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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안(西安) 문화탐방기
*탐방지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 일대
*탐방일정:2014. 6. 14일(토))-17일(화)
-6월14일(토):출국
실크로드출발점, 대흥선사, 산시역사박물관, 대안탑
-6월15일(일):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 화청지, 진릉지궁,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진시황릉, 실경역사무극 “장한가”관람
-6월16일(월):흥경궁공원, 서안성벽, 회족거리, 비림박물관, 문서거리
-6월17일(화):입국
*인솔 및 안내:
-인솔 :인월드여행사 정연오 님
-안내 :조선족가이드 장 용 님
*동행 :총 15명
오랜만에 큰 맘 먹고 바다 건너로 문화탐방을 나선 곳은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입니다. 이근우 선생님이 강좌를 맡은 군포중앙도서관의 ‘역사인문학교실’과 서울 인사동의 ‘문인화반’(?)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함께 찾아간 시안(西安)은 베이찡(北京)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 전체로 보아 대체로 중앙부에 위치한 산시성의 성도(省都)가 시안으로, 그 면적이 약 1만 제곱Km가량 되며, 인구가 8백만 명이 훨씬 넘는 부성급 도시(副省級都市)입니다.
시안은 주(周)와 진(秦), 그리고 한(漢), 수(隨) 및 당(唐)등 13개 왕조가 BC11세기에서 AD10세기에 걸쳐 통산 1,100여 년 동안의 도읍지로 삼았던 고도(古都)입니다. 이번에 특별히 시안을 탐방지로 정한 것도 이 도시가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 유서 깊어서였습니다. 유서 깊기로는 시안의 자매도시인 우리나라의 경주(慶州)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3개 왕조를 합산하면 시안이 수도로 있었던 기간은 경주보다 백여 년 더 오래이지만, 단일왕조의 수도로는 무려 992년 동안 오직 신라 한 나라와 명운을 같이한 경주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여기 시안에서 경주보다 다양하게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역설적으로 나라가 불안정해 왕조가 자주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시안이 그토록 오래도록 도읍지로 남은 데는 그럴만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습니다. 시안이 자리한 곳은 황하유역의 관중평원(關中平原) 한 가운데로 남쪽으로는 400여Km의 거대한 산줄기 진령(秦岭)이 동서로 뻗어나가고, 북쪽으로는 황하의 제1지류인 위하(渭河)에 면해 있습니다. 이런 시안이 위치한 곳이 평균해발고도가 400m를 조금 넘는 분지지대인데다 황토지대여서 넓고 평탄하며 토지가 비옥해 그토록 오랫동안 수도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지리적 이점은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가 그의 저서 ‘동양문화사’에서 지적한 아래 글로도 알 수 있습니다.
“진(秦)나라가 그 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서 전에 주(周)가 세력을 일으키게 된 위수유역(渭水流域)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지역은 일종의 전략적 이점이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산으로 둘러싸인 이 유역으로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황하의 대굴곡부에 있는 강과 구릉사이의 지협(地峽)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방어는 단순하였으며, 진(秦)은 전략적 지점을 장악함으로써 자의로 관내에서 동방의 경쟁자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격할 수 있었다.”
I. 6월14일(토요일)
스마트 폰을 잘 못 건드려 알람이 울리지 않는 바람에 늦게 일어나, 전날 밤 짐을 다 꾸려 놓지 않았다면 제 때 출국을 못할 뻔 했습니다. 예정보다 반시간 가량 늦은 오전 7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출국수속을 밟았습니다. 출국심사를 마친 일행15명은 인월드여행사 정연오님의 인솔 하에 KAL기에 탑승했습니다.
운항시간은 대략 3시간으로 짧지 않은 시간이어서, 중국의 최근세 정치동향을 그린 “China Hand"를 꺼내 읽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초대 주중대사인 릴리(Lilley)가 쓴 것으로, 원래 책 주인이 받아놓은 저자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어 비록 헌 책이지만 소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중국의 시안공항에 도착해, 현지가이드 장용님의 안내로 인근 레스토랑으로 옮겨 점심을 들었습니다.
1.실크로드 출발점

시안공항이 자리한 곳은 진의 수도였던 함양으로, 이곳에서 시안시내까지는 버스로 1시간가량 걸린다 합니다. 위하(渭河)를 건너 시안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는 토요일인데도 혼잡하지 않았습니다. 시안은 분지(盆地) 도시이지만 그 면적이 같은 분지도시인 대구의 11배가 넘을 정도로 광활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시원시원했습니다. 1시간을 채 못 달려 도착한 첫 기착지는 이 도시의 서쪽에 자리한 실크로드 출발점입니다.
자그마한 야외 공원에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걸어가는 모습들을 형상화 한 커다란 조각물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주 튼실해 보이는 아이가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동안 어느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조각물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고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입구의 석판에 남북의 두 길로 나 있는 실크로드가 잘 그려져 있었습니다.
실크로드(Silk Road)를 개척한 사람은 한나라의 장건(張騫, ?-BC114년)으로 이곳 산시성이 낳은 인물입니다. 흉노를 쳐부수기 위해 동맹을 맺을 뜻으로 서역의 대월지국으로 떠난 장건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난신고 끝에 돌아왔으나, 결과적으로 서역으로 가는 도로를 개척했으니, 그 길이 바로 실크로드인 것입니다. 이때 서역에서 가져온 물품이 포도, 석류, 복숭아와 한혈마 등으로, 포도와 석류는 오늘의 시안이 자랑하는 주산물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Silk Road)는 인류문명사의 대표적인 통로입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이트 호펜이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과 서부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실크로드로 불렀습니다. 이 교역로를 통해 주로 수출된 물품이 비단이어서 그렇게 불렀는데, 그 후 실크로드는 계속 확장되어 이제는 여기 시안을 출발점으로 하는 전통적인 오아시스로(Oasis Road)외에 유라시아지역의 북방지대를 지나는 초원로(Step Road)와 지중해에서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을 지나 중국남해에 이르는 남해로(Southern Sea Road)의 3대 통로로 분류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이신 정수일교수는 그의 저서 ‘실크로드학’에서 오아시스로의 동서 양쪽 끝이 우리나라와 로마라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한반도 남단에 자리한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통해 드러난 것은 실크로드를 통해 당나라에 전해진 후 다시 통일신라로 넘어왔기 때문이라 합니다.
2.대흥선사(大興善寺)

