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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경 산 사람들 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병마용
사천성의 심장부를 다녀와서
제1부. 사천성의 요람 황룡(黃龍), 구채구(九寨沟)
7월30일(금) 황룡(黃龍)
한달 반 전부터 쓰꾸냥산이 있는 사천성에 가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기는 하였는데, 막상 일상에 쫒기다 보니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여행겸 산행을 떠나기 열흘 전 지구별여행자(이하 “대장”이라 칭한다.)님과 고니님과 함께 식량 및 산행일정을 검점하면서 본격적인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그런데 함께 하기로 한 고니님이 갑작스런 개인사정으로 불참한다는 통보를 5일전에 받고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혼자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문제, 이른 아침 비행기(7시)를 타기 위해서 공항까지 가는 부분이 부담으로 작용된다.
전 날 일찍(밤 9시) 잠을 청했는데 긴장이 되었던지 밤 12시경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이불속에서 뒤치닥 거리면서 시간을 소비하다가 새벽2시경부터 결국 짐을 정리해 놓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인터넷을 보다가 5시경 집을 나섰다. 쉽게 잡히지 않던 택시를 5시 30분경 겨우 잡아 탔는데 택시기사는 사천으로 가는 공항이 2호 터미널 인지 아니면 3호인지 모르겠다면서 일단 2호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입구에 위치한 안내데스크에 있는 여직원한테 물어보니 친절하게 3호 터미널로 무료셔틀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시간은 여섯시를 넘고 있어 식은땀이 이마와 등 뒤에 흐르면서 범상치 않은 이번 여행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9시 20분 사천성에 있는 구황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황량하기 그지 없다. 시간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버스가 운행 되는게 아니고 손님이 꽉 차야만 출발하는 체계인데 내가 황룡으로 가기 위해 매표소에 들렀을 때는 이미 황룡으로 가는 손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가라고 여직원은 권유한다. 마침 그 앞에 택시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나보고 터무니 없는 가격(240원 ~ 280원)을 제시하며 호객행위를 한다. 나와 같이 이 곳에 내렸던 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장님과 전화연결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만 했다. 마침 한국인 관광객을 마중나온 조선족 가이드를 만나서 그들 틈에 같이 가는 걸로 양해를 구해서 황룡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구황공항에서 황룡까지는 차마고도를 따라 약 58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지대가 해발 3,000미터 이상되다 보니 산소부족으로 인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곳은 티벳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라마교를 믿으며, 한족대비 40%이상의 장족(티벳)이 모여 살아 자치구가 형성되었고, 중국정부가 실시하는 화장제도와 산아제한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 1부1처제가 아닌 1부 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이다.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 앞서 만들어진 인류 최고(最古)의 교역로로, 중국 서남부에서 윈난성[雲南省]·쓰촨성[四川省]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인도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이다. 윈난성·쓰촨성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했다고 하여 차마고도(茶馬古道)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장족들에게 있어서 야크와 말은 인생의 동반자이며, 버섯등이 주된 식량자원이다. 학교, 공장, 병원시설등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만큼 낙후되어 있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9월말까지 도로보수를 완공한다는 미명아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어서 먼지가 눈처럼 날리고 있으며, 도로 곳곳에는 커다란 돌 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차로 통행하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12시가 채 못되어 황룡에 도착하여 대장님을 조우한 후, 시간적 여유가 없어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많이 걷지 않았음에도 등산화 밑창이 나가 떨어져 덜렁덜렁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등산화도 고산병에 걸린 모양이다. 하여튼 꼬임의 연속이다.
황룡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누런 한 마리 용이 누워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3,400여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회질, 모래, 썩은나무가 어우려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곳이다. 그중에서 오채지(五彩池)는 대표적인 연못으로 해발 3,576미터 위치하여 마치 푸르른 옥쟁반 같으며 붉은색, 자주색, 하늘색, 녹색등 여러 가지 색조로 오색찬란한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황룡 오채지>
오채지를 돌아 나오면 황룡고사(黃龍古寺)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고대사적을 고찰할 수 있고 도교문화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내부수리공사로 들어 갈 수 없어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다.
황룡의 두견화는 열향두견, 두화두견 등 17개종으로 종류가 다양하며 늦봄과 초여름에 오색찬란한 두견화가 만발하여 황룡의 독특한 유월설(六月雪) 경관을 이룬다고 한다.
두견화 단지를 지나 내려오다 보면 사라영채지(娑萝映彩池)가 나오는데 사라는 두견화를 상징하며 매년 4-5월에 앞다투어 피어 두견화는 연못의 물, 푸른하늘과 서로 어울려 더욱 아름다움 광경을 이룬다고 한다.
물속에 거꾸로 비친 구름과 밀림의 그림자가 실물과 구분하기 어렵다 하여 붙여진 명경도영지(明净到英池)는 공사중인 관계로 볼 수 없었으며, 황금빛 석회탄을 형성한 금사포지(金沙铺池)와 신선이 몸을 깨끗이 씻고 도를 닦았던 세신동(洗身洞)을 거쳐 내려오니 연대비폭(蓮臺飛瀑)에 이른다. 이 곳은 폭포의 길이가 167미터, 폭 19미터로 황금빛을 띤 석회물로 마치 “용의 발”과도 같으며 삼림속으로부터 웅장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황룡의 주요한 골짜기는 옥추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골짜기의 길이는 약 7.5킬로미터, 넓이는 1.5킬로미터로 석회화채지와 종유석등으로 이루어져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크고 톡특한 풍경을 자아내어 1992년 세계 자연유산 명록에 수록되었다.
15시 10분경 대장님과 함께 난주(兰州)부터 같이 여행을 해 온 야마꼬님을 매표소 입구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후, 15:30분 구채구로 가는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차에 몸을 실었다. 흙먼지가 펄펄 나는 비포장도로와 포장길을 번갈아 가며 달리던 차는 천주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난데 없는 양떼들이 무리를 지어 도로를 건너고 도로 곳곳에 공사중인 구간이 많아 여러차례 급정거와 급출발을 반복한다.
