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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사후 1500년 회고 기념 강연, 1930년 5월 4일 튀빙겐 대학교 카톨릭 신학부
칼 아담(Karl Adam) 지음, 구영철 옮김
인문 과학의 영역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그러한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실은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이 서양 역사의 중차대한,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하는 점에 있습니다. 한 이교도 아버지와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는 저 열광적인 흥분의 시대, 곧 이교문화와 기독교가 마지막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에 여전히 배교자 율리안의 투쟁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율리안은 가장 극한 폭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향력에서 로마 제국을 빼돌려 이교 제신(諸神)에게 다시 바치기를 원하였던 사람입니다. 생애의 절정에서 어거스틴은 중차대한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는데, 곧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카톨릭 국가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 감독과 황제를 서로 동거동락 하게 하였던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때에, 동 로마와 서 로마의 분리를, 즉 어떤 의미로 서방의 탄생 시간을,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게르만 정신의 탄생 시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미 알라리히가 로마를 침공하였고, 게르만 지파들은 서 로마 제국을 쳐서 그 잔재로 자신의 제국들을 건설할 참이었습니다. 열병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안으로, 게르만계 반달족이 그의 감독 도시(히포)를 포위하였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즉 한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의 외적인 운명에 따라 볼 때에도, 과도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서, 이교 문화가 기독교에 의하여, 로마 문화가 게르만 문화에 의하여 극복되었던 시대와, 형성 중인 서양의 최초의 윤곽들이 역사의 하늘에서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직시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독특한 특성 이외에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성자 자신의 인격입니다. 이미 생전에도 상당히 읽혀졌던 「고백록」1)에서 그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한 영혼의 역사를 보기 드문 필체로 그리고 있는데, 이 필체는 아주 복잡다단하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과정들을 그 본원적인 신선함과 향내를 풍기는 가운데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에, 곧 고대 말기의 정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심리학적 심리 관찰과 심층 관찰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현대적인 어느 현대인과도 같이,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 세계에 힘 입고 있습니다. 단순한 세상 감정으로 대담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그냥 뛰어 넘어섬으로써 자신을 등한시하고 외부 세계에 전념하던 고대 사람의 입장과는 현격하게 달리 그의 사유에 있어서 내적인 사람, 곧 인간 영혼은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가까운 의미 있는 성찰 대상과 인식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에 어거스틴은 의식적인 경험주의자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섬세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진정 "생리학적 심리학"2)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성찰과 타인 성찰의 노정에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표현들과 기능들과 법칙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여전히 오늘도 어린아이의 영혼의 삶과 그의 놀이와 눈물과 거짓말에 대한 그의 진단들과, 연민과 비극적인 것에 대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은, 이에 대해 말하여 질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상에 속합니다. 아마도 그는 일말의 의식의 사실들의 토대로부터야 비로소 실재성의 굳건한 대지로 들어갔다 할 수 있습니다3). 그리고 비로소 인간 영혼 안에서 발견된,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제 공리(公理)의 기존 사실로부터, 이 실체적인 선험(先驗)으로부터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이르는 어떤 확실한 길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거듭 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성찰이 형이상학적 대상들의 사전 단계요 근거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심리학적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서 심지어 신적인 삶의 심층을,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존재를 들여다보고 인간 영혼의 삶을 비유로 삼아 삼위일체의 내부 삶을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적-심리학적인 정신 자세가 그의 탐구 자세에 부여하였던 것은, 우리가 특히 어거스틴 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실재성에 가까움과 그러한 뜨거운 구체성과 선명함과 동시에 또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신 자세는 허무맹랑한 것에서 그의 사유를 지켜주고, 그가 제 아무리 높이 정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여도, 모든 인간적인 인식의, 그러나 또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의 불완전함과 제약성에 대하여 그를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4)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누구와도 달리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중에서도 심리학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즉 미리 예감하는 동시에 미리 느끼고 포착하면서 궁극적인 가능성들과 맥락들을 감촉하는 능력은 그의 심리학적인 재능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새로운 고랑을 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하여 수 백년 간이나 애써 왔고 또 애쓰고 있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싶은 신학 분야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미 얻은 결과들의 순수 논리적인 추론과 괄호 묶음을 무시하였고, 그의 사상들의 보다 말끔한 조직적인 구축과 확장 