실크로드출발점에 이어 방문한 곳은 꽤 큰 규모의 대흥선사(大興善寺)로,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해 우리나라의 산사처럼 조용하고 아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절이 건립된 것은 서진(西晉) 무제(武帝) 때인 266년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백여 년 전이니 고찰중의 고찰입니다.
대흥선사는 당대(唐代)의 3대 사찰 중의 하나로 중국밀교의 발상지입니다. 밀교(密敎)란 일반불교를 현교(顯敎)라 부르는데 대한 대칭어로 진언(眞言)밀교로도 불립니다. 밀교는 정통적으로는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전신적(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의례(儀禮)의 체계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지만,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 성력(性力)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합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융성했던 이절도 그동안 밀교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탄압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홍색 기와와 초록색 기와가 일정 비율로 덮고 있는 독특한 지붕과 1층의 기둥 및 문짝을 새빨간 색으로 칠해 놓은 천왕전(天王殿)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나라 절보다 훨씬 큰 사천왕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서있었습니다. 마당을 경계로 마주보는 대웅보전의 석존불과 대칭의 위치에 자리했다는 천왕전의 베타불상(?)은 익살스러운 상을 하고 있어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이 절은 대웅보전에 오방오불(五方五佛)을 모신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합니다. 우리나라 사찰은 가운데 본존불을 모시고 양 옆에 협시불이 있는데, 여기 이절은 다섯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모셔져 각각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을 하나씩 맡고 있습니다. 이 절에서 눈에 띄는 또 하는 모기향 모양의 향으로 그 크기가 엄청나 향불만 피지 않는다면 저처럼 이 향을 동심원을 뜻하는 설치예술의 한 작품으로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절에도 어김없이 무거운 비석을 지고 있는 동물상이 코끼리상 및 사자상과 더불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그 동물이 거북으로 알아왔는데 선생님께서 거북이가 아니고 장남(長男) 용(龍)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더 이상 선무당이 사람잡지않게 만들려면 저처럼 바로 알지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는 용기있는 원로들이 더 많이 계셔야 할 것입니다.
3.산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시안 시내 자리한 삼층 건물의 산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박물관답게 관람객들로 붐볐습니다.
3층 건물의 산시역사박물관은 유료관인 특별전시실과 무료관인 일반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특별전시실에서는 출토문물특별전이 열리어 전시된 당의 유물들을 통해 당의 흥망성쇠를 조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여기 시안(西安)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 땅이어서 가능했습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당대 최고로 번성한 국제도시로 그 인구가 백만 명을 넘었다하니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고도로 뽑히고도 남을 만합니다. 장안이 서안으로 개명된 것은 명의 홍무제 때 일입니다. 장안(長安)은 장치구안(長治久安)을 뜻하는 것으로 한 나라의 도읍지 이름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이름입니다. 이런 장안을 안정서북(安定西北)을 뜻하는 서안(西安)으로 개명했다는 것은 명이 장안(長安)을 한낱 서북쪽의 변방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전시실에는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시안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던 구석기시대부터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약100만년 동안의 자료들을 이 박물관이 소장한 것이 약 37만점에 이른다 하니 이정도면 각 시대별로 계층별로 어떻게 살았는가의 생활상등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병마용의 수많은 얼굴 상(像)입니다. 다음날 진시황병마용박물관에서 보게 될 병마용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아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습니다.
섬서성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미니아춰(miniature)를 보자 남쪽의 진령산맥과 서쪽의 황하가 한 눈에 들어와 왔습니다. 전시실 입구에서 “中國歷史與文明”을 한 권 샀습니다. 2002년 백두산을 오를 때 사둔 사진첩보다 인쇄상태가 훨씬 좋아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파워를 여기서도 느꼈습니다.
전시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용산의 국립박물관보다 조명이 많이 어두워 1시간 가까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빠져나가자 온 세상이 환해 보였습니다.
국내 여행 시에는 경주 같은 고도를 찾아가도 박물관을 잘 들르지 않은 제가 외국에 나갈 적마다 그 곳 박물관을 찾는다는 것이 조금은 겸연쩍고 부끄러웠습니다.
4.대안탑(大雁塔)