계속해서 눌러대는 경적소리를 들으며 굽이굽이된 길을 가다보니 몸이 좌우측으로 흔들리고 정신이 혼미해져 잠을 이룰 수 없다. 낡은 가옥에는 장족의 특징이자 상징물인 각종 형형색색의 깃발이 오성기와 함께 휘날리고 있다.
3시간 여만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30인승 버스 트렁크를 열어보니 가방은 온통 흙먼지로 뽀얗게 쌓여 있어 얼마나 험난한 길을 왔는지를 말해준다. 버스 터미널 출구 주변에는 호객행위(주숙, 안마)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날 정도이다. 당초 예약했던 유스호스텔은 공간이 너무 비좁을 뿐만아니라 중국 여자 한 명과 같이 지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로 급히 옮겼다.
저녁8시 숙소앞에 마련된 야외 탁자에서 마파두부와 오이무침, 토마토계란탕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은 다음, 가게에 들러 수박과 음료수를 사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 곳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이하려 굉음과 함께 흙먼지를 뿜어내며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곳이 많다. 찔끔찔끔 나오는 샤워물 만큼이나 쓰꾸냥산에 오를 등산화 구입 문제로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여러 생각 끝에 8월 1일 합류하는 울프님에게 등산화를 구입해서 와 달라고 전화를 걸어보지만 너무 늦은 시간인지 전화를 받질 않는다.
7월31일(토) 구채구(九寨沟)
똑딱똑딱 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음성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극해 깨어보니 벌써 8시이다. 많은 인내심과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샤워기와 씨름하고 나와보니 대장님이 보이질 않는다. 쓰쿠냥산 초입에 위치한 일륭으로 가는 차표를 구하기 위해 이른 새벽 성도로 먼저 출발했다는 야마꼬님의 전언이다. 수박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야마꼬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구채구로 향했다. 그런데 입장할인을 받을 수 있는 학생증을 숙소에 놓고 오는 바람에 다시 숙소를 갔다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문표-210원, 차표-90원)
구채구(九寨沟)는 산좋고 물 맑은 명승지로 40킬로미터 길이의 Y자형 모양의 골에 9개의 티베트 동네가 자리잡고 있다 하여 구채구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구채구 장해>
10시50분경 차를 타고 장해로 올라가는 도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관광객들은 자연의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에 탄성을 자아낸다. 11시 35분에 구채구의 최대호수인 장해에 도착했다. 드넓게 펼쳐진 장해는 보는 거리에 따라 물의 색깔이 달리 보이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해발 3,100미터에 위치한 이 곳 주변에는 팬더곰과 금빛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안내도가 있지만 쉽사리 볼 수 없다.
오채지로 가기 위해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과 연인들이 저마다 손을 잡고 천천히 가고 있어 빠르게 이동 할 수가 없다.
어제 황룡에서 보았던 오채지가 이 곳 에도 같은 이름으로 있는데 관광객들의 발을 놓아주질 않고 있다. 현지의 티베트족들은 오색이 창연한 이런 호수를 해자(海子)라고 부른다.
<구채구 오채지>
하산하는 차를 타고 Y자형의 분기점(갈림길)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한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식당에는 많은 인파들로 인해 혼잡을 이루고 있는데 줄을 서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횡렬로 늘어진 상태로 서로 먼저 달라고 아우성이다.
13시40분 장해와 다른 방향인 원시산림(原始森林)으로 가는 차에 올라 30여분을 달리니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도 장족복장을 임대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환경을 배경으로 사진 찍어주는 상인과 매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수목으로 형성된 이 곳은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처를 제공해 줘 더 없이 좋다. 정상에서부터 내려가는 길을 차를 이용하지 않고 야마꼬님과 함께 걸어서 가기로 했다.
<원시삼림>
쓰러진 고목과 아가씨의 긴 생머리처럼 풀어 헤쳐진 채로 물속에 잠긴 수풀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새들의 지저귐이 정겹게 느껴지는 초해(草海,Grass Lake)와 천아해(天鵝海,Swan Lake)는 분명 지상낙원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아름다운 새들이 노니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자 했으나 기술부족과 새들의 비협조로 담아 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풍경을 유유자적 즐기면서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카메라에 옮겨 담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산책로가 없는 관계로 차를 타고 이동하라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전죽해(箭竹海)와 웅묘해(熊猫海)을 대충 둘러본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겨 오화해(五花海)로 향했다. 이 곳은 흙과 산체가 무녀져 내린 돌로 막혀 이루어 진 곳으로 칼슘과 마그네슘, 이끼와 수조류등이 햇빛아래 녹색, 파란색, 보라색등 다양한 색채를 나타내며 그 색채는 공작을 방불케 하여 공작호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며 물고기들이 자유로이 노니는 모습이 꼭 남태평양 청정해에 온 기분이다.
<오화해를 배경으로>
물줄기가 절벽을 따라 흘러 내리면서 물로 된 주렴이 햇빛에 변화무쌍한 무지개를 형성해 기이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진주볓 폭포와 낙일랑 폭포는 그 소리만큼 시원함을 더해준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장해에 버금가는 구채구 제2의 큰 호수인 코뿔소바다(犀牛海)이다. 안정적인 지하수 공급으로 일년 내내 한결같이 토석류가 도랑을 형성해 만들어 진 곳으로 수정군해 중 하나이며 토착명칭을 가지고 있다.
내려오다 보니 우리나라 물레방아 처럼 생긴 전경동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하류로 흐르는 물의 힘을 운동에너지로 전환시켜 날실을 베틀에 걸어 면직물을 뽑아내는 데 기구인 듯 하다. 주변에는 장족의 언어가 쓰여져 있고 재가 되어 버린 향이 수북히 쌓여 있다.
턱시도를 입은 신랑과 아름다운 빨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혼 부부 한쌍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는 호랑이 바다는 마치 남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하다. 한가로이 놀고 있는 물고기들 만큼 그 둘은 평화롭고 다정해 보여 나의 눈을 한동안 고정시켜 버렸다.
