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구 부채시 2인전
곽문연 시 「눈길 묵상」
눈길 묵상
곽 문 연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차오른다
잠을 덜 깬 눈바람에
한걸음 앞선 작은 들새들의 날갯짓에
흩날리는 숲속의 축복
풍경에 취해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지그재그 뒤따라온 발자국들
순백의 숲, 백지에 발로 쓴 글씨들
드러난 상처가 깊다
산허리에 쌓인 눈이 가로막아
되짚어 내려오는 길,
이런 날은 산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단단한 묵상 앞에
눈밭에 기록한 글씨는 지워지고
윤정구 부채시 2인전
정미소 시 「못다 한 사랑 노래」
― 나타샤가 되어 백석을 그리워함
못다 한 사랑 노래
― 나타샤가 되어 백석을 그리워함
정 미 소
그대여, 강원도 산골 ‘나타샤와 흰 당나귀’ 펜션에 들어
눈 감옥에 갇힌 몸입니다.
깃대봉 쓸며 오는 칼바람이 혁명처럼 우는 밤,
세상의 나타샤는 많지만 함흥기생 나타샤가 되려 합니다.
언 땅 딛고 일어선 매화나무 가지마다 피어 난 꽃을 보며,
분단의 벽쯤은 가랑잎 바람에 실려 못 넘을 길도 아닌데,
꿈으로나 가능합니다.
꿈길은 제 마음을 저보다도 잘 알아서
붉은 상사화 무더기로 피어, 그대에게 드릴 꽃다발을 엮습니다.
그대여, 예전에는 눈나라가 이렇게 감옥인 줄 몰랐어요.
눈 나라가 큰 감옥이라면 제 가슴은 사랑의 감옥,
운명처럼 만난 그 저녁이 오랏줄 묶었습니다.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의 나타샤는 불꽃 같은 사랑에 감전되어
어쩌자고 그대만을 향하여 줄달음치는지,
독수공방 사랑의 감옥을 짓고 북녘하늘 바라봅니다.
≡ 부채에 옮긴 시
좋은 시, 좋은 글씨를 위하여
윤 정 구
시를 쓰기 전, 정서의 예열 획득을 위하여 좋은 시를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방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오늘은 그 말씀과 함께 방산의 제자 중에 방향이 다른 양극으로 나아가 꽃을 피운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전에 부채시로 올렸던 천생 천사표 시인 송태옥과 아직도 개구쟁이표가 어울릴 듯한 시인 고영의 시다.
나팔꽃은 아침에 피고// 분꽃은 저녁에 피고// 배롱나무 능소화는 여름에 피고// 매화 벚꽃은 봄에 피고// 꽃마다// 피는 시간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 송태옥의 「자연법」전문
뱀이 쓸쓸히 기어간 산길/ 저녁을 혼자 걸었다// 네가 구부려뜨리고 떠난 길/ 뱀 한 마리가/ 네 뒤를 따라간 길/ 뱀이 흘린 길// 처음과 끝이 같은 길/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길// 너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너의 입속을 걸었다// 뱀의 입속을 걸었다
― 고영 「뱀의 입속을 걸었다」 전문
결국 시는 자신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아니 하늘로든, 땅속으로든, 더 높이, 더 깊이, 더 멀리, 세계와 자신을 향하여 걸어가라고 말한다.
곽문연: 삶과 시의 본향을 일깨우는 남향의 서정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좀 특이한 이름의 식당이 있었다.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사회에 쓰임이 마땅찮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시국을 논하기도 하고, 옛이야기도 들려주며 거들어서, 나름의 명소가 되었다. 주인이 거물 누구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확인 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그때는 뉴스의 주인공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출구 역할을 하며, 나름 카타르시스 작용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에어콘이 집집마다 달린 형편으로 보면, 오늘 내가 부채시를 쓰는 것이 꼭 90년대초 이야기 속 늙은이 같아 보인다.
곽문연 시인은 나의 장형과 동갑으로 제주에 별서를 마련하여 판교를 오가며 생활을 하고 있다. 이번에 보내온 신작시도 제주도 생활에 대한 정취가 물씬하다. 90%는 백돌이라는 골프계에 아직도 사거리가 젊은이 못지 않고, 싱글의 골프 실력을 지켜가는 곽 시인이 늘 시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써가는 모습은 새삼 존경스럽다.
‘늦은 달밤 자갈 밭을 걷다보면/ 파도에 닳고닳은 자갈들이 속삭인다/ “우리도 한 때는 불꽃이었다”라고’(「제주의 숨결, 자갈밭」) 바람과 자갈과 달빛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들이 고르는 외식 식단을 맛있게 먹어주고, 아들이 추천한 영화를 보며 조금은 과도하게 ’참, 좋다 좋다‘고 반응하는(「참 좋다 좋다」) 제주 생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행복해 보이는 것은 영동 제일의 명문 출신 규수와의 열애 끝 결혼한 사모님의 소원애 따라 제주에서 황혼을 함께 하며 ’나란히 앉아 밤을 까며/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보는(「달빛에 익어가는 밤」) 모습이다.
부채시에 고른 「눈길 묵상」은 함께 보낸 제주 시편의 백미이다. ’순백의 숲‘을 오르는 행복과 ’산허리에 쌓인 눈이 가로막아/ 되짚어 내려오‘며 ’산의 마음‘을 헤아리며, ’삶의 자취‘를 묵상하는 것으로 인생의 멋과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정미소: 아직도 푹푹 눈 내리는 순수를 사랑하는 나타샤
정미소 시인의 시편 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생가에서」는 5연 8행의 길이로 부채시로 쓰면 깔끔해 보일 장점으로 곧바로 큰 부채에 옮겨졌다. 대청마루의 글 읽는 소리와 양수 들판의 익어가는 벼이삭, 그리고 천 년 은행나무가 잘 어울렸다.
그러나, ’나타샤가 되어 백석을 그리워함‘이란 부제를 단 「못다한 사랑 노래」를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순수에의 열정으로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효용을 상실한 서정시인이 궁여지책으로 아동문학가로 생활하다가, 개마고원으로 방출되어 천형의 유배지 삼수갑산 농장에서 농삿꾼 겸 양치기로 생을 마감한 백석의 생애에 대한 안타까움도 작용했으리라. 시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시인으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뽑히기도 했던 백석의 시는 지금까지도 인간의 그리움과 고독과 사랑의 진실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여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백석과의 연애로 유명한 기생 김영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공식 기록 190cm의 유학파 킹카 모던보이로 영생고녀 영어교사였던 백석이 김영한에게 바쳤다는 이 시는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는 끝맺음으로 오늘날까지도 사랑 받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이다.
나타샤가 되어 백석을 그리워하는 연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도전임에 틀림없다. 시적 장치로 ’흰 당나귀 펜션의 눈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눈나라가 큰 감옥이라면 제 가슴은 작은 감옥‘으로 ’오랏줄 묶인 체 북쪽 하늘을 바라봅니다‘로 간절한 연시를 맺는다. ’꿈으로나 가능한 길을 위해 붉은 상사화로 꽃다발을 엮는‘ 모습은 세속적인 잣대가 아닌 순수한 사랑을 희구하는 현대인의 마음 한 구석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열심히 살아가는 두 분의 시를 통하여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이루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친 속단이 되겠지만, 현실에 충실하지 않는 시쓰기를 경계하시던 방산 선생님의 속뜻을 알 것 같아졌다. ◑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한 뼘이라는 적멸』 외