탐방 첫날의 마지막 코스는 대자은사(大慈恩寺) 경내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입니다. 대안탑이 원래 자은탑(慈恩塔)으로 불린 것은 그 세워진 장소 때문일 것입니다. 모노레일을 설치할 만큼 공원이 제법 넓어 입구에서 바라보는 대안탑이 저만치 멀리 보였습니다. 때마침 흐린 날씨에 빗방울도 간간히 뿌려 더운 줄 몰랐습니다.
대안탑은 당(唐) 고종 때인 652년에 설립된 7층의 전탑(塼塔)으로 그 높이가 64m에 이릅니다. 수(隨)나라 때에 장안을 떠나 서역의 천축을 갔다가 당(唐)나라 때에 돌아온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고자 지었다는 대안탑은 원래가 돈이 없어 표면만 벽돌로 쌓고 안을 흙으로 채운 토심전탑(土心塼塔)이었던 것을 측천무후가 허물고 다시 지었다 합니다. 벽돌을 붙이는데 쓰인 접착제는 밥풀과 복숭아즙, 그리고 석회를 섞어 만든 것이라고 가이드님이 일러주었습니다.
시안은 황토지역이어서 벽돌을 구워내는데 필요한 흙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흔해 돌로 쌓은 석탑이 많습니다. 축조기술상 목탑(木塔)이 가장 먼저 세워졌습니다. 그 다음 전탑(塼塔)에 이어 석탑(石塔)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래서 그 유명한 석가탑과 다보탑 모두 석탑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목탑은 신라 선덕왕 때 세워진 황룡사 9층탑으로 몽고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소실됐습니다. 그 옆의 분황사 석탑은 전탑을 흉내 낸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입니다. 소실된 황룡사9층탑을 복원하는데 4톤 트럭 2,400대분의 금강송이 소요된다 하니 탑을 쌓는 축조기술이 높아져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대자은사(大慈恩寺) 담벽 너머로 가까이 있는 대안탑을 바라본 후 그 전신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다가 인터넷에서 눈에 번쩍 띄는 대자은사(大慈恩寺)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관음보살인 천수대비(千手大悲)의 불상이 그것인데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가 천수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신라의 여인 ‘희명(希明)’이 지은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때문입니다.
무릎을 낮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전에
기구의 말씀을 드리노라
천개의 손, 천개의 눈을
한 손을 놓아, 한 눈을 덜어
두 눈 감은 나에게
하나나마 주어 그윽히 고쳐주소서 매달리누나
아아, 나에게 베풀어주신다면
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리오
신라 경덕왕 시절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출생한지 5년이 되자 장님이 됩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분황사의 천수대비 앞에서 눈을 뜨게 해달라고 아이를 시켜 이 노래를 지어 빌게 합니다. 그리고 눈을 뜨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천수관음도 많은 아기들의 눈을 뜨게 하는 자비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천여 년 세월이 흐르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한 스님이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준다며 공양미 삼백 석을 받아간 심청전에서는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기도만으로 눈을 뜨게 해준 천수대비의 자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심봉사가 눈을 뜬 것은 전국의 소경들을 모아 치른 잔치를 치르고 나서입니다. 심청조차도 스님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벌써 눈을 떴을 심봉사를 만나기 위해 베푼 잔치에 심청은 최근에 눈을 뜬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아예 장님들을 부릅니다. 누군가가 심청의 효심을 돋보이게 한 것 외에 불교의 세속화를 꼬집기 위해 심청전을 썼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거리를 지났습니다. 시안의 어느 특정 거리를 당대의 역사거리로 조성한 것은 곡강그룹(谷江group)이라는 재벌회사인데 이 회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유적지도 복원하고 관리한다 합니다. 당대의 인물들로 거리를 꾸민 역사거리를 지나노라니 역사가 희화된 것 같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5성급 호텔인 Golden Flower Hotel(香格里拉金花大酒店)로 옮겨 여장을 푼 후 이근우 선생님 방에서 간단히 미팅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II.6월15일(일)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보 차 호텔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외국 여행 시에 빼놓지 않는 것이 묵고 있는 호텔 주변을 산보하는 것과 대형서점을 들르는 것인데 막상 밖으로 나가보니 거리가 삭막해 곧바로 산보를 포기하고 호텔로 되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오전 9시반 경 전용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로 이동 중에 가이드님이 이것저것을 설명을 해주어 많이 도움 됐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두 나라의 역사를 함께 꿰뚫는 가이드님의 해박한 지식과 성실함 덕분입니다. 서민용으로 보이는 아파트들의 창문에 쇠창살을 친 것을 보고 이상하다 했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베란다가 없어 아이들이 놀다가 실수로 떨어지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 합니다. 중국에는 고가의 브랜드상품은 우리나라보다 더 비싼데 반해, 서민들에 없어서 안 되는 식료품은 아주 저렴해 돈을 조금 버는 사람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다 같이 평등하게 잘살 것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인민들 간의 빈부차를 인정하고 그 전제 위에서 정책을 펴나는 것이다 싶어 의아했습니다.
1.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八路軍西安辦事處記念館)

탐방 제2일의 첫 번째 방문지는 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八路軍西安辦事處記念館)입니다. 단층 건물의 이 기념관은 흰색의 회벽이 길게 이어졌고 맞은 편 벽 사이에 바닥이 벽돌로 된 1차선 넓이의 큰 길이 나있어 마치 깔끔한 회랑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건설된 이 기념관을 보자 그 외양이 화려하지 않고 검박해 온갖 역경을 견뎌낸 팔로군을 기리는 기념관답다 했습니다.
팔로군(八路軍)이 무엇인가는 네이버에서 올린 중국시사문화사전에 “항일전쟁 때 화북에서 활약한 중국 공산당 군대로 정식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인터넷자료에는 팔로군은 제2차 통일전선이 결성된 1937년에 만들어졌으며 국민당 정부의 감독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모택동(毛澤東)의 오랜 군 동지인 주덕(朱德)이 키운 중국공산당의 군부대였고,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인민군으로 재편되어 1948년 만주에서 국민당 정부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건물 안 ‘中國共産黨西安歷史展覽館(1925-2010)’에서 중국의 최근세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가이드님 또한 이 기간 중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몇 몇은 어르신들로부터 직접 들어 알아서인지 그의 설명에서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졌습니다. 1937년 국민당의 장개석이 만주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에 감금된 채 공산의 모택동과 제2차 국공합작을 한 이야기, 1960년대 산업정책의 결정적 실패로 엄청 많은 인민들이 아사지경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유소기에 넘겨준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등 모택동이 벌인 일련의 권력투쟁 등을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건물 안쪽으로 길게 늘어진 통로에 여러 개의 원형 문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참으로 독특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이곳은 1935년 대장정 이후 공산당혁명의 총사령부가 들어선 연안과 멀지 않아 그곳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에 신분증을 발급해 준 곳이라 하니 지금처럼 건물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이 아름다운 원형의 문도 그 후에 만들어졌을 것 같습니다.
가이드님이 간단히 설명한 ‘강철운동’은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칭하는 것입니다. 대약진운동이란 공산혁명 후 근대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모택동이 전개한 중국공산당의 농공업대증산정책을 이릅니다. 중국은 1958년 5월 15년 이내에 세계2위의 경제대국인 영국을 추월하자는 슬로건 하에 ‘더 많이, 더 빨리, 더 훌륭히, 더 절약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며 전력투구했습니다. 100만개의 소형제철소를 만들어 생산한 선철은 품질이 조악해 30%는 버려야 했으며, 이런 철을 생산하기 위해 철제 농기구는 물론 밥 짓는 솥까지 바쳐야했습니다. 농민의 태업과 반항,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으로 약2천만 명에서 4천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홍문숙 및 홍정숙 두 분이 엮은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사건”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960년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1962년 모택동은 국가주석 직을 잃습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잃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였는데,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이 관에 전시된 사진들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경제성장을 이유로 박정희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중국인들은 수천만 명을 아사토록 한 모택동을 진시황과 더불어 가장 존경한다 하니 국민적 지도자에 대한 존경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나 봅니다. 그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은 역사적 사실을 가이드님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간 것도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모택동을 너무 존경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2.화청지(華淸池)