<호랑이 바다에서 신혼부부의 모습>
힘차게 흘러내리는 수정폭포 옆길을 따라 걷다보니 구채구의 풍경의 아름다움에 저절로 심취되어 버린다. 이 곳에는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모여 많은 그림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계단을 올라와 보니 구보연 꽃보리탑과 구채구 민속 문화촌이 눈에 들어온다. 구보연 꽃보리탑은 티벳불교의 하나의 상징이며, 탑을 세울때 라마승 혹은 성불에 의해 선택되어 그 위치가 정해진다고 한다. 탑을 오랫동안 살펴보다가 보니 많은 시간이 경과되어 민속촌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배경삼아 사진 한 장을 찍고 다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구채구 민속문화촌>
입구까지 약 10킬로미터 남아서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우리는 다시 승차하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운전기사와 직원들간에 잡담, 아가씨 4명이 대화하는 소리가 어우러져 차안은 이내 폭포 소리 만큼커서 멍한 느낌이다.
<구채구 입구>
구채구 입구에 도착하니 시계바늘은 벌써 7시 10분을 넘어서고 있다. 약 9시간여 동안 쉴틈 없이 풍경구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보냈으며, 풍경구의 70~800%를 둘러본 것 같다. 8시경 숙소에 돌아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숙소에서 운영하는 노천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음식을 주문하였는데 손님이 많은 관계로 한참 지나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소화도 시킬겸해서 산책삼아 야시장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야크뿔, 장족들의 복장, 각종 기념품을 파는 좌판들은 하나둘씩 철수하고 있었으며, 거리에는 웃통을 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 양꼬치를 먹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역동적이지만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건설현장의 인부들을 보니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도심을 관통하여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네온싸인이 켜져 있는 거리를 쉴새 없이 다니는 택시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부산하기 그지 없다.
시원한 캔맥주를 들이키고 야마꼬님이 준비한 오징어를 씹으니 그야말로 찰떡궁합이다. 그렇게 갈증을 해소하며 오늘 하루의 긴 여정을 마감했다.
8월1일(일) 성도로 이동
오늘은 성도로 가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5시20분 기상하여 짐을 챙긴후 주인으로부터 야진(보증금)을 돌려 받고 숙소를 빠져 나와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재지 않은 채 달려와 놓고는 무조건 8원을 달라고 졸라댄다. (원래 기본요금 5원 거리임)
성도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3대만 운행하기에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여행객들로 붐빈다. 우리를 실은 7시발 성도행 버스는 아름다운 풍경구 구채구를 뒤로 하고 한걸음 한걸음 내달린다. 기사는 한계령처럼 굽이 굽이 굽어진 길을 곡예운전을 하고 있고, 도로 곳곳은 여전히 낙석에 의한 도로 유실로 공사중인 구간이 많았으나 안전표지판 하나 없다.
10시 50분경 간이 휴게소에 들러서 30분간 정차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장거리 여행하는 동안에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잘 먹지 않는 습관 때문에 바나나 2개로 허기를 달래본다.
12시 30분경 협소한 비포장도로에 많은 교차하는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꼼짝 달싹을 안한다. 차창 밖을 바라보니 한 마리 새가 나뭇가지에 앉더니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날개를 떨구는 모습이 보이고, 영롱한 개울과 짙푸른 녹음은 펑온함을 가져다 준다.
기사는 승객들을 위해 남아공 월드컵 주제곡등 노래를 틀어주지만 모두들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피로회복을 위해 잠을 청해보기도 하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어 보지만 성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다.
오후 5시가 조금 못되어 드디어 목적지 성도 신남문 터미널에 도착했으니 10시간동안 달려온 셈이다. 성도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대장님을 만나 우선 곡기를 채우기 위해 사천성 전통 화궈집에 들어갔다. 원래는 김치찌개를 먹으러 한국식당에 가려 했으나 식당 약도를 숙소에 놓고 오는 바람에 가까운 식당을 찾아간 것이다. 북경에서 먹었던 것보다 매운 강도가 심해 혀가 얼얼하고 온 몸이 이내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종업들은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영수증 발급이 안 된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버리고 만다. (결국 5원정도 깎아주는 것으로 위안 삼음)
<쓰촨 전통 火锅>
쓰꾸냥산에 먹을 필요한 식량인 쌀 등을 구입하고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오는 데 이 곳은 아파트 단지내에 있어 출입하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성도 게스트 하우스는 조선족 주인이 도심속 아파트를 매입하여 관광객등을 상대로 임대해 주는 숙소인데 친절하지 못한 집주인 태도 만큼이나 시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이다.
10시경 거리에서 파는 마라탕(이열치열)과 수박으로 더위를 달래보지만 식을 줄 모르는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 들지 않는다. 12시경 숙소내에서 내일의 일정등을 점검하면서 셋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울프님으로부터 성도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초에는 새벽2시에 성도공항 도착하여 일륭으로 가는 버스터미널에서 합류하기로 함)
친절한 택시 기사덕분에 잘 찾아온 울프님을 만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한국에서 같이 오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일이 생겨 부득이 하게 혼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새벽 늦게 까지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8월2일(월) 소금(小金), 그리고 일륭(日隆)으로
이른 새벽 4시 45분 알람소리에 깨어 간단히 세안을 하고나서 짐을 챙긴 후, 거실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잠이 든 집주인의 잠을 방해 하지 않기 위해서 5시 30분경 숙소를 조용히 빠져 나왔다.
버스 정류장 대합실은 아직 문이 열려 있지 않았으며, 문앞에는 많은 승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일륭으로 가는 길목인 소금(小金)으로 가기 위해 밖에서 대기 하고 있던 우리에게 어느 여자분이 다가오다니 소금(小金)으로 갈거면 자기들 버스를 타고 가라고 권유한다. 이 곳은 터미널에서 정식으로 운행하는 버스외에도 비공식적으로 운행되는 시스템이 있는 것 같아 다소 의아스럽다. 어쨌든 우리는 목적지까지 같은 가격으로 가면 그걸로 족할 뿐이다.
먹거리 등으로 무게와 부피가 늘어난 짐을 버스 짐칸 좁은 공간에 겨우 밀어 넣은 후 승차하니 차안은 이미 승객들로 꽉 차 있다. 예매한 출발 시간보다 10분 일찍인 6시 10분. 부르릉 몸을 떨며 버스는 동이 트고 있는 거리를 내달린다.
