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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천마총,첨성대유적지
경주 불국사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 창건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751년 당시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 두 번째 중창이 시작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1593년 왜군에 의해 파괴된 불국사는 1604년 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불국사의 거대가람으로서의 위용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1966년부터 부분적인 보수를 거처 1973년 마침내 현재의 불국사 모습을 갖추었으며 2012년부터 시작된 석가탑 해체 복원 작업이 2015년 마무리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와중에 유물의 완벽한 복원과 보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의 문화정책의 전시물로서 수난을 겪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경루(經樓) ·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泛影樓) ·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2008년 12월에서 2009년 12월까지 다보탑 해체 수리작업이 있었고 2012년부터 2015년 석가탑 해체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사리장엄구가 재봉안 되기도 했다.
1909년 대웅전 | |
1914년 불국사 전경 | 1919년 안양문 |
1919년 범영루와 청운교 백운교 사이 석축 | 1919년 안양문과 연화교 칠보교 |
1919년 청운교 백운교 모습 | 1919년 청운교 백운교 |
1924년 대웅전 수리 모습 | 1924년 불국사 전경(당시 일제의 보수 설계도에는 좌경루가 빠져 있음) |
1960년대 불국사 모습 | 1966년 석가탑 해체 수리 |
1969-73년 복원공사 현장 | 2015년 9월 석가탑 사리 이운식 및 재봉안식 |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국보 제22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26호)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천마총天馬塚황남동 제155호분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관. 국보(1978.12.07 지정). 높이 32.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널 내부의 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던 것이다. 너비 4.5cm 가량의 금판을 관테[臺輪]로 삼고 그 위에 출자형솟은장식[出字形立飾] 3개와 사슴뿔장식[鹿角形立飾] 2개를 금못으로 박아 고정시켰다.
관테의 상하단에 점열무늬[點列紋]를 타출하여 평행선대를 만들고 이 내부에 파상선무늬[波狀線紋]와 원무늬[圓紋]를 배치했다. 그 위에 다시 금제원형달개[金製圓形瓔珞]와 비취곱은옥[翡翠曲玉]을 금실[金絲]로 매달았다.
출자형솟은장식은 곧게 솟은 주간의 좌우측면에 각기 4개씩의 가지[橫枝]가 직각을 이루며 올라가고, 사슴뿔장식은 곡선을 그리는 주간에 좌우 2개씩의 가지가 교차되어 있다. 모두 주간과 가지의 끝부분은 보주형을 이루며 주연을 따라 2줄의 점열무늬를 돌리고 금제원형달개과 비취곱은옥을 금실로 매달았다.
천마총 금관장식
천마총에서 출토된 나비 모양 과장식과 새날개모양관장식. 보물 제617·61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껴묻거리 상자에서 나란히 발견되었다. 날개부분이 짧은 것(보물 제617호)은 나비모양관장식[蝶形冠飾]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1장의 두툼한 금판을 오려서 중앙 상단은 보주형, 좌우는 짧은 날개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전체의 상단 이상의 부위에는 9개의 역심엽형 투조무늬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중앙의 상단에 있는 1개의 투조무늬 아래에는 다시 마름모형의 투조무늬를 시문했다. 그 다음에 투조무늬와 전체 상단의 외연을 따라서 타출한 점열무늬를 배열하고 약 150개의 달개를 줄줄이 꿰어 부착시켰다.
중앙부의 아래쪽은 약간 접힌 상태에서 쇠못이 박혀 있어 다른 관모 등에 부착했음을 알 수 있다. 날개부분이 긴 것(보물 제618호)은 윗부분이 산자형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괴운무늬를 투조했고 아랫부분에 쇠못이 남아 있어 다른 내관에 붙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금판의 양쪽에는 새의 날개, 혹은 소뿔 모양의 긴 금판을 못으로 연결했는데 여기에도 역시 괴운무늬를 투조했다. 중앙 상단과 양쪽의 금판에 투조된 부위를 따라 금제달개가 매달려 있으며 점열무늬를 빈틈 없이 돌아가며 새겼다.
천마총 금동장봉황환두대도
천마총 널 내부 피장자의 좌측에서 출토된 칼. 보물 제621호. 길이 98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칼자루와 칼집 표면에는 금동이 입혀져 있다. 고리 안에는 1마리의 새가 장식되어 있는데 봉황으로 추측된다. 칼집에는 소형의 자도와 머리핀 모양의 장식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자도의 고리 안에도 역시 봉황장식이 달려 있다. 칼집 중앙의 측면에는 원형의 구멍이 뚫린 쇠장식이 돌출되어 있다.