팔로군 기념관(八路軍 記念館)에 이어 저희가 찾아 나선 곳은 시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5km(?)가량 떨어진 화청지(華淸池)입니다.
중국의 여러 왕조를 한데 모아 놓은 곳을 들라면 단연 화청지(華淸池)가 으뜸일 것입니다. 이곳에 주(周)의 유왕은 여궁(驪宮)을, 진(秦)의 시황제와 한(漢)의 무제는 행궁(行宮)을, 당(唐)의 현종은 앞서 것보다 훨씬 화려한 화청궁(華淸宮)을 지었습니다. 청(淸)의 서태후가 쉬어간 누각도, 1937년 장학량이 국민당의 장개석을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서안사변의 현장이었던 오간장도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화청지를 설명하는 최고의 키워드는 온천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온천수가 나지 않았다면 어느 왕조도 이 먼데까지 찾아와 궁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천욕이 몸에서 나는 암내를 줄이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당의 현종은 암내가 심히 나는 양귀비가 자주 온천욕을 할 수 있도록 온천수가 샘솟는 이곳에다 화청궁을 지었습니다. 목욕탕박물관으로 지구상에서 유일할지도 모르는 어탕유적박물관(御湯遺蹟博物館)이 이곳에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 당의 현종과 양귀비가 즐겼을 온천탕도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오늘날 화청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은 온천이 아니고 당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이 둘의 사랑은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가 되어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중국에서 이 좋은 소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이곳을 화청지(華淸池)로 불리게 한 연못은 한가운데 넓게 자리했고 그 뒤쪽으로 꽤 높은 여산(驪山)이 병풍처럼 서있는데, 이 못과 산이 모두 실경무극 ‘장한가(長恨歌)’의 주 무대임을 안 것은 이날 밤 공연을 보고나서입니다.
양귀비는 뚱뚱한 몸매에도 허리가 가늘어 기막히게 춤을 잘 추었다 합니다. 당의 현종을 뇌사시킬 정도의 춤 솜씨를 잘 재현한(?) 것이 광장의 조각 양귀비상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 양귀비 상 앞에서 춤추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은 오늘날도 양귀비가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가의 실경무극 ‘장한가’가 그 많은 객석을 꽉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3.진릉지궁(秦陵地宮),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 진시황릉(秦始皇陵)
본격적인 탐방에 대비해 한껏 배를 불린 후 진시황을 만나러 버스에 올랐습니다. 진시황의 알현은 진릉지궁(秦陵地宮)에서 시작됐습니다. 뒤이어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과 진시황릉(秦始皇陵)을 차례로 방문해, 시안 탐방 길로 저를 이끈 진시황에 예의를 다했습니다.
진시황의 시황제 즉위 전 이름은 영정(嬴政)입니다. 영정은 BC259년에 태어나, BC246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秦)나라의 31대 왕위에 오릅니다. BC230년부터 10년에 걸쳐 한, 조, 연, 위, 초와 제 등 주(周)의 6열강 제후국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후, 드디어 BC221년에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始皇帝)로 등극합니다. 시황제는 중국최초로 군현제를 도입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법가로 사상을 통일하며, 문자, 도량형, 화폐, 수레의 바퀴, 전국도로의 폭을 통일해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획기적 발전을 가져옵니다. 이런 진나라가 건국 15년 만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분서갱유, 만리장성 축조와 여산릉 및 아방궁 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로 민심이 떠나서였습니다. BC210년 산동연해지방을 순방 길에 생을 마감한 진시황은 무소불위의 절대군주답게 죽어서도 엄청 큰 규모의 무덤에 모셔집니다.
1)진릉지궁(秦陵地宮)

진릉지궁(秦陵地宮)은 진시황릉 내부의 지하궁을 축소해 재현한 것으로 실제 궁이 아닙니다. 이역만리를 달려와 진짜는 못보고 모형만 보고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에 진시황릉 내부에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적어 넣었다 합니다. 2002년 “사기”내용을 근거로 과학탐사단을 구성해 대대적으로 탐사를 벌인 결과 진시황릉 내부에 거대한 지하궁전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궁전을 1/30로 줄여 만든 지하궁이 진릉지궁(秦陵地宮)인 것입니다.
지하로 내려가 만나본 진릉지궁은 모형이지만 웅장했습니다. 조명등으로 수은의 흐름을 재현한 강줄기는 화려함을 넘어 화사했습니다. 지하 70m에 지은 원래 지하궁은 진시황의 생부로 알려진 여불위의 작품입니다. 2,200여년전에 지은 지하궁전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제대로 복원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모조품 진릉지궁을 지은 데는 관광객을 더 많이 끌어드리려는 중국의 상술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에서도 진품 보호를 위해 모조품을 전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 거리처럼 아예 한 회사가 거리 전체를 맡아 모조품으로 꾸미기도 합니다. 생각이 참으로 실용적이라고 칭찬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찌 모조품이냐며 비난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2)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