협곡 소로길을 따라 가다보니 길가에는 옥수수밭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고 푸른숲과 계곡사이로 물살이 거품을 토해내며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금(小金)으로 가는 길목에서>
11시경 간이휴게소에 잠깐 들러 마파두부와 감자조림 등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밥이 오래 되었는지 쉰내가 나서 모두들 숟가락을 일찍 놓고 만다.
가는 동안에 말, 양떼, 닭등이 갑자기 도로로 뛰쳐 나오는 바람에 급정거를 하는 사태가 여러번 발생하고 만다. 의자에 앉아 있는게 지겨웠던지 아이들은 선 채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비가 내리고 난 후여서 푸르름과 청명한 날씨가 검은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 넣는 느낌이다.
내 인생의 노트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 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인생의 반려자 아내와 요즈음 영어캠프에 푹 빠져 있는 딸, 공부는 뒤로한 채태권도 체육관에서 살다시피하는 큰 아들, 갈수록 부쩍 말을 듣지 않는 귀염둥이 막내가 떠 오른다. 그리운 얼굴들이다.
2시 40분경 정류장이 아닌 협곡 소로길에 일가족으로 보이는 7~8명의 승객들이 하차하고, 우리 일행을 실은 차는 엄마찾아 삼만리 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하염없이 달린다. 어제에 이어서 오랜시간 동안 버스안에 갇혀 있으니 목과 허리가 뻐끈해지고 지루함에 몸서리 쳐진다.
4시 50분 드디어 첫 번째 관문인 소금에 도착했다. 우리일행을 일륭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마중 나온 미니버스 기사가 당초 협의와는 달리 가격을 높게 부르는 바람에 다른 차를 구해서 가야만 했다. 우리와 목적지가 같은 중국인 젊은친구 2명과 함께 역시 냉방 설치가 안 된 차로 50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했다. 처음 20여분간은 비포장길 이어서 오고가는 차량에서 쁨어져 나오는 매연과 흙먼지를 무방비 상태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일륭에 있는 산장에 도착하였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우리는 산장 주인이 마련한 저녁밥상에 가져온 김치를 곁들여 성대한 만찬을 즐겼다. 김치와 커피를 사흘만에 접하다 보니 그야말로 꿀 맛이 따로없다.
식사후에는 앞으로 3일 동안 야영하면서 먹고 쓰게 될 식량 배분 겸 장비검사를 하였는데 울프님의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한 장비와 도구들을 보면서 혀를 내 둘렀다. 처음보는 장비도 있고 용어자체도 나에게 낯설은 게 있다. 고산적응을 위해서 산자락의 거리를 가볍게 산책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니 반짝이는 별들이 뻬곡하게 수 놓아져 있다.
이 곳이 최근 꿈에 나타나 데쟈뷰 된다는 울프님의 말처럼 웬지 정겹게 느껴진다.
제2부. 쓰꾸냥산 품에 안기다
8월3일(화)
새벽5시. 방음장치가 안 되어 있다보니 물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저절로 눈이 떠지고 말았다. 이불속에서 그 동안 여행해 온 동선과 오늘 있을 산행을 생각하다보니 7시 알람소리가 들려온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마부와 말은 벌써부터 대기중이다. 기념사진을 한 컷 찍은 후 매표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산장앞에서 힘찬 결의>
외국인들에게는 입산 허가가 비교적 까다롭고 가격도 현지인과는 차별된다는 소리에 매표소를 통과할 때 꿀 먹은 벙어리 처럼 가만히 있어야 만 했다. 9시 30분. 산행에 앞서 야마꼬님이 미리 준비한 소금과 술로 운무가 뒤덮여 있는 쓰꾸냥산을 향해 간단히 제를 올린후 우리 일행 4명은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재계평에서 재결의>
3,440미터에 위치한 재계평(斋戒坪)을 거쳐 과장평(锅庄坪)을 지나 10분정도 올라보면 조산평( 朝山坪)에 다다른다. 이 곳은 장족지역에서 유명한 성지로 해마다 음력 5월초가 되면 국내외 불교 신도들이 여기에 모여 전통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다시 위로 30분 정도 올라가니 등산객들과 말들의 쉬고 있는 석판열(石板热)이 나온다.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꽃길을 계속 이어져 있어 푸근한 느낌이다.
<과장평으로 가는 길에>
12시경 말을 타고 하산하는 등산객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검표원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입장표를 보자고 한다. 우리의 얼굴과 표를 번갈아 훑어 보고 난 후 오늘 비가 올 예정이니 산행할 때 조심하라고 당부의 말을 하며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진다.
타첨포(打尖包)를 지나 석소대(石稍台)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말들이 선 채로 우리의 짐을 등에 지고 휴식을 취하고 있고, 지붕에는 붉은 오성기가 펄럭이며 우리를 반겨준다.
햇반과 라면을 혼합하여 만든 라면죽을 만들고 있는데 중국인 등산객들은 우리의 음식과 모습이 신기한지 계속 쳐다본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난 후 오후 1시 45분경 이 곳을 떠나 오늘의 숙영지인 과도영(4,300미터)으로 향했다. 산행길에는 여기저기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야크의 무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오후 2시 20분경부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산행하는 발걸음이 무거워 지기 시작한다.
<야크의 무리>
3시 20분경 4,000미터 지대에서 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데 말들도 피곤하고 배고픈지 정신없이 풀을 뜯고 있다.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위에 우의를 입고 오르는데 약간 한기가 느껴진다.
비가 그쳤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빨리 숙영지에 도착하여 따뜻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겠다는 일념하에 한걸음 한걸음 재촉하여 내 딛어 본다.
4시 15분 숙영지에 도착하니 일본등산객들이 상시적으로 사용하는 노란 텐트와 야크의 무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야마꼬님과 함께 텐트를 쳐 놓고 짐 정리를 마치고 저녁식사 준비를 할 무렵인 5시 20분경 대장님과 울프님이 뒤늦게 도착한다. 우리와 간격이 벌어진 채로 느긋하게 걸어오다가 길을 잘 못 들어서는 바람에 늦게 도착하고 만 것이다.