등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창조적이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의 심리학적 내부 고찰과 심층 고찰의 풍성함과 관계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통찰들과 신학적인 통찰들은 상당히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고도의 통일성으로 총괄하여서 그들에게 그의 체계의 전체 안에서 그들의 특별한 장소를 배당하고자 하지도 않았거니와 적어도 그렇게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적지 아니한 그의 논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그 학술적인 연구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어거스틴의 명제들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생동력 있는 사람으로서, 즉 먼저 자신의 질문들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문제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외적인 대상을 결코 그 단순한 문제 자체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계시키는 가운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이 단지 체험의 과정으로서 혹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하기나 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진리인 동시에 학문이 아닌 진리 자체나 학문 자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학문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고 풍성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주체, 곧 신학자는 대상(객체), 곧 계시의 말씀의 고상한 실재성 앞에서 전적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습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침묵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 듣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주체성을 벗어나서, 모든 개인적이며 문화사적이며 시대사적인 정조들과 숙고들에서 온전히 벗어난 가운데 진리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순수성과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의 작업 방식을 수놓는 이 유일한 파토스는 순수 사실성의 파토스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결한 봉사의 파토스입니다. 이렇게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전적으로 타당한 것, 초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이 흘러나오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토마스주의 적인 교리방식의 냉랭한 것, 뻣뻣한 것, 비인격적인 것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인격과 그의 시대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적지 않게 시대 조건적이요, 상대적인 것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그 때문에 일깨워주고 불을 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불을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어거스틴이 이미 그의 심리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있다면, 즉 어느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그러했던 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즉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러한 특별 방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의 특유한 리듬을 통하여, 그의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통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1. Quid autem meorum opusculorum frequentius et delectabilius innotescere potuit quam libri Confessionum?(그러나 내 작품 가운데 어떠한 것이 「고백록」 보다도 더 자주, 더 즐겁게 유명해 질 수 있었는가?, 「견인의 은사」 20,53).
2. V.Harnack, Reflexionen und Maximen XV을 참고.
3. Nam et sumus et nos esse novimus et id esse ac nosse diligimus. In his autem tribus, quae dixi, nulla nos falsitas veri similis turbat. Non enim ea, sicut illa, quae foris sunt, ullo sensu corporis tangimus, velut colores videndo, sonos audiendo, odores olfaciendo, sapores gustando, dura et mollia contrectando sentimus, quorum sensibilium etiam imagines eis simillimas, nec jam corporeas, cogitatione versamus, memoria tenemus, et per ipsas in istorum desideria concitamur. Sed sine ulla phantasiarum vel phantasmatum imaginatione ludificatoria, mihi esse me, idque nosse et amare certissimum est. Nulla in his veris Academicorum argunenta formido, dicentium, quid si falleris? Si enim fallor, sum. Nam qui non est, utique nec falli potest, ac per hoc sum, si fallor. Quia ergo sum, si fallor, quomodo esse me fallor, quando certum est me esse, si fallor? (즉 우리는 존재하며,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며 우리는 이러한 존재와 지식을 사랑한다. 내가 언급하였던 이 세 항목에서 진리의 여느 유사한 기만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색채를 보고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고 맛을 보고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만짐으로써 느끼듯이, 밖에 있는 사물들처럼, 그것들을 어떤 육체의 감각으로써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각적인 것들 중에서 우리는 또한 이것들과 유사하나, 더 이상 실체적이 아닌 상상들을 생각으로 숙고하고, 기억으로 간직하며, 그러한 것들 자체를 통하여 그것들을 열망하도록 자극을 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이나 망상의 기만적인 상상들 없이, 나에게 아주 확실한 사실은 내가 존재하며 내가 그것을 알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주의자들의 논쟁들은 이러한 진리들에 있어서 어떠한 두려움도 주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기만을 당한다면, 어떻게? 내가 즉 기만을 당한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는 전혀 기만을 당할 수도 없거니와,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이것을 통하여 내가 이것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내가 존재하는 까닭에,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만당하는가?, 「하나님의 도성」 XI,26 이하).
