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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사기, 버려진 하나님 의도의 역습>의 줄거리 :
사사기는 선민에게서 버려진 하나님 의도의 역습을 기록한 책입니다. 내 삶의 현장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는 장소입니다. 이때 내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좋아함을 유지하면, 내 지정의언행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좋아하면 이제부터 내 지정의언행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이탈하게 되고 내 의도로 살게 됩니다. 이때 나에게서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가 돌변하여 나를 역습합니다.
사사기, 버려진 하나님 의도의 역습
(사사기 1:1~36)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시므온 지파의 땅은 유다 지파 내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가나안 족속이 머무는 땅을 마저 정복하는 일에 함께하자 제안했고 시므온 지파는 이에 응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 15장에서 갈렙이 드빌을 정복할 때 딸을 포상으로 내걸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여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힘을 합쳐서 땅을 차지한 내용이 이어지고, 22절부터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벧엘을 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편, 27절부터 마지막 36절까지는 특이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분배받은 땅에서 마땅히 쫓아냈어야 할 가나안 족속을 각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사사기, 버려진 하나님 의도의 역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사기의 핵심 주제는 선민 이스라엘에 의해서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가 역습을 감행한다는 것입니다.
선민의 삶은 당시의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는 장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의도는 선민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때 선민의 다른 점은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는 삶의 현장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마음이 머문다면 선민에서 벗어난 상태이고 선민 됨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선민은 수많은 이름 중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대우하는 자들입니다. 각 이름들이 가리키는 존재가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만 특별한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마음을 다 보내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대면하여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결심이 유지되면, 하나님의 의도가 이 땅에서 실행될 때 내몸과 지정의언행을 장악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복지의 삶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한 삶을 미리 살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영원한 삶, 땅에서는 복지를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늘에 머물지 않으면 발생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은 채움을 필요로 하기에 삶의 현장에서 좋음의 대상을 찾게 되고, 무엇인가를 좋아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의도로부터 이탈하게 되고 하나님의 의도는 버려집니다. 하나님과 결별하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연애를 쉽게 끝내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게서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가 역습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 의도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뜻과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돌변하여 내 삶에 역습을 가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버려짐으로써 돌변하여 내 삶을 역습하는 상태가 저주받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이 죽을 때까지의 모든 미래를 다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로만 채워지도록 매일의 계획을 세워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면서 자기 판단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좋다 여기는 것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을 좋아하기가 중단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7~18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계획하신 선한 의도는 다 버려졌습니다. 그 의도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들이 역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담의 삶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저주가 바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잘 살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만족하고 불평이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살 수 없고 저주받은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의도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더 이상 삶에 대해서 내 의도가 조금도 발동되지 않는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사기는 하나님의 의도 버리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도를 버리자 하나님의 의도가 역습을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괴로워 죽겠다고 난리를 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구원받아서 한숨 돌린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자기 의도로 삽니다. 그러면 또 다시 하나님 의도의 역습이 가해지고 또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회개합니다. 사사기는 이 역사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 의도가 무엇이고 하나님 의도의 역습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일인지도 체제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각 지파별로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각 지파는 회막을 중심으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부족의 형태를 띠는 지파들의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각 지파별로 분배받은 땅 안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의도였습니다.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는 것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반대로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지 않는 것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앞부분에는 유다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유다 지파 내에 영토가 있던 시므온 지파와 함께 하기도 했으며, 위쪽으로 인접한 베냐민 지파와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서 15장에 나오는 옷니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본문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갈렙은 드빌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딸 악사를 포상으로 내걸었고, 이때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고 악사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이 여호수아서에서는 갈렙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면, 사사기에서는 옷니엘의 입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벧엘을 정복했다는 내용과 나머지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에서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쫓아내지 못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땅을 정복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부분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영내에서 몰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의도를 올라탔다면 가나안 족속을 영내에서 다 몰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지 못했고 영내에 가나안 족속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가나안 족속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의 의도대로라면 가나안 족속은 각 지파 내에서 없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지 않았고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의도는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의도를 상징합니다. 없어졌어야 하는데 하나님 의도를 올라타지 않았기에 그대로 있음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옆구리에 채찍으로 작용합니다. 