상에 질뿐입니다. 이 전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면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구조차 티끌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는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독생자 예수를 믿는 성도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세상 전체를 이기는 승리가 나타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지구 위에서 어느 나라와 어느 민족이 전쟁을 하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세상에 져서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끼리 전쟁을 해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것은 하나님께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가정에서 여러분이 배우자를 마주할 때, 자녀와 마주할 때, 또 직장 생활을 할 때 여러분 안에서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나타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나 한 사람은 지구보다 큰 사람입니다. 지구는 하나님을 담지 못하지만 나 한 사람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주적 차원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우주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우주와 같은 규모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소우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소우주가 아닙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 우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어떠한 순간에도 십자가 생활화를 놓을 수 없습니다. 지구가 열 조각이 나는 핵전쟁이 일어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세상에서 대환란이 벌어질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습니다. 지구 위에서 환란이 일어나든 종말이 임하든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와도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에게 무서운 일이지 우리에게는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갈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죽으면 아버지 품에 안겨 잠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독생자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와 있는 사람인지 예수님 바깥으로 나간 사람인지를 보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에 대해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 나오게 하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저항합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천국과 공중과 땅이라고 하는 세 개의 차원이 겹쳐져 있는 인격 상태인 나에게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로써의 전쟁입니다.
오늘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이 전쟁에서 마귀 쪽으로 승세가 기울어진다면 평강은 깨어지고 근심과 걱정과 불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감정이 아닌 우주적 차원에서 일어난 싸움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지구보다 큽니다. 우주를 지으신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나 한 사람을 향한 귀신들의 저항도 그토록 거세게 달려듭니다.
눈에 보이는 외관상의 어려움들은 우리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은 천국과 공중과 땅의 세 차원이 겹쳐져 있는 우주적 전쟁터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미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나게 될 일들의 내막을 밝히며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승리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계시록을 이 땅에 허락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내게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계시를 올바로 받게 하시고,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우주적인 전쟁 가운데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