< 과도영에서 저녁식사>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육계장과 김치등으로 저녁 밥을 먹고 난 후에야 점차 산소부족에 의한 고산병증세가 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골때린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뇌가 욱씬거리면서 쑤씨는 듯한 통증이 동반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리 뛰는 등 생체리듬의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물을 마시고 소변을 자주봐야 증세가 안정된다는 대장님의 조언을 듣고 수박 2조각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겨본다. 저녁 8시가 넘어서 텐트안에 들어와 침낭을 덮고 일찍 잠을 청해 보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는다.
고산병이 이리 무서운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고산(高山)을 만만하게 보고 대한 죄값을 톡톡히 치루면서 후회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나저나 숙영지에 도착하기전 부터 몸의 상태가 좋지 못한 울프님이 걱정된다. 창백해진 얼굴에 저녁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라 혹시라도 밤새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 냄새를 맡고 텐트 주변을 맴도는 야크떼와 1~2시간 간격으로 물을 먹고 소변을 보러 텐트를 들락날락 거리는 상황으로 인해 잠을 설치고 말았다. 웬만해서는 자리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잘 자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외임을 느끼면서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8월4일(수)
6시에 기상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장님의 인기척을 듣고 있다가 침낭을 박차고 텐트밖으로 나왔다. 고산 적응훈련을 위해서 숙영지로부터 100~200미터 아래에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고 큰 볼 일(?)을 보았더니 몸이 한결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오전 8시경 대장님이 준비한 쇠고기죽과 육포 등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우리는 오늘 정상을 향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대해자로 하산해서 적응시간을 가진 다음 내일 다시 정상을 향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괜챦았던 야마꼬님 마저도 구토를 동반한 고산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텐트를 지키고 있는 마부들이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만약에 쓰꾸냥산 정상에 갈 경우 허가증 없이는 오를 수 없으며 내일은 아마도 허가증 검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귀뜸해준다 (허가증 없는 상태로 올라가다 발각되면 벌금 2,000위앤 부과대상).
9시 30분경 햇살이 숙영지의 텐트위를 드리우자 모두들 힘이 솟는지 오늘 일단 올라가 보자고 한다. 다리 근육에 힘이 없어 괴로워하는 울프님과 구토증세를 보이는 야마꼬님의 몸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만큼은 대단한 것 같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0시 15분 우리는 숙영지에 짐을 놓아둔 채 쓰꾸냥산 대봉을 향했다. 주위가 온통 돌로 덮여져 있어 석산을 연상케 한다.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와 차가움의 정도가 숙영지와는 사뭇 다르다. 마부겸 가이드인 샤오양은 쉬는 곳마다 담배를 피워 물 만큼 체력이 대단한 친구이다. 쓰꾸냥산 등반 횟수가 마치 뒷 동산에 오르듯이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한 시간정도 지나서 초코릿등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나서, 차오르는 숨을 달래가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 안부인 4,800미터 부근에 도착하니 시간은 12시를 지나고 있다.
<4,800미터 능선>
산 정상까지 약1시간이면 도착한다는 샤오양의 말에 힘을 얻어 스틱을 힘차게 내리 꽂으며 걸어본다. 오후 1시 20분경 드디어 쓰꾸냥산 대봉(5,038미터)에 오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중국의 알프스로 불리우는 미봉, 최고봉인 幺妹峰(6,250m, 야오메이)를 중심으로 三姑娘山(5,664m, 싼꾸냥), 二姑娘山(5,454m, 얼꾸냥), 大姑娘山(5,355m, 따구냥)의 4개 봉우리가 서로 어깨를 걸치듯이 나란히 솟아 있어서 '四姑娘山(쓰구냥산)'이라고 부르는 곳에 난생처음 고행 끝에 안착 할 수 있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포근히 스꾸냥산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산은 정복의 대상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해야 하는 동반자여야 만날 수 있는 대상이리라...
<여기서 잠깐!!! 쓰꾸냥산 대봉의 높이가 지도와 책자에 나와 있는 5,355미터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산정상 비석에 새겨져 있는 5,038미터가 맞는 것인지 알수 없음>
<쓰꾸냥산 대봉>
원기회복을 위해 간식도 먹고, 기념사진을 많이 찍은후 우리는 1시 40분부터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발길은 가볍기는 했지만 허무함이 밀려온다. 고생하면서 겨우 겨우 올라왔는데 오래 머물 겨를도 없이 바로 내려가야 하는 현실에 아쉽기만 할 뿐이다.
오후 3시경 대장님과 함께 숙영지인 과도영에 도착하여, 무조건 짐을 꾸려 고산증이 덜한 대해자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기후변화가 심한 탓에 비교적 쾌창했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을 동반하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울프님은 몸 상태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말을 타고 내려가고, 우리 셋은 짐을 하나씩 둘러 멘 채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후각을 자극하여 좋았지만 옷, 등산화는 벌써 흠뻑 젖어버린지 오래라 무아지경이다.
정상적인 등산 코스가 아닌 비탈진 길을 개척해서 하산하는 바람에 여러차례 넘어지고 만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렀을 때는 매우 험난한 길이어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 마저 불가능하여 어쩔수 없이 울프님도 함께 걸어가야 만 했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보여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다행히 사고 없이 목적지인 대해자(大海子)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텐트를 칠 만한 상황도 안되고 , 밥을 직접 해 먹기도 곤란하리 만큼 우리의 몸과 주변환경은 열악했다. 마침 대장님이 특산품파는 가게(대피소)주인과 담판을 벌여 누추하지만 대피소내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1인당 60원씩에 협상에 성공하여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할 줄 정말 몰랐다.
주인이 해주는 음식에다가 우리가 직접 만든 꽁치김치찌개와 통조림 깻잎등으로 저녁을 먹으니 힘이 솟는 느낌이다.
주인과 샤오양이 늦은시간 까지 T.V를 시청하는 관계로 잠이 드는데 불편했지만, 자그마한 것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하루여서 좋았다.
8월5일(목)
아침 식사 까지 제공해주기로 한 주인이 8시가 넘어서도 보이질 않는다.
