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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인은 출생하지, 가입하지 않는다>의 줄거리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거듭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그 수효가 중다한 민족으로 번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다한 사람 하나하나가 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부터 이미 예정 가운데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의 원형인 이스라엘은 외부에 있던 자들이 가입하여 이루어진 단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명단에 있던 자들이 교회이고 이들은 반드시 출생합니다.
교인은 출생하지, 가입하지 않는다
(출애굽기 1:1~22)
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창세기는 우리에게 믿음의 원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이 개인적으로 관계하는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믿음을 입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한편 출애굽기는 이 믿음을 가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짐에 있어서 어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번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나타난 것이 언급됩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왕은 없을 것입니다. 새 왕이 요셉을 몰랐다는 것은 요셉이 이방 민족이었음을 알고 그의 치적을 마음속에서 무시했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요셉의 치적을 없는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박해가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 1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에 대해 말씀해 주실 때 400년 동안 애굽 사람에게 고통받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 있었던 기간은 430년입니다. 400년 동안 고통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것을 염두에 두자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 17년 만에 죽고 난 뒤 13년이 지나는 동안에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 살아있을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종차별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고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80세 되었을 때 일어난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46년입니다. 이로부터 환산하면 모세의 탄생은 주전 1526년이 됩니다. 학자들은 노예 생활이 이쯤에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도 노예 생활이 80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이 일어나기 80~100년 전쯤에 애굽 사람들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이 우리의 주의를 끕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거듭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거대한 수효의 집단이 되었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마치 밀가루 반죽 덩어리처럼 개개인이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하나의 큰 집단으로 발전했다는 것에 주목하게 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반복하신 이 약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실 때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의 명단이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은 먼저 조직이 만들어지고 조직 외부의 사람들이 가입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이라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거기에 속하고 싶은 사람들이 외부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되리라는 약속에 하나님이 예정의 명단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예정하신 명단에 있던 자들이 태어나면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외부에 있던 자들이 회원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예정의 명단에서 출생한 자들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교회의 원형입니다.
출애굽기를 교회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주권자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의 원형이 그림 그려졌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대답이 이스라엘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이 창세기에서 그림 그려진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 되어가는 우여곡절의 변천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 가운데 있다가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교회의 원형인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 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이스라엘 안에서 출생하는 자들이 교인이 되고,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예정 밖에 있는 자들이 가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이 명단에는 아브라함의 혈육 상의 자손들 중에서도 제외된 자들이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제외되었고,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들도 제외되었습니다. 이삭이 낳은 자 중에서는 에서의 자손들이 제외되었습니다. 반면 교인의 명단에는 바로 우리도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단에 있다가 이 땅에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교회의 속함에 대해 오해해 왔습니다. 예배당 조직을 교회라 불렀고, 조직 바깥에 있던 입장에서 조직 안으로 들어가면 교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출애굽기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를 통해 그려진 믿음을 전수 받고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가졌던 오해를 교정해야만 출애굽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내가 교인이 되었다’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시고 예정하신 명단에 내가 들어있다면 사실상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교인입니다. 출생과 더불어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교인이라는 증거가 어떻게 확인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을 유일한 신의 이름으로 붙잡게 되는 것이 증거입니다. 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배당 안에 있기 때문에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유일한 신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명단에 있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 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혈통 중에 태어나면 곧바로 선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이 각각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 안에 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만인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그 만인 중에서 당신의 예정 가운데 적어 두신 명단이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한 것처럼 태어나면 곧바로 이스라엘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에 있다가 태어난 자들이 교인이 됩니다. 다만 자기가 교인인 것을 아는 시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붙잡게 되었다면 ‘나는 교인이구나!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에 속해 있었구나! 이제야 알았다!’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면 집에 있어도 이스라엘인이고 밖에 나가도 이스라엘인입니다. 밥 먹을 때도 이스라엘인이고, 밭에서 일을 할 때도 이스라엘인이며, 결혼을 할 때도 이스라엘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교인이라면 집에 있을 때도 교회에 있는 것이고, 직장에 있을 때도 교회에 있는 것이며, 밥 먹을 때도 교회에 있는 것이며, 결혼할 때도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 속에 있다가 출생한 사람 전체가 교회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정 가운데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유일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으면 나는 교인입니다. 교인이기에 집에 있어도 교회에 있는 것이고 밖에 있어도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집에 있어도 이스라엘인이고 밖에 있어도 이스라엘인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를 출석하는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장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태어나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의 원형에 소속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던 자들이 태어나면 교회에 소속됩니다. 그리고 예정 가운데 있는 증거는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붙잡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내 마음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고 전능하신 신이고 창조주요 주권자이심을 믿는 것이 바로 내가 예정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매듭지어지고 완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의 우여곡절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은 교회를 이룹니다. 그 예정의 명단이 이루는 교회 안에 출생한 자들이 창세기를 통해 드러난 믿음을 갖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는지를 출애굽기가 보여줍니다.