4. Est ergo in nobis quaedam, ut ita dicam, docta ignorantia, sed docta spiritu Dei, qui adjuvat infirmitatem nostram(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어떤 박식한 무지가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의 허약함을 도와주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박식한 무지가 있다, 「서신」 130,15,28).
첫댓글 내용이 정말 길고 어렵지요?^^ 예, 저도 어렵습니다.^^ 이 글을 제가 직장에 다니는 동안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읽었었는데, 저는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은혜를 받았답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처음부터 그리된 것이 아니라 발전을 했다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가 지나온 순례의 과정이 정도에 있어서는 저같은 사람이 도무지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제가 많은 부분을 동감하게 되더군요. 인간이 된다는 것은 투쟁가가 된다는 말을 저는 이 글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참 진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 영혼이 겪게 되는 그 고투와 씨름의
과정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도 조금은 넓어지게 되었던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그것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할 때,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게 되기까지 겪는 방황과 좌절과 투쟁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런 고민과 사유의 과정의 없이 믿는 것은 맹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 우리가 믿는바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힘쓰고 그 발견된 진리의 영광과 탁월함에 놀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삶은 우리에게 그런 면에서 용기와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처음에 올려놓았던 글을 나누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제가 욕심을 부렸네요.^^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듯하지만 인내심을 같고 끝까지 읽었습니다~^^;; 30%도 이해하지 못한 듯 하지만 어거스틴이 얼마나 많은 고민속에 삶의 길들을 걸어왔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리강좌도 그렇고 어거스틴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나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내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정말 옳고 바른 믿음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어서 혹시 주님앞에 섰을 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물러가라고 하시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기기도 합니다. 뭐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믿어~ 라고 할 수 있지만 이단이 판치는 지금 시대에 진정 믿음을 점검해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형제님, 글이 어렵지요? 네 저도 어렵습니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올리면서 다시 한번 읽었는데 저는 이것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어거스틴이 겪었던 그 치열한 투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냥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생각에 엄두를 못내고 있답니다.^^저는 시편을 하나님을 찾는 자의 탄식과 하나님을 찾은 자의 탄성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이 표현이 제가 어디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제가 가지게 된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표현인 것 같은데 기억이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내뿜는 영혼의 탄식과, 그렇게 탄식하며 찾았던 하나님을 마침내 발견하고 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그분의 어떠하심 앞에서 탄성을 지르는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신앙여정 가운데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원을 살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 한분 뿐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영혼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서 결코 중단이 없이 이 일을 지속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금 형제님이 고백하듯이,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아는가?"라는 두려운 회의가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질문은 얼마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면 그 질문에 용감하게 맞서기보다는 믿음이라는 소화기로 그 질문을 끄기에 급급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볼때, "나도 너처럼 그런 질문들이 일어났었던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그런 질문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에게 피상적인 답 외에는 제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제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저 역시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났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제 주변의 사람들은 너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고 하거나, 나도 너처럼 그런 고민을 했었다는 대답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제겐 그것이 어떤 위로도 답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로이드 존스를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런 질문들에 용감하게 맞서서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찾았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로 그분의 책을 겨우 한 권-참회록-을 읽었을 뿐이고 다른 분들의 책에서 언급하는 몇몇 짧은 명언들이 전부이지만 말이죠.^^ 어쨌든 이런 질문에 맞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이 있으면 성경에는 답이 항상 있으니까요. 오늘날 생각하지 않는 신앙이 유행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 신앙은 깊이를 더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기독교지성주의의 위험을 늘 경계하면서 탐구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그런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혼란을 겪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두려운 질문들과 회의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어거스틴은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이미 그 두려운 과정을 그의 삶을 통해 통과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렸으니까요. 