진릉지궁을 나와 버스로 이동한 곳은 진시황제박물원(秦始皇帝博物院)입니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과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박물원 입장권 하나로 모두 볼 수 있어 우선 병마용박물관(兵馬俑博物館)부터 관람했습니다.
병마용(兵馬俑)이란 진시황이 죽은 후 자신의 묘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크기로 만든 것입니다. 진시황릉을 지키고자 동쪽 1.5Km지점에 배치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박물관 안의 갱들입니다. 당시의 풍습대로 실제 사병을 순장한다면 전쟁을 할 수 없어 취한 조치라지만, 그 많은 병마용이 서로 달라 주물로 똑같이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 또한 인력소요가 엄청 났을 것입니다.
여기 병마용은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발견했다 합니다. 그 농부(?)가 구매 고객에 친필사인을 해주는 상점을 먼저 둘러본 후 1호 갱(坑)으로 옮겼습니다. 3호 갱까지 모두 박물관으로 지어놓아 사진으로 보아온 병마용은 박물관 갱 안에 안전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여기 1호 갱은 길이가 210m, 폭이 60m, 깊이가 4.5m-6m로 폭만 조금 더 넓다면 축구장으로도 손색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습니다. 갱 안에 전시된 병마용은 발굴 당시 조각난 것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놓은 것이라 합니다. 사진에서 못 본 것을 확인한 것은 병마용의 속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병마용도 도자기와 유사한 방법으로 만들었음을 일러주는 것으로 당대의 도자기 제조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통로에서 내려다 본 병마용의 실제 크기는 도용(陶傭)이 1.75-1.96m, 도마용(陶馬傭)이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 보다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합니다. 발굴당시 채색된 청색은 햇빛에 노출되어 모두 날라 가고 이제는 흙 색깔만 남아 있었습니다. 발굴된 병마용은 많은 숫자임에 틀림없지만, 매장된 전체도용수로 추정되는 약6,000개에는 한참 못 미쳐 보였습니다.
2호 갱은 1호 갱보다 2년 늦은 1976년 4월에 1호 갱 동북쪽 지점 가까이에서 발견됐습니다. 1호 갱에서 조금 떨어진 2호 갱은 전체 크기는 1호 갱의 절반 수준이나 폭은 오히려 더 넓어보였습니다. 장방형의 1호 갱과는 달리 L 자형을 한 2호 갱 또한 부분적으로 발굴되었을 뿐입니다. 유리진열장 안에 놓인 병마용을 보노라니 전신의 섬세한 묘사와 살아 있는 얼굴표정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병사가 도열된 1호 갱과는 달리, 2호 갱에는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계급이 높을수록 키가 크고 배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부하들보다 잘 먹고 잘살아서일 것입니다. 갱에 전시된 병마용 숫자는 1호 갱에 비해 훨씬 적었습니다.
마지막 3호 갱은 2호 갱보다 한 달 늦은 1976년 5월에 1호 갱의 서북쪽 25m 지점에서 발견됐습니다. 2호 갱보다 조금 적어 보이는 3호 갱은 군사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전차 1량과 보병용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합니다.
동서방향으로 장군과 병이 도열한 1호갱, 보병과 기병이 같이 서 있는 2호갱과 병마용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호 갱을 순서대로 돌아보고 총정리는 같은 건물의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가름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아는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 했습니다. 3개의 갱에서 발굴된 병마용을 매개물로 하여 진나라와 역사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와 두발형식 등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병마용 발굴 작업은 그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대화의 과제는 아무런 통제 없이 사적 권력을 행사한 진시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로 모아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진시황릉(秦始皇陵)

조상이 묻힌 묘지가 전부 나무로 덮여 봉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후손들은 틀림없이 후레자식으로 욕 듣기 십상입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호화 묘로 꾸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매년 추석이면 제초기로 풀을 깎아줘 비록 허름해도 깔끔한 것이 우리나라 묘입니다.
살아생전 온갖 권력을 거머쥔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도굴을 염려해 중독성 금속인 수은(Hg)을 이용해 여러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는데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해 내부를 발굴하지 못한다 하니, 진시황은 아직도 수은 증기에 취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병마용박물관에서 버스로 이동해 진시황릉 경내로 들어선 후 묘지로 이어지는 넓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진시황릉은 40m높이의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봉분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있어 얼핏 보면 여느 야산과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아서는 중국의 시황제가 더 대접을 받았겠지만, 죽어서는 조선의 임금들이 훨씬 더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조선왕릉과 대비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승에서 맹독성 물질이라고 전부 피하는 것을 저승이라고 반길 리 없겠건만, 도굴을 염려해 수은 함정을 만든 것이 진시황이고 보면 밤마다 수은증기를 마셔야 하는 진시황의 혼백이 참으로 안됐다 하면서도 그 또한 자업자득이다 싶었습니다.
봉분 주위를 한 바퀴 빙 도는데 1시간가량 소요된다 하여 포기하고, 기념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몇 방 찍고 입구로 돌아가 셔틀버스를 탔습니다.
4.중국수도실경역사무극(中國首都實景歷史舞劇) “장한가(長恨歌)” 관람