밖으로 나와서 젖은 옷도 말리고 울프님이 틀어놓은 고요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데 등산객 무리들이 도착한다. 알고보니 어제 노우원자(老牛圓子)에서 묵고 아침 일찍 대해자와 화해자를 가기위해 이 곳을 지나는 일본인 등산객들이다.
주인 대신에 샤오양이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데워서 내 놓는다. 모두들 식욕이 없어 하는데 나는 이상하리 만큼 입맛이 좋고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되는 느낌이다. 태양마저 외면하는 바람에 젖은 옷과 등산화는 어제와 큰 차이가 없다. 대피소에서 산 아래로 약 50미터 내려가니 대해자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명당을 발견하였다. 시원하게 세안을 하며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 마시니 정신이 맑아진다.
점심에 먹을 주먹밥을 김자반과 참치 등으로 버무려서 만든 후에 화해자로 향하는 길을 울프님과 잠깐이나마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최종적으로 짐을 꾸려 하산준비를 하였다.
<대해자>
<먼 발치에서 본 노우원자>
야마꼬님과 울프님은 말을 타고 먼저 하산하고 대장님과 나는 12시 20분경 젖은 등산화를 신은 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시 즈음에 노우원자(老牛圓子)를 스쳐 석소대에 도착하니 시계바늘은 오후 2시를 가리킨다. 이미 도착한 야마꼬님과 울프님은 거의 식음을 전폐한 모습이다.
<백마를 탄 울프왕자와 적토마를 탄 야마꼬황세자>
점심은 주먹밥으로 재빨리 해결하고 시원한 콜라를 한모금 들이킨 후 다시 발걸음을 아래로 재촉했다. 타첨포(打尖包)와 석판열(石板热)에 이르니 여지없이 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제발 오늘 만큼은 오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소로길과 풀밭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는 많은 진흙 웅덩이가 패여져 있는모습이 마치 황룡과 구채구에서 보았던 오채지와 색깔만 다를 뿐 같은 형상이다. 오고가는 등산객과 마부를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수 없는 둘만의 고독한 트래킹이 이어진다.
3시 30분 조산평(朝山坪)을 지나 700미터 떨어진 과장평(锅庄坪)을 거쳐 재계평(斋戒坪)에 이르니 첫 날 의기양양 했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4시 30분경 매표소 입구에서 먼저 내려간 샤오양을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샤오양은 우리의 짐을 실은 말(馬)은 약 20분후면 도착할 거라는 말(言)과 함께 산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귀뜸해 준다. 산장으로 내려가는 포장길에서 야마꼬님과 울프님과 감격의 재회를 하였다.
이번 산행은 약간의 상처를 동반하기는 했지만 쓰꾸냥산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행복한 순간을 모두가 공유하였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4시 50분 산장에 도착한 우리는 6시가 되어서야 짐을 받을 수 있었다. 샤워가 늦어졌지만 모두들 개의치 않는 분위기이다.
야마꼬님의 제안으로 대장님이 가지고 다니던 북경산사람 산악회 손수건(빨간색)에 이번 등정코스와 일시등을 아로 새기고 서명을 한 후 식당 벽면에 걸기로 했다. 산장주인도 흔쾌히 허락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료로 맥주 한박스를 내놓는다. 미처 수박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징어와 라면등으로 성찬을 즐겼다.
<등산완주 기념행사>
대장님은 또 한번 훌륭한 협상을 도출해냈다. 산장주인차로 내일 성도 부근에 있는 도강언, 청성산을 비롯하여 성도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1,000원에 협의를 한 것이다. 성도로 가는 표는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리는 불편함이 있는데 두 가지를 적정한 가격으로 말끔하게 해소해 준 셈이다.
내일은 대장님과 결별하는 날이다. 우리 셋은 성도로 향하고 대장님은 아바자치구로 들어가 나머지 여행일정에 돌입하게 된다.
우리일행이 술을 마시면서 축하겸 아쉬움을 달래는 동안 한켠에서는 내일 운전하게 될 산장주인과 샤오양은 다른 중국인과 함께 밤늦게 까지 도박을 하고 있어 걱정이 된다.
제3부. 도교/ 불교의 성지 그리고....
8월6일(금) 청성산(青城山), 도강언(都江堰)
3시 30분 기상하여 짐을 챙겨 나가보니 모두들 벌써 준비 완료된 상태이다.
대장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성도로 향했다. 일륭지역의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내려 버린 채 다른 지역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겨우 찾아서 깨우고 난후, 출입문을 열어 그 곳을 통과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어 깨어보니 어느새 어둠은 걷히고 날이 밝아오고 있다.
6시 50분 웅묘구(熊猫沟)라는 푯말이 쓰여져 있는 곳을 지날 무렵 우리를 실은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기사가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기를 여러번 하다보니 다시 정상적으로 시동이 걸리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낙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도로는 호우피해로 인한 복구가 늦어져 통행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전수와 조수는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참으로 성격이 여유로운 친구들이다.
8시경 조그만 산어귀 중턱에 내려 우리는 조식시간을 가졌다. 이 곳은 상설시장이 따로 없을 정도의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을 갖춘 곳이다. 채소를 실은 차가 도착하자마자 주변 식당주인들이 쏜살같이 몰려드는 모습은 우리네 시골 장터 모습과 별 반 다름없다. 반대편에서는 도로 굴삭기가 도로보수를 위해 열심히 상하좌우로 회전운동을 하고 있다.
10시경 당초 생각보다 빨리 1차 목적지인 청성산(青城山) 부근에 도착하였다. 청성산은 도교문화와 사상이 이 곳의 옛 건물들과 유적지들을 속에 스며들어 있어 살아 있는 도교박물관이라고 불리운다. 산속에 있는 도교사원을 통해 정상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으로 편안하게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산 입구에는 도교의 창시자 노자와 장자를 모신 건복궁이 있는데 공사중으로 입장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천연각을 지나면 여러 봉우리들이 모여 마치 병풍그림과 같다는 천연도화에 다다른다.