따라서 저는 형제님이 지금 겪는 혼란(?)이 참으로 귀하게 생각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곧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고 참된 찬양과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1장 1절을 접할 때마다, 매번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마치 제가 지금 딛고 있는 땅이 계속해서 땅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왔고, 그 위에 집과 여러가지 건물들을 짓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땅이 조금씩 꿈틀대는 것을 느꼈을 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땅이 아니라 거대한 동물의 등이었었는데 마침내 그 동물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저를 지탱해 주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두려움 말이지요. 그 거대한 동물의 등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야 그 동물의 전체를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그 동물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울면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시대의 기독교의 특징을 한 마디로 "피상성"이라는 말로 압축을 했더랬습니다. 그의 시대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는 더욱 그렇겠지요. 그런 시대에서 형제님이 지금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겪을 그 영혼의 진통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요. 사실 저는 많이 못봤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과정을 지나는 것을 보면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답니다. 모쪼록 계속해서 질문이 생기면 그것을 그냥 잠재우기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데에서 오는 목마름과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데에서 오는 갈증과 눈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갈증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이 갈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이 이 갈증을 해갈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정진하십시오. 계속해서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조금씩 조금씩 올려 놓을까 합니다. 계속 교제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한가지 우문에 엄청난 지혜의 답변과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주시는 목사님의 댓글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어거스틴에 대해서 짧게 요약한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어찌 어거스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과연 지금 제 주변의 목사님들께 똑같은 질문과 생각을 말씀드렸을 때 이런 답을 해주실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만큼 회중의 반응이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사보다 우선시되는 시대, '믿음의 본질'보다 '많은 회중과 목회성공, 대형교회'가 하나님의 복의 결과, 신앙, 믿음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점점 잠식되어가는 제 영과 혼과 육신을 보며
회의감이 드는 시기에 이 카페와 목사님과 로이드존스 교리강좌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은혜라고밖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통독중인 예레미야서에 담긴 하나님의 분노와 경고와 징계의 메시지가 더욱 마음에 다가옵니다. 한국교회, 이 시대의 교회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의 우매하고 나태하고 비진리속에 살아온 신앙행태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다시금 목사님의 말씀을 읽으며 깨닫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말씀과 가르침을 목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교회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시기를 멀리서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
어두운 저의 유년시절을 지나 사춘기때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결혼한 세월 6년 목사님과 사역하면서 믿음을 지켰다고 생각한 7년 그리고 지금 우리 목사님을 천국 보내고 신앙을 유지하면 살아왔다고 하는 14년 합이 27년 동안 저는 지금 위에서 말씀하신 목사님의 갈망함이 많이 없이 그냥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매우 기뻐하며 찬양하며 달려왔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목마름이 찾아왔습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내가 가진 이런 생각과 행동들은 어디서 온다는 말인가? 그러나 저도 공감하는 것은 아픔과 싸움 투쟁으로 얻어지는 것은 그냥 있는것이 아닌 나를 나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오늘 이 말씀을 접하게 하시니 감
사하며 어려운 책을 저도 읽어가길 원하며 그 깊으신 뜻들을 이해하길 원하며 나의 영혼의 자유와 만족 그리스도로 충만하길 원하며 나의 영적 질병을 주님께 가져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시고 나의 상한 마음과 영혼안의 병들을 고쳐주소서 울부짖는 아침입니다. 아직은 게으리고 나타함이 나를 더 괴롭히면서 어디서 부터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저도 더 만나보길 원해봅니다. 감사드립니다.
전도사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다루시지는 않으시기에 모든 사람이 제가 걸었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 누구나 독불장군은 없기에 우리가 가는, 또 가야 할 길을 앞서간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에 저는 로이드 존스를 그런 분으로 붙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누군가를 그를 통해 또 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지만요.^^ 로이드 존스의 강해서들, 예를 들어 로마서나 에베소서 강해들을 시간을 내어 한꺼번에 읽는 것이
좋긴 하지만 일단 양이 너무나 많고 너무 두껍습니다.^^ 해서 처음엔 단권으로 된 책들 중에 전도사님의 마음에 있는 갈망을 채워줄 만한 책들을 선별해서 읽으시다가-아, 먼저 전기나 평전을 읽으셔도 좋을 것 같네요-나중에 강해집을 읽으시면 복음이 보일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를 모두 읽었을 때 마치 처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그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의 감격이 밀려오더군요. 모쪼록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벅찬 기쁨의 길에서 많은 보화들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일들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조언해 주심을 감사드리며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