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짜다 / 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져봐 배가 고플 거야
바늘로 빵을 찌르는 제빵사의 손길
먹줄 실 뽑아 바닥을 튕기는 거미의 솜씨
어긋난 선을 바늘이 엮어주면
옷이 한눈에 주인을 찾아, 보란 듯이 걸쳐 줄래, 그거면 충분할 거야
버스는 늘 먼저 떠나
박물관 뒷길은 혼자된 연인만 걸어가지
거기 길이 끝난 곳에 당도하면
길과 길을 잇는 재봉틀이 떠오를 거야
한 벌의 옷을 짓고 거기에다 누군가 몸을 넣는다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머리끝에 꽃이 달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