<청성산>
새들의 지저귐과 피리 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고 있어 편안한 정원에 온 느낌이다. 두명의 일꾼이 한조가 되어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인력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사원내부의 보수를 위해 넝마에 건축자재를 잔뜩 실어 나르는 노공들의 이마에는 땀방울로 송골송골 맺혀 있다. 시간관계상 전진관을 끝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물로 해소되지 않는 타는 목마름을 오이로 달래본다.
1시에 청성산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강언(都江堰)으로 출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우리는 점심 먹는것 조차 잊은 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강언은 우기에는 자주 범람하고 건기에는 가뭄이 빈발했던 민강(岷江)의 치수사업으로써, 기원전 3세기 촉(蜀)의 지방장관이었던 이빙(李氷)의 지휘 아래 처음 공사가 시작되어, 대규모 공사는 그의 아들 이이랑(李二郞)이 이어받아 계속 진행하였으나 (도강언 시내에는 이빙/이이랑 부자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있음), 아들도 죽고 수세기가 지나서야 완공된 수리공정이다.
수리공정을 통해 민강은 둘로 나뉘는데 바깥쪽이 외강으로 원래의 수역이고 안쪽이 내강으로서 보병구라는 수로로 이어져 몇줄기의 용수로를 통해 사천평원에 관개용수로 공급이 된다고 한다.
수량이 많아져 홍수의 우려가 있을 때는 비사언(飛沙堰)댐이라는 댐을 통해 수문이 열리며 외강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식으로 수량을 조절해 평원의 범람을 막는다고 한다.
이런 치수사업 덕택으로 민강은 범람하지 않고 관개능력도 개선되어 사천은 중국유수의 곡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빙/이이랑 부자의 도전정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사천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들 한다.
<도강언에서 야마꼬님>
3시에 정문앞에 대기하고 있던 울프님과 기사일행(산장주인과 부인, 샤오양)을 만나 성도 시내로 향했다. 샤오양은 냉방시설이 없는 차를 운전 하느라 고단하였는지 계속 졸음 운전이다. 목과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물과 간식을 건네니 화들짝 놀랜 눈치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성도 톨케이트를 통과하여 시내로 진입하니 많은 차들로 인해 곳곳이 정체중이다.
갑자기 시내 한복판에 차를 멈추더니 우리가 예약한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스호스텔( Sim s Cozy)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우리보고 택시타고 알아서 가라고 한다. 못찾겠다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한다.(못찾겠다 꾀꼬리도 아니고....) 계약위반임을 주장하여 우리도 돈을 못주겠다고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이 곳 지리를 잘 아는 택시기사를 따라 미니버스도 함께 숙소까지 같이 가서 다시 얘기하기로 합의 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가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시간이 더 지연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다친 사람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경찰에게 해명하는 택시운전기사의 모습이 약간은 측은하게 느껴진다.(80원을 벌고자 운행하다가 더 많은 비용을 치루는 셈이 되었으니)
숙소로 가는 동안 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산장주인과 당초 계약관계를 정확히 묻고자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답답했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는 그들과 대화하는데 한계를 느꼈으며 대장님의 빈공간이 이리 클 줄이야...
우여곡절 끝에 교통사고는 수습되고, 6시30분에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사일행의 언행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골탕 먹일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해봐야 서로 시간낭비이고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아 우리는 깔끔하게 1,000원을 건네주고 기분좋게 악수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이 곳 유스호스텔( Sim s Cozy)은 서안에서 머물렀던 상즈먼 유스호스텔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정문은 통행이 언제나 자유스럽게 시원스레 열려있고 넝쿨등으로 주위 환경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들고자 한 흔적이 돋보인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려고 찾은 유스호스텔 내부 레스토랑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대화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연히 한국에서 혼자 여행 온 한국 청년을 만나 자연스레 합석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상해를 거쳐 라사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저녁식사후에 고단한 하루를 보낸 탓에 피로를 풀고자 발마시지도 받고 양꼬치를 먹고자 했으나 그 청년이 그려준 발마시지 받는 곳의 약도가 분명하지 않아 우리는 헤매다가 결국 숙소로 돌아왔다.
8월7일(토) 아미산(峨眉山), 낙산대불(乐山大佛)
울프님은 숙소에 남아서 쉬기로 하고 야마꼬님과 둘이 움직이기로 했다. 찬 공기를 맞으며 성도 신남문 정류장에 도착하니 아미산으로 가는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차량은 30분 간격으로 배정되어 있을 만큼 많다. 7시가 조금 못되어 출발한 차는 2시간 후인 9시10분경 아미산 터미널에 도착한다. 아미산 입구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1인당 5원씩 더 지불하라는 안내양의 말에 차안의 승객들은 동의하는 눈치이다.
<아미산 입구>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제일산”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보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희귀한 식물40여종이 자라고 있는 식물원을 지나 보국사 경내로 들어서니 향에서 피어 오르는 자욱한 연기사이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신도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이 곳은 명나라때 창건되어 청나라 강희제때 복원되고 사찰의 이름을 하사 받아 불교 사찰로 변모한 곳이다.
<보국사>
10시 30분경 보국사를 빠져 나와 산정상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10분정도 올라가니 복호사로 이어지는 숲속길이 나온다.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5분정도 올라가니 어느새 복호사 입구에 다다른다. 절 뒤의 산봉우리가 마치 호랑이 모습처럼 보인다고 붙여진 이 곳은 1131년에 지어져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복호사 부근까지 운행되는 5번 버스와 관광차는 많은 사람들을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어 조용히 산책하기에는 불편하다. 좌우측으로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어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정상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해 결국 포기하고 낙산으로 가기 위해 시내로 향하는 5번 버스에 올라탔다.
아미산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0분만에 낙산에 도착한 우리는 성도로 가는 표를 미리 예매한 후 터미널근처 자그마한 식당에서 삶은 계란등으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너무 짜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타고 낙산대불로 향했다.
강렬한 태양이 머리위로 쏟아지는 관계로 걸어다니는 행인은 그리 많지 않은 모습이다. 한가한 매표소 입구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보니 꽤 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놀랐다. 7세기에 지어져 17세기에 다시 증축한 릉운사를 거쳐 낙산대불에 이르니 줄지어져 있는 행렬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족히 2~3시간을 기다려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어 보여 우리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고 측면에서 감상하였다.