천마총 관모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 관모. 국보(1978.12.07 지정).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널과 껴묻거리 상자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여러 장의 금판을 금못으로 결합시키고 테두리는 얇은 금판으로 복륜한 형태이다. 금모를 구성하는 금판에는 산형무늬·괴운무늬·T자무늬·원무늬·능형무늬 등이 투조되어 있으며 빈틈에는 직선, 곡선, 혹은 톱니 모양의 점열무늬들을 빽빽이 배치하고 있다. 머리에 얹히는 아랫부분의 평면은 볼록 렌즈 모양을 띠고 있다.
천마총 금제 허리띠
천마총 널 안에서 출토된 금제 꾸미개. 국보(1978.12.07 지정).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44개의 띠꾸미개[銙板]와 같은 수의 심엽형수하부, 띠고리[具]와 띠끝꾸미개[帶先金具] 각 1개, 그리고 13개의 띠드리개[腰佩]로 구성되어 있다. 네모난 띠꾸미개에는 괴운무늬를 간략화한 투조무늬가 시문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심엽형의 장식이 달려 있다.
수하부에서 늘어진 13개의 띠드리개 중 11개는 방형과 횡타원형의 금판을 교대로 엮어 내린 점에서 공통적이며 끝부분에 규형금구, 곱은옥, 원통형금구, 족집게, 약롱형투조금구, 물고기모양[魚形]금구 등을 매달았다. 나머지 2개는 특이한 형태로 그중 하나는 크고 작은 횡타원형의 금판들을 교대로 엮어 내린 후 규형금구를 매달았으며 표면에 많은 달개[瓔珞]가 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달개가 달린 사슬 모양의 금고리[金環] 끝부분에 투조금모와 숫돌 모양의 금판을 접합한 형태이다.
천마총 목걸이
천마총 널 내부 피장자의 가슴부위에서 발견된 목걸이. 보물 제619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주식과 좌우 각 1개씩의 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식은 중앙 하단의 경옥제곱은옥[硬玉製曲玉]을 중심으로 청색유리구슬·금은제중공옥·금제방주형금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합방법은 종으로 7줄, 횡으로 6줄 가량의 청색유리구슬을 연결하고 그 아래에 금은제중공옥을, 다시 그 아래에 방주형금구를 연결하여 하나의 단위로 삼고 좌우 모두 5개의 단위가 이어지며 중앙 하단의 곱은옥 주위는 청색유리구슬로 연결되어 있다.
중공옥과 방주형금구에는 심엽형달개[心葉形瓔珞]을 매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부식은 주식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으나 유리구슬·곱은옥·금구의 크기가 작고 결합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천마총 유리잔
천마총 껴묻거리 상자에서 발견된 유리잔. 보물 제620호. 높이 7.4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맑고 투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다. 깊은 바리의 형태로 바닥은 둥그스름하며 아가리는 밖으로 벌어졌다. 아가리 아래에서 몸통의 윗부분에 걸쳐 선조무늬가 요면을 이루며 위·아래 방향으로 베풀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거북등무늬가 역시 요면으로 베풀어져 있다. 그밖에도 짙푸른색의 유리로 만든 굽다리잔이 1점 있으나 파손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다.
천마총 청동제자루솥
천마총에서 출토된 청동제 자루솥. 보물 제622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납작한 편구형의 몸통에 짐승다리 모양의 다리가 3개 달리고 뚜껑·손잡이·귀때 등을 갖추었다. 뚜껑은 몸통과 경첩으로 연결되어 여닫게 되어 있으며 뚜껑의 윗면에는 보주형의 꼭지가 달려 있다. 손잡이는 1번 꺾인 후 길게 연결되고 나무자루를 꽂을 수 있도록 속이 비어 있으며 나무자루를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다. 몸통의 중앙에 달려 있는 양의 머리는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귀때의 기능을 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경주 첨성대
국보(1962.12.20 지정).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원주부·정자형두부로 나누어진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며 〈고려사〉에도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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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원주부(圓柱部)·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 높이 39.5㎝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은 이보다 약간 큰 한 변이 536㎝, 높이가 39.5㎝인 직육면체 석재 2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가 있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 14번째 단의 둘레는 1,170㎝, 제일 윗단의 둘레는 920㎝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이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이다. 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 돌아가 있다.
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비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 끝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정자형의 두부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단은 306×32×32㎝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놓았다. 정자석의 내부에 220×64㎝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 끝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 書雲觀志〉나 〈문헌비고 文獻備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和田]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洪思俊)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박동현(朴同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후 상설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전상운(全相運)은 첨성대가 규표(gnomon)를 중심으로 한 다목적 관측대일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김용운(金容雲)은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 周髀算經〉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용범(李龍範)은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했다. 또 박성래(朴星來)는 첨성대를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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