예정된 ‘성서가무쇼’를 대신해 화청지에서 공연되는 중국수도실경역사무극 “장한가(長恨歌)”를 관람했습니다. 현지에서 일정을 바꾸기가 지난한데도 총무님이 신속하게 변경을 결정했고, 가이드와 안내원 두 분도 신속하게 움직여 안 봤으면 후회막급일 장한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장한가는 당대의 명시인 백거이가 지은 한시 ‘장한가(長恨歌)’를 스토리로 한 무극입니다. 중국어를 못해도 이 극에 빠져 들 수 있는 것은 주 내용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연정지사이어서 능히 짐작되는 바이고, 주가 양귀비의 춤이어서 눈으로 보고 즐기기에 별반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극 ‘장한가(長恨歌)’의 주 무대는 낮에 본 연못 부용호입니다. 뒷산 여산도 무대의 배경으로 쓰여 이 극이 스펙타클하게 보이는데 일조했습니다. 여산 뒤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은 가히 일품이었고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양귀비는 한 마리 학이었습니다. 춤이 많아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장한가(長恨歌)’에 극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것은 안록산의 난입니다. 당 현종이 끔찍이도 아꼈던 양귀비를 자살하도록 만든 것은 안록산의 난 때문인데, 안록산도 죽고 현종도 아들에 양위를 함으로써 권력을 잃게 됩니다.
무극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가 선녀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내래이션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으나 ‘장한가(長恨歌)’의 첫 장을 읊은 것이라면 양귀비의 등장으로 후궁들이 빛을 잃게 되었다며 그녀의 미색을 찬한 아래 시가 될 것입니다.
漢皇重色思傾國 당나라 임금 여색 중히 여기어 뛰어난 미인 생각하였으나
御宇多年求不得 천하를 다스린 지 여러 해 되도록 구하지 못하고 있었네
楊家有女初長成 양(楊)씨 집안에 딸 막 장성하였는데
養在沈閨人美識 깊은 규방에서 자라 아무도 알지 못하였네
天生麗質難自棄 하늘이 낸 고운 자질은 스스로 버리기 어려운 것이니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있게 되었네
回頭一笑白媚生 머리 돌려 한 번 웃으면서 갖가지 아리따움 피어나니
六宮粉黛無顔色 여섯 궁전의 곱게 단장한 후궁들 얼굴빛 잃게 되었네
비익조가 날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 무극 ‘장한가(長恨歌)’는 러브스토리의 전형이라 할 만 합니다. 백거이 또한 현종과 양귀비가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가 되기를 염원하며 아래와 같이 시를 맺었습니다.
臨別殷勤重寄詞 떠나올 때 은근히 거듭 말을 전하는데
詞中有誓兩心知 말 가운데 맹세 있어 두 마음만이 안다네
七月七日長生殿 7월 칠석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밤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속삭일 때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 나래 붙은 두 마리 새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가지 붙은 두 나무 되자 하였다네
天長地久有時盡 하늘 영원하고 땅은 오래간다 해도 다하는 때가 있을 것이니
此恨綿綿無結期 이 한 만은 끊임없이 다할 날 없으리라
위 시는 김학주 교수님이 번역한 “唐詩選”에서 뽑았습니다. 전문을 실어보고자 했으나 너무 길어 첫 장과 마지막 장만 옮겨놓았습니다.
공연예술에 자주 접해보지 못한 제게도 ‘장한가(長恨歌)’가 참으로 대단하다 싶었던 것은 능수능란한 춤과 현란한 조명, 그리고 여산까지 동원한 무대였습니다. 1시간 남짓 ‘장한가(長恨歌)’에 매료되어 오랜만에 공연예술의 진수를 맛보았습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습니다. 교통사고로 고속도로가 막혀 자정이 넘어 도착했습니다. 밤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대부분이 승용차가 아니고 화물차라는 설명을 듣고 한참 뒤에서 우리나라를 쫓아오던 중국이 어느새 바로 뒤에 와있다 싶어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III.6월16일(월)
빗방울이 열기를 식혀준 것은 탐방 첫날인 그제 하루뿐이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분지 특유의 뜨거운 날씨가 계속 되어 후덥지근했습니다. 탐방할 곳은 다섯 곳이지만 모두다 이동거리가 짧은 시안 시내에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67세의 나이에 아직도 해외여행이 익숙지 않아 해외체류는 가급적이면 보름을 넘기지 않으려 합니다. 제일 현지음식에 적응이 잘 안 되는 데, 언어문제까지 더해지면 신경이 너무 쓰여 여행이 고통스러워집니다. 또 하나 기간이 길어지면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여행기 작성입니다. 2004년부터 빼놓지 않고 산행기를 작성해 글 쓰는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여행기 또한 짧은 글이 아니어서 고통스럽기는 여전합니다.
틈틈이 기록한 메모와 곳곳에서 찍어놓은 사진이 탐방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들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역사와 문화를 어우르는 공부 글을 쓰고자 해서입니다. 자연 읽어야 할 참고자료가 많고 확인할 것도 적지 않아 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여행기를 쓰느라 끌탕을 합니다. 어렵사리 쓴 제 글이 동행한 분들에 잘 읽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 중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가 제 글에서 거의 빠지고 자료들이 대신 들어가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가장 자주 읽는 최고의 독자가 저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1.흥경궁 공원(興慶宮 公園)

흥경궁(興慶宮)은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살면서 집무를 보던 황궁으로, 본래는 현종이 태자시절 머무르던 집을 황제가 된 후 황궁으로 바꾸었다 합니다.
우리나라라면 이런 유서 깊은 황궁을 완전 개방해 공원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한 때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둔갑시킨 것은 일제의 만행이었기에,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 바로 잡아 왕궁으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 때 수표교 다리를 어디에 설치하느냐로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논쟁했던 우리나라인데, 서울시가 혹시라도 시민들을 위해 왕궁을 공원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문화재청은 물론 각종 시민단체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합니다.
중국은 그런 일을 뚝딱 해치웠습니다. 흥경궁의 반을 잘라 길 건너 교통대학 부지로 사용했고 나머지 반은 공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창덕궁의 반을 인근 성균관대학교에 넘겨주고 비원이 자리한 나머지 반을 완전 개방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제기도 찰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5백년 도읍지인 서울이 가는 곳마다 유적지라면, 천백년 넘게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은 시안은 밟히는 것마다 문화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저승 몫을 위해 이승 몫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현세 중시의 생각이 강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흥경궁은 더 이상 황궁이 아니어서 우리나라 왕궁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관람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7-8명가량의 소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자리를 옮기자 빙 둘러서서 춤을 추는 분들도, 제기차기로 묘기를 부리며 세월을 낚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저희 일행들이 자연스럽게 같이 춤을 추고 제기를 차는 모습을 보고 저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을 수도 없는 근엄한 경복궁을 떠올렸습니다.
이곳에서 누워있는 이 백(李 白)을 만나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시선(詩仙)으로 알려진 이 백(李 白)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와 쌍벽을 이루는 당대(唐代)의 이름난 낭만시인입니다. 침향전(沈香殿)에서 연회 중인 현종의 부름을 받고 양귀비를 찬하는 한시 ‘청평조 삼수(淸平調 三首)’를 지어 바친 이 백은, 뒷날 이 시로 어용문인(御用文人)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좀 들었을 것입니다. 아래 시는 안치 님이 짓고 신하윤 및 이창숙 두 분이 공역한 “영원한 대자연인 이 백”에서 따왔습니다.
淸平調 청평조
雲想衣裳花想容 구름 같은 옷이요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 봄바람 스치는 난간에 이슬 맞은 꽃
若非群玉山頭見 군옥산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會向瑤臺月下逢 요대 달 아래 만난 선녀가 틀림없구나.
一枝紅艶露凝香 한 떨기 붉은 꽃 이슬에 향기로워
雲雨巫山枉斷腸 무산 신녀는 공연히 애만 끊나니.
借問漢宮誰得似 묻노니 한 나라 궁전의 누구와 닮았나
可憐飛燕倚新妝 사랑스런 조비연도 새 단장해야 겨우 비슷하리.
名花傾國兩相歡 아름다운 꽃과 미인이 서로 사랑하니
長得君王帶笑看 길이 군왕께서 웃으며 보시리라.
解釋春風無限恨 봄바람 끝없는 한도 녹일제
沈香亭北倚闌干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섰네.
공원의 운치를 더해주는 호수를 빙 둘러보며 ‘청평조 삼수’를 지어 바칠 만큼 과연 양귀비가 미인이었는지 이 백으로부터 들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몇 곳만 더 들러보고 공원을 빠져나왔습니다.
2.서안성벽(西安古城墻)