낙산대불은 낙산시의 세개의 강(민강(岷江), 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룽운산 절벽을 깎아서 만든 현존하는 세계최대의 석각불상으로 대불 높이가 71m이다. 당나라 승려 해통이 만들기 시작하여 그가 죽고난 뒤 9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어졌다고 한다.
<낙산대불>
소원이라는 정원을 지나 동파루에 올라가니 중국인 관광객과 가이드의 마이크 소리에 혼잡스럽다. 출구인 동문으로 나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망중한을 즐겨본다.
당나라 시대 건축된 29미터 높이의 영보탑을 돌아 나오니 말약당으로 이어진다. 말약당에는 20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학가인 곽말약의 연대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곽말약의 동상앞에는 삼강합류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낙산시내를 비교적 잘 조망할 수 있다.
<곽말약 동상과 영보탑>
<삼강합류대에서 바라본 낙산시내>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그늘진 계단이 나오는데 왕래하는 사람이 적고 정갈하게 정비된 나무보조대가 있어 산책하기에는 그만이다. 계단을 내려와 입구 반대편으로 향하는 동문으로 가는 길에도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아늑한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동문을 나와 큰 대로변을 따라 시내방향으로 2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다 보면 낙산대불을 표시하는 관문과 낙산대불박물관이 보이는데 무더운 날씨 탓인지 우리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수박 겉 핥기 식이지만 가 볼만한 곳은 다 둘러 본 것 같아서 오늘도 마음이 뿌뜻한 하루였다. 시내로 향하는 3번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왕래가 잦은 13번 버스를 탔는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공공버스정류장이 아닌 다른 곳에 도착하는 바람에 다시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당초 표를 예매했던 落山客運中心站곳으로 향했다.
예약했던 차표를 물리고 앞당겨서 5시 30분 출발하는 성도행 버스에 몸을 실으니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쉴수 있었다.
내일 성도시내 여행을 위해 지도를 펼쳐놓고 보다가 문득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인해 일 단면이나 일부분의 지역을 보고 판단하기 어려운 중국은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재를 너무 많이 보유한 나라로 부러움의 대상이다. 넓은 땅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선조들의 지혜가 오늘의 중국을 강대국으로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우리도 후손들을 위해 역사와 문화재 보존은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7시 30분 성도에 도착한 우리는 냉장고 수리 문제로 유스호스텔 복무원과 대화하다가 8시 40분이 넘어서야 저녁을 먹으러 거리로 나왔다. 한국 청년이 추천해 준 사천전통식당은 이미 만원으로 한참을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전신안마(25원)을 받으니 몸이 노골노골 해진다. 방에 들어와 보니 가동되지 않은 냉장고가 아직도 교체가 안되어 있다. 일본인 복무원에게 따져 물으니 빈 방에 있는 냉장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내일은 시원한 수박을 먹을 수 있으리라 라는 생각을 갖고 침대 시트를 가슴에 끌어 댕겨본다.
8/8(일) 무후사(武侯祠), 두보초당
아침 8시에 일어나 책을 보다가 피곤 했는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10시 30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숙소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블랙퍼스트, 샌드위치, 볶음밥 등으로 다양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체크아웃(퇴방)을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을 숙소 보관소에 맡겨 놓고 먼저 무후사로 향했다. 일요일 점심때여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 곳 관람을 위해 모여들고 있다. 성도 무후사는 중국 최대 삼국유적 박물관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청나라 강희제때 중건 확장되었고, 사내에는 무후사, 한소열묘(유비의 사당), 삼의묘와 결의루가 있다.
유비의 사당을 지나면 좌우측에는 당비(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와 명비(1547년 조각)가 마주보고 있으며 그 뒤에는 제갈공명의 사당인 무후사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촉한의 영웅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제갈첨, 제갈상등의 형상이 소조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 뒤에는 삼의묘와 유비, 관우, 장비를 다소 익살스럽게 바윗돌 위에 표현한 결의루(도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공명원을 지나면 삼국시대(위, 촉, 오)전시관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에서는 당시의 인구와 병력, 군제편, 생활풍습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도원 결의루>
사과와 복숭아로 영양보충을 하고 나서 마지막 관람지인 두보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보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원래 두보시 출판본은 700여종에 달했으나 오랜세월에 걸쳐 후대의 학자들이 두보시를 수집하여 현재는 150여종 밖에 없다고 한다. 중국역사를 찬란하게 빛낸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머물렀던 임시거처인 초당은 중요한 성지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시에는 애국사상등을 강렬한 감수성과 응집력으로 표현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깨우침이 되어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그의 넋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자문을 지나면 공부사가 나오는데 이 곳에는 두보의 신사와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도유와 황정견의 신사도 함께 모셔져 있다.
유적지 전람관에는 대량의 당대의 생활기구 및 승려탑등 당나라시대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분경원(盆景圆)에는 잘 가꾸어진 200여년이 넘은 소나무 분재등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대아당(大雅堂) 안에는 유명한 조각가들이 만든 고대의 존경받는 이백, 소식등 12명의 시인들의 조각상이 진열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대아당>
3시 30분경 출구인 남문으로 빠져 나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사천박물관 방문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유스호스텔( Sim s Cozy) 풍경>
북경 발 저녁 8시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콜 택시를 기다리면서 이번 여행의 동선과 궤적을 그리며 정리해 본다.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고단함을 잘 이겨냈고, 고산증과 싸워가며 쓰꾸냥산 대봉에 오르는 소기의 성과도 얻었다. 또한 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은 겸허해야 함을 배웠다.
사천성의 명승고지를 돌아보면서 아날로그 여행의 향수를 제대로 느낀 여행임을 자평해 본다.
누가 그랬던가? 40 이란 뒤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가야하는 나이라고...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선 지금, 때로는 고행의 길을 가면서 내 삶을 재조명 해보고 성찰해야함을 깨닫는다.
첫댓글 여행기를 쓰신 글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나중에 여행기를 출판하셔도 될듯. 힘든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