출애굽기는 예정의 명단 가운데 있던 자들이 출생하여 교회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아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최측근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산파 이야기와 하나님 경외를 통해 제시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번성했고 이에 바로는 매우 강경한 인구 제한 정책을 실행합니다. 15~16절을 보면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십브라와 부아라는 두 산파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유명한 산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 경외가 출생하여 교인이 된 사람들이 앞으로 이루어 내야 할 도달점입니다.
출생함으로 교인이 되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라는 표현을 이미 접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마지막으로 시험하시며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를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장 12절에서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아까워함과 하나님 경외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란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만 이 두려움은 일반적인 공포가 아닙니다. 공포는 어떤 일이 내게 주어지거나 생길까 갖는 두려움이라면, 경외는 어떤 대상이 내게서 없어지거나 잃어버릴까 갖게 되는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움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이삭이 없어지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이 없어지는 두려움을 더 크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가짐을 하나님을 경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두 산파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 경외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의 원형에 속한 사람들의 과제가 하나님 경외로 설정되고 목표가 제시됩니다. 앞으로 모세의 출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80세가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예정의 명단 가운데 있던 이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경외에 도달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출애굽기의 내용과 주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통해 형성됩니다.
1장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교회는 가입하거나 출석하는 특정 장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인은 기존의 조직에 가입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습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시며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붙잡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의 예정의 명단 가운데 있던 자입니다. 이미 출생하면서부터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이것을 알았다면 하나님 경외의 자리로 가야 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교회 안에 속했는지 아닌지는 회원증을 쓰고 등록카드를 내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한 교인이 되는 것은 내 마음에서 결정되는 일입니다. 많은 소중한 대상들 중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경외하는 자가 교인입니다.
돈이 없어짐을 두려워하면 돈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없어짐을 두려워하여 건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건강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통치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자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서 붙잡을 이름들이 많습니다. 그 이름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되었다면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내 마음속에 많은 이름들이 간직되어 있는 중에 모든 이름을 떨쳐내고 하나님의 이름 하나만을 붙잡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제시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으로서 이미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사닥다리 꿈을 통해서 하나님 경외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사닥다리를 타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으심에 마음 전체를 쏟지 못하고 자기 미래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럼으로써 130세가 될 때까지 험악한 세월을 살고서야 요셉을 계기로 하나님 경외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경외라는 목표 의식이 생겨납니다. 우리에게는 없어지면 두려움이 생길만한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 한 분이 없어지면 두려워하는 과정까지 가는 것이 바로 교인입니다.
교회의 탈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역교회를 안 나간다고 교회에서 탈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교회에 속한 교인이 될 수 있고 교회를 탈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되 유일하게 없어지면 두려워할 대상으로 붙잡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경외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면 집에 있든 직장에 있든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하나님 경외 대신에 돈 경외, 건강 경외, 사업 경외, 배우자 경외, 자녀 경외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내 마음에서 없어지면 두려울 것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이 되어있는 상태라면 예배당을 가고 안 가고는 상관 없이 교회에서 탈퇴한 것입니다.
예배당은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 경외라는 목표를 향하여 가는 과정 중에 있지 않으면 교회에서 탈퇴한 것입니다. 예배당에 출석하면 교인이고 출석하지 않으면 교회를 탈퇴하는 게 아닙니다. 교인은 출생으로부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정의 명단 속에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출생하면 이미 교회 안에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내가 교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이것을 몰랐던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출생하는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상징적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종교 안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저 같은 목사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돈 경외해서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잘 믿으면 돈을 지킬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건강을 좋아해서 건강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잘 믿으면 건강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바로의 말을 듣는 산파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선민의 출생을 죽여버립니다. 교인이 교인답게 되기 위하여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잘라버린다는 것은 죽여버리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좋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있음입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을 내가 잊거나 잃어버리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제일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지도자라면 산파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산파의 조건은 하나님 경외입니다. 본문의 두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바로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선민을 살려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야곱의 사닥다리 꿈을 기억하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놓치면 망한다. 죽는다. 큰일 난다.’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집에 있든, 직장에 있든, 시장에 있든, 여행 중이든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야 한다는 하나님 경외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없다면 이미 교회 바깥으로 나간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전해도, 없어지면 최고로 두려운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교인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도 교회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교인이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에게 명확하고 뚜렷하게 제시되고, 강조되고, 요구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출애굽기를 함께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원하시는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도 진정한 교회에 속한 진정한 교인들로 온전히 서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의 원형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속한 교회가 무엇이며 교인이 어떤 자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출애굽기 전체를 통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우리 각자에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