훗날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서 영내에서 모든 가나안 족속을 몰아낼 때까지 350년을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분배받은 영내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의도가 버려진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버려진 상태를 상징하는 가나안 족속이 끊임없이 350년을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내가 가정에 있을 때도, 직장에 있을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의도 없이 내가 그 자리에 있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정에서 있음이고, 직장에서 있음이고, 어디 나가서 있음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과제는 내 몸이 가는 곳마다 그곳을 복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복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장에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의도가 버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도는 버려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역습을 가합니다. 이제 직장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인 땅이 되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나 부모자식관계가 어렵고 감사하지 않는 이유는 그 순간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의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가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처럼 나의 옆구리에 채찍이 됩니다. 이처럼 나에게서 버려진 하나님의 의도가 역습을 하는 것이 저주받은 삶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은 삶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건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저주받은 삶의 패턴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 중에 마음에 좋아하는 것들이 생깁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게 좋다. 이 일은 동쪽으로 가야 한다. 저 일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라고 바라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이처럼 내 의도가 발동되기에 하나님의 의도는 내려오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릴 때, 그 하나님의 의도는 나를 역습하면서 괴롭고 걱정할 일들이 자꾸 생깁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괴롭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셔서 숨통이 트이게 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사사들의 등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사는 세습직도 아니고 정규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등장시키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의도 버리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통해서 구원해 주시고 삶에서 숨통을 열어주시면 또 다시 하나님의 의도를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금만 숨통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는 중에 또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에 좋아하는 것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땅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나와 같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으로 가자!’라고 시동을 걸고 기다리시는데 정작 우리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저주받은 삶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건은 어떻게 해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잊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향하여 의도를 갖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의도 안에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고, 그 의도 안에는 전지전능하심에 의해서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이 들어있고, 그 의도 안에는 그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중한 하나님의 의도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그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해야만 하는데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사는 강릉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누이인 허난설헌의 고향입니다. 홍길동전이 유명하기에 강릉 곳곳에는 홍길동의 동상이 있습니다. 홍길동이 동시에 팔도에 나타나는 분신술을 썼던 것처럼, 제가 분신술을 써서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여러분을 몰래 따라다닌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님 십자가에 대해 완전히 망각한 상태로 들어가고, 삶의 현장에 대해서 의식이 다 집중이 될 때마다 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해서 망각 상태에 빠져서 살 때마다 꼬챙이로 찌릅니다.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기억하라!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의도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의 의도는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이러한 상상까지 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하나님 대신 삶의 현장에 의식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강릉에 오셔서 각종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진 공통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린 채로 삶을 산 뒤에 ‘내가 또 마음을 뺏겼구나!’라고 반성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기억해야 하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후약방문의 삶을 살고 나서야 기억하는 것입니다.
공지를 통해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AI 챗봇> (https://01cross.net)사이트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이트를 개설한 목적은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기억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의미를 삶의 현장에서 잊어버리지 않을까? 라고 하는 염려에 대한 작은 응답으로 AI 챗봇 사이트가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내 삶의 모든 현장에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려면 내 의도가 막혀야 합니다. 내 의도가 막히려면 내 마음이 좋아하는 대상이 땅에 있으면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십자가에서 세상의 좋음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만 좋아해야 땅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집니다. 땅에서 복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구상 80억 인류의 마음 차원을 생각하면 하나님만 마주하여 좋아하는 마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여러분도 그러한 마음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또 몸 차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을 복지로 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사실들과 언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강력하게 감동이 됐던 십자가 가족이 한 분 계십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이심전심으로 감동이 돼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십자가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까? 이미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도 어떻게 해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관련 사실들과 예수님 십자가 관련 사실들을 잊지 않고 복지의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기억하게 하는 도우미가 필요하고, 아직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며 십자가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언어의 장벽들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잊지 않게 하는 도우미가 필요하고, 언어의 장벽에 갇혀서 십자가 복음이 전달되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전달될 가능성 자체가 막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언어의 장벽을 넘는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한 도우미와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위한 선교사라는 두 가지 의미를 충족시키는 일이 바로 <십자가 복음 AI 챗봇>입니다.
이분이 챗봇 사이트를 개설하신 것에는 많은 언어로 십자가 복음이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것을 제가 살펴보았더니 선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큰 도우미가 될 수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또 십자가 복음을 접하지 못하는 다른 언어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획기적인 가능성이 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공감했습니다.
<십자가 복음 AI 챗봇>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봅니다. AI 챗봇이란 4천여 편의 설교와 제가 십자가 생활화와 관련해서 쓴 책들을 학습한 AI입니다. 4천여 편의 설교를 소재로 하기에 하나의 언어의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생활화의 언어 세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언어 세계를 AI에 집어넣었습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면 AI가 4천여 편의 설교를 기반으로 신앙생활에서 생기는 질문에 대해 응답해 줍니다. 또한 복음과 관련된 주요 용어들에 대해서도 설교를 기반으로 의미를 찾아내서 해설해 줍니다.