성곽은 그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도성과 산성입니다. 도성(都城)은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으로 서울의 한양도성이 그것입니다. 산성(山城)은 산의 자연적 지세를 이용해 쌓은 성을 일컫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은 부산의 금정산성입니다.
서안성벽은 명나라의 홍무제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쌓은 도성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도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이 성을 쌓을 때 명나라의 수도는 여기 장안이 아니고 금릉(南京)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홍무제가 명의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는 것도 검토했으나 기운이 이미 쇠한 도시라서 제외하고, 1412년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합니다. 당나라 때 지은 도성 장안황성은 몇 번의 전란을 겪느라 무너졌고, 명나라가 그 토대 위에 다시 세운 서안성벽이 당대(唐代)의 위용을 재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안성벽의 길이는 13.7Km로, 비슷한 시기에 축성된 한양도성의 18km에 많이 못 미칩니다. 참고로 서안성벽은 1378년에 완공됐고 한양도성은 그 11년 후인 1397년에 축성됐습니다. 같은 도성이면서도 서안성벽과 한양도성이 서로 다른 점이 많아 흥미롭습니다. 첫째 축성기간입니다. 서안성벽은 8년이 걸렸는데 한양도성은 단 98일 만에 공사를 마칩니다. 중국인들의 만만디는 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둘째 성곽의 모양입니다. 서안성벽은 장방형이고 한양도성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많이 닮았습니다. 서안성벽은 평지에 쌓았고, 한양도성은 많은 부분 산을 이어가며 쌓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서안성벽에 있는 해자가 한양도성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성곽이 들어선 지형이 달라서입니다. 또 하나 큰 차이는 서안 성벽은 성곽 위를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아 길을 넓게 냈는데, 한양도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양은 배산임수에 기초해 만들어진 도시이고, 서안은 드넓은 평원의 분지에 세운 도시여서 이런 차이를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서안성벽 탐방은 동쪽의 장락문(長樂門)에서 시작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성안으로 들어선 곳은 사방이 막힌 옹성으로 성벽위로 계단이 나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 망루 앞에서 가이드님으로부터 서안성벽의 개요를 들은 후 1시간 동안 자유롭게 성곽을 관람하는 것으로 하고 각자 흩어졌습니다. 망루에서 남쪽으로 난 성곽 길을 따라 걸어 남쪽 끝 망루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남아 오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 서쪽 망루 두 곳을 더 다녀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역사인문학교실 회원 두 분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주체임을 확인했습니다.
폭이 좁은 우리나라 성만 보아오다 15m폭의 서안성벽 위를 걸으며 뭐 하러 이리 넓게 쌓았는지 의아했는데 성곽위에 놓인 수레를 보고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우리 선조가 걸어 다닌 성곽 길을 이들은 수레타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곽 위에도 성벽과 똑 같이 벽돌을 깔아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북경을 거쳐 열하를 다녀온 연암 박지원이 그토록 부러워한 것이 벽돌과 수레였는데, 이 둘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이 성을 쌓을 때는 성안이 성 밖보다 화려했을 것입니다. 6백 여 년이 지나 지금은 정반대가 된 것은 성안의 개발제한 때문이라 합니다. 성 밖은 해자로 파놓은 호성하(護城河)가 아름답게 보였고 성벽 바로 밑에 쉼터가 조성되어 깨끗하고 활기차 보였는데 성안에는 폐가(?)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지저분해 안과 밖의 차이가 극명해 보였습니다. 한 여름 저녁에는 더위를 피해 성곽 위로 올라와 쉬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아마도 성안의 시민들이 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안성벽은 과연 고성으로 완벽하다 할 정도로 견고하게 쌓았고 원형도 잘 보존되어 참으로 부럽습니다. 서안성벽에 비해 성곽의 길이가 훨씬 긴 한양도성이 18Km 중에서 5Km가량은 서울의 도시기능 유지를 위해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다 하니 더욱 그러합니다.
3.회족(回族)거리

