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는 꽃
이행자
열여섯 소녀는 수학 과외 선생님을 좋아했다
이웃에서 하숙하던 선생님이 거처를 옮길 때
가사 시간에 배운 감자 크로켓을 정성껏 대접하고
이삿짐 보따리를 들고 선생님을 배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긴 머리를 곱게 늘어뜨리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선생님의 근무처인 D여고를 방문했을 때
소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며
바람 부는 교정으로 걸어가는
그 머쓱하던 선생님의 뒷모습
그렇게 아픈 봄은
디테일한 나의 꿈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깨어보면 허무한 세상
사랑하였으므로 슬프지만
흔들리며 피는 봄꽃인 것을
유월의 장미
이행자
스무 살, 초록 순결
드리우지 못하여도
유월이면
그 벤치에
넝쿨로 뻗어가는
빠알간 장미 되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의 딸을 낳아준
당신을 그리워 할 것입니다
한낮의 꿈
이행자
푸른 오월이 이제 막 떠나려는 채비를 할 즈음
1호선 3호선이 만나는 1번 출구에서
아득한 그때에
우린 이미 약속한 것처럼
환한 미소 악수를 하고
수십 번 어쩜, 백 번도 넘게 스쳤을
그 보도블록을 밟으며
철판구이 집에서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실 때
여중 1학년처럼 재잘거린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꼭 닮은
둘째 오빠
오늘 그와 비슷한
검은 눈썹의 서울대생
그 남자는
눈앞을 가로막는 복권방에서
"복권 사줄까?"
“으응~"
자동복권 2매 중 한 장을
내게 떼어 주네
만약 복권 당첨되면 어쩌지?
그럼 우리 여행가요
장거리 비행이 싫어서
동남아만 다녔다고
뉴질랜드 가고 싶다네
난 거기 갔다 왔는데에
그럼 호주로 가자고~ 오케이
복권 당첨 될 리도 없지만
어차피 꿈속의 데이트라면
못할 약속 무엇이랴
오래된 골목길 꽃집 앞에서
"꽃 사줄까?"
"으응 나 꽃 좋아하는 것 어찌 알았지?"
꽃 싫어하는 여자도 있나암
아, 꿈결 같은 그 음성
한낮의 데이트
하얀 안개꽃 다발 속에
보랏빛 스타티세 가슴에 안고
이제 태양의 나라로 출발하는
이 나른함
지하철은 서쪽으로 뻗어만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