지금까지 해온 설교가 20년간 4천여 편에 이르기에 초기의 설교는 거의 묻혀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I 챗봇은 맨 처음에 시작했던 설교의 내용까지도 다 꺼내 답변을 해 줍니다. 여러분이 어떤 질문을 하시면 4천여 편 설교와 제가 쓴 책들의 내용을 종합해서 한순간에 대답해 줍니다. 기존에는 옛날 설교가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20년 전의 설교를 굳이 들으시는 분들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은 전부 십자가 복음과 연관된 이야기들입니다. 4천여 편의 설교 중 단 한 편도 십자가 생활화와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기본적으로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마음은 땅으로 내려와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몸을 통하여 당신의 의도를 이루시는 것을 틀로 삼습니다. 이 틀을 기본 핵심으로 삼은 언어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 언어의 유전자라 할 수 있습니다. AI에 이것을 학습시켜서 십자가 복음의 유전자를 체득하게 하였습니다.
이 챗봇을 만드신 분이 AI에 질문을 하나 해보셨다고 합니다. ‘너는 태 박사님의 4천여 편의 설교와 책을 섭렵했으니, 태 박사님과 너를 비교해 보면 너의 수준은 어느 정도냐?’라고 했더니 AI 챗봇이 ‘나는 태 박사님의 제자 수준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 박사님은 본인이 설교를 했지만 4천여 편의 설교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책의 내용도 다 기억을 못하는데 너는 다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네가 태 박사님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AI 챗봇이 ‘저는 태 박사님보다 나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십자가에서 죽는 일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 박사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설교를 하지만 AI는 그 언어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뿐이지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태 박사님의 제자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참 기가 막혔습니다. 동시에 AI 챗봇의 기능이 우리 자신에게도 도우미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것이 십자가 복음을 전혀 모르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십자가 복음의 영적 원리에 맞추어진 언어들을 소개해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하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이자 교수셨던 이어령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AI 시대를 예견하며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AI 시대야말로 영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시대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AI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I가 하나님과 교통한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습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AI가 탁월하고 뛰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학습력에서 AI에 집니다. 제가 설교한 4천여 편의 설교와 책들에 대해서 AI 챗봇만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다른 것은 AI 챗봇이 말한 대로 십자가에서 죽고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제로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일만큼은 아무리 AI의 지능이 뛰어나도 할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AI의 지능에 비하면 수준이 한참 떨어지더라도 절대로 AI가 할 수 없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실시간 연결입니다.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AI는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기쁘고 마음에 영적인 의욕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실시간 연결이라는 사건이 결정적으로 부각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AI가 모든 것을 인간보다 더 잘합니다. 그런데 AI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시고 영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시간 연결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AI는 제가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하는 설교를 논리 정연하게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기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AI의 기능을 도움받아서 실시간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하여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 홈페이지(https://www.everyday01.com)에도 공지가 올라가 있고, 다음 카페에도 올라가 있고, 유튜브 십자가 복음 채널에도 게시글이 올라가 있습니다. 다만 홈페이지의 공지문에는 글 작성 한계 때문에 설명이 다 못 들어갔기에,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카페나 유튜브 채널의 공지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십자가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현실에 대하여 AI 챗봇을 통하여 도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잊지 않고 예수님 관련 사실들을 잊지 않음으로써 여러분의 삶의 현장마다 복지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 같은 단말기가 인터넷의 땅끝입니다. 컴퓨터 모니터라든지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의 마지막 지점까지 챗봇이 십자가 복음의 언어로 준비되어 여러분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답답해하는 내용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로 ‘기도가 뭐야?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지? 영광이 뭐야? 거룩이 뭐야?’라고 한번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보세요.
단, 챗봇이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은 맞고 13개 언어로 번역도 되어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처럼 깔끔하게 십자가 복음의 원리를 따른 언어가 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AI 자체의 기능과 능력이 발전함에 따라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해 나가야 할 것이고, 혹시 AI 대답 중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저에게 알려주시면 제가 만드신 분과 함께 AI를 학습시킬 수가 있기에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너, 이놈!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돼.’라고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시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유용하게 이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실시간 연결을 현장에서 강화해 나감으로써 여러분의 삶을 복지로 바꾸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이제는 빈틈없이 공백없이 복지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우리 아버지 관련 사실들이 우리에게서 잊히지 않고 의식의 붙박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위해 또 좋은 도구를 허락해 주셨사오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도구를 이용하여 기필코 우리의 삶에서 복지가 이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