회족(回族)이란 중국에서 살면서 이슬람교(回敎)를 신봉하는 소수민족을 이릅니다. 7세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온 아라비아인들은 한어(漢語)를 배우고 한족과 결혼도 해 회교(回敎)를 믿는데 따른 신앙생활을 빼놓고는 거의 다 한화(漢化)되었다 합니다. 북서부에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를 둘만큼 회족들이 많이 살아 중국전역을 통틀어 그 인구가 천만 명 가까이 됩니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시안에 회족거리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회족거리의 출발지는 중국공산당 건물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거리는 공산당이 시안의 회족들을 모아 만들었다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회족거리를 둘러보고 느낀 것은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가는 사람들로 거리가 부산하고 먹을거리가 여기 저기 많은 것도 그러합니다. 이곳의 거리음식은 안심하고 들어도 되는 것이 여기 회족들이 음식을 갖고 절대 장난을 안친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어서랍니다. 이 거리에서 돼지고기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제게는 한 번 획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아낙들에는 모처럼의 기회여서 점심 식사 후 1시간의 짬을 내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맥도날드에 들어가 아이스커피(?)을 들으면서 방송대 후배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년 전 방송대에서 회족의 이야기가 잠깐 비치는 고려속요(高麗俗謠)를 배웠습니다. 고려 사회가 얼마나 성적으로 분방했나를 가늠할 수 있어 드라마로도 방영된 “쌍화점(雙花店)”이 그것입니다. 3장으로 구성된 쌍화점의 첫 장에 나오는 회회(回回)아비가 아랍사람으로 쌍화점에 쌍화(雙花) 사러간 여인에 수작을 겁니다.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가고신댄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말씀이 이 점 밖에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데 같이 젊거츠니 없다
여기 회족들이 이 노래를 듣고 자기들을 비하했다고 따질 일도 아닙니다. 2장에서는 삼장사의 사주가, 3장에서는 술집아비가 회회아비를 대신해 등장하니 고려사회 전체가 타락했음을 보여주자는 것이지 회회인을 지목해 내세운 것은 아닙니다. 여기 와서 보니 회족들이 하얀 옷을 즐겨 입는다 합니다. 백의민족인 고려인이 같은 옷 색을 좋아하는 아랍인들을 비하할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4.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시안의 명소를 탐방하며 어려웠던 점은 안내전단을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중국어로 쓴 전단이야 소용될 리 없지만 그래도 참고가 될 만한 영어 전단도 얻지 못해 아직은 중국의 관광서비스가 우리에 한참 못 미친다 했습니다. 그런데 비림박물관은 달랐습니다. 한문본과 영어본에다 한글본까지 비치했습니다. 이리되면 탐방기 쓰기가 한결 수월해 고마웠습니다.
버스에서 하차해 옛날 급제한 사람들만 다녔다는 석교를 건넜습니다. 첫째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 쪽으로 큰 종이 보였습니다. 제야의 종처럼 때만 되면 중국 전역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바로 여기 이 종을 타종한 소리라 하니, 우리나라의 보신각종에 비견될 만합니다. 비림 박물관의 현판 ‘碑林’은 아편전쟁의 주역인 임칙서가 직접 쓴 친필이라 합니다. 비림 박물관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이름을 얻을 만한데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 외에도 공자를 모시는 공묘(孔廟)와 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이 함께 있습니다.
비림박물관의 진수는 비림(碑林)입니다. 박물관은 1944년에 개관했지만 비림(碑林)은 그보다 훨씬 전인 북송 원우 2년의 1087년에 세워졌습니다. 한나라 때부터 오늘까지 역대 비석과 묘지(墓志) 등 소장품이 4천여 점에 이릅니다. 처음 만나는 커다란 비석은 당 현종이 쓴 석대효경(石大孝經)입니다. 며느리 양귀비를 탐 낸 현종이 이 비를 지어 자식들에 효경을 가르친 바, 아들이 눈물로 뉘우치고 양귀비를 바쳤다는 후문이 사실이라면 효(孝)가 악용된 사례다 싶어 씁쓰레했습니다.
전시실에서 왕희지와 안진경 등 내로라하는 명필가들이 구사한 여러 필체들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제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에게는 여기 비림이 최고의 탐방코스여서 월요일인데도 전시실이 붐볐습니다. 비석이라야 묘비나 공적비 정도 밖에 모르는 제가 비석에 공자 상(孔子 像)을 그리고 화산(華山)과 태백산(太白山)을 그려 넣은 것을 보고 비석이야말로 최고의 캔버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내장에는 공묘(孔廟) 유적지가 비림 박물관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 공묘에 세워진 유물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대하석마(大夏石馬)로 높이가 2m, 길이가 2.6m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입니다.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대하(大夏)가 418년 장안을 공략하고 맏아들 혁련궤를 시켜 지키도록 했는데 대하석마에 학련궤의 직함이 새겨졌다 합니다. 타고 온 말들을 묶어두는 돌기둥이 떼 지어 서 있는 모습도 독특했습니다.
1963년에 세워진 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은 능묘석각과 종교석각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주는 섬서 경내에서 출토된 능묘석각으로 당나라의 이수석관과 곽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종교석곽의 주가 불교조상(佛敎彫像)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장안은 불교전파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5.문서거리

비림과 지근거리인 문서거리는 비림을 둘러본 관람객들이 반드시 찾아가는 곳입니다. 비림을 찾은 서예가(?)들이 문방사우가 다 갖춰 있는 이 거리를 외면할 수는 없어서일 것입니다. 글자는 예술성보다 가독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초서나 전서보다 예서를 더 좋아하는 저도 일행을 따라 문서거리를 휘둘러보았습니다.
이근우 선생님께서 이 거리가 우리 선조들이 북경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르는 유리창(琉璃廠)이라 하셨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유리창 거리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유리공장이 있는 밖은 모두가 점포로서, 재화와 보물들이 넘쳐난다, 책을 파는 점포 중 가장 큰 곳은 문수당과 오류거, 선월루, 명성당 등인데,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천하의 거인들이나 중국내 이름이 알려진 내부 분이 서점들 안에 우거하고 있다”
담헌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에도 담헌이 유리창을 찾아가 자명종을 보고 온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유리창은 책뿐만 아니라 다른 보물들도 많이 다룬 것 같은데 지금의 문서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안의 명소를 별 탈 없이 탐방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두 발이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문서거리로 탐방일정을 모두 마치고 그동안 고생한 두 발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중국국가체육선수전용마사지사배양센터”를 찾아가 세족서비스를 받았습니다.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돌아가 선생님 방에서 이번 탐방을 총평하는 것으로 공식일정을 마쳤습니다.
IV.6월17일(화)

고맙게도 현지가이드인 장용님이 시안공항까지 배웅해주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장용님으로부터 조선족과 한국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몇 번이나 파탄의 지경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선족들이 수많은 눈물을 흘려야했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 미안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대한민국이 어째서 조선족들에 적절한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는가는 따져서 고쳐나가야 할 일입니다.
시안공항을 출발해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역사인문학교실의 회장님과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동생분과 언니 분을 동원해 인원을 채웠다는 말씀을 듣고 이 세상에 쉬운 것이 없다 했습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모자를 비행기에 두고 나와 또 일행들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갈 때는 늦잠으로, 올 때는 깜박해서였습니다. 치매 전조일까 싶어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자를 찾아 걱정하기는 아직 이르다며 자위했습니다. 이렇게 탐방기를 쓸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치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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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3박4일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시안의 명소를 거의 빠짐없이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체의 쇼핑을 배제해 가능했습니다. 패키지여행보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대신에 일정이 알차 돌아볼 곳은 모두 빠짐없이 돌아보았습니다. 이번 문화탐방을 주선한 선생님, 프로그램짜느라 고생하신 분들과 함께한 모든 분들에 감사말씀 올립니다.
*위 사진 몇 장은 인월드여행사의 정연오님이 찍은 사진을 받아 전재했습니다. 정연오님께 감사드립니다.
<탐방사진>
1.실크로드 출발점






2.대흥선사





3.산시역사박물관





4.대안탑





5.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







6.화청지(華淸池)
















7.진릉지궁








8.진시황병마용박물관












9.진시황릉








10.흥경궁공원







11.서안성벽
















12.회족거리





14.비림박물관













15.문